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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맛만 보는 사람들(히브리서 6:4-8절을 중심으로)"구원의 확신에 대한 시비"를 읽고
   
▲ 홍성철 목사(코닷연구위원, 대전주는교회 담임)

한국교회 일부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맛만 보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여긴다. 이런 자세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자신도 불행하게 되는 위험천만한 행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를 건강하게 바로 세우려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하고 예수를 믿도록 강단에서 강론해야 한다. 본고는 정주채 목사님의 구원의 확신에 대해 히브리서 6:4-8절의 해석을 확대하여 주장을 이어가고자 한다.

히브리서 6:4-6절은 신약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히브리서 6:4-5절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참예자가 된 사람과 6:6절의 이런 사람이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구절 사이에 하모니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질문은 다음과 같다: 6:4-5절에서 구원을 거의 경험한 사람이 6: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타락하여 회개할 수 없는가? 6:4-5절이 구원을 말하고, 6:6절은 구원의 상실을 묘사하는가? 6:6절은 이런 사람들은 타락하고, 다시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하는가? 6:6절은 타락한 자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는가?(아니면 회복은 가능한가?) 마지막으로 질문은 이 구절에서 저자가 경고하는 위험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구절은 4가지 다른 견해로 해석된다: 1) 이 구절에서 이 사람들은 참된 신자인데,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2) 이 사람들은 참된 신자인데 배교하면 상급을 상실할 수 있다; 3) 이 구절에서 이 사람들은 가설적 견해로서 성장과 성숙을 촉구하는 가설적 경고다; 4) 이 신자는 거짓 신자다. 이 사람은 배교하여 영원히 정죄를 받는다.

1. 네 가지 견해:

1) 알미니안적 견해(The Arminian view):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을 실제로 잃은 신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참으로 믿는다면 즉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 개혁파의 성도의 견인 교리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이 그를 영원히 구원받은 상태로 지킬 것이라는 견해다. 왜냐하면 구원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개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이 실제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 사이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람 영혼을 영적 사망에서 영생으로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중생하게 하는 능력을 제외하고도 결정을 믿는다는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신뢰한다고 결정할 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그 사람을 사망에서 영생으로 일으키는가?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었는가?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돌밭에 뿌린 씨도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도 잠깐 동안은 좋아 보인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13:20-23). 다시 말해서 개혁자들은 이것들을 거짓 믿음이라고 부른다. 거짓 신자는 잠깐 동안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에 핍박이 오고 환란이 오면 참된 상태가 폭로되고 멀리 떠나간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데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심각한 죄는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알미미안주의자들은 히브리서 6장은 구원을 상실한 신자를 묘사한다고 본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많은 성경 구절에서 참된 신자는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6:39-40; 10:27-30; 8:28-39). 둘째로 참된 신자가 구원을 상실한다면 그러면 이 본문은 그들의 구원을 다시 회복하기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견해(Non-lordship salvation view)

이 견해에 따르면 참된 신자도 믿음을 부인할 수 있다는 사고다. 그러나 구원받은 채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은 제인 하지(Zane Hodges, Bible Knowledge Commentary, Hebrews [Victor Books])와 은혜 복음주의 협회(the Grace Evangelical Society) 사람들과 켄달(R. T. Kendall)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원 받은 믿음을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사건을 지적으로 동의해도 구원받은 믿음이라고 여겨준다. 다시 말해서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도 영원히 그 구원이 안전하다는 견해다. 그가 후에 무신론자가 될 수 있고, 혹은 그의 인생에서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믿었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다는 견해다.

이 견해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야고보와 요한일서에서도 이 견해를 반박한다. 성경은 분명히 참된 신자는 죄를 슬퍼한다. 그러나 회복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믿는다고 주장하나 참으로 구원 받지 않았을 수 있다(발람, 가룟유다, 시몬 말구스; 고전 15:2; 고후 6:1; 13:5; 1:16).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을 박고 타락한 자는 회개하여 회복될 수 없고 상급을 상실하는 신자가 아니다.

