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가르치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

▲ 최갑종(백석대 총장, 신약학교수) 고신대와 고려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Reformed 신학대학원, Calvin 신학대학원, Princeton 신학대학원, Iliff 신학대학원과 Denver 대학교대학원에서 신약(부전공 구약)을 전공(M.A. Th.M ., Ph.D. in Biblical Studies).

저의 글, “구원론/칭의론 다시 생각하기코람데오닷컴에 게재된 이후, 많은 분들이 긍정적인 관심을 보여주셨지만, 제 글의 논지와 의도를 곡해하는 분들도 있어 간단하게 해명의 글을 올립니다. 제 글의 논지는 전통적인 이신칭의 구원론을 포기하고,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을 가르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장로교회나 개혁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나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등은 우리의 신앙선배들이 물려준 아름다운 유산으로서 여전히 보존되고 가르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또한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와 함께 성경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에 대한 가르침도 함께 보존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독자들 가운데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틀렸고, 저것이 옳으면 이것은 틀렸다는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저의 이것도 성경의 가르침이고, 저것도 성경의 가르침이다는 양면적인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으로부터 통일성을 가진 교리를 찾는 조직신학적 관점에 익숙해 있거나, 전통적인 시각만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보려고 할 경우, 저의 양면적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성경신학자로서 성경의 가르침을, 때때로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고수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도를 강조하는 마태복음서나 신자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읽을 때는, 믿음과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는 바울의 서신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동시에 믿음과 은혜의 구원을 말하는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는, 마태복음서나 야고보서의 강조점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양자를 조화시켜 읽으려고 할 경우 오히려 우리는 각 성경 저자의 강조점과 메시지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자세가 또한 오직 성경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가르치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는 개혁신학의 원리와도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의 양면적 주장을 동시에 가르치거나 설교함으로써 청중들에게 혼란을 주어서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와 구원을 말하는 성경 본문들과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 및 탈락을 말하는 성경본문들을 나란히 두고 양쪽 중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려 하거나, 양쪽을 적당이 절충하려 하거나, 한편을 중심으로 다른 쪽을 종속시키려는 자세 등은 성경에 대한 옳은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성경의 판단 자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의 판단 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성경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성경 말씀에 경외할 수밖에 없고, 그 말씀에 겸손과 승복할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특정한 성경 본문을 만날 때 우리의 자세는, 다른 성경 본문들과 비교하면서 진위여부를 판단하려 하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그 성경 본문에 집중하여, 성경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왜 이 말씀을 독자들에게 하시는지,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독자들의 상황은 어떤 한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성경 본문의 의미와 강조점을 바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성경 본문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려 할 때는, 성경 저자들이 독자들의 상황과 관련하여 그 본문을 통해 독자들에게 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우선적으로 그 성경본문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양면적인 교훈을 동시에 언급하거나 가르침으로 인해 혼란을 가져오기보다는, 자신의 목회적 판단에 따라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의 칭의와 구원을 강조하여야 할 상황에서는 그에 따른 성경본문을,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그에 따른 성경본문을 가르치고 설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오직 은혜오직 믿음으로의 칭의와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주거나, “오직 은혜오직 믿음으로의 칭의와 구원을 가르쳐야 할 상황에서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주어 청중들을 혼란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서신들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도 이러한 목회적 원리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의 구원을 말하는 로마서 3-11장과 갈라디아서 3-4장만이 복음이 아니라,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 및 탈락을 말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5-7), 마태복음 25장의 3가지 비유의 말씀도 복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강조해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으로의 구원”, “오직 은혜로의 구원을 강조하여 기적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년 전부터 한국교회는 정체 내지 축소가 되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고, 유년과 청소년을 교육시키는 주일학교가 점점 축소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낮은 출산율의 원인도 있겠지만, 한국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비윤리적인 행위와 부패에 원인이 있지 않는지를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물론 저는 개척교회를 포함하여 오늘 날에도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하는 구원론 문제와 관련해서는 분명히 오직 믿음오직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연륜이 있는 기성 교회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바르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는 상황에서는 성경에 역시 나타나고 있는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 및 탈락의 메시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고린도전·후서나 데살로니가전·후서나, 로마서의 후반부(12-16)나 갈라디아서 후반부(5-6)에서 사도 바울이 그랬고, 야고보가 그랬고, 마태가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마태복음 5:2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을 읽는다면, 산상설교(5-7)의 결론인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을 읽는다면, 혹은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나, 바깥 어두운데 내 쫓겨진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나, 영벌에 처한 왼편에 있는 자들의 경우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성경에는 오직 은혜와 믿음에 의한 칭의 및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과 멸망에 관한 가르침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어떤 분이 오늘 날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혹은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고 있는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을 강조한다고 해서 함부로 전통적인 구원관을 표기하고 행위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매도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목회자가 자기 교회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하여 성경에 있는 오직 믿음과 은혜의 구원을 가르치고 설교한다고 해서 이를 윤리 없는 값싼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매도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코람데오닷컴에 글을 보낸 주된 이유입니다. 칭의/구원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저의 입장은 연말경 출판사 새물결플러스를 통해 출판되는 제 책 칭의란 무엇인가?에 제시될 것입니다. 지난 번 제 글의 부족한 부분은 그 책에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코람데오닷컴에 실린 제 글에 대한 오해가 불식되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문의 한 문구로 이 글을 마칩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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