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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에 있어서 선한 행위의 역할(1)
   
▲ 홍성철 목사(영국 웨일즈 대학 Ph.D, 대전주는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선한행위는 크리스천 생활에 선택이거나, 혹은 우리의 구원과 칭의에 전혀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신약전체 내용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은 분명히 약한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예수를 믿고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선한행위는 마지막 구원과 참된 칭의에 필수적이라고 가르친다. 곧 참된 구원과 칭의에 있어서 선한행위가 그 열매로 동반된다는 개념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에 타협을 결코 가하지 않는다.

이 글은 참된 칭의와 구원은 반드시 선한행위를 동반한다는 가설을 성경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신자처럼 보이나 행동이 없는 칭의와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님을 논의하려고 한다. 먼저 (1)편에서 참된 칭의와 구원을 받지 못하는 믿음이 아닌 믿음이 신약성경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1. 야고보서-구원받지 못한 믿음(지식적 동의)

지식적 동의는 구원받지 못한 믿음이다. 약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약한 믿음인가? 약한 믿음은 교리, 신조와 신경, 그리고 어떤 선언, 그리고 어떤 신념을 지식적으로만 동의하는 믿음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나는 믿는다고 말하는 그것이 구원받는 믿음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고보는 2:14a에서 수사학적 질문을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구원을 받은 믿음인가(2:14). 곧 야고보의 질문은 무엇이 구원받는 참 믿음인지를 묻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믿음이 행함이 동반되지 않은 지식적인 동의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고백만 하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며, 이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1) 야고보는 살아있는 믿음은 그 자체가 선한 행위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분리는 없다. 믿음과 행위는 구원에 있어서 분리되는 두 가지 요소들이 전혀 아니다. 야고보에게 선한 행위는 믿음에다 더하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적 표현이다.

구원하지 못한 믿음도 교리적으로 바를 수 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믿음은 마음과 행동의 변화가 없으며, 귀신들처럼 정통교리도 알지만, 그러나 선한행위 없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지식적인 동의 믿음은 약하고 비워 있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지식적으로 교리나 진리의 명제에 동의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전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운 선물임을 강조하는 소위 은혜의 선물 운동(The Free Grace movement)은 약한 지식적인 동의가 실제로 사람을 구원한다고 주장한다.2) 이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의 해석을 인용하려 한다. 왜냐하면 용어들 의롭게 여기다(dikaioo),’ '구원하다'(sozo)는 종말론적 구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고보가 실제적으로 종말론적 구원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과 상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의롭게 여기고 구원하다는 용어들은 땅에서 의로운 인생의 생활이라고 본다. 구원은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런 해석은 칭찬할만한 것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어떤 주장과 개념을 거부하길 원한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믿음이란 솔라 피데의 가치와 그 구원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길 원한다. 그러나 치명적 실수는 성경 주해 해석이다. 용어 구원하다,’ ‘의롭게 여기다는 우리의 마지막 구원을 언급하는 용어들이다. 무엇보다 야고보는 바울이 구원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인 믿음,’ ‘행위,’ ‘의롭게 여기다,’ 그리고 구원하다를 같은 구원론에 논쟁 하에 사용한다. 바울이 칭의에 관해 호소하는 가장 두드러진 구절(창세기 15:6; 4:3; 3:6)을 야고보서 2:23절에서도 사용한다. 야고보와 바울은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아브라함을 같이 사용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고 로마서 4:3절에 인용하고,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 그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바울도 야고보도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을 같은 인물인 아브라함을 인용하지만 같은 주제인 구원에 관한 주제이다. 구원은 은혜로운 선물임을 강조하는 소위 은혜의 선물 운동(The Free Grace movement)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학을 뒷받침 하려 그들이 원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그들의 신학을 애쓴다. 그러나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정확히 해석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견해를 말하고자 본문을 자기 의도에 주입하려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야고보는 2장에서 약한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행위가 동반되지 않은 믿음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2:17). 신자에게 선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은 그 믿음은 그 자체가 현재 죽은 것이다.’ 어구 믿음이 죽은에서 형용사 죽은’(네크로스, νεκρς)은 믿음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죽은 것을 말한다. 곧 사랑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은 행동은 죽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구원 받을 수 없는 믿음이며,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될 수 없는 믿음이다.