3) 가설적 견해(The hypothetical view):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은 가설적 경고라고 말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일부 독자들은 결코 정죄와 저주를 받을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냥 가설적 경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들이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여 성숙과 성장으로 나아가도록 경고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가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데 이런 글을 경고로 했을 리는 없다.

4) 거짓 신자 견해:

이 사람들은 말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나 참된 신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고 여기나, 그러나 진정으로 구원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견해는 히브리서 6:4-5절의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인데 겉으로는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기 찾아오면 그들의 진정한 정체가 드러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버리고 유대주의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과 같은 편에 선다.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한다. 그들은 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크리스천 믿음이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저자는 이런 배교자들에 대해 이런 사람들은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미 마음에 노출된 진리에 대해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 그들이 잠깐 동안 구원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결코 구원을 받은 적이 아니었다.

이 견해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로 6:4-5절의 용어들은 거짓 신자들이 아니라, 진정한 신자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짓신자를 묘사하는 것이라면 왜 저자는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은 것 같은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대한 문제다. 둘째로, 만일 그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러면 그 무엇이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처음에 결코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들이 회개하여 회복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2. 복음의 맛만 본 사람들(6:4-5)

어떤 견해가 히브리서 문맥과 상황에 가장 잘 맞는지 고려해야 한다. 히브리서는 박해 중에 유대주의로 돌아가려는 유대인 신자 그룹에게 쓴 편지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주의에서 유력한 인물인 여호수아, 모세보다 우월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논증했다.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옛 언약인 유대주의로 복귀하는 것은 배교다.

히브리서 3-4장에서 저자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악하고 불신의 마음 때문에 타락하여 배교하지 않도록 광야에서 구약에서 완악한 유대인을 부정적 예를 사용하여 경고한다(3:7-12, 15; 4:3, 5, 7). 저자는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경고한다. 따라서 저자는 그들이 처음에 잡았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라고 도전한다(3:14).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세례의 모형인 홍해를 건넜고,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그리스도의 모형인 바위에서 터진 물을 마셨다. 구약 이스라엘도 한번 구름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 기적과 만나, 광야에서 보호받은 여러 가지 영적 경험과 유익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주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복음을 선포했지만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대부분 광야에서 죽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광야에서 홍해를 가르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만나의 은사를 경험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대조하여 히브리서 청중 가운데 타락하여 유대주의로 돌아가려고 하는 진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을 대상으로 6:4-5절에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이라고 비교하여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6장에서 이 사람들은 구원을 실제로 받지 못하고 맛만 본 사람들이다.

1) 그들은 한번 비춤을 받았다.

히브리서 6:4-6절에서는 구원에 관한 용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칭의, 성화, 새로운 출생, 중생 거듭남, 거룩하게 흠이 없게 만드는 일이란 구원에 관련된 용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냥 어떤 사람들은 한번 빛을 비춤을 받았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선한 말씀의 맛만 보았다로 표현한다.

'한번'(하팍스, ἅπαξ)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이해했다. 그러나 구원은 받지 못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갈릴리 사람들은 이사야 9:1-2절에서처럼 그들은 어둠에서 복음의 빛을 비춤을 받았다. 이 사람들이 하늘의 빛을 비춤을 한번 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경험했다가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했다는 뜻이다. 빛의 비춤을 받았다는 구약 셉투아진트에서 지식과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빛을 비춤을 받는다는 뜻이다. 구약의 여러 구절에서 빛을 비춤을 받는다는 뜻은 지식적으로 어떤 것을 안다는 뜻이다. 최소한 이 빛을 비춤을 받는다는 것은 마음에 어떤 정보를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주어진 복음의 정보에 반응할 필요는 없는 것을 말한다.

어구 빛을 비춤을 받았다는 표현을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 사람들이 위대한 빛을 보았다고 표현된다. 이방인의 갈릴리 지역에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위대한 빛을 보았다. 그들은 빛을 보았다. 이 빛을 보았다는 것이 갈릴리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빛을 보았고,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을 보았다. 빛을 비춤을 받았다는 말은 곧 그들이 마치 컴퓨터 안에 어떤 정보의 지식을 집어넣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9절에서도 예수님은 세상에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빛을 비추었다는 것은 머리에 성경적 진리의 정보가 들어갔다. 그것을 비추었다고 표현한다.

