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청길 선교사(동경성서교회)

프란시스코 쟈비엘 신부와 야지로(弥治郎)의 일행이 가고시마(鹿児島)에 상륙한 1549815일은 카토릭교회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는 대축제의 날이었다. 그들의 일행은 야지로(弥治郎)의 고향이었던 가고시마(鹿児島) 지역에 일 년 동안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100여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고 일본의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인 카토릭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1549년 겨울,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일본 선교를 위한 일본어 공부에 열중하는 한편 교리서를 번역하는 작업을 착수하였다. 그는 인도 고아(Goa)에 있는 선교본부에 일본 선교의 가능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일본에 대하여 우리들이 경험하여 얻은 지식들을 전달합니다. 첫째로 우리들이 교제하면서 얻은 지식은 이 나라 백성들이 지금까지 발견한 국민들 가운데 최고의 수준이며 일본인보다 우수한 이교도 없을 정도로 놀라운 민족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친절하고 선량하여 악의가 없고, 명예심이 매우 강하며 무엇보다 명예를 존중하는 백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무사들은 물론 일반 평민들은 가난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모욕을 당하거나 천박한 언어로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무사 이외 사람들은 무사들을 대단히 존경하고, 무사들은 그 지역의 영주(領主)을 위하여 일하며 영주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이 지역에는 포도원 밭이 없기 때문에 쌀로 만든 술을 즐겨 마시며 도박하는 사람들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 하기 때문에 기도문, 교리서 등을 빠른 시일 안에 습득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하 생략- 1549115일 프란시스코 쟈비엘

이 편지는 예수회 동지들에게 보낸 프란시스코 쟈비엘 신부의 서간문에서 발취한 내용임을 밝혀 둔다. 이 문서를 통하여 선교 초기의 일본 국민에 대한 정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 국민은 매우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며 매사에 분별력이 있으며 명예를 존중하고 무사들을 존경하고 무사들은 충성심이 매우 강함을 증명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쟈비엘 신부는 가고시마(鹿児島)에 체류 중에 이찌기성(市來城)에서 온 노무사(老武士) 전도하여 세례를 주고 세례명을 미겔루라고 명명하였다. 노무사(老武士)를 통하여 그 지역에 선교는 활성화되었고 큰 힘을 얻게 되었다.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이찌기성(市來城)의 성주인 니이로 야스히사(新納經康久)의 부부를 전도하여 수십 명의 무사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일본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1550년에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가고시마(鹿児島)를 떠나서 도시로 진출하기 위하여 해로(海路)를 따라서 히라도(平戶) 지방에 상륙한 후 한 달 동안 체류하면서 히라도(平戶)의 성주 마쓰우라 다가노부(松浦降信)와 회견하고 선교의 허가를 받아 히라도(平戶) 지역에 교회의 기초를 놓게 되었고 함께 동반한 도루레스 신부에게 맡겼다.

155010월에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후루난데스 수도사와 베루나루도 함께 히라도(平戶)를 출발하여 하가다(博多)를 경유하여 야마구치 스오(山口周防)에 도착한 후 영주(領主) 오우지요시다가(大内義隆)와 회견하였다.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오우지요시다가(大内義隆)를 회견한 자리에 서양의 진귀한 선물을 준비하였는데 시계, 안경, 거울, 철포 및 포도주를 등을 예물로 증정하였는데 그 당시 일본에서는 구하기 매우 어려운 귀한 품목들이었다. 야마구치 스오(山口周防)의 영주(領主)는 귀한 선물에 매우 만족하여 선교 활동을 허락하였고 쟈비엘은 매일 같이 사람들을 모아 설교하는 한편 지식인들과 승려들을 만나 토론을 전개하여 그들을 설득하고자 분주한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하여 설파하였고 이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기리스단이란 용어로 부르게 되었는데 기독교를 포르투갈의 발음으로 기리스단(Cristao:吉利支丹, 切支丹, )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1551년 가을에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분고(豊後)의 항구에 포르투갈 상선이 입항한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포르투갈 사람들과 함께 분고(豊後)의 영주인 오도모 요시시게(大友義鎭)를 만났다. 오도모 요시시게(大友義鎭: 후에 개명하여 大友宗麟)22세의 젊은 영주(領主)로서 쟈비엘의 인격에 깊은 감명을 받고 선교활동을 허락하였으며, 30년 후에는 자기 스스로 세례를 받고 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일본에 상륙하여 약 2년 동안에 가고시마(鹿児島), 이찌기(市來), 히라도(平戶), 야마구치(山口), 후나이(府內) 등 각 지역에 기리시단 공동체를 세우고 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일본 선교를 위해서 중국의 힘이 필요함을 느끼고 155111월 중순에 포르투갈 상선을 타고 중국으로 출발하였으나 쇄국정책으로 중국 대륙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말라카(Malacca)를 경유하여 광동해협 산찬도(上川島)에서 중국 본토의 상륙을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인하여 객사하게 되었다. 1552123일에 중국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6세의 젊은 나이에 애석하게도 이국(異國) 땅에서 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선교의 열정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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