행함이 부족한 믿음은 역사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그런 믿음은 구원을 받는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3) 야고보는 2장에서 헛된 믿음, 약한 믿음, 효력이 없는 믿음, 죽은 믿음을 반대한다. 참된 믿음은 살아있고 역동적이며, 그리고 분명히 열매인 행위를 생산해낸다. 야고보는 2:22절에서 아브라함이 칭의를 이룬 실제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믿음이 행위와 함께 협력하였다

사람들이 믿는다고 주장할 때, 믿음의 실체는 그들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행동이 믿음의 실체다. 만일 그들이 약한 믿음인지 지적인 동의는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다.

 

2. 마태복음, 요한복음, 바울서신에서 불충분한 믿음

약한 믿음은 야고보에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 마태복음, 요한복음, 바울서신에서 예수님이 무엇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믿음인지 알려준다.

1)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각각 씨들의 종류와 그 복음의 말씀을 받는 사람의 종류와 관계가 있다. 마태는 독자에게 4개의 땅의 종류를 비교하고 서로 대조한다. 청중들은 각자는 어떤 종류의 땅이며,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자의 영적 상황을 스스로 묻고 새로운 결단을 요구한다. 씨 뿌리는 비유에 따르면, 종말에는 열매를 거두는 추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씨 뿌리는 비유는 신자가 왜 열매가 맺지 않는지, 신앙 성장의 방해물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해 독자가 생각해보라고 도전한다. 마음 밭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장 근원적 이유는 마음 밭이다. 1) 말씀에 대한 무관심; 2) 충동적; 3) 세상에 몰두해 있는 것 때문에; 4) 마음 밭이 회심하였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다.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3개의 마음의 땅은 좋은 결실을 생산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의 땅인 마음이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자는 좋은 결실을 생산한다. 따라서 마태는 마태 공동체와 독자에게 불행하고 실패한 땅들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열매란 결실을 맺는 자들은 참 제자라는 결론이다. 그 결과로 마태는 신자가 맺는 열매가, 그가 참 제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테스트임을 밝힌다(3:8-10; 7:16-20; 12:33; 21:19, 34, 41, 43). 오직 참 믿음은 열매를 맺는 믿음이다. 이 열매를 맺는 이 믿음은 오래 동안 열매를 맺고 그 믿음은 선한행위를 생산한다.

2) 요한복음에서 구원받지 못한 불충분한 믿음

요한복음은 합당하지 않은 믿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초창기 사역할 때에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이 수행하는 기적을 보고 몰려왔다. 유월절 날에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그를 믿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다 알았기 때문이다(2:23-24). 예수님이 행한 기적은 효과적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보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하지만, 요한은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었음을 힌트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예수님이 수행한은 기적과 이적을 보고 매력을 느꼈다고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수행하는 이적을 보고 놀랐다(4:48).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믿음은 일시적이며 구원을 받지 못하는 믿음임을 인식했다. 군중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수행하는 이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는 의도로 이적들을 소개한다(20:31). 이적 자체는 본질적으로 불충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행한 이적을 보고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23-24절에서 군중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행한 외형적 이적에만 몰입되었지만, 그들의 삶을 예수님에게 맡기는 데는 실패했다.