히브리서에서 어떤 유대인 신자들은 한번 빛을 비춤을 받았고, 복음에 노출되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구원을 받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맛보았다. 아마도 6:4절의 하늘의 은사를 구원을 언급하는데 그것을 맛만 보았다. 성령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축복과 히브리서 교인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를 맛만 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만 보았다.

히브리서 일부 유대 신자들은 하늘의 은사에 경축했거나 그 안에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그것을 맛만 보았다고 언급된다.

동사 맛보다’(규오마이, γεομαι)는 개념은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맛보다는 일시적으로 맛본 맛을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일시적 상태를 묘사한다. 예를 들자면 동사 맛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혔을 때 신포도주를 주었으나 맛보고 마시지 않았다. 따라서 맛보다는 그 맛을 보고 그 맛이 어떤 맛인지 알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마시지 않고 그것을 마실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약간 맛만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맛을 보고 마시기로 행동하고 헌신하는 상태가 구원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도 맛만 보았다. 그들은 선한 주의 말씀 안에 살았거나 그것을 지켰다고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오는 시대에 능력에 대해서도 기대했거나 소망했다고 언급되지 않고 맛만 보았다고 언급된다. 어떤 음식을 맛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삼키고 먹고 마셔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맛만 보았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내 살이고 내 피니 마시라고 했다. 요한복음에서 먹고 마시고 일은 주님과 인격적 관계와 헌신하는 일을 의미한다. 민수기 13장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12정탐꾼을 파송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의 포도송이를 어깨에 이고 돌아왔다. 그들은 그 땅에 맛만 보았다. 그리고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헌신하지 않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그 땅의 맛만 보았다. 맛만 보는 것은 먹는 것이 아니다. 음식 맛만 보는 것은 그 음식을 마셔서 자신의 영양 상태로 먹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3) 그들은 성령의 참예하는 자들이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참예하는 자였다(카이 네토쿠스 게내센타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καμετχους γενηθντας πνεματος γου).

우리는 반드시 이 참예하다는 용어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참예자’(메타코스, μτοχος)는 흥미로운 용어다. 참예자는 성령을 소유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와 관련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이 역사할 때 그 주변에 있었다는 말이다. 참예했다(μετχους)는 헬라어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한번 과거에 한번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현장에 한번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성령이 일으키는 기적의 역사와 현장에 과거에 한번 참여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현장에 없었다. 참예자란 말은 누가복음 57절에서 베드로가 새벽에 주님 말씀대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그 친구들이 고기를 끌어올리는데 참예했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성령에 참예했다는 말은 성령 하나님이 그 신자 속에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역사할 때 그 주변에 어떤 종교 활동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 하나님이 그들을 속에 내주하여 순종하게 하는 역사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구원의 선행단계 과정에만 있다가 핍박이 오니 믿음을 포기했다는 안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습관적으로 나아와서 은혜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그들 속에 주님이 내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8:9절에서 만일 성령이 가지지 못하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6장의 이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는 동안에 교회 주변에 있었지, 성령 하나님이 중생한 삶 속에 임재하고 내주해 계시지 않았다. 성경 어디에서도 성령 하나님의 참예자가 되라는 말은 없다. 성령 하나님이 중생한 신자 속에 내주해 계신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주변에 참예자로 있는 것하고 성령 하나님이 그들 속에 내주해 계셔서 활동하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에서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구원의 선행단계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구원의 선행단계 현장에 있었고, 한 단계 한 단계 믿음의 단계로 가는 과정 가운데 있었다. 이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공간에 함께 참여했다. 히브리서 6장에 따르면 이 사람들도 교회 왔고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당시 그 주변에 있었다. 의심 없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이 되는 구원의 선행과정 중에 있었는데, 도중에 포기하고 타락하여 배교하게 되었다.

