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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방
칭의론에 대한 흔한 오해
이상엽 2016-09-09 08:17:35 | 조회: 1241
저희 교회가 설교표절로 힘들었을 때 서적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던 목사님(회복의 교회)의 칭의에 대한 글입니다.
평신도가 읽고 이해하기 쉽게 적혀 있어 소개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깊고 심오한 진리를 삶 속에 적용하기 용이하고 누구나 같이 생각해볼 수 있게 설명해주는 분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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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에 대한 흔한 오해

글쓴이: 김민호 목사

종교개혁 시대부터 칭의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와 공격을 받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은 칭의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었지만, 그 깨달음은 많은 지성적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특히 루터를 괴롭게 했던 사람은 다름이 아닌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렸던 '에라스무스'였다.
그의 공격은 매우 합리적이었고,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성경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공격이 표면적으로는 타당해 보일 수 있을지 모르나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에라스무스적인 공격이 오늘날 전 세계의 교회를 강타하고 있다.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칭의론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루터의 후예들이 1999년에 칭의론을 가톨릭과 합의를 보았다.

그 이후에 기독교가 천주교와 칭의론에서 합의를 시도하는 일은 여러 개신교 교단에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루터는 칭의론이 교회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문제라고 했다.
이 말은 칭의론을 타협하면 교회는 죽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칭의론의 합의가 종교개혁 시대와 너무도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이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칭의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이 오해는 어느 시대든지 칭의론을 공격할 때마다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론에 대한 이 오해가 무엇인지 알고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칭의론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첫째로 칭의론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칭의론이 도덕적 방종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에라스무스 뿐만 아니라 요한 웨슬리의 주장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행위가 무시된 믿음만을 강조한 칭의는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칭의가 행위와 무관한 '믿음으로만'(sola Fide) 이루어진다는 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도덕적 방종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칼빈이 지적했던 것처럼 칭의가 "율법에 순종하도록 하시는 갱신의 역사를 포함 시킨는 것"이라는 점을 망각한 주장이다(기독교 강요3.14:11).
칭의는 단순히 신분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분명히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한 의를 전가받아 법정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지만, 이 의롭다 함에는 반드시 율법을 능동적으로 지키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칭의가 도덕적 방종을 가져온다는 지나친 기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두 번째로, 칭의에 대한 오해는 유사 그리스도인이라는 교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개혁자들이 주장한 칭의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부도덕성에 기인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처럼, 작금의 교인들은 불신자들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도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므로 구원을 확신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문제는 칭의론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들이 칭의론을 구원파처럼 가르친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통 개혁파 교회에서 가르치는 '칭의론'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이들의 문제는 사실 칭의 되지 않은 유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자기 확신에 빠져 있다는 것에 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칭의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근거로 하여 결코 부도덕한 삶을 살게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어설픈 칭의론(잘못 이해한 칭의론)이 한국교회에 확산됨으로써 개혁자들이 가르친 위대한 칭의론이 잘못된 교리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며, 한 편으로는 잘못된 칭의론으로 말미암아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참 신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이해한 칭의론은 교회 안에 유사 그리스도인들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유사 그리스도인들의 대량 양산 때문에 바른 칭의론이 공격을 받는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개혁자들이 주장한 칭의론을 다시 바르게 이해하고 유사 그리스도이들의 양산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정확한 진단이라 생각된다.

세 번째로 칭의론에 대한 오해는 "성도의 견인"교리를 오해하게 된 것이다.
칭의론과 관련하여 항상 언급되는 교리는 '성도의 견인' 교리이다.
칭의교리와 관련하여 상당수의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한 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는 타락을 하더라도 구원에서 이탈이 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보면 맞는 가르침인 것처럼 보이나,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 아래에서 본다면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 말로 가득하다.
왜냐하면 성도의 견인 교리가 한 번 구원 받은 성도가 구원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는 결과적인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견인 교리는 성도가 타락하더라도 천국으로 인도(견인/牽引)해 준다는 교리가 아니다.
견인교리는 도리어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견인이란, 성도가 어떤 사단의 도전과 유혹을 받더라도 끝까지 인내(견인/堅因)하여 타락하지 않는다는 교리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타락을 방조하는 교리가 아니라, 도리어 타락을 이기도록 독려하는 교리이다.
이 교리를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 구절 하나만 보자.
그러면 독자들은 견인 교리가 타락을 방조 하는 교리가 아니라 도리어 타락을 강력하게 경계하는 교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네 번째로, 칭의론에 대한 오해는 성화를 너무 도덕적인 문제로만 본다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칭의 된 사람들에게 성화가 너무 안 나타난다는 점을 이유로 개혁자들이 주장한 칭의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 주장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칭의론과 관련하여 성화는 단순히 도덕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도덕적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필자의 의도는 성화를 좀 더 본질적으로 이해한다면 칭의된 성도에게 기대하는 성화는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의 발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 된 사람이 때로는 도덕적인 죄를 범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더 겸손해지고,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존하게 되기도 한다.

다윗을 예로 들어보자.
다윗은 자기의 충직한 부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다.
이 문제는 분명히 파렴치한 범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범죄를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다.
그는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더 겸손하게 되었으며, 죄인들을 향하여 더 관대한 왕이 되었다(그렇다고 해서 죄에 대하여 관대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라고 할 수 있다.

성화는 도덕성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해의 문제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칭의론에 대한 오해는 칭의의 목표가 단순히 죄인들로 하여금 쉽게 구원을 받도록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칭의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을 쉽게 받는데 있지 않다.
사도 바울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라고 한 것은 구원을 손쉽게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교리(칭의교리)는 인간의 의의 무가치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교리이다.
에베소서 1:5-6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의 말처럼 칭의는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려면 나의 의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의는 철저히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만 영광을 받게 되어야 한다.

이 은혜를 극대화 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하시는 작업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이전에 우리가 얼마나 전적으로 타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 이 과정이 생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을 모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값싼 의가 될 뿐이다.
아니 도리어 내가 믿어주었으니 의롭게 된 것이라는 '신 율법주의'에 빠져들고 만다.

믿음으로 칭의 됨은 철저히 자신의 불의함에 기초해야 한다.

루터가 칭의를 깨닫게 된 것도 자신의 의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이 처절한 자각 가운데 얻은 것이다.
이 처절한 자각을 기초로 하여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그 가운데 극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전가 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끔찍한 죄인 의식을 전제로 하여 칭의 됨을 받게 될 때, 비로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Amazing grace)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의롭게 된 사람은 루터의 표현처럼 "의롭게 된 죄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칭의는 반드시 이런 고백을 동반한다.
이런 고백이 동반되면 당연히 그 은혜에 보답 하고픈 열정이 따라온다.
그래서 거룩한 삶이 동반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계시록의 명령처럼 죽도록 충성하게 된다(계 2:10).
일평생 그리스도를 닮기를 열망하며 더욱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 한다.

결코 오늘날처럼 무늬만 기독교인같은 추한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나타나는 칭의론의 문제는 신학 자체의 오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신학을 다시 손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위험하기 이를데 없으며, 교만한 주장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칭의문제에 대하여 바르게 접근하는 방법은, 칭의론을 다시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가르치는 운동으로 가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것이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부흥은 예외 없이 칭의 교리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바로 잡고, 정확하게 칭의교리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반성해야 할 문제는 칭의론이라는 신학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칭의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바르게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이 필요할 뿐이다.
2016-09-09 08:17:35
58.xxx.xxx.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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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광 | 2016-11-19 21:53:37 삭제

칼빈주의자인 전병욱, 오정현 목사는 중생한 자가 아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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