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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독교회 속의 한국교회의 성장전략 (45)
PAUL 2018-11-24 23:00:10 | 조회: 171
세계기독교회 속의 한국교회의 성장전략 (45)

④ 현대예배의 개혁
강단의 개혁(the reformation of the pulpit)은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는 예배(worship service)의 개혁과 또 다른 하나는 목회자의 설교(preaching)의 개혁이다. 특히 현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 분위기와 설교이다. 필자가 미국의 성장하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리서치 한(research) 결과로는 성장하는 교회치고 예배 분위기가 대단히 은혜스러웠다는 평가이다. 그리고 목사의 설교 역시 대단히 은혜롭고 현대인들에게 어필(appeal)할 뿐만 아니라 매우 복음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물론 예배란 인간 편에서 평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예배의 진행과 결과에 따라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쁨이 되었으며, 예배하는 자들이 이 하나님의 즐거움에 얼마나 유효하게 참여하였는가? 로 평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드릴 때에 그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가? 영적인 예배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이다(롬12:1). 다시 본문을 주석해보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배는 (1) 몸을 드리는 몸의 제사, (2) 거룩하게 드리는 성스러운 제사, (3) 산제사, 즉 살아 있는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한다. 결론으로 영적 예배로 드리라는 말씀이다.

(1) 몸을 드리는 제사는 그리스도의 “몸의 제사”를 연상하는 말이다. 구약시대에 연속적으로 드리던 속죄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몸”(the body of the ramb)을 제물로 드렸다. 그 당시의 짐승의 몸을 산채로 드린 것이 아니라 죽여서 피를 흘려 제물로 드렸다.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몸을 드려 제물로 바쳐졌고, 이에 관련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the sacrifice of Christ)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롬 6:2; 7:4, 6; 갈 2:19-20).

(2) 거룩하게 드리라는 말은, 인간의 죄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힘입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며, 주님께서도 이를 위하여 기도하셨다(요 17:17).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 11:44; 19:2).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몸을 깨끗하게 하라는 뜻이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체나 짐승의 죽은 사체를 보더라도 부정하다고 해서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접근하거나, 제사에 참예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거룩한 몸으로 산제사(living sacrifice)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3)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몸을 의미한다. 즉 현재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드리라는 말씀의 뜻은 “죄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롬 6:13에서 지적한 대로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죽은 제사가 아니라, 몸을 산 자 같이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은 죽었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산 “의의 몸”이 되었으니, 이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거룩한 생명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또 “산제사”(living sacrifice)라는 말씀의 뜻은 계속적인 헌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연속해서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영적 예배로 드리라는 말씀은 우선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이 말씀과 같이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영(God is Spirit)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영적”(spiritual)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상숭배(idol worship))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제1계명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제2계명에서 아무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영적인 예배”(spiritual worship service)라는 말의 구체적인 뜻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배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기보다도, 인위적인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몸을 드리기 보다는 물질로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거룩하게 드리기 보다는 죄악으로 점철된 죄로 흠이 있는 상태로, 그리스도의 성결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진정한 회개와 고백이 없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배행위가 하나의 형식적인 의식에 그치고 생활의 고백과 표현인 산 예배가 아니라 죽은 행실의 의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현대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인간적인 차원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지만 예배의 행위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예배를 받기를 원하신다고 해도 예배의 행위자가 없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기 위하여 그 예배의 행위자인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의 행위자에게 모든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배하는 것도 자유의지에 맡기신 것인데, 그 자유의지의 잘못 사용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인간의 탈선으로 결국 하나님은 예배를 받지 못하시게 되었고, 인간은 멀리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예배할 자를 찾으신 것이다.

물론 인간이란 본래부터 자기를 창조하신 신(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성향(宗敎性, religiosity)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도 여러 신들을 만들어 놓고,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TO THE UNKNOWN GOD)까지 만들어 놓고 예배한 것을 볼 수 있다(행 17:23). 인간이 신을 찾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유는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요, 인간이 범죄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이 떠나서 모습을 감추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죄인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면 죽기 때문에-그리스도께서 중재에 나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은 다시 인간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조차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더욱 안타까우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예배의 문제점이라 하겠다. 다른 의미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인간의 관심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배에 있어서의 인간의 입장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예배의 본질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용하여 영광을 받고, 즐기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이것이 이 문제를 푸는 키포인트(key point)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이 순전한 이기주의자가 아니시다. 그렇다고 인간과 공동 유익을 취하자고 하시는 분도 아니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종속적이면서 완전한 자유에의 행복이다. 먼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다. 아버지가 기쁘니 아들도 기쁘다. 아버지는 기쁨을 창조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일에 순종함으로 그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영광과 기쁨과 그 즐거움에 인간이 순종함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된다(마 25:21).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성도들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기쁨을 배제하지 않으신다.

