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루터와 개혁자들의 캐치프레이즈인 오직 믿음으로는 성경적이 아니다?

[들어가는 말]

▲ Rev/Dr. Paul B. Jang(미주총신대학교 교수)

어떤 사람들은 개혁자들의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오직 믿음”(Sola Fide)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한다. 루터나 칼빈이 믿음”(fide) 앞에 오직”(sola)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면서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로마서를 잘 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는 성경적이 아니고 믿음으로가 성경적이기 때문에, 개혁자들이 성경을 잘 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아마도 칭의나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가능하다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의 길(room)을 열어놓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인간이 믿음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행위로 이는 인본주의적 발상으로 가톨릭주의(Catholicism)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깊이 드려다 보면, 심지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고 했고(3:28),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까지 했다(2:16). 그리고 아울러 바울은 믿음을 좇아 행한다는 말씀으로서, 행함을 논하려면 반드시 믿음을 좇아 하는 행위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고후 5:7). “오직이라는 수식어는 믿음의 행함을 무시하는 뜻이 아니라 그가 항상 강조하고 있는 표현으로 인간의 행위로의 구원에 대비해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강조 용법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이러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문구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3: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는 구절에서 라는 문구인데,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원문은 Nuni; de; cwri;" novmou dikaiosuvnh qeou' pefanevrwtai marturoumevnh uJpo; tou' novmou kai; tw'n profhtw'n으로 영역을 비롯하여 한역에서도 번역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영어로 부정관사인 “a”을 붙여서 “a righteousness of God”(ASV, NJV)이라고 번역했고, 한역에서는 하나님의 한 의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인간이 그 본질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의어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성경들에서는 정관사 “the”를 사용하여 “the righteousness of God”이라고 번역하고(KJV, NASV, NRSV), 한역에서는 하나님의 의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 제한시키는, 하나님의 의외에 다른 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상 헬라어 원문에는 부정관사나 정관사가 없고 단지 하나님의 의dikaiosuvnh qeou'로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헬라어 기록으로 볼 때에, 성경 번역들 중에 대부분의 번역들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오역된 역본들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문제는 성경의 문자에 매어 신학적으로 전체적인 성경원리를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문자나 문장까지도 문맥적 의미(contextual meaning)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 문법적 해석의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태도라는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의 원인”(ga;r, by, for)은 전적으로 은혜”(cavritiv, grace)이며, 구원의 방편인 통로”(dia;, through)가 곧 믿음”(pivstew", fide, faith)이라고 말한다(2:8). “행위”(e[rgon, works)는 당연한 믿음의 결과로 의로운 행위는 의로운 믿음을 증명해준다(2:21~22). 그러나 아날로그 방식으로 말하는 경우에는 행함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로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 사람, 즉 불신자들의 행위는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것 같다 하더라도, 이는 일반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의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이것은 믿음의 의에는 이르지 못하는 행위로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성경진리를 믿어야 한다.

 

[의인의 행위와 악인의 행위에 대한 비유]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구절 중에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표현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19:16~19)라는 구절로 이 구절의 뜻은 (1) 나무의 종류와 열매의 종류로부터의 유추하고, (2) 열매의 유무의 문제로부터 유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비유의 뜻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듯이,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의 행위에서 믿음의 의로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칭의를 얻은 의인에게서만 의로운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뜻이며, 만일 사람이 믿음으로 의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을 떠난 행위로 그 열매가 나타난다면 이는 틀림없이 유사의인(pseudo-righteous man)으로 스스로 칭의를 받았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처음에 받은 칭의가 포도나무와 같이 참 칭의라면, 반드시 포도나무 열매와 같이 참 의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포도나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포도나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음에 얻은 칭의가 참 칭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포도나무와는 전혀 종류가 다른 가시나무이기 때문에 포도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성서적, 신학적인 원리적로 칭의의 선언에 대한 비유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나무가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나무가 병들거나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물론 연약한 나무라도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그 나무가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칭의의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2:22). 물론 이것은 피상적으로 칭의를 받은 것 같지만 실제로 칭의의 능력이 없어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경우에 참 칭의가 아니라 유사-칭의”(Pseudo-justification)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로부터 유추한다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게 된 이유에는 특별하신 주님의 판단이 계셨다. 먼저 무화과나무에 대한 주님의 요구가 있었다. 그 근접한 동기는 주님의 시장하심이었다. 그러나 때가 아직 아니라 무화과 열매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요구는 때를 가리지 않는다. 물론 당시 무화과나무는 여름 과실을 맺어야 할 시기로 열매를 맺지 못했거나 맺었던 열매가 부실하여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주님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무화과나무가 최소한의 무화과 열매도 맺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단지 몇 개만이라도 맺었더라면 주님의 시장하신 최소한의 요구에 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덜 익은 여름 무화과 열매라도 맺었으면 문제는 달랐을 것이다. 문제는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칭의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의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했다면, 이는 틀림없이 칭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참 칭의를 받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참 칭의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적은 열매라도 맺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열매를 양적으로 계산해서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면, 그 양을 얼마나 많이 채워야 되며,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이 행함과 협조해서 구원을 성취한다는 신인협동설(Divine-human Synergism)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구원의 원인은 인간의 행위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이다.

