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C,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신교회의 내일이다

▲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동부산 노회를 비롯한 부산 지역의 몇 노회들이 SFC(학생신앙운동. 이하 학신)의 방향성과 지도하는 간사들에 대한 다양한 질의들을 2016년 총회에 하였다. 이런 질의와 논의들은 이미 수년간 진행된 학신의 현실을 반영한 질의들이다. 그리고 학신 내부에서 이런 현실들을 대처하기 위한 노력들을 정리해서 코닷에 기고하였다.

현실 대처를 위한 노력들은 학신 간사 그룹들 스스로 정리한 내용이다. 그간 학신의 역사에서, 지도위원회가 학신을 지도하는 간사들의 인사 문제에 직접 간여한 일들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상처로 남았다. 그래서 현재의 지도위윈회는 가능하면 학신 간사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같은 간사들끼리 선배가 후배 간사들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마는 몇몇 사태들에 책임을 지는 선으로 수년간의 논의를 자체적으로 정리한 결과들이다. 지도위원회도 이런 노력들을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도 불구하고 수련회 강사를 선정한 것에 대한 문책성 인사, 그리고 어느 공동체와 관련해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 간사들의 사퇴라는 어느 정도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학신의 현실은 고신 교회의 외부적 강압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만들고 있다.

 

논란이 되는 사안들

현재 발표된 조치들과 총회 상정 SFC 안건들 가운데 몇 가지가 논란이 된다. 진화론자를 강사로 세울 수 있느냐? 혹은 그런 강사를 세운 간사들에 대한 책임론이다. 그리고 모 공동체에 관여하는 간사들이 개혁파 교회론과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기본 질문에서 출발하여 그 공동체의 지향적 가치가 진보적인 성향을 넘어서 좌파적이지 않는가라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학신 전반에 진보적 성향(좌파적?)의 간사들이 복음을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일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본다. 세월호 배지나 리본을 다는 것이 좌파인가? 강정 마을에 다녀온 것이 좌파인가? 환경을 생각하고 행동하면 국가 안보에 다 적이 되는가?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 지나친 의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학신이 지나친 사회 참여를 강조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고난 주간에 인터넷과 휴대폰 등을 삼가 하자는 문화 금식운동이 지나쳤다는 것인가? 아니면 학교에서 커닝이나 리포트 베끼지 말고, 선거에 참여하자는 운동을 한 것이 지나쳤다는 것인가? 나아가 세월호 사건 때 안산에서 조문객 안내를 한 일이 지나쳤다는 것인가? 강정마을에 학생들이 가보고 갈등의 현장이 무슨 고통이 있는지 살펴보고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는 일이 그토록 좌파적인 행동이던가? 내 조국이, 내 동포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갈등과 고통이 무엇인지조차도 외면하는 것이 개혁파 운동의 진수이던가?

중요한 사안 중에 하나가 유신론적 진화론 학자를 수련회에 초청한 일에 대한 책임 공방이다. 먼저 확실한 것은 개혁파 신학에서 창조론에 대한 합의된 내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카이스트를 중심한 창조론자들의 의견에 대해서 개혁파 신학이 동의를 하는가? 젊은 지구론이 고신의 입장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이 과학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한다. 해가 머물렀다는 여호수아의 기록으로 지동설을 비웃었던 루터의 입장은 과학적으로 비난의 대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루터의 어리석음과 동시에 과학으로 성경의 진술을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어리석음도 마찬가지이다.

유신론적 진화론 학자는 빅뱅 이론으로 창조주의 개입 가능성을 질문함으로 기독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너무 많이 성경의 진술들을 과학적 입장에서 일관성 있게 보려고 하면서 무리한 진술들을 했다. 아담에 대해서, 타락에 대해서, 선악과에 대해서, 모두 역사성이 부인되는 결과를 가진다. 과학자의 무리한 시도이다. 이런 시도가 명백한 과학자의 진술이 교회의 입장에서는 우려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책임을 물을만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가진 고유의 목적이 창조 사건과 관련해서 아직도 발전하는 과학적 사실과 때로는 일치를 때로는 불일치와 갈등을 앞으로도 많이 가질 것이다. 자라가는 학생들을 위해서 기독학자들의 시도를 소개하고 자극을 주려고 했던 선한 의도를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완전할 수 없지 않은가? 실수한 부분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 다른 중요한 사안은 이념성이다. 소위 좌파라고 부르는 성향이 과연 학신의 간사들에게 있는가이다. 우리 사회에 종북좌파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두려움에 섞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학신에도 있다고 단정한다. 과연 개혁파 신학을 배운 간사들이 진보적 가치를 넘어서 좌파적이며 종북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모 공동체와 관련된 간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것이 개혁파 신학과 교회관을 가르쳐야 하는 간사로서 적합한가라는 질문도 있다.

오늘 한국 교회가 그리고 고신교회가 정말 개혁파 교회인가?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의 현장인가? 전국 장로회 집회에서는 윤석전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우리 교단의 몇몇 대형교회 목사들의 강연들이 과연 복음인가? 그리고 교회에서 하는 소위 목회라고 하면서 욕을 해대고, 부교역자들을 날품팔이보다 못하게 쫓아내는 교회가 개혁파 교회들인가? 어디 이상한 소리나 일들이 있으면 쫓아다니다가 교회에 도입한다고 사고나 치는 교회들은 아닌가? 두 날개가 남부 지역에서는 한창이라고 한다. 라이즈업 운동을 한다고 대단하다고 치켜세운 결과가 무엇인가? 학신 운동과 간사들은 왜 저렇게 못하는가라고 비교하던 인사들이 누구이던가? 교회는 성장, 개인은 성공에 목마른 오늘의 기복신앙에 고신교회가 과연 편승하지 않았는가?

