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취재원과 독자에게는 코닷에 자유로이 접근할 권리와 반론·정정·추후 보도를 청구할 권리가 있다는 뉴스 미란다 원칙에 따라, 최갑종 교수의 기고문 구원/칭의론 다시 생각하기에 대한 황 스데반 목사의 반론을 보도합니다. 이 글은 순수한 기고자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 황 스데반(그리스도보혈교회 담임)

백석대 총장 최갑종 교수가 코람데오닷컴에 구원/칭의론 다시 생각하기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의견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하였고 그리고 한번 구원 받은 자는 어떤 경우에서든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후 심판을 거쳐 영원한 구원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라고 정확하게 짚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슬로건에 도전하였다.

그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의견을 반대하는 이유는 기독교 복음을 값싼 복음, 기독교 신앙을 십자가와 제자도의 삶이 요구되지 않는 비윤리적 신앙을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 최갑종 교수는 톰 라이트 박사 및 김세윤 교수를 소개한다. 이 두 사람의 내용을 요약하면 톰 라이트는 성령의 인도 아래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서최종 칭의가 결정되고, 김세윤 교수는 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살려는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최종 칭의는 확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결론은 거룩한 또는 의로운 이 없는 경우 처음 믿을 때의 칭의는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칭의는 신자의 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

톰 라이트 박사와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소개한 최갑종 교수는 이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해 나간다. 그의 입장은 한번 구원에 참여한 자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삶이 없고 타락한 자는 최종적인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주장을 성경적으로 뒷받침 하기 위해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의 측면을 논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은 구원은 최후 심판 때까지 여전히 유효하여 최종적인 구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첫 구원은 믿음으로 은혜로 받지만, 최종적인 구원은 우리의 선행과 삶에 따라 됩니까?”

이 질문을 던진 최 교수는 모든 사람이 최후 심판 때,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 어떤 사람은 영벌에 처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영생의 축복을 누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한다. ,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최종적으로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한 최교수는 은혜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받아야 하고, 또한 행위로 심판하시는, 따라서 구원을 받은 자가 탈락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주장을 하기 위해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선택과 자유 의지의 관계를 예로 든다. , 성경의 문맥에 따라 믿음으로 받는 구원도 이해해야 하고 행위()로 판결되는 미래의 구원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이러한 구원의 두 측면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칭의 및 구원의 양면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바울은 이러한 양면적 가르침을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칭의, 구원, 성화는 이미아직이라는 종말론적인 구조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과 관련해서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성경 말씀을 따라, 전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지 않을 경우 최후 심판에서 탈락될 수도 있다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성경의 양면적인 교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필자가 볼 때 최갑종 교수는 복음의 본질을 놓친 가운데 스스로 미궁에 빠져버렸다.심지어 그는 자신의 미궁의 탓을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라고 돌리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처럼, 칭의와 구원 교리도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는 양면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는 결론적인 주장을 내렸고, 이에 우리는 그가 내린 결론을 근거로 하여 그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다.

그가 내린 결론의 앞부분,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내용은 거듭난 성도라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뒷부분은 정통 개혁 교회가 볼 때 큰 문제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지 않을 경우 최후 심판에서 탈락될 수도 있다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성경의 양면적인 교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문제가 되는가?

첫째, 최 교수의 주장은 개혁교회의 신앙 고백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필자의 이 말에 대해서 최 교수는 교리로 따지지 말고 성경으로 따지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은 공교회가 오직 말씀에 근거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함께세운 거룩한 교리이다.

특히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 가운데 가장 온전하다고 여겨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최 교수의 주장과 전혀 상반된다. 신앙 고백 제 10효력있는 부르심에 대하여부터 살펴보자.

2. 이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로만 되어지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아신 후에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면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그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후에야,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되며, 또한 이 부르심 안에서 제시되고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신앙 고백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효력있는 부르심부터 다룬다. , 부름 받은 자들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서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이들이 구원 받는 것은 칭의에 의해서이다. 신앙 고백 제 11칭의에 대해서를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이는 그들의 죄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며 받아주심으로 칭하신다. 칭의는 그들 안에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행하여진 어떤 것 때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칭하여진다. 그들의 믿음 그 자체, 믿는 행위, 그리고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전가함으로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과 보속(satisfaction)을 그들에게 전가함으로 의롭다 칭함 받는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분 및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한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순종과 죽으심에 의해 이같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빚을 완전하게 청산해 주셨고 그들 대신에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하게 보속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주셨고, 또한 그들 대신에 그리스도의 순종과 보속을 받으신 만큼, 그리고 이 두 사실은 그들 안에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거저 되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칭의는 오직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정확한 공의와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칭하시는 가운데 영광을 받게 하셨다.

4.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영원 전부터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 때는 성령께서 적절한 때를 따라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실제로 적용시키실 때이다.

5.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의 죄들을 계속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칭의(稱義)의 상태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분노 아래 떨어질 수 있으며, 그들이 자신들을 낮추고 그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그들의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누릴 수 없다.

