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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1+1+1=3=1 인가?(1)
박창진 2008-06-03 21:20:56 | 조회: 465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하나님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교회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신이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스스로를 교회에게 계시하신 분이십니다. 교회의 신앙이 성경에 계시된 신과의 관계 문제라면 그 신에 대한 바른 이해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과 교회의 성령충만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아버지, 독생자, 성령님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동시에 성경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교회 역사에서 많은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삼위일체를 “1+1+1=3=1”로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1+1+1=3=1”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이며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성경의 신적 기원을 나타낸다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성경의 기록이 순전히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결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기록할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면 수긍이 되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요? 성경에서 하나님과 연관하여 “1+1+1=3=1”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교회 역사에서의 흐름도 중요하지만 성경 자체의 진술을 살핌으로 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페리코레시스(pericboresis)
‘페리’는 “원을 도는”이고 ‘코레시스’는 “춤”입니다. 우리나라의 강강수월래를 연상하면 됩니다. 물론 단순하게 원을 만들어 빙빙 도는 것은 아니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움직임이 함께 하는 춤입니다.
이를 다메섹 요한이라는 신학자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사용합니다. 상호 침투라는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그 이후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데에 계속 사용되어집니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안에서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고 있다.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이 말은 일면 굉장히 설득력을 가진 듯 하고 성경적으로 여겨지지만 잘 살펴야 합니다.

성경적 근거의 문제
페리코레시스의 성경적 근거는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안에 있다”(요 10:38, 14:9,11, 17:21)는 표현입니다. “안에 있다(계신다, 거한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는 상호공재를 지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잘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강림을 언급하시면서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 14: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논리를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각자 안에 상호공재하는 것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제자들이 공재해 있고 제자들 안에 예수님이 공재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 15:7). 여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공재하거나 침투한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6)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공재 또는 침투하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에 있다”는 표현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연합을 통한 하나됨, 한 생명을 공유하고 생명의 사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전적인 의존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안에 있다”는 표현은 복이면서 사명의 요소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이면서 동시에 그 복을 받은 사람 편에서 온전케 하여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요 1:18)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 글을 쓸 때에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단어나 문장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때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로 하는데, 추가적인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품속에 있는"은 명백하게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아기 또는 유아기의 자녀가 부모 특히 엄마의 품속에 안겨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렇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한 연합과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의 근거로 제시되는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의 ‘나’는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피와 살과 뼈를 가지고 계신 사람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들을 근거로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주장하면 피와 살과 뼈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신다는 것이 됩니다. 피와 살과 뼈를 지니신 한 존재가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신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페리코레시스(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안에 있다”는 성경의 표현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논리의 문제
삼위의 독특성은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기원하지 않으시고 나시지도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라는 것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위의 설명과 분리될 수 없고 연관성을 가지고 성립되어야 합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데, 페리코레시스가 성립되려면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면서 나신다는 것이든지 아니면 나시고서 성부 안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데, 페리코레시스가 성립되려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면서 나오신다고 하든지 아니면 나오시고서 성부와 성자 안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 안에 들어가시든지 아니면 성부 자신을 성자 안에 두시고서 성자를 낳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시면서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계시다고 하든지 나오신 성령 안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수긍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경륜적인 관점에서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자는 역사적인 한 시점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성자가 인성을 가지지 않으셨고 육신을 입으심으로 인성을 덧입으셨습니다. 페리코레시스를 따르면 성자가 육신을 입으신 이후에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가 인성을 입은 신인이 되셨다는 것일까요? 이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가 성육신한 것은 아니기에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아니면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성육신하지 않으셨기에 신성만을 지니시고 계신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땅에 계신 예수님과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취급하지 않는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언급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언급할 사안 성경의 원리를 통하여 풀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는 페리코레시스는 성경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협의의 현장과 관련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삼위가 협의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줍니다(창 1:26). 그러한 협의의 현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협의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부 안에는 성자와 성령이 계시고 성자 안에는 성부와 성령이 계시며 성령 안에는 성부와 성자가 계십니다. 위격의 관점에서 보면 공재하지 않은 방식으로 계신 성부 한 분과 공재하시는 방식으로 계신 성부가 두 분이십니다. 성자와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격의 관점에서는 총 아홉 분이 계시는 것이 됩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2008-06-03 21:20:56
211.xxx.xx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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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 2008-06-04 08:57:36 삭제

저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회의 이해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쓴 책 '성경해석 잘해야 부흥이 보인다'의 121-134쪽에 있는 내용을 몇차례에 나누어 올릴 예정입니다. 삼위일체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좋은 논의의 한 발제로 받아주시기 바라며 다른 생각들에 대해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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