⑤ 예배와 교회성장
예배는 교회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분명히 예배는 교회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결과가 교회성장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예배가 은혜롭고 축복이 넘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 나오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교회가 우선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은 말해주는 것이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 나온다는 것은 그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성장을 위하여-교회성장이 교회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지만-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하는 것은 교회성장학적인 질문이다. 교회성장학적으로 질문할 때에 언제나 그 시비가 뒤따르기도 하지만, 이 질문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권위를 묻는 교리적인 근본적 질문이 아니라, 상황적, 선교적인 질문이기 때문에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좀더 근본적으로 질문하자면,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결과로 교회성장을 가져왔느냐?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인론적으로 결과를 추론하려는 것이고, 결과를 위한 원인을 창작하자는 뜻이 아니다.

과연, 예배가 교회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관련해서 어떤 상태에 있는가? 예배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이 문제들이 이 부분에서 논하려는 문제들이다. 사실, 한국교회의 예배를 분석해보면, 아직까지도 유교적인 권위주의적 양반형의 예배로 어떤 면에 있어서는 경색되어 있는 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경건한 모양이 전혀 나쁜 것은 아니다. 유교의 수직관계의 권위적인 자세가 지금까지는 교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규모(規模)있는 자세와 경건한 모양을 만들어 주어,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직자의 권위를 세원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직자들을 존경함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받아 누린 축복도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의 과거 권위주의적 목회방식을 무조건 비난할 것도 못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좀 다른 차원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대 문화적인 차원에서 조명해보아야 할 시점에 와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현대교회는 구시대의 패턴(pattern)과 매너(manner)를 고집할 때는 이미 지난 것 같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의 패턴을 좀 바꿀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 예배의 행위자들의 구성이 현대문화적인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성장학적인 안목으로 볼 때에 이제는 교회의 예배를 고루한 옛날 의식적인 틀(형식)에 매어서 신령하고 생동력 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배의 대상이나 내용은 불변하지만 예배의 형식과 진행스타일에는 변화를 주는 것이 은혜롭고 하나님께나 인간에게 유익이 되리라 믿는다. 성경적으로 볼 때, 구약시대의 예배나 신약시대의 예배의 대상과 그 내용은 동일했으나, 예배의 형식이나 진행방법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내용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찬송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 같이 산에서 양을 잡고, 예루살렘에 꼭 올라가서 예배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고 어디서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신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5). 그러면 현대 교회가 교회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떤 면에서 개혁해야 하는가?

첫째로, 현대교회의 예배는 예배신학(the theology of worship)을 정립하여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에서부터 개혁해나가야 한다. 예배가 없는 신학도 문제이지만, 신학이 없는 예배 또한 문제이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자칫 샤마니즘 적인 예배(Shamanistic worship)가 되거나, 아니면 형식적인 매너리즘(conventional mannerism)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신학을 정립해서 현실적으로 잘 적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living sacrifice)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그 영광과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언급한바 있다. 특히 그리스도론 적이며 성령의 주도하에 드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약의 예배와 달리, 신약의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건에 그 초점이 모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사건들(탄생, 생애,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통하여 드려졌다. 그 예배의 기원(origin)과 예배의 원형(prototype)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승천하신 후의 원시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언급(요 4:21-24), 사도들의 예배(행 2:42-46; 5:42)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예배의 내용은 사도의 “가르침”(διθαχή)과, “교제”(κοινωνία)와, “떡을 떼는 일”(κλάσει τού ἄρτου), 그리고 “기도”(προσευχή) 등이다.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교제”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교제로 이 교제를 위해서 “애찬” (agape)이 준비되곤 하였다. 물론, 이 애찬의 문제로 고린도 교회에서는 시끄럽기도 했었다(고전 11:17-22). 바울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함을 대강 믿었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 11:18-22)라고 책망했다. 이 애찬은 주의 만찬인 성만찬이 아니라 신자들이 교회에서 그들의 교제(交際)를 위하여 나누는 사랑의 애찬(the meals of lovely feast)을 의미한다(고전 11:17-21; 유 1:12).

