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서 목사(큰사랑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조지 바나(George Barna)솥 안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라는 비유가 한때 사람들의 글에 자주 인용되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빗댄 비유였다. 지금 이 시대가 그런 것 같다. 금년 예장 통합 총회가 벌인 이단 해제와 취소라는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가 그 상징적인 예다. 대한민국은 지금 저출산·고령화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그 우산 아래 있는 교회 역시 현재 중2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는 시점이 되면 그 충격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이런 현실과 그 대안에 대해 여러 차례 글을 썼다. 이 글 역시 동일한 맥락이다. 다소 과장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쯤 되새겨 봄도 필요하다 생각된다.

 

.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우선 첫 질문이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얼마나 될까? 통계청의 종교인구통계는 10년마다 발표된다. 2015년 통계가 아직 발표되지 않아 2005년 자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2005년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860만이다. 과연 이 통계를 신뢰할 수 있을까? 개교회의 재적과 실제 출석상황을 엄밀하게 살펴볼 때 거품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2005년 기독교 인구에서 거품 약 100만과 이단 150만 정도를 뺀 나머지 즉, 600만 정도가 2005년 기독교 인구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2016년도에도 10년 전 통계인 600만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세속화와 주일학교를 포함한 젊은 세대의 감소, 그리고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10년 사이에 약 500만 정도로 감소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할 것이 있다. 현재 한국 기독교인 500만 중 거듭남의 체험이 분명하고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는 수는 얼마나 될까? 중생 체험이 확실한 성도를 30% 정도로 볼 때, 실제 한국교회의 핵심이 되는 성도는 약 150만이다. 결국 한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 150만 성도다. 이들이 한국교회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2015년 대한민국 전체 인구 5,080만과 비교해볼 때 150만은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다. 결국 한국교회는 97% vs. 3%의 영적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 통계를 주목하는 이유는 현재 밀려오는 동성애나 이슬람과 같은 인본주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교회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세계와 비교해 볼 때, 수적으로나 힘으로나 기독교는 미약한 존재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다윗 같은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기에 마음이 무겁다. 강력한 교회의 갱신과 회복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차별금지법은 곧 법제화될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당황스런 지각판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 한국교회의 침체가 신학의 부재에 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다양한 측면의 신학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혹자는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와 타락의 원인을 칭의관의 부재로 보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논쟁을 하는 것을 본다. 과연 신학의 부재가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의 주된 원인일까? 필자 역시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바른 신학이 중요함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일탈, 특히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일탈이 바른 지식이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일까? 필자는 너무 사변적 신학의 유희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은 많은 이들이 무엇이 정답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균형을 찾아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바른 신학의 부재도 문제이지만, 세속화의 강력한 힘을 이겨낼 경건의 능력이 부족해서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경우, 그가 몰라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음에도 세상을 향한 탐욕을 이겨낼 경건의 힘이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같은 소돔과 고모라로 서서히 옮겨갔고(13:10-13), 결국 패륜과 패가망신으로 끝났다. 지금 이 시대는 부족한 것을 모르는 풍요의 시대다. 교회사가 교훈해주듯 풍요는 언제나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 ‘이건 아닌데읊조리면서도 중독자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의 상실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데 어떻게 경건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의 원인은 중생 체험이 없는 종교인들이 적지 않음에 있다고 본다. 존 번연의 걸작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크리스천이 갈보리 언덕에서 체험한 중생의 경험이 없이 목회의 길로 들어선 속물들이 적지 않다. 또한 중생체험 없는 사람들이 신학을 하고 강단에 서 있음도 한몫을 하고 있다. 천로역정 1부 마지막은 무지라는 인물을 평하면서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나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 멸망의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 문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중생의 영악한 이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미혹해야 하는지 동물적 감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그들의 미혹에 빠지고, 불신 세상에서도 볼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중생 체험이 없는 이들로 구성된 집단에게서 어떻게 거룩을 바라며, 그런 곳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 한국교회가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는 적게는 인구의 1%50만 명, 많게는 인구의 3%150만의 핵심 성도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 숫자로 밀려오는 거대한 영적 쓰나미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목회자들의 영적 대각성이 필요하다. 성공과 번영신학에 기초한 목회 철학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세속적 유익을 꿈꾸며 제왕적 목자를 지향했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혹자는 목사는 양을 모는 개요,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했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자신 없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목자로 모실 때 교회에 갱신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둘째로 교회는 교인들의 중생에 관심을 두고 보살펴야 한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된다는 것은 교회에 가짜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도 보듯이, 청교도들은 신자의 중생을 중시하고 중생자의 특징이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때로 유사 그리스도인이 더 진짜처럼 행할 수 있음에 유의하며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섬겼다. 거듭나지 않은 자가 가득한 교회는 배교하는 교회가 될 것이며, 앞으로 참된 교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치게 될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다가올 사악한 영적 쓰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어느 진영에 서 있느냐의 차이일 뿐, 정치인들의 정책은 80%가 같다고 정치인들 스스로가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라면 교회의 입장에 서 주겠지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 단적인 예로 동성애 관련 법안의 경우 양측 모두 입법 시도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모두가 때만 노리고 있다. 교회가 강하게 반대하고, 국민들 역시 아직은 동성애에 대한 반감이 있어 잠시 멈칫하고 있을 뿐, 동성애에 호의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성인이 될 때쯤이면 쉽게 통과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유럽과 미국교회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향후 벌어질 기독교의 역차별에 대비해서 기독교 법조인들과 협력하여 구체적인 법안과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하여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향후 우리의 후손들은 크나 큰 고통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오래전 대법원장을 역임한 어떤 장로님이 필자에게 목사님, 무슬림이 국민의 2-3%만 되도 한국교회는 망합니다. 왜 목사님들이 이슬람을 강조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한국교회를 지키고 있는 핵심 성도는 인구의 1-3%50-150만의 성도다. 현재 한국 무슬림의 인구를 20-40만으로 볼 때, 다산(多産)을 지향하는 저들의 포교 특성상 100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챌 것이다. 무슬림 테러리스트 출신의 기독교 목사인 타스 선교사가 한국 순교자의 소리에서 전한 말씀 중 중요한 내용이 있다. “이슬람은 굉장히 똑똑합니다. 정책적으로 자신들이 목표하는 나라의 시스템을 연구해 이슬람 인구를 늘립니다. 한국교회가 정부를 격려하여 이슬람이 가진 그들의 시스템을 한국에서 갖지 않도록 저지해야 합니다.” 과연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국교회는 지금 대각성의 시점에 있다. 하나님 앞에 모두가 회개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울어야 하고, 영적으로 깨어 복음과 진리를 사수하는 바른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만일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데도 여전히 솥 안의 개구리처럼 안주하고 있다면 그 수명이 다하는 날은 순식간에 임할 것이다. 그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