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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는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가?"구원의 확신에 대한 시비"를 읽고
   
▲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한국 교회에 이신칭의의 복음이 값싼 복음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분명하다. 개인은 성공, 교회는 성장만이 답이 되는 복음은 값싼 복음이다. 그런데 이신칭의의 복음을 바르게 적용하는 것이 행위의 문제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되는가? 오늘 필자의 관심 질문이다. 다르게 질문하면 이신칭의의 복음이 성화를 견인한다는 교리적 진리에서 행위는 어떤 종류의 행위를 말하는가?

문제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한 기사를 소개한다. 최근 코닷에서 정주채 목사는 이신칭의의 복음의 피상적 이해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지적하였다(아래 관련기사 참조). 오직 믿음과 은혜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본문을 주해하는 것이 아니라(exgesis) 주입한다고(eisgesis) 비판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마7:21-23절 해석에 있어서 이런 틀에 갇혀서 행위를 강조하지 못하는 설교자를 비판했다. 여기서 말하는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잘못된 지도자들로 얼버무리면서 현재의 청중과 관계없는 식으로 설교한다고 비판한다. 나아가서 바른 적용으로서 이 본문은 교회의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주신 말씀이고 합당한 열매가 없는 사역자들은 홍수에 무너지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고 분명히 제시한다.

필자는 글의 전체 논지가 말하려는 중심을 반대하지 않는다. 교리의 정통이라는 틀에 갇혀서 성경 본문이 말하려는 본질 즉 행함이 없음을 강조하는 논지를 흐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여기서 조금 논지를 발전시키고 싶다.

7:21-23절의 이해

필자가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마7:21-23절에서 왜 주여 주여 하는 자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권능을 행한다는 말은 마태의 문맥에서 병을 고치는 권능이다(10:1).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병자들을 고친 자들이 왜 불법인가? 병을 고치는 행위도 행위에 속한다. 문제는 불법이다(7:23). 그리고 불법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7:21). 따라서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권능을 가진 자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음에 대한 심판 선고가 불법을 행한 자들이란 말씀이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음을 말한다. 여기서 병을 고치는 권능도 행위에 해당한다. 예수님도 권능으로 병을 고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고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고치지 않았다. 왜 그런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구별된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구별된다. 그러면 나의 이 말을 듣지만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차이가 난다. 여기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관계는 무엇일까? 듣고 행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들었는데 행하지 않을까? 시장에서 약장사가 약을 파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지 않는다. 왜 안 살까?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듣고 행하지 않는 것에는 그 듣는 이야기에 신뢰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들은 이야기가 문제가 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을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신다. 주의 이름을 가지고 행위를 했는데 불법이다. 이것은 행위 하지 않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를 들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계시는가? 산상수훈(5-7)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이 틀림없다(5:2 가르쳐 가라사대, 7:28, 가르침에 놀라니, 29 그 가르치는 것이). 그런데 이 가르침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르침과 다르다.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가르치는 것은 천국의 헌법으로서 완성된 율법을 가르치신다(5:17). 이 율법은 황금율로 요약된다(7:12).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이다. 그렇다면 황금률은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병고침의 능력이 드러나는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제자들에게 병고치는 권능을 주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다(10:7-8).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10:8).

예수님이 권능을 주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이다. 공짜로 받은 은혜이기에 공짜로 권능을 행해라.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실체이다. 완성된 율법으로서 황금율은 이렇게 적용되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값없는 은혜를 받았으니 값없이 행하라.

이제 다시 마태복음7장으로 돌아간다. 질문은 왜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한 자들이 불법을 행한 자들이 되는가?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은 자들로 평가되는가? 완성된 율법, 황금율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값없이 얻은 은혜의 말씀과 삶 그리고 권능을 값을 받아가면서 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법을 행한 자들이 된다.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되었다면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아야 한다. 그 이름을 사용한 사람이 받아서는 안된다. 값없는 은혜의 복음을 가지고 사용한 자가 스스로 높아지고 영광을 취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행위가 바로 불법의 행위이다. 주의 은혜와 이신칭의 말씀을 듣지만 행하지 않은 자들이다.