왜 청년들이 새로운 교회 상을 질문하게 되고 실험적 자리들을 찾게 되는가? 그들이 직분적 치리가 있는 개혁주의 교회를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한 번도 직분적 치리가 진행되지 못하는, 그리고 목사들이 제 편을 감싸는 재판이 진행되는 현실을 보면서 오늘의 보편교회가 얼마나 역사적 현실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를 젊은이들이 질문하고 있다. 그런 질문을 하면서 모인 공동체들이 복음적 가치를 정말 상실하고 좌파적 이념의 공동체인가?

물론 방법론적 측면에서 막스를 비롯한 좌파적 이념들을 학습하는 일들이 혹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현실 사회의 반성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대안적 사회로서 아직도 철학적 좌파를 사고와 추구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종북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공동체의 실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 그런 노력들의 작은 일부가 전체로 와전 곡해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복음이 오늘의 교회보다는 더 순전하고 온전하게 영향을 미치려는 삶의 진지한 태도들이다. 소위 무늬만 복음이고, 실제로는 현실 보존과 기복적 신앙에 쩔어서 자기 보존만을 생각하는 오늘의 교회 현실과 다른, 철저한 잃어버림과 낮아짐의 복음의 본질을 체화하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너무 몰아 부치지 말자. 우리의 교회 현실들을 보라. 그럼 우린 우파냐? 그럼 물론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 현실을 솔직히 돌아보자. 이대로 계속가면 교회의 미래가 있다고 보는가? 인구 절벽, 주일학교 폐쇄 현상들이 왜 왔는가?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라 낙태, 불임 등의 방식과 둘만 낳자 잘 기르자는 현실적인 기복적 가치에 굴복한 결과들이 아닌가? 정말 순전한 복음으로서, 자녀 생산의 복을 가르쳐 왔는가? 낙태하는 자들에게 치리를 해 본 경험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면 물타기라고 할지 모른다. 물타기 맞다. 우리 교회가 제대로 하면 왜 우리 젊은이들이 저런 곳들을 찾아가겠나? 학신 간사들이 바보인가? 왜 저들을 품어보려고 벌써 수년간 노력을 했는가? 기다려주면서 복음적 가치의 본질을 흐리지 않고 시대적인 요구를 담아보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이제 어느 정도 비등해진 여론과 함께 정리를 한 현실이다. 기존의 조직은 어느 정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서로 헤어져서 저들의 실험이 더 성공적인 되도록 하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학신의 난맥상, 그 현실

고신 내부에서 학신을 생각하면 손이 안으로 굽는 성향이 있다. 그럼에도 여러 노회들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누군들 다음 세대가 중요한지 모르는가? 누군들 SFC가 어느 교단보다 잘 사역해 온 것을 모르겠는가? 라이즈 업의 현실을 보면서, 반짝 하다가 스스로 무너져 사라지는 운동들과 달리 교회와 함께 다음 세대의 성실한 교회와 사회의 일꾼들이 양성된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개혁파 신앙을 가지고 캠퍼스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수련회 현장에서 변화되는 인격들과 헌신하는 무리들이 자라가고 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학신에 질문을 하고 있다. 잘 가고 있는가? 그리고 심지어 학신의 간사들에 대해서 의심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노회들이 총회에 질의를 하고,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에는 학신 지도위원회가 제 기능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학신 지도위원회는 과거 지도위원회에서 대표간사가 해임된 경험을 가진 세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학신 간사들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노회의 입장에서는 잘 지도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해 본다. 학신 간사들은 장기 사역 평가를 하고서 장기 사역자들의 사역 적합성을 판단해 왔다. 그런데 그 제도가 없어졌다. 왜 없어졌는가? 어떤 장기 사역자들의 사역을 평가하는 일에 자율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을 했던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해 본다. 거기에 노회들과 지도위원회가 개입해서 무마했던 일은 없는가?

오늘 간사들이 부름 받아 나섰다고 하면서 사역이 필요한 현장에 파송되는 일에 겸손하게 순종하고 있는가? 다양한 이유들로 현실에 안주하는 현실은 없는가? 4-50대의 간사들이 과연 학원 현장에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간사들의 재정적인 공동체성을 말하는 풀링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 왜 대안적 공동체가 이야기 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교회적인 현실과 다르지 않는 모습이지 않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노회나 총회가 주는 지원들이 쉽지만, 그러나 그것이 독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난한 정신(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는 말을 고민해야 한다.

 

글을 마치면서

학신에 대한 고신 교회의 우려를 총회 상정 안건들을 통해서 절감한다. 그럼에도 이 운동이 여전히 우리 고신교회의 내일이다. 다치게 하지 말고 잘 일으켜 세워보자. 저들의 젊은 날의 은혜와 헌신이 오늘의 우리들이지 않은가? 눈물로서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 교회 건설과 세계교회 건설에 충성을 맹세했던 우리들이다. 다시 한 번 우리의 후배들이 이 운동을 통해서 한 시대를 살려내는 운동이 되도록 격려하며 안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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