4)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맛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레마의 말씀을 맛보았다(카이 카론 규사메노스 데우 래마, κακαλν γευσαμνους θεοῦ ῥῆμα ). 어떻게 맛을 보았는가? 그들은 선포된 말씀에 일시적으로 감동되었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선포된 말씀에 헌신하거나 주님에게 자신의 인생의 삶을 던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바위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선한 말씀을 듣고 감동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신을 위해 죽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인생과 시간과 정성을 전폭적으로 바치지 않았다. 그것을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말씀에 감동되었다. 일시적으로 마음에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뿌리가 없었다. 그 씨에 뿌리가 없었다는 것은 일시적인 감동이었지 회심하거나 중생하지 않았다.

선한 말씀에 맛을 보았으나 그들은 히브리서 6:4-6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말로는 고백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말로만 고백하고 자신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희생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에게 전폭적으로 맡기고 헌신하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라고 권면한다(고후 13:5).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라는 것인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시험해보라는 말이 무엇인가? 이것은 너희 자신 안을 보라는 말이 아니다. 너희 속에 누가 계신가? 과연 예수님이 계신가? 당신 속에 예수님이 계신 증거가 무엇인지 스스로 테스트해보라는 말씀이다.

5) 그들은 오는 시대의 능력을 맛보았다.

오는 시대의 능력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의 기적의 파워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수행되는 능력을 보았다. 그들은 나라를 맛보았다. 그들은 사도들이 행하던 사인과 기적을 보았다. 이 사람들은 빛을 비춤을 받았고, 구원의 은사를 맛보았고, 성령의 역사를 그 주변에서 보았고,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맛보았고, 기적을 보았다. 그런데 만일 타락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다시 회개하여 회복될 수 없다.

3. 타락한 자들은 새롭게 될 수 없다(6:6)

그런데 그들이 타락하여 멀리하면 회개하고 새롭게 되기가 가능하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과연 이 사람들은 과연 크리스천으로서 영적인 경험을 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인가?

1) 그들이 영적인 경험을 했어도 그들이 실제로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7:21-23). 이런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 하는 종교적인 일들을 많이 행할 것이다. 신약시대에 바리새인들도 많은 종교적 의식들을 많이 행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도 힘을 다해 수고하여 전도했다(23:15)

감동 있게 기도도 했다(23:14).

많은 종교적 헌신을 했다(23:16)

엄격하게 십일조도 드렸다(23:23)

종교적 전통을 선호했다(23:29-31)

규칙적으로 금식했다(18:12)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23:15)

2) 그러나 인간 관점에서 볼 때 히브리서 6:4-5절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크리스천이지 의심스럽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운명을 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보면 크리스천의 모습이 있다. 우리는 히브리서 6:4-5절이 소위 자신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데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데마는 배교하여 바울을 예수님을 떠났다(딤후 4:10).

3) 만일 타락하고 주님을 떠나면 회개하고 새롭게 될 가능성이 없다(6:6). 그들이 이 사람들은 헌신이 약한 사람들이며 하늘의 상급을 잃을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고 말만 고백하는 자들이다.

히브리서 6:1-2절의 문맥에서 볼 때 저자는 유대주의로 돌아갈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경고하는 구절이다. 유대주의로 돌아가는 일은 예수님을 버리는 일이 되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된다.

4) 만일 그들이 떨어지면.

떠나가고 있는 것떨어지면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떨어지면 실제로 예수님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차이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다.

(1) 만일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구원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만일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전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2)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에서 떠나면 왜 그가 회개할 수 없고 하지 않은지를 생각하라. 회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다. 만일 그들이 외관상 영적 경험을 맛보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사실 위험에 처해 있다. 만일 하나님을 떠나면 그들은 회개하거나 새롭게 되기가 가능하지 않다.

4. 타락한 자들의 심각한 결과(6:7-8).

1) 비가 내리는 땅은 결실을 맺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땅이 비를 받아들일 때 결실과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그 땅의 기능과 존재 이유를 다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을 적용시켜 말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 그러면 그 축복의 열매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 속에 성장한 열매를 보길 원한다. 특별히 성숙하게 자라는 열매를 보길 바란다.