이것은 사역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값없는 은혜를 가지고 값없이 베푸는 삶과 행위를 하는 것이 듣고 행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들은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은혜의 행위를 하지 않은 자들이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값없는 은혜를 강조한다. 그 은혜를 가진 참된 사람들은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값없는 은혜를 드러내는 행위를 한다.

게하시는 그 은혜의 행위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서 챙긴다. 이때 엘리사 선지자가 말한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때이냐? 엘리사 선지자는 게하시를 책망하면서 아합 왕을 겨냥한다. 왕의 권리로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을 책망한다. 왕의 자리를 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 권리로 백성들에게 포도원을 주어야 마땅할 판에 빼앗은 일이냐고 책망한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값없는 은혜를 은혜답게 표현하는 복음적 행위를 요청한다. 심방 한번 부탁하면 오백만원씩 내야 하는 교회 목사가 있는 모양이다. 값없는 은혜의 복음을 가진 목사가 얼마나 값싼 존재인지를 모르는 모양이다. 이런 목사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이런 목사들뿐이겠는가? 자신의 지위와 권리를 이용해서 성추행을 저지르는 목사들이 늘어난다. 값없는 은혜의 복음을 얼마나 추하게 값을 치루는지 모른다. 더러운 정욕에 복음을 팔아버리는 행위이다.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복음을 팔아버리는 목사들이 있다.

복음은 값없는 은혜이다. 왜 고신 교단은 수익 병원인 복음병원을 정리해야 하는가? 값없는 은혜의 복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약회사 리베이트로 복음이란 이름이 얼마나 이익의 대가에 파묻히는가? 빨리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수익을 목표로 하는 병원이 아니라 교회가 헌금을 해서 운영비를 넣어야 하는 병원으로 바꾸어야 한다.

글을 마치면서

이신칭의의 복음은 어떤 성화, 어떤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가? 마태복음7:23절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 듣고 행하지 않는 자들은 무엇을 행하지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로 글을 시작했다. 주님이 완성한 율법대로, 황금율대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이다. 김영란 법으로 세상도 자기의 수입에 만족하는 이때에, 거저 받은 은혜의 복음을 탐욕과 성공과 성장을 위한 행위만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행위든지 행위를 한다. 그런데 그 어떤 행위가 은혜를 반영하는 행위인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인가?

  

이세령  leesr6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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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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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령 기자 2016-10-04 16:41:08

    저는 정목사님의 글을 읽고, 마7:21-23절 해석에 보충적인 글을 적었습니다. 복음의 일관성은 행위가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를 담보하는 행위어야 함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신칭의가 성도의 성화를 견인한다는 말은 했습니다. 샬롬   삭제

    • 박창진 2016-10-04 13:29:13

      사실 마 7:21을 명사화하며 선행구원론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이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이 선행이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니깐요.
      로마가톨릭 교리서를 읽으면 그들도 구원이 은총이라고 합니다.
      그 은총의 내용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내포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했는데, 잘못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잘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게 말이 되는가요?   삭제

      • 박창진 2016-10-04 13:25:05

        옳은 내용과 옳지 않은 내용이 함께 있는데, 옳은 것으로 인해 옳지 않은 게 옳지 않다고 인지되지 않거나 인지하더라도 그냥 넘기는 현실. 이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삭제

        • 박창진 2016-10-04 13:24:32

          이 주경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문제는 이 주경과 성도의 견인이 동시에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견디게 되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말입니다.
          거듭났어도 거저주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데요.   삭제

          • 정주채 2016-10-04 07:34:33

            이 목사님이 나의 글을 발전시켜주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가 포커스를 맞춘 본문은 마 7장의 말씀이 아니라 히브리서 6장이었습니다.
            이 본문에 대해서도 확장된 논의가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누구시든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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