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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구원론이 뭔 문제?
알콩달콩 2017-01-10 08:24:02 | 조회: 789

선.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다. 선행.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선행구원.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따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선행구원론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따름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이론이다.

이 정도에서라면 한 성구가 떠오르지 않는가? 떠올라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하면 선행구원이 된다. 그것을 말하는 이론이 선행구원론이다.

선행구원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겁대가리를 상실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무지의 결과이든지 무식하여 용감해서든지 어느 경우라도 그러한 말을 듣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왜 이런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유는 두 가지이다. 오백년 전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에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모습과 그 시점의 개혁자들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교부들을 이어 중세 때의 선행구원론은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한 것으로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 그 시점의 로마가톨릭은 선행을 오용 내지 악용하였다. 성직매매나 면죄부 판매 또는 성당의 계단을 피를 흘리며 무릎으로 오르는 등의 행위를 선행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모습을 선행으로 포장하였던 것이다. 이런 악행이 선행구원론을 거부하는 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참고로 단순히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오늘날의 로마가톨릭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랄 수 있다. 도덕률의 입장에서 착한 일과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명백하게 다르다. 거짓말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열심히 구제하더라도 성경의 선행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람이 자기 의를 쌓는 것이면 사회적으로는 착한 일이 맞지만 선행은 아니다. 성경의 선행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서 착한 일이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도덕적으로 착한 일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에게 스스로가 신이 되어 행하는 착한 일이기에 성경의 선행과 전혀 무관하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는 무엇인가? 신자의 어떤 행함과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무관하고 행함과는 완전히 분리되는 별개의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인가? 루터나 칼뱅은 그렇게 이해했다. 그 이해를 아무 생각 없이 현재의 개신교가 뒤따르고 있고.

그곳에서 행위는 그 시점의 이방인 신자들이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을 준수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율법은 613개의 조문으로 된 모세 율법이다. 당연히 십계명이 대표적이다.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교사들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원리는 율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와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는데, 그렇게 완전하게 하신 율법이 이방인 신자들에겐 삶의 원리였던 것이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 그리스도의 (율)법(갈 6:2), 성령의 (율)법(롬 8:2)이다. 이방인 신자들은 그 (율)법으로 자신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했다.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는다. 물론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에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현재에 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전자는 법정적 칭의이고 후자는 관계적 칭의이다. 이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내용은 http://cafe.daum.net/BCRestoration/Nigm/751에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고 산 제사 곧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했다(롬 12:1). 이 명령이 율법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는 무지 자랑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생명의 성령의 (율)법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이 명령을 지킨다.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때도 그를 의롭다고 하시는가? 그렇다고 하는 신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 때에 그러한 삶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시는가? 그렇다고 하는 신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개혁자들 이래로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신자들이 많다. 너무 많다. 성경의 진술을 따라 말하자면 명백하게 죄다. 돌이켜야 할 중죄이다.

앞의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끝자락에서 하신 것이다.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완전하게 하실 율법의 내용을 미리 강론한 것이다. 문맥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가리키는 바이다. 마 7:21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언약의 삶의 원리들이다. 이는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12장 이후에 제시한 삶의 원리와 동일한 성격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한 선행구원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는 내용적으로 같은 말이다. 교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우선권을 주고서 선행구원론을 주창한 것이다. 당연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선행구원론과 이신칭의론은 다 성경의 가르침이며 내용적으로 같은 것이다. 선행구원론이 잘못되었고 이신칭의론이 옳다는 것이나 이신칭의론이 잘못되었고 선행구원론이 옳다는 것이나 다 잘못된 것이 된다. 선행구원론과 이신칭의론을 다 말하여야 한다. 다만 이신칭의론은 선행구원론의 하부 구조이다. 구원론을 말하자면 선행구원론을 앞세우는 것이 옳다.

두 가지 모두 은혜 구원이라는 틀 안에 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름으로 가능하다. 신자가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가능하다. 그 성령의 역사가 신자에게 임하는 현재적인 은혜이다. 그러므로 선행구원론이나 이신칭의론이나 모두 은혜 구원론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개신교회의 현실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개혁자들의 잘못된 주장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하는 삶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그러한 삶의 태도에서 하나님을 망령되어 일컫는 범죄가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언제까지 돌이키지 않으려는가?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데, 이제는 돌이켜야 하지 않겠는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큰소리치는 신자들의 태도는 죄이며 그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이다.

로마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교리에 있어서 옳은 부분이 있고 그른 부분도 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밝혀서 부합되는 내용은 받아들이고 부합되지 않는 내용은 거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이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모토를 현재에 실천하는 모습이다. 그 모토는 이 시대의 교회에게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하다. 반드시 교회가 적용하여야 할 모토이다.

기억하라.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죄 곧 중죄이고 그것에서 돌이키도록 일깨우는 이 글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성령의 역사 안에 있는 신앙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은혜를 바르게 받느냐 헛되이 받느냐는 당신의 선택이다.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욕심 사이의 선택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육체의 욕심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선택하기를 바란다. 그 선택을 실천에 옮기게 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2017-01-10 08:24:02
223.xxx.xxx.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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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 2017-01-10 08:53:43 삭제

예수님의 말씀과 로마서를 위의 글처럼 읽고 구원에 대해 진술하는 것과
로마서의 행위를 신자의 모든 행함으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함을 예수님을 믿는 것 곧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으로 읽고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을 비교해보라.
자신의 신앙양심에 비추어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신앙양심이라면 어느 것이 옳은가는 너무나도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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