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거지의 기도만 들으신다

▲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최순실씨가 약 3년간 강남의 한 교회를 출석 했다. 그리고 언론들이 그가 교회에 낸 헌금 목록을 주보에서 발췌해서 실었다. 이명이나 등록을 한 상태도 아니고 출석하면서 헌금을 하였다. 감사 헌금의 제목들이 노출되었다. 승마대회 금메달을 따서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고,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기도 제목을 적었다. 이제 최순실씨와 그의 딸의 대학 입학이 문제가 되고 있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 있다. 이런 상태에서 성도의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어떤 기도를 받으시는가?

 

광야에 있는 신약 교회

고난당하는 교회가 어떻게 현실의 난관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성도들이 드린 기도가 금향로에 담겨서 하늘 보좌로 나아간다(5:8, 8:3-4). 이 결과가 땅 위에 세 번에 걸친 일련의 7재앙으로 응답된다(, 나팔, 대접). 일곱 재앙이 부어지는 가운데 사탄 혹은 용은 교회를 핍박한다. 그래서 교회로 불리는 여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로 도망가서 1260일간을 지낸다(12:6). 이런 기간에 용은 바다에서 나온 정치적이며 제국적 권력인 짐승과 땅에서 나온 거짓 선지자인(종교 이데올로기) 짐승과 함께 교회를 제거하려고 한다(13). 당시 큰 성 바벨론으로 불린(17:5, 18) 로마 제국이 사치와 영광의 황제 숭배를 통해서 교회를 핍박한다. 이것이 교회가 놓인 상황이고 오늘도 계속되는 상황이다. 이런 핍박을 예수님의 증거가 담긴 두루마리의 복음을 가지고 인내함으로(14:12) 그리고 기도함으로 때론 순교로 감당하면서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로 마침내 서게 된다. 이것은 무천년설의 관점으로 교회의 현실을 이해함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에 있다.

 

구약시대의 광야 교회

교회가 광야에 있다는 이해는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광야 교회에 있었다고 진술한다(7:36). 구약 시대의 광야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이것을 잘 말씀해 주는 곳이 신명기8장이다.

신명기는 모세가 출애굽 2세대를 가나안 맞은 편 모압 평지에서 한 일련의 설교이다(1:5). 광야 40년을 지나고(1:3) 이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는 경계에 선 무리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하다. 광야와 땅의 경계에서 주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지나 온 과거로서 광야 40년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들어갈 땅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광야는 부족함의 땅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풍요로운 좋은(아름다운) 옥토이다(8:6-10). 따라서 부족과 풍요 사이에 서 있는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 신명기이다.

출애굽 2세대들에게 40년간 광야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말씀하신다. "기억하라"는 말씀은 성찬에 사용된다. 기억은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라는 말씀은 장차 들어갈 땅에서의 삶을 위해 광야 40년이 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광야 40년의 삶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성찬을 매주 혹은 정기적으로 거행하면서 주님의 피와 살을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광야와 같은 현실에서 살게 하는 영적인 복음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광야를 왜 기억해야 하는가?

광야를 기억하는 이유는 광야의 시간이 우리는 낮추고 시험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내용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에 대한 확인이다. 광야는 부족한 곳이다. 그러나 그 부족함의 현장에서 이스라엘은 부족을 극복하는 참된 힘을 경험했다. 만나를 먹었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8:16, 4).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율법이고, 명령과 규례와 법도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의 삶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아가는 삶을 경험하는 장이었다. 이것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이 광야의 길이 연속되는 끝에 약속의 땅이 있다. 이 땅은 아름다운 옥토이다. 부족이 없는 땅이다. 먹고 배부른 땅이다. 부족이 있는 광야의 시험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는 자들이 누리게 되는 부족함이 없는 세상이 가나안의 땅이다.

그런데 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약속의 땅에서 광야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광야를 기억하는 일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았던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고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8:11, 14). 이것이 모세가 출애굽 세대에게 주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이었다. 풍요 속에서 광야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잊어버리는 사태를 경고한다.

다시금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강조한다(8:18). 풍요로운 가나안 땅에서는 나의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8:14, 17). 광야와 땅이라는 삶의 현장은 달라도 여전히 사는 방식은 같아야 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풍요의 시대인 가나안 땅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 즉 율법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광야를 지나 풍요의 시대와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풍요의 시대의 목적: 가나안의 꿈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가지고 가나안에서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세상 모든 나라와 구별된 하나님의 소유가 된(보배로운) 백성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을까?(26:17-19).

이를 위해서 신15장을 살핀다. 매 칠년마다 돌아오는 면제년의 규정이 나온다. 부채를 탕감하고 부채로 인해 생긴 종을 자유하게 하는 해이다. 안식년으로 불리기도 한다. 면제년의 규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 중에 하나이다. 이렇게 면제년의 규정을 지키면 어떻게 될까?

가나안 땅은 풍요로운 땅이지만(사실 천수답으로서 광야에 비교해서 그러하다 참고 신11:10-11) 현실적으로 면제년의 규정이 있는 것을 보면 부채를 질 수 밖에 없는 현실들이 많았음을 말한다. 더욱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고 빌려주는 일을 하지 않으면 죄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면(15:9) 가진 자들이 가장 은혜로운 해를 가장 악하게 다루는 병폐를 볼 수 있다. 재앙이나 흉년 그리고 억압과 착취 또한 경영의 미숙과 게으름 등 다양한 원인으로 가난이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는다(15:11). 그런데 이런 끝없는 가난 가운데서 면제년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부채의 탕감은 가난한 자들이 항상 있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만들까?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15:4-5). 가난한 자가 없는 세상이 된다. 이것이 면제년이 가진 지향점이다.