이 무화과나무는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며, 오늘 날에는 바리새 적 유대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예언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대를 상징한 무화과나무는 접근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는 응했으나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시장기를 해결해 줄, 즉 칭의를 증명해줄 의의 열매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저주를 받았다. 여기서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그 나무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의의 열매가 하나도 없다면 역시 야고보가 말한 대로 죽은 믿음이다. 믿음(칭의)이 죽었기 때문에 행함(열매)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무화과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외식하는 유대 파 바리새인을 비유한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택한 백성이지만, 내면적 유대인, 즉 참 이스라엘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 무화과나무와 같은 참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칭의와 의의 열매]

만일 참 칭의를 얻은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이것은 의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했다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의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받은 바 칭의에 문제가 있는 말이 된다. 참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칭의의 과정(구원의 서정)을 따라 의의 열매를 맺어가게 되어 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느냐라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 같은 의의 열매의 다수에 의해서 칭의의 성화가 완성되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것은 난센스로 성경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논리이다. 칭의로부터의 성화는 열매의 다수에 관계없이 우리가 죽는 순간 바로 완성되는 것이다. 심지어 의의 열매를 맺을 사이도 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강도의 경우를 보면, 역시 참 칭의라면 그 열매의 분량에 관계없이 죽는 순간 성화가 된다는 것이 칭의의 원리이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칭의를 얻은 신자들은 죽는 순간 영적 성화가 이뤄지며, 영육이 부활하는 순간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같은 참 칭의를 받은 사람들 간에 의의 열매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신앙인격의 성장을 의미하며, 이런 사람들은 주님과 사람들에게까지 칭찬을 받게 되며, 하나님의 뜻이면 이러한 영광 외에 지상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이다(12:3; 5:10~12; 6:22~23, 35; 22:12; 딤후 4:8, etc.). 결론 적으로 칭의는 의로운 행위의 동인이 되며 의로운 행위로 그 칭의가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의로운 행위와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분리해서 설명할 수는 있으되 결국에 가서는 참 칭의의 본질로 귀결된다는 진리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날로그 방식으로의 분리해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디지털 방식으로 다시 연결 통합시켜서 반드시 칭의의 본질이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새관점 학파의 결정적인 실수가 바로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믿음을 통하여 단번에 주신 칭의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행위여하에 따라 취소되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칭의의 본질을 망각한 처사이다.

만약에 참 칭의를 얻은 의인이 선행으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징계를 받아 무서운 고통 중에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도록 주의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5~13).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바울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처음에는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켜 어떤 경우에는 믿음을 강조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고 하며(3:31) 믿음과 행함을 하나로 묶어 놓고 있다. 그의 서신의 체계, 특히 로마서에서 전반부(1~11)까지는 특히 칭의의 교리를, 후반부(12~16)에서는 크리스천의 윤리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은혜의 믿음과 율법의 행함의 신비로운 연합이다. 야고보도 이와 같은 신비로운 연합체계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2:21~22). “오직 믿음이란 행위를 분리시켜 설명하는 과정에서 율법과 대조시켜 구원이란 믿음을 통하여 받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차원에서 강조한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2:8).