요한복음 6장에서도 군중들은 예수님이 행한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 놀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믿는 자에게 생명의 떡임을 인지하지 못한다(6:35). 그들은 이적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제자이며 신자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31-59절에서도 자기들은 믿는다고 여기나 합당하지 않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 믿음의 사례를 말씀한다. 예수님은 그를 믿었다고 여긴 자들에게 설교한다(8:31).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구원을 받지 못한 종류의 믿음이었음이 밝혀진다. 예수님과 대화가 계속된 후에 자신들이 믿었다고 여긴 자들은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죽이려 한다. 예수님은 그들과 대화 중에 그들의 믿음은 피상적이었으며 합당하지 않은 구원을 받지 못한 믿음이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데 합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믿는 구원받지 못한 믿음을 드러내신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이 신자라고 여긴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의 종이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죄의 속박에서 자유해야 하는 진리에 동의하지 않았다(8:31-36).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자 그들은 분노했고, 그를 죽이려는 살기등등한 자세를 보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참된 구원을 받은 진정한 신자이며 설교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지적을 참신자라면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예수를 참으로 믿은 참된 신자는 비록 죄를 지적하고 그들의 생활이 잘못되었다고 죄를 지적해도 겸손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3) 요한일서

이와 유사한 사례는 요한일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한의 교인들은 한 때는 서로 연합되었으나 분리되었다. 교회 공동체 중에 초기영지주의를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은 교회를 떠났고 새로운 교회를 형성했다. 아마도 그 교회를 떠난 자들은 원래 교회의 리더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요한은 교회를 버린 사람들의 영적 기원을 설명한다(요일 2:19).

그들이 교회 공동체를 떠난 것은 그들이 다른 영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참 신자로서 공동체의 내부 구성원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공동체를 떠남이 진정한 신자와 가짜 신자의 차이를 입증한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은 교회의 차이를 성경적으로 알려주는 구절이다. 곧 그들이 나갔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소속이 아니었음을 알려준 것이다. 곧 그들이 공동체를 떠남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려준다.4) 하나님은 그들이 공동체를 떠난 것은 그들이 이단이었음의 본질을 알려준다. 곧 그들이 우리 중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5)

그들은 처음에는 신자들이라고 생각되었을지 모르나, 그들이 정통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그들이 참된 신자가 아니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요한은 그들이 구원을 상실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들이 참된 신자였다면 그들이 교회에 남아있고 그들의 믿음을 보존했을 것으로 말한다. 요한은 한번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은 인내하고 정통교회 공동체 내부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4) 바울에게 있어서 충분하지 못한 믿음

바울은 참된 믿음이 아닌 믿음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울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합당하지 않은 믿음을 말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여겨진 데마(Demas)라는 신자를 언급한다. 데마는 바울과 같이 동역하는 사역자였다(4:14; 24). 그러나 데마를 바울이 투옥하는 기간 동안에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과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다(딤후 4;10). 데마는 처음에는 참된 신자처럼 보이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가 바울과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믿음의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 또 다른 사람은 후메네오(Hymanaeus)란 사람이다(딤전 1;20; 딤후 2:17). 그는 교회에서 리더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행동으로 보아 그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데마와 후메네오는 교회의 지도자였고 처음에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약한 믿음이 아니다. 교리나 신조와 교리들을 지식적으로 알고 암송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여겨질 수 없다. 이적을 보고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에게 의탁하지 않은 자들도 진정으로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다.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죄인이며 죄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영적 비참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자들도 구원받은 믿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교회 리더로서 교회를 위해 헌신한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정통교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을 좇아간다면 그들이 진정한 칭의를 받았는지 구원을 받았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2)편에서는 구원받는 믿음, 혹은 참된 칭의는 역동적이며 선한행위가 반드시 동반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홍성철  bennyhong3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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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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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UL 2016-09-08 12:29:21

    성경에서 바울은 물론 야고보도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바울은 “칭의의 원인”인 은혜의 믿음을(엡 2:8; 롬 1:17; 3:28), 야고보는 칭의의 “필연적 결과”인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을 뿐(약 2:22~26; 롬 3:31), “첫번 칭의”와 “종말 칭의”가 달라질 수 없다고 합니다. 새관점 학파들은 달라질 수 있다고 하나, 정통 개혁신학에서는 절대로 달라질 수 없다고 합니다.   삭제