그 다음으로 “떡을 떼는 일”은 주의 성찬을 가리킨다(고전 11:23-29). 이 성찬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감사와 간구와 송축으로 이루어진다. 고백에는 회개와 신앙의 고백으로, 자기의 죄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마16:16)을 내포하고 있다. 감사는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감사하는 내용이며, 간구는 신앙고백 적 생활을 위한 청원이다. 결국 생활의 변화를 추구하는 내용이 된다. 사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근본적이고 매우 단순했었다.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예배당과 그 안의 초호화판 시설도, 화려한 조명도, 웅장한 강대상과 성만찬상, 그리고 각종 현대적인 악기들도 없는 소박한 가정집이 아니면 공공건물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날과 같은 강한 하나님의 영감이 넘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께 온 몸과 뜻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전폭적으로 드려지는 그야말로 신령한 예배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배는 어떠한가? 초대교회의 예배신학을 정립하여 우리 교회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신령(in spirit)과 진정한(in truth) 예배를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교육 훈련함으로서 예배개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진지한 고백적 예배(confessional worship)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배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 “고백”(confession)의 부분이다. 고백은 예배의 영적인 진행의 내용으로 볼 때에, 송영다음으로 가장 먼저 있어야 할 순서이다. 기도에는 회개(참회, confession)와 신앙고백과 간구와 감사로 이루어진다. 송영의 부분을 하나님의 존귀와 능력과 권세와 창조의 사역을 찬양하는 부분이라면, 기도의 순서는 죄악으로 단절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 자기의 몸을 던져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 교통의 길이 참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예배에 개입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질의 예물을 드리기 전에 자기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는 역사가 있어야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배는 어떠한가? 현대교회에서 회개라는 용어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말이 되어 버렸다.

한국교회도 예배나 심지어 부흥성회 시에도 회개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성령은 십자가의 사건(the event of the Cross based on the historical fact)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임하시며, 반대로 거짓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 즉 십자가의 사건을 부인하는 영이다(요일 4:1). 그러므로 성령을 통한 신령한 예배를 위해서는 회개를 통한 십자가의 내용이 담겨진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한참 부흥의 불길이 넘치든 과거와 같이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저 복 달라는 예배로 일관되고 있는 인상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성호를 찬송하고, 회개와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에 동참하는 축제예배(祝祭禮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에 의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6:16)라는 고백을 통하여 그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에게 부딪혀서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서 죽는 역사(갈 2:20)가 일어나야 한다. 사마리아 여자는 수가 성 우물가에서 우연히 주님을 만나 참 예배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참 예배를 드리는 체험을 했던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는 주님을 만나서 처음에는 유대의 낯선 청년으로 알았지만, 주님과의 대화중에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점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고 있고, 자기가 고대하던 그리스도(요 4:25)를, 말씀(설교)을 통하여 깨닫게 됨과 동시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고, 이로 인하여 동네로 들어가서 열심히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신앙적인 문제 중에서 “참 예배”가 어디서 드리는 것이냐? 라고 질문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참 예배”란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라고 설명해주셨다(요 4:24).

셋째로, 예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와 부활(resurrection)을 통한 승리를 선포하고 찬송하며 참예하는 축제예배(celebration worship service)로 이어져야 한다. 본래 예배는 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달리심이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죄를 속하는 제사로서, 그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을 위해 탄생하신 복된 소식(good news), 기쁜 소식임으로 축제의 의미를 더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탄생 예배부터 축제의 예배이며, 예배의 전체적인 기능이 축제를 전제하거나 축제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예배는 반드시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노래하며, 성령의 같이 하심을 감사하는 축제적인 내용으로 일관된 예배이기 때문에 축제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떤 분위기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요즈음에는 미국교회의 영향으로 축제예배로 전환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을 볼 수 있는데, 이 문제는 교회성장학의 차원에서 볼 때에,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한국교회는 과거의 유교적인 형식과 가톨릭의 의식적인 예배형식의 영향으로 형식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교파적으로 보면, 루터교회나 성공회와 같은 교회들은 가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의식으로 치우쳐 있고, 감리교회나 회중교회는 예배의식이 없으며, 개혁교회나 장로교회는 일정한 순서는 가지고 있으나 형식에 별로 매이지는 않고, 침례교회는 일정한 순서가 없다. 한국교회를 보면, 대부분의 교파들이 거의 비슷한 의식과 예배순서들을 가지고 있다. 축제예배에 있어서 의식이나 형식들은 그렇게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기쁨으로 마음껏 영광을 돌린다.

넷째로, 예배형식에 너무 매여서는 신령한 예배를 드리기가 어렵다. 미국교회 같은 데서는 예배형식에 별로 매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배순서에 있어서 미국교회들은 거의 무시하고 주보에는 대부분이 신문에 내는 것과 같이 광고로 일관되어 있다. 예배순서는 거의 무시하기 때문에 예배진행 자체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다. 판에 박힌 듯한 한국교회의 주보를 보다가 미국교회의 주보를 보면, 순서진행을 따라가는데 혼동을 초래하기 쉽다. 주보에는 다만 그 날의 스피커(speaker: 설교자)가 누구이며, 특송은 누가 하는가 정도뿐이고, 나머지 지면은 거의가 교회의 소그룹 프로그램을 광고로 싣는다. 물론, 예외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오렌지카운티의 가든 그로브(Garden Grove, Orange County)시에 있는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예배순서가 한국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대교회의 형식을 초월한 교회들에 대해서 무조건 거부감을 갖고 잘못된 교회라거나 심지어는 이단시하는 것은 성경과 신앙에 있어서 독선적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교회의 형식과 의식을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보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교회문화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배의 본질이 변했다면 당연히 문제가 있다.