신앙 고백은 태초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은 성령에 의해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이에 칭의되며 그 후 칭의의 상태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다.”그 대신 택자들이 죄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며 징계하사 그들로 회개하게 하신다.

분명한 것은 신앙 고백에서는 칭의의 이미아직구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앙 고백 제 12장은 양자 됨에 대하여고백하는데, 그 내용도 태초부터 택함을 받은 자는 효력있는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칭의를 얻게 되며, 양자가 된다고 말한다. 이때 한번 양자가 되면 결코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양자됨 역시 이미아직구조에 들어가지 않는다. 121절의 내용이다.

1.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수효에 들게 되고, 자녀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리게 되며, 또한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놓이며,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으며, 은혜의 보좌로 담대하게 나아가며,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가 있으며,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보호를 받으며, 필요한 것을 공급받으며, 육신의 아버지에게 징계를 받는 것처럼 징계를 받으나, 결코 버림을 받지 않으며,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으며,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들로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

13장은 성화에 대해 다루는데, 성화 역시 오직 태초에 택함을 받은 자들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칭의된 후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점점 거룩하여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화는 이생에서는 불완전하며 삶의 모든 부분에서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생을 떠나는 그때까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거스려 싸운다. , 거듭난 신자의 특징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거스려 싸우는 것이고, 성화는 그러한 갈등의 상태에서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 계속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16장은 선행에 대해 다루는데, 중생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신자들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음을 선포한다. 이는 최갑종 교수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신앙 고백이다.

5.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죄 사함이나 영생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울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어 드릴 수가 없고, 우리들의 전에 범한 죄의 빚을 갚을 수도 없다. 가령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 뿐이요, 우리는 무익한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행위들이 선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데 있다. 그러나 그 선행들이 우리들에 의해 행하여질 때에는 여러 가지 연약성과 불완전함으로 더럽혀지고 섞이게 되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견디어 낼 수가 없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생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흠이 없거나 책망 받을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시기 때문에, 비록 많은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수반하더라도 진실하게 행한 것에 대해서는 받아주시고 상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의 선행 역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없고, 오직 우리에게 거주 주어진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한다. 우리의 믿음에 의한 선행은 단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신자들이 영원한 세상에서 누리게 될 각 개인의 영광과 비례할 것이다.

17장은 성도의 견인을 고백한다. 이 고백은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최 교수의 주장과 전적으로 상반된다.

1.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주신 자들, 곧 성령에 의해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고 또한 거룩하여진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으며, 그들은 마지막까지 틀림없이 그 상태에 꾸준히 머물러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

2. 성도들의 이러한 견인은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흘러 나오는 예정의 불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로 말미암은 것이요, 은혜 언약의 속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또한 견인의 확실성과 무오류함이 나온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사탄과 이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부패의 편만함과, 그들을 보존해 주는 은혜의 방편들을 무시함으로 인하여, 극심한 죄에 빠질 수 있으며, 얼마 동안 그 죄 가운데 거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초래하며, 그의 성령을 근심케 하고, 그들이 받은 은혜와 위로를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그들의 양심은 상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고 걸림돌이 됨으로서 일시적인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

, 칭의를 받아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지언정 결코 영원히 버림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신앙 고백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진리를 지지한다. 그러나 참으로 구원 받은 자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이며, 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함을 나타낸다.

나아가 신앙 고백 18장은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고백한다.

1. 주 예수를 참으로 믿고, 신실한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을 따라 힘써 행하는 사람들은 이생에서 자신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가 있다.

2. 이 확신은 허황된 소망에 근거한 추측이나 그럴 듯한 신념이 아니다. 그 확신은 구원의 약속들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와, 주어진 약속들로 인해 발생하는 은혜들에 대한 내적 증거,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양자의 성령의 증거에 근거하는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성령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성령에 의해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3.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신하기 위해 열심을 다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확신의 합당한 열매들로는, 그의 마음은 성령 안에서의 화평과 희락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되고, 또한 순종의 의무에 있어서 힘과 유쾌함이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 확신을 갖게 되면 결코 방종함으로 기울어질 수 없다.

최갑종 교수의 주장을 듣는 순간 필자는 공교회의 역사 가운데 있었던 알미니안의 주장과 같다는 것을 보았다. 톨트 신조의 내용을 보자. 첫 번째 주요 핵심 교리인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다루는 부분을 보자.

하나님의 예정 교리에 대한 결정

11 : 불변하는 선택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시며 불변하시며 전지(全知)하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그가 행하신 선택은 중단되거나 변하거나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또한 택함 받은 자는 버림받거나 그 수가 감소될 수 없다.

12 : 선택의 확신

그들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구원의 선택에 대한 확신은 그 정도가 다르고 또한 다양한 단계가 있기는 하지만 적당한 때에 주어진다. 그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깊은 것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 안에 성령으로 인한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구원 받은 자의 분명한 열매들을 주목하게 되면서 얻어진다.

