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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에 대한 시비-이신칭의와 연관하여-
   
▲ 정주채 목사(본사 발행인/ 향상교회 은퇴)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하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해서 그가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확신이 없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매우 안타까운 경우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경우다. 안타까운 까닭은 이 사람들은 평생토록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한 채 그 인생이 끝나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들은 주로 이단종파에 많이 있지만 기성교회에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유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값싼 은혜의 복음이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기만에 빠지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6:1-8 말씀의 도전

이런 면에서 히브리서 61-8절의 말씀은 우리 신자들 모두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다. 여기 보면 도의 초보에 머무르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도의 초보에 속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1b-2a)이다. 히브리서의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는 부분인데,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니까 신앙의 초보란 이런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 단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교훈의 터만 반복해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어떻게 완전한 데까지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본문은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

그런데 본문에는 우리 믿는 자들을 매우 당황하게 하는 심각한 말씀이 이어진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4-6)

이 말씀은 예정과 선택의 교리를 믿고 거기다 성도의 견인 교리까지 믿는 신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고 놀라운 말씀이다. 진리(복음)의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기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하면 성경의 뼈대가 되는 중요한 교리들을 알고 인정하고 믿을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오는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맛본 사람이 어찌 타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오직 은혜의 교리와는 또 어떤 관계가 있는가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즉 도의 초보에 속하는 교리들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 나아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사람이라 하더라도 믿음을 따라 행하는 삶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믿음의 진위를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곧 거짓되거나 온전치 못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맛만 보고 다닌 사람들이다. 어떤 때는 말씀을 통해 빛을 받는 깨달음을 얻고, 말씀에 감동하여 그 능력을 맛보기도 하고,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여 그 은사들을 맛보기도 한다. 나아가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며 내세의 능력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맛보기만 할뿐 거기에 자신을 던지지 않는다. 곧 그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그가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싣지 않으며 의탁하지 않는 것이다.

영어에서 신앙이란 뜻을 가진 낱말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faith. 이 말은 주로 신앙의 내용을 나타낸다. 곧 무엇을 믿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trust. 이 말은 신앙의 대상을 강조하는 말이다. 누구를 믿느냐는 것이다. 셋째는 conviction이다. 이 말은 신앙의 주체를 곧 누가 믿느냐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는 말이다. 자신이 알고 자신이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에는 이 세 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 믿음의 진정성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할 때 나타나고 확인된다.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6장 바로 앞에 있는 512,13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은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벌써 선생이 될 만도 한데 아직도 말씀의 초보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유는 의의 말씀을 경험치 못했기때문이다.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이 의로운 말씀이라는 것도 인정하고, 심지어 말씀의 능력을 맛보기까지 하면서도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며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의로운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경험은 순종함으로 하게 된다. 우리는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임을 알고 믿는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그 말씀을 경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그 말씀은 과연 의로운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그 말씀에 자신의 고백과 간증이 따라 붙는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의의 말씀으로 입증된(testified) 것이다.

성경 66권에는 수많은 말씀들이 있다. 이 말씀들 가운데서 경험한 말씀은 얼마나 되나? 알고 있는 말씀, 암송하는 말씀, 신학적으로 깊이 연구한 말씀이 많겠지만 경험한 말씀은 얼마나 되나? 경험한 말씀들이 없으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계속 초보에 머무르며 신앙의 어린아이로 살아간다. 누군가가 항상 가르쳐주고 먹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성숙되지 않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순종이 없는 믿음의 비극적인 결과

아주 심각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 첫째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 신령한 세계에서 그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는 경우 -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왜 참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빛을 주시고 성령의 역사에 참여케 하시며,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까지 맛보게 하시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다. 참된 믿음과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맛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맛만 보고 끝나기 때문이다.