미국교회의 예배진행 방식은 한국교회와 좀 다르다. 한국교회와 같이 사회자로 인하여 리듬이 자주 끊어지거나, 굳어 있는 듯한 느낌이 거의 없다. 그리고 미국교회들은 목사가 거의 가운을 입지 않는다. 물론 미국 가든 그로브의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나 플로리다의 제일장로교회의 제임스 케네디(James Kennedy) 목사는 가운을 즐겨 입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교회 목사들은 가운을 입지 않는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형식을 아름답게 차리고도 자연스럽고 은혜로운 예배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가운이 다윗에게 부자유스러웠던 사울의 갑옷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제사장의 가운도, 예배순서도, 악기 없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로운 신령한 예배를 드렸다.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이용하는 것은 좋으나 그런 것들로 인해서 신령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면 문제가 된다. 한국교회는 예배순서나 형식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예배의 분위기는 축제의 분위기로 바꾸어 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성장하는 교회마다 찬양을 통한 축제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축제예배는 특히 카리스마 교회들에서 유행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포도원교회(Vineyard church)가 찬양과 치유목회로 잘 알려져 있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들을 보면 대부분이 록음악(Rock-N-Roll)이나 재즈음악(Jazz music)을 하던 사람들이 리더가 되어 있다. 포도원교회의 창설자인 존 윔버(John Wimber) 목사도 재즈음악 출신이다. 문제는 이러한 세속음악의 리듬을 교회에서 어떻게 이용하느냐 인데, 사실상 교회에서는 세속적인 음악을 직접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예배나 교인들의 생활에서 전혀 불가한 이러한 리듬들을 선교나 전도대상들을 상대로 일시적으로 이용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빌 하이벨즈(Bill Hybels) 목사가 이끄는 미국 시카고 윌로우크릭공동체교회(Willow Creek Community)이다. 이 교회는 교회예배와는 별도로 토요일 불신자들을 위한 모임에서 세속적인 음악이나 운동 등 전도를 위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전도전략(Seeker driven strategy)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와 같이 축제예배는 형식들을 초월한다. 목사와 교인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기쁨으로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한국교회들은 예배분위기가 딱딱하고 굳어져 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마음을 좀 채로 열지 않는다. 물론, 죄로 인해서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기의 체면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좀 체로 마음을 열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께 예배하는데도 치명적인 지장을 초래한다.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신자 접근(out-reach)에 적극적이어야 하며, 그들이 동화할 수 있는 교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신자들은 물론 불신자들이 예배에 참예하였을 경우에 형식에 매인 딱딱하고 메마른 예배분위기는 불신자들은 물론 교인들까지도 견디기가 힘들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일대 교회성장을 이룬 교회 중 미국의 캘리포니아 남부 엘토로(Eltoro, Forest) 지역에 위치한 릭 워렌(Rick Warren) 목사가 목회하는 새들백밸리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가 있다. 이 교회의 전도 전략은 불신자들을 교회의 예배분위기로 감동을 주어서 유도하는 구도자 감동전략(seeker sensitive strategy)을 사용하고 있다. 교인들을 예배의 분위기에서 은혜로 인도하고 특히 불신자들의 전도를 위하여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추수감사절 등 미국의 큰 절기들을 이용하여 불신자들을 끌어들이는 특별 프로그램(community program)을 진행시키는데 이때에 모이는 사람들이 30,0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때에는 특히 예배형식(the form of worship service)에 매이지 않고 신자와 불신자와 함께 어우러져서 축제에 만끽한다. 결국 기성교회의 의식과 형식의 높은 담을 헐어버림으로서 불신자들까지 관심을 가지고 참예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크리스천이 되도록 한다. 한국교회도 예배가 지나치게 형식적이 되어서 분위기가 굳어 있는 것을 축제의 분위기로 바꾸는 형식의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그 형식에서부터 개혁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유교적인 틀을 벗어난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이 말은 지나치게 예배형식에 매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형식에 너무 매이다 보면, 예배의 영성(spirituality)이 약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을 잘 갖춤과 동시에 예배의 내용에 있어서 신령하고 진정한 예가 된다면 참으로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형식에 지나치게 매여서 전통만 고집하다 보면 예배 자체에 영성이 약해지고(형식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상반되기 때문에), 은혜롭지 못하여 불신자들은 물론 교인들에게까지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께 대한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성장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나님은 영(Holy Spirit)이시므로(요 4:24)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반드시 신령으로(in spirit) 드려야 한다.

- 계속 -

Rev./Dr. Paul B. Jang
revpaulj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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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4 23: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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