13 : 이러한 확신으로 인한 열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식하고 확신하게 될 때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지며,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여 주신 주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자비를 찬양하게 되고, 그들에게 먼저 그토록 어마어마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뜨거운 사랑으로 보답하게 된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있어서 나태해지거나 육체적으로 안일하게 되는 일이 없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선택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며 당연하게 여기는 자들과 택함 받은 자들의 길로 행하려 하지는 않고 그저 택함에 대해 게으르고 도도한 말장난을 하는 자들에게 종종 임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최갑종 교수의 주장은 알미니우스의 주장과 정확하게 같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성도의 견인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을 보면 다음과 같다.

6

알미니안들의 주장 : 택함 받은 사람들 중의 얼마는 멸망 받을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영원히 멸망할 것이며, 하나님의 그 어떠한 작정도 이를 막지 않는다

7

알미니안들의 주장 : 이생에서는 어떤 사람을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불변하는 선택이 없으며, 그러한 선택으로 인한 열매나 자각이나 확신은 전혀 없다. 오직 가변적이며 불명확한 것에 기인하는 조건적인 선택이 있을 뿐이다.

2

알미니안들의 주장 : 만일 신자가 그의 의무를 이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신자에게 인내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공급하시고 그 신자 안에 이 힘을 기꺼이 보존하고자 하신다. 그러나 비록 신자가 믿음 안에서 견인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예비되어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존하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실지라도 여전히 견인은 인내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

3

알미니안들의 주장 : 참 신자요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은혜와 구원뿐만 아니라 의롭다 하는 믿음을 완전히 그리고 끝까지 잃을 수 있다. 또한 실제로 그들이 종종 그러한 것들을 잃고 영원히 버림 받기도 한다.

4

알미니안들의 주장 : 참 신자요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사망에 이르는 죄(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지을 수 있다.

6

알미니안들의 주장 : 성도의 견인과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한 교훈은 그 본성과 특징에 있어서 육신의 아편이며 경건과 선한 도덕과 기도와 다른 거룩한 훈련에 해가 된다. 그러나 오히려 이 교훈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것은 칭찬받을만하다.

7

알미니안들의 주장 : 오직 잠시 동안 믿은 자들의 믿음과 칭의와 구원의 믿음은 기간의 차이외에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교회 역사 가운데 돌트 총회는 이러한 알미니안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내렸다.

더욱이 총회는 간절하게 거짓 비방자들에게 그렇게 많은 교회와 그들의 고백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고, 약한 자들의 양심을 곤경에 빠뜨리고, 많은 신자들의 마음에 편견을 주입시킴으로서 참 신자들의 교제를 방해한 자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어떠할지 고려하기를 경고한다마지막으로 성경의 진정한 의미에 의해 우리를 위해 설정된 경계를 넘어서서 결코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서 무례한 궤변론자들에게 개혁교회들의 교훈에 대해 조롱하거나 심지어 거짓된 비방을 할 수 있는 타당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최 교수의 문제는 성도가 얻게 될 영원한 영광(면류관 및 상급)을 얻고 잃는 문제를 구원 그 자체를 잃고 얻는 문제로 연결하였다. 그는 성도가 최선을 다해 살지 않을 때 잃게 되는 상을 마치 영생(구원)을 잃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셋째, 최교수의 주장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가 말하는 최종 심판은 주의 재림 때를 의미하는데 그때 가봐야 최종 구원을 알 수 있다면, 신자가 죽을 때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나님의 보좌 앞인가 아니면 주의 심판 때까지의 어떤 중간 상태의 대기실인가?

넷째,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의 설교는 크게 달라져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는 예수만을 믿어야 구원 얻습니다라고 하여 믿게 만들고, 이제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구원을 확신해서는 안 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최종 구원은 주님의 재림 때에나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라고 가르치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러한 설교가 청중들에게 복음이 되며 나아가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그들이 갖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상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그러나 참 신자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사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 분 안에서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고 또한 우리를 바르게 교육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을 안다. 그 사랑은 이생 가운데 우리의 완고한 고집을 꺾어 놓으시고,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으려고 고집할 때도 매로 때리시며 바른 길로 오게야 만드시는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증거는 십자가의 구속이니,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 죄가 아무리 주홍처럼 많을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때문에 영접하시는 하나님을 뵙게 된다. 영원 전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은 복음의 소식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고 알게 되며, 그때부터 살아계신 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진행되고, 추억이 만들어지며, 꾸지람을 받을 때도 있고 심지어 매를 맞을 때도 있으나, 결코 영원히 그분에게 버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는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실 정도의 그 사랑은 영원하고 변함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을 왜곡하여 탈선과 죄악의 방편으로 삼는 자는 구원파 유병언처럼 이단이며, 또한 그러한 신자들이 있다면 처음부터 거짓 신자이지, 구원을 받았다가 죄악 때문에 잃을 수 있는 그러한 현상이 아닌 것이다. 필자는 자칫 최갑종 교수의 주장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에 속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 어떠한 행위든 행위 그 자체를 최종 구원의 조건으로 두려는 것은 바울이 흥분하며 경계하고 경고한 갈라디아 교회에 전파된 다른 복음, 또는 거짓 복음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 스데반 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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