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청길 선교사(동경성서교회)

카토릭 예수회에서 최초로 파송한 프란시스코 쟈비엘 신부의 일본 선교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자방 영주(領主)들의 서양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무역을 통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야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의 고도의 학문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패한 불교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서양 종교에 매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시스코 쟈비엘은 교토(京都)에 있는 천황을 알현하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을 영영 떠나게 되었다.

프란시스코 쟈비엘의 뒤를 이어서 꼬스메 디 또레스(Cosme de Torres)신부가 일본선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또레스 신부는 얼마동안 남부지방 섬들을 순회하면서 선교한 후 1560년에 교토(京都)에 상경하도록 허락을 받았으나 기득권을 가진 불승들의 방해와 박해로 인하여 사가이() 지방으로 피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선교는 더욱 왕성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그 당시에 일본은 봉건영주들이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휘하의 가신들인 무사(사무라이)들과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지방의 영주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 백성들을 개종시킨다는 선교정책을 채택하였다. 이와 같은 선교정책으로 선교사들이 지방 영주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설득하므로 보다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봉건 영주들은 선교사들이 중개하는 무역이 막대한 이윤이 있음을 알고 선교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교활동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매우 호의적인 태도로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야마구치 스오(山口周防) 지방의 영주인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는 자기 영내에 선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므로 선교의 문이 크게 열리게 되었다. 1552916일에 또레스 선교사는 교회 창건 허가서를 받아 첫 번째 교회인 다이도지(大道寺)를 건축하여 선교의 근거지로 삼았다. 야마구치(山口)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세끼강 비와호시(雙眼琵琶法師)란 젊은이가 개종하므로 그를 통하여 일본선교는 더욱 왕성하게 전파되었다.

그는 개종한 후 교리공부를 열심히 하여 세례를 받고 라우렌시오라는 세례명을 받고 최초로 예수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포교자로 세움 받게 되었다.

15521224일에 다이도지(大道寺) 교회에서 일본 기독교 역사의 첫 크리스마스의 미사를 올리고 이웃 사람들을 초청하여 식사대접을 하는 할 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행사로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므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1553년 여름에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분고 후나이(豊後府內)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578년에는 분고(豊後)의 영주인 오도모 소린(大友宗麟)이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프란치스코라고 했다. 분고(豊後)의 영주가 개종하므로 신자의 수가 급증하여 1만 명을 넘게 되므로 선교사들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1562년 말경에 나가사기(長崎)에 최초로 기리시단의 영주가 된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는 요꼬세우리(橫瀨浦) ()을 선교사들에게 제공하고 10년간 입항세를 면제하는 조치를 취하므로 포르투갈 무역선의 근거지가 되었다. 1579년에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영주는 나가사기(長崎)를 예수회에 교회 영으로 제공하고 선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하므로 이 지역은 기리시단의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1614년경에는 신도수가 50,000명으로 증가하여 완전히 기독교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방 영주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신앙의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 영주는 오사카(大阪) 다카즈기(高槻)성의 다가야마 우곤(高山友近)이었다. 그는 12살에 세례를 받고 제스도라는 세례명을 받고 포교활동에 많은 공적을 남기었으며 다카즈기(高槻)에 훌륭한 천주교회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시대에 금교령에 의하여 국외로 추방되어 161411월에 마닐라에 거주하다가 1615년 봄에 63세에 소천하였다.

기리시단 영주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일 것이다. 그는 기리시단 영주로서 임진왜란 때에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와 더불어 선봉장군이 되어 조선을 침략한 장수로서 한국역사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83827일에 세례를 받고 아우구스치노라는 세례명을 받고 선교사들을 도와 선교활동을 협력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일본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활동을 하였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하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에 상륙한 카토릭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활동한 70년 후에 기독교가 금지당할 때까지 80만 명의 신자로 성장하였으며 그 당시 인구는 15백만 명에서 2천만 명으로 추정한다면 엄청난 부흥임을 짐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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