필자가 언젠가 아내와 함께 어느 마트의 식품점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살 것이 없었으므로 입구 쪽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런데 식품점 중앙의 한 코너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니 와서 맛을 한 번 보라는 것이었다. 가서 맛을 보았는데 내가 어릴 때 즐겨 먹던 젓갈이었다. 나는 사고 싶었으나 아내가 반대해서 맛만 보고 그냥 돌아왔다.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맛보았다.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때론 가슴이 찡하는 감동도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맛만 보고 끝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살면서 어려움이 생기고 시련이 닥치면 그냥 넘어지고 만다. 낙심하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해버린다. 한 때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며 기뻐하고 열심을 내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원망하고 불신한다. 그러다가 과연 하나님이라는 분이 있기는 있나?’라며 불신에 빠진다. 이런 자들이 회개하고 돌이킨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경우도 있다. 7,8"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는 농사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팎에서 여러 가지 방법과 모양으로, 여러 가지 은혜를 풍성히 베푸신다. 비가 어느 밭에나 내림 같이 각 사람의 심령에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의 밭에는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가 자라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 밭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자란다. 어떤 사람의 밭에는 믿음이 자라고 은혜가 자라지만 어떤 사람의 밭에는 쓴 뿌리가 자란다. 그래서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괴롭힌다.

우리는 교회에서 가끔 이런 사람들을 발견한다. 교회 안에서 가시 노릇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에 불평불만, 원망과 비난, 완고함과 완악함,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교만함 등의 엉겅퀴들로 차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일반 신자들과 지도자들 사이에 차별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교회생활을 오래 해서 신앙지식도 많고 교회에 대해 아는 것도 많다. 그래서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교회를 더럽히고 괴롭힌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경계하고 경고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2:15) 이렇게 도의 초보, 곧 성경의 기본교리들을 알고 인정하고 믿고 그러면서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맛보는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순종의 삶으로 나가지 않으면 타락할 수도 있고, 또 도리어 교회를 해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복음의 피상적인 이해는 너무나 위험하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나 "오직 은혜"의 교리를 자기 좋을 대로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그런 값싼 은혜를 바탕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불안하고 위험한 일이다. 이단자들이 자기들 주장에 유리한 몇 가지 성경구절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잘못된 확신을 갖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런 잘못된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은 그 영혼을 패망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인지 모른다.

정통교리를 신봉하는 교회라고 해서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교리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닌데, 교리주의에 빠지게 되면 성경에서 나온 교리로 성경을 제한하는 잘못까지 저지르는 경우를 가끔 본다. 한 때 찬송가를 새로 개편하면서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하게 함"을 가지고 오랫동안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과격한 이들 중에는 "하게 함"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훼손하는 이단성이 있는 가사라며 반발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오직 은혜""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슬로건[교리]을 너무 단순화하거나 완전히 배타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면 역시 성경을 제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에서 "오직"이란 말을 행위를 완전히 배제하는 말로 이해한다면 행위를 강조하는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과 그 외에도 많은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23)

필자는 설교자들이 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아주 어설프게 설교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교리의 프레임에 갇혀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당시 아주 잘못된 신앙에 빠져 있었던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현재의 청중들이나 설교하고 있는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말씀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설교했다. 지금도 그런 설교자들이 있다. 과연 그런가?

본문 말씀의 일차 대상자는 사역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좇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던 자들이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들이었다. 구원의 확신뿐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장차 천국에서 영광과 존귀와 상급을 받을 것으로 믿고 기대하고 있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주님께로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판의 말씀을 듣는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믿음으로 받는다 하더라도, 거기다 심지어 선한 말씀의 능력을 맛본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자들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여러 가지 예를 드시며 거듭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7:24-27)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복음 중의 복음이지만, 이를 너무 쉽게 말하면 안 된다.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이 뒷받침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을 전할 때도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설명하는 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논리적 일관성만 생각하다가 성경 말씀의 깊은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전하여 혹시 자기도 속고 있을 수 있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할수 있도록(고후 13:5)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 복음은 평안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거짓된 안정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흔들어 넘어지게 만드는 기능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벧전 2:6-8) . 

 

정주채  juchai2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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