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 우병훈(고신대 신학과, 교의학)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사실 매우 오래된 질문이다. 종교개혁자들과 그 이후 세대의 신학자들은 이 질문을 두고 열띤 토론을 했었다. 결론은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16-17세기 개혁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이 확신은 신앙의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쳤다.

첫째, 성경에서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어휘들을 조사해 보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믿음에 대한 용어들(히브리어-‘아만’, 헬라어-‘피스튜오와 그 동족어들)을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많은 용례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둘째, 성경에 나오는 신자들의 삶을 보면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를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앞으로 지키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너무나 유명한 다윗의 시편 23편은 삶의 여정 전체를 지키시는 목자 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있는 믿음을 보여준다. 바울의 서신서 특히 로마서 8장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셋째, 구원역사적으로 볼 때에 성경 계시는 확신이 신앙의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확신했다. 시편 기자들의 노래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 구약 백성들의 확신 있는 신앙은 히브리서에서 칭송된다(10:39-12:2). 신약의 여러 곳에서 확신 있는 신앙은 신자의 특권이자 축복이다. 요한복음은 확신 있는 믿음에서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교제가 나온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실상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특징상 신앙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이 신앙의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은 신앙의 필수적 요소인가? 신앙에서 구원의 확신을 뺀다면 그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안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중적으로 대답했다.

신자의 삶 전체를 유기적으로 본다면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본질이다.

하지만 신자의 삶의 어떤 순간을 잘라서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무슨 말일까? 우선, 믿음의 여정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구원의 확신이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신자는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그런 확신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신자의 의식 가운데 항상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별히 죄를 지었을 때나 영적으로 침체기 빠졌을 때에는 구원의 확신을 못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다시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바라보면 구원의 확신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원의 확신은 신앙에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다. 확신 있는 믿음은 회개, 칭의, 성화, 회심, 양자됨, 인침, 견인, 기름부음, 증거, 순종, 은혜, 죄를 극복함,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과 연결된다. 구원의 확신은 신자의 믿음의 다양한 순간에 여러 가지 열매를 맺게 하는 귀한 신앙의 요소이다. 무엇보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그래서 청교도 토마스 브룩스는 확신 있는 영혼은 천국에 동료 없이 가고자 하지 않는다.”라고 했고, 토마스 굿윈은 확신은 신자로 하여금 10배나 더 하나님을 위해 살게끔 만든다.”라고 했다.

조엘 비키는 구원의 확신 교리가 이토록 중요하기 때문에 목회자는 구원의 확신 교리를 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의 확신을 그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깊이를 경험할 수 없다.

구원의 확신을 억지로 강요하는 교회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구원의 확신을 무시하는 교회는 복음적 열정을 상실하게 된다.

반대로 구원의 확신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는 신실하신 하나님만 주목하게 함으로써, 신자가 은혜 속에서 강해지도록 하며, 침체에 빠지더라도 다시 나올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3:6, 1:6).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의 삶에는 이미/아직은 아닌의 긴장이 있다. 우리는 구원 받았지만 아직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불확실하여 중도에 탈락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목하여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며 하루하루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양녀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며,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자들이다. 삼위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확신 가운데 신앙생활하게 된다.

B. B. 워필드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 . .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구원의 능력은 믿는 행위에 있는 것도, 믿음이라는 마음의 성향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그분께 있는 것이다. 오직 그분께만 전체 성경의 설명이 집중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구원의 능력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 그분께만 돌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다른 것에 돌린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심각하게 성경을 오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자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비록 의심과 불안이 계속해서 괴롭히겠지만, 결코 그런 것들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임할 그 날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최종적 구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를 주님의 뜻대로 빚어 가실 것이다.

전반전(십자가 구원 사역)에서 열심히 뛰신 주님이, 후반전(신자 안에서 구원 사역)에서 그냥 대충 쉬실 리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을 바라보자. 오직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흔들릴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16-17세기 개혁신학자들의 가르침이다.

(8)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 이상의 내용은 Joel R. Beeke, The Quest for Full Assurance: The Legacy of Calvin and His Successors (Carlisle, PA: Banner of Truth, 1999), 269-285쪽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편의상 자세한 각주를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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