물론 문자적, 문법적으로는 오직 믿음으로믿음으로의 의미가 수식어 오직에 의해서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이 말한 용어(오직)에 대한 바울의 사용법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이나 다른 어떤 이론이라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할 때에 심각한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말하자면 세대주의에서와 같이 성경의 모든 숫자들을 문자적인 (conventional/mathematical number)로만 이해할 경우에 성경이 틀린 것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와 같은 수사학적 (rhetorical number)와 같은 시적, 문학적 표현 같은 것 말이다.

이론을 전개할 때에 원의(original meaning)에 대한 수사적 표현을 무시하고 문자에만 매달리게 되면 펀 플레이(pun play/말장난)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특히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문자와 문법적인 이해, 둘째로, 역사적인 이해, 셋째로, 신학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그러므로 문장, 특히 문자에만 집착하다 보면 성경을 잘 못 이해하기 쉬우며, 성경말씀의 문맥(context)을 전 성경에 연결시켜서 성경의 기본 원리를 파악하고 그 원리에 의하여 적용된 역사적 환경으로부터 현재 실제적인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Scriptures)은 이미 "적용된 진리"(the applied truth)이며, 이 말씀을 설교로 현실의 상황에 적용할 때에 이것을 " 적용된 진리"(the reapplied truth)라고 한다.

성경에서 특히 바울의 용법을 보면, 한편(믿음)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하여 다른 한편(행함)에 대하여 상대적 부정법을 쓰거나 약화시키기도 하고, 나타내지 않고 숨기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혹자들이 문제시하고 있는 단어인 오직은 헬라어 원문에는 알라”(ajlla;), “”(de;) 그리고 ”(mh;)등으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들의 뜻은 대부분 그러나”(but), 특히 강조용법으로 사용될 때에는 진실로”(surely, verily)오직”(only)으로 사용되어 번역되기도 한다.

(1) 상대적 부정법으로부터 유래된 강조의 경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4:13).

(2) 한 쪽을 약화시키는 경우: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3:27).

(3) 숨기는 경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그러나 믿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행함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믿음이 전면에 나오는 상황으로, 믿음과 행함이 따로 가 아니라 함께(together) 역사한다(working)는 뜻이다(NIV).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위하여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루터(Luther)도 행위를 부정하는 듯한 언어구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심지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a right strawy Epistle)이라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만일 종교개혁을 위해 오직 믿음을 강조하다가 야고보서에서 발목이 잡혀 행함을 강조하게 되었다면 또 다시 가톨릭주의(Catholicism)로 돌아가게 되어 종교개혁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방식으로 이해해서 성경의 총제적인 통전 적 의미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직 믿음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성경을 전체적인 원리에서 이해하지 않고 한 부분인 단어 하나로 자신의 주장을 세우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결국 구원에 관한 칭의에 대하여 오직 믿음이라는 절대적 의미를 포기하고 믿음으로라는 상대적 의미를 이끌어내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한 알미니안 적인 행함으로의 구원이나 신인협력설의 구원론을 세우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나가는 말]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대해서 경고하기 위하여 믿음과 더불어 행함을 강조한 것이며(2:14~17), 이와 반대로 사도행전에 보면,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안디옥교회에 내려와서 복음에 대한 믿음에 율법의 행위를 가미시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15:1,5)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베드로와 야고보가 중심이 되어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하느냐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고 하면서(15:10,11)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고 경고했다(15:19).

사실 바울이 구원을 율법에 결부시킬 경우에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안디옥, 로마, 갈라디아)의 구원을 위해 복음의 은혜를 받아드릴 수 있는 방편으로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신령한 것이지만(7:13,14) 그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3:20; 2:16)는 뜻에서,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2:12)는 것으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고부동한 복음이다.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이 가톨릭의 공로구원”(the salvation by merits)이나 행위구원”(the salvation by works)에 항거하여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the salvation by faith alone)를 외친 것인데 이러한 고상한 뜻을 왜곡시켜서 종교 개혁자들을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Systematic Theology (Professor)

Rev/Dr. Paul B.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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