가난한 자가 항상 있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가난한 자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소망이다. 부족을 경험한 자들이 부족의 현실이 발생할 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 즉 율법의 명령을 따라서 면제를 함으로 부족을 해결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면제년, 희년, 안식일은 모두 부족을 해결하여서 원래의 부족이 없는 하나님의 세상(23:1)으로 회복하고 복귀시키는 법이다.

신약에서 광야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가진 교회는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가질까? 면제년의 이상이 이스라엘에서 성취되지 않았기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교회는(4:19, 21) 가난이 없는 교회를 만들어 내었을까? 사도행전의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주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 그래서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진술한다(4:34). 각 사람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각 사람의 부족을 채우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4:35). 가난을 극복하는 일을 교회가 하였다. 면제년의 규범인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미래적 표현의 현재적 성취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교회이다.

이런 회복 가능한 세상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룬다는 교훈이 신명기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가진 백성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다른 보배로운 백성이며 성민으로 구별한다(26:17-19 참고 출19:4-6).

 

세상과 구별된 보배로운 나라의 왕은 어떤 통치자이어야 하는가?

신명기는 면제년을 통해서 가난한 자가 없는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런 나라의 왕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많은 말과 여자와 은금을 두지 말라고 했다(17:16-7). 대신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 율법을 등사해서 가까이 두고(옆에 두고) 읽어야 했다. 국방과 외교 정치 그리고 경제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가까이 하고 읽는 왕이 세상 나라와 보배로운 거룩한 나라의 왕이 할 일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가나안을 통치하는 왕이 이스라엘의 왕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읽는 왕은 하나님을 부르고 찾는 왕이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를 역대기는 이렇게 말한다. 다윗은 율법의 돌 판이 있는 언약궤를 가까이 두면서 여호와를 찾고 구하였다(대상13:3). 다윗은 율법을 가까이 두고 여호와께 물었다(대상14:10, 14). 그러나 사울은 구하지 않았다(대상10:14). 율법을 가까이 두고 읽는 것이 바로 여호와께 묻는 것이다.

 

거룩한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따라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보배로운 백성이며 거룩한 백성들의 삶의 현장으로 들여다보자. 왕뿐 아니라 백성들의 삶에서 세상 나라와 구별된 보배로움은 어떤 모습일까? 신명기4:7절은 이런 말씀을 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큰 나라가 바로 보배로운 나라이다. 거룩한 성민이다. 그런 큰 나라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나라이다. 신명기의 율법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는 백성들은 기도를 함으로 현실적인 난관을 극복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신명기에서 말하는 난관 극복의 실제적인 현장으로서 기도하는 경우를 어떻게 소개하는가? 이것이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이다. 도대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도는 어떤 경우에 하는 것으로 신명기가 말하는가?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두 군데 있다. 신명기15:9절과 24:15절이다.

먼저 신15:9절에는 앞서 언급한 면제년의 규정과 관련되었다. 면제년의 악용의 사례를 규정한다. 면제년에는 부채가 탕감이 되기에, 면제년이 가까이 오면 가난한 자에게 빌려주지 않으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악한 생각으로 규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자가 여호와께 호소한다. 호소하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히브리어로 카라). 가난한 자가 부족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빌리게 되는데, 이를 거부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이런 것이 가능한 세상이 보배로운 백성들이 사는 세상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신24:15절인데, 여기서는 가난한 품꾼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일을 한다. 그런데 고용주가 품삯을 간절히 바라는 가난한 품꾼에게 해가 지도록 품삯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품군은 여호와께 호소를 한다. 즉 기도를 한다. 그래서 해지기 전에 품삯을 주어서 호소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구체적인 경우이며 신명기의 전부이다.

가난한 자들이 기도 혹은 호소한다는 단어는 왕이 율법을 옆에 두고(가까이 두고) 읽으라고 할 때 읽는다는 단어와 같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율법을 읽고 그리고 그것을 약속으로 받고 실현을 요청하는 것이 기도이다. 왕의 힘과 권력이 이를 성취하도록 통치해야 한다.

신명기는 위의 두 기도를 예를 들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백성의 실체를 증거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은 어떤 자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실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가까이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권력을 가까이 하면서 얻은 영향력으로 안하무인의 행동을 하면서 협박하고 이익을 챙기는 사람의 기도가 가능한 것일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기도가 될까?

 

글을 마치면서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왜 하나님은 과부의 헌금을 받으시고(21:1-4),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거절하시고 세리의 가슴 치는 기도를 들으셨는가?(18:9-14)

광야의 부족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는 경험을 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나라가 큰 나라이고 보배로운 나라이고 세상 모든 나라와 구별된 거룩한 백성(성민)이라고 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죽으면서 그의 품에 "우리는 거지입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라고 적은 쪽지를 가졌다고 알려졌다. 정말 거지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면서 천국의 복은 가난한 자에게 있다고 천국의 일성을 시작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5:3)

최순실 씨가 딸이 금메달을 딴 것에 대해서, 그 딸은 아시안 게임에 입상하도록 감사 헌금을 하면서 기도의 제목을 적었다. 하나님이 들으셨을까?

하나님은 거지의 기도만을 들으신다. 우리는 거지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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