2) 그러나 만일 마음속에서부터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너희는 거절당한다. 만일 땅이 비가 내려 축복을 받았는데 열매가 없다면 농부가 엉겅퀴와 가시를 불태워도 농부를 비난할 수 없다. 따라서 신자는 타락하지 않도록 영적 성장과 열매를 맺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예수 안에 산다(15:5). 그래서 타락할 위험이 없는 것이다.

5. 우리가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1)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열매로 전폭적으로 자신을 헌신해야 구원의 확신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개인적 교제를 가지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동시에 거부하는 것이다.

2) 이 구절은 구원 확신은 성화에 열심인 사람에 의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자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까운 문맥인 히브리서 6:9-12절에서 분명히 성화와 인내를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은 어떤 환란과 박해 중에서도 인내하고 성화를 이루는 점에서 확신을 말할 수 있다.

3) 구원의 확신은 진리를 맛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 받고 죽은 주 예수님에게 헌신과 충성과 믿음이다. 하나님 축복이 비춰졌는데도 타락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회개는 가능하지 않다. 히브리서 6:4-8절은 배교의 가능성을 고려한다.

4)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 자주 순종하지 않은 자는 위험한 사람이다. 배교가 자신이 스스로 회심했다고 여긴 자에게 경고하는 것은 믿음에서 떨어져 멀리 갈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진정으로 회심되지 않은 가능성을 언급한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종교적 열정(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을 보지 않아도, 구원받았는지 조사하고 점검해보아야 한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실상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행동하지 않은 것은 거짓 믿음일 가능성이 높다(1:16).

5) 그리스도를 말로만 고백하고, 삶에 열매,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행동이 없다면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축복의 은혜의 비를 계속 내린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열매 순종의 열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행위가 있는가?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열매의 리스트와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라(5:19-23). 내 삶에 가장 두르러진 열매는 무엇인가? 나는 점진적으로 육체의 행위를 부인하고 성령의 열매로 성장하고 있는가?

6) 자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다. 회개는 회심 때에 한번 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변화나 행동의 변화가 아니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진짜 회개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신자가 갖는 진정한 회개다. 과거에 불신자들은 복음주의자들을 회개하는 자로 불렀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매일 가까이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것들을 바로 보고 돌이킬 것이다. 회개는 합당한 반응이다.

7) 자신의 마음이 강팍한데도, 히브리서 6:4-8절의 경고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증거다. 저자는 이런 강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마음이 점점 강팍해가는 사람들에게 충격과 경고를 주어서 그들이 너무 늦기 전에 영적으로 깨어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하는 신자에게 주는 경고가 아니다. 이 구절은 그들이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을 형벌로 빠져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 신자는 그들의 옛 생활 방식으로 빠져가지 않는다.

8) 참 신자는 믿음으로 순종으로 인내한다. 우리는 히브리서 10:36절에서 다시 강조한 인내의 필요성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가 멸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10:39). 다시 말해서 핍박과 환란 중에서도 구세주로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의 유일한 방법은 믿음과 순종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9)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예수를 포기하고 악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위험하여 영적으로 심각한 것이다. 만일 당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죄를 반대하고 매일 싸우면 이 경고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라. 주님과 함께 계속 거닐고, 그러면 하나님은 하늘 왕국에 안전하게 데려갈 것이다(딤후 4:18).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진정한 구원확신에 이르지 못하고 복음을 맛만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 은혜로 복음을 경험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강단에서 설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정직하게 진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지혜를 구하라고 공동체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홍성철  bennyhong3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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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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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데반황 2016-10-07 15:02:55

    귀한 글입니다. 하지만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당시 어떤 의미인지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전함'을 부인하고 인간의 행위를 넣어서 구원 얻으려는 시도입니다. 즉 갈라디아서의 다른 복음이 유대교로 돌아가는 배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참된 믿음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신령한 열매를 맺게될 것입니다. ^^   삭제

    • 정주채 2016-10-06 10:40:48

      홍목사님 감사합니다. 저의 글을 이세령 목사님과 함께 확대해주시고 깊이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글을 통해 저도 히브리서 6장 1-6절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글과 이세령 목사의 글, 그리고 홍목사님의 이 글을 다 읽으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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