    • PAUL 2016-09-08 12:25:06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언된 칭의가 인간의 자유 행위에 의하여 취소될 수 있는가?인데, 만일 선언된 칭의가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취소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 하나님은 계속 실패하실 수밖에 없으며, 아니면 인간의 행위에 따라 번복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하신 분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삭제

      • PAUL 2016-09-08 12:23:32

        지면의 한계로 성경을 일일이 들어가며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칭의에 대한 설명에서 상반된 주장들 즉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를 지원하는 듯한 성구들이 많아 성구마다 성경의 원리와 문맥에 따라 주석해서 정확한 의미를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에 대한 보다 신학적, 성서적인 상세한 설명을 [토론방]에서 PAUL의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에 대한 반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삭제

        • 행복지기 2016-09-08 10:32:57

          PAUL님의 댓글에 공감합니다. 글 들을 읽어 보면 칭의론에 관한 논쟁이 너무 신학을 주관적으로 논하여 성경의 본질에서 벗어나 삼천포로가고 있는것 같습니다. 저도 모 신대원에서 교수님들과 토론 수업을 진행하며 느낀건데 학자들은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보다는 학자 누가 뭐라했느냐에 주목하고 거기에 자기의견을 말하다보니 본질에서 멀어져 버리더군요 PAUL님께서 댓글의 내용을 성경으로 정리하셔서 올려주세요   삭제

          • 이상엽 2016-09-06 16:07:15

            그러한 설교에 염소는 참된 칭의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당당하게 칭의를 받었다고 우길 것이고 양은 내가 참된 칭의를 받은자로서 제대로 살고 있는 지를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기복적인 설교, 금니빨 설교, 주의 종을 대접하면 복받는다는 설교, 성전건축을 조장하는 설교(사실 성전이 아닌 것을 잘 알면서도)는 이제 그만하시고.... 물론 대부분의 고신 목회자들은 그러지 않으시겠지만...   삭제

            • 이상엽 2016-09-06 16:03:08

              인간의 행위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공감을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목사님의 설교와 가르침을 받고 깨어 있는 교인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나 바라는 것은 우리 중에 칭의를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 당신의 구원이 참된 것이냐를 순간순간 점검해보도록 하는 설교를 자주 해달라는 것입니다.   삭제

              • PAUL 2016-09-06 03:57:39

                칭의의 선언은 그 자체가 완전하여 어떠한 후속 조치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와 같이 행위열매의 정도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칭의 자체로 구원을, 의의 열매로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고로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을수록 현세와 내세에 궁창의 별과 같이 더욱 더 영광의 빛으로 빛날 것입니다(단 12:3). 결론은 불의의 행위든 의로운 행위든 인간의 행위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삭제

                • PAUL 2016-09-06 03:51: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인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믿어지는 확신”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고백으로 표출되려면, 성장의 과정을 통하여 지성과 영성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에는 자기가 누구며, 누구의 아들인지, 누가 자기의 부모인지 모르다가 지성과 인격이 성숙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기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삭제

                  • PAUL 2016-09-06 03:44:56

                    이는 마치 임신을 못하고도 주위를 의식하고 자신의 지나친 욕구로 인해 임심한 것 같은 증상들이 나타나서 임신으로 믿고 있는 상상임신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임신이 주관적인 증상만 가지고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이 칭의도 주관적인 믿음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확인은 신자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 초기에는 자아의식으로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삭제

                    • PAUL 2016-09-06 03:41:18

                      약복용과 그 효력의 비유로 잘 설명하셨습니다. 효과가 있는 약을 먹었느냐 효과가 없는 가짜 약을 먹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참된 칭의냐 거짓 칭의냐가 문제입니다. 칭의를 받았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드시 의로운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효력이 없는 가짜 약을 먹고도 진짜 약을 먹었다고 생각는 것과 마찬가지로 칭의를 받고도 의로운 삶이 없다면 그것은 칭의를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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