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 천헌옥 목사(편집인)

아는 길도 물어가는 속담이 있다. 한 번 묻는 것은 한 번의 수치지만 묻지 않는 것은 영원한 수치라고도 했다. 하여 묻는 자가 현자이다. 아이들은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묻는다. 지식과 지혜가 성장하기 위해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물어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묻는 대상자가 누군가에 따라 생과 사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이처럼 물어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 묻고 답하는 것에서 죄악이 발생하고 상벌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창세기 초반에 다 나온다. 우리는 자신이 묻는 것만 생각하지만 창세기에는 누가 묻느냐 어떻게 대답하느냐 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 최초의 묻는 자가 뱀이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금기에 대해 물어본다. 이 물음에 지나치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것을 말함으로(선의의 거짓말?) 꼬리를 잡혀 금과를 보게 되었고 먹음직스럽기까지 한 과일을 따서 먹음으로 인생은 타락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묻고 답하는 형식이 인간사에 일상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와 물어본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와 물어보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아담이나 가인이나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아담은 변명을 늘어놓았고 가인은 거짓말을 한다. 역시 변명은 거짓말로 가는 통로였으며 타락한 인생은 변명부터 시작해서 거짓말을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거짓말로 채워진 인생은 어둠에 빠진다. 어둠은 바른길을 찾지 못하게 한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사는 길인지 죽는 길인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그때부터 하나님께 물어보는 일을 한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이나 왕들이 주로 하나님께 물어보았다.(18:5, 삼상22:13, 대상14:10)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이 기록된 성경 66권을 손에 쥔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래도 때때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기도 한다.

이렇게 누구에게 물어보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기꾼에게 물어보면 결과는 어찌 될 것인지 빤하다. 적에게 물어보는 것은 나를 잡아 잡수시오.’하는 것과 다를 바가 아니다. 무당에게 물어보면 멸망의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런 물어보는 일을 잘못함으로 나라가 매우 시끄럽게 된 것을 본다. “이게 나라냐는 구호가 나오기까지 한다. 그리고 적반하장의 일들도 발생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적에게 물어 보고 결정하다니

지금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너무 커서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한 때 송민순 회고록으로 인해 시끄러웠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시절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비서관 회의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북측의 의견을 물은 뒤 협박성 답을 받고 기권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비록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 문제를 의논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종전상태가 아니다. 휴전상태이다.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로 지목되는 북한은 우리의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보편적 가치의 인권 문제를 적의 나라에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통고였다고 해도 고급스러운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변명 역시 거짓말에 속한다.

그것은 엄격히 반역행위이다. 이 나라의 주권을 망가뜨리는 심각한 범죄행위이다. 어떤 변명으로도 국민을 설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한마디의 인정도 유감도 사과도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기술한 회고록의 저자와 이를 말하는 자들을 또 종북놀이 하냐? 면서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언어도단이다. 교묘한 말로 덮어버리기에만 바빴다. 그뿐 아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 저들이 최순실의 일로 마치 승리를 한 개선장군처럼 떠들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가관이다. 현시국은 박대통령이 잘못하여 일어난 것이지 야당이 잘하여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묻힐 일이 아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고 풀지 못할 일이라도 적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일은 차후에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국정의 책임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아닌 적의 수장이 나라를 다스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국정을 특정 개인에게만 물어보고 하다니

박근혜 대통령이 재차 사과하고 검찰이 자신을 수사하도록 허락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는 굴욕적이게도 모든 것을 내어주는 거국내각구성을 약속했다. 일 년 전, 박대통령은 유승민 새누리당 대표를 향해 정직하지 못한 사람, 배신자라고 덮어 씌워 대표 자리에서 쫓아냈고 국회의원 후보 자리도 주지 않아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박대통령에게서 쫓겨난 사람은 유승민 뿐만 아니다. 보도에 따르면 정계, 재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눈에 거슬린 사람들은 모두 쫓겨났다. 그것의 잣대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었다. 그녀의 치마폭 뒤에 뭔가를 감춰놓고 그들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보고 정치를 풀어나갔다. 심지어 그들이 재벌들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는 일을 자행하도록 옆에서 도와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게는 불통이라는 딱지가 껌처럼 딱 붙어 다녔다.

대통령이 물어 볼 곳이 있다. 국무회의이다. 총리와 장관들이다. 아니면 비서실의 회의를 확대하여 물어보면 된다. 헌법을 개정하는 아주 큰일은 국민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러나 이번 일은 좁혀 들어가 보면 특정 개인 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잇속을 챙겼다는 정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것도 대 무당이던 최태민의 딸에게 말이다. 그래서 그는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이상한 국정을 운영해 왔던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하나님께 묻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당연히 하나님께 묻고 그 뜻대로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교회 역시 제 뜻을 관철하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동원한다. 불통 목사, 불통 장로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하나님께 묻는다고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를 하지만 무속적 비나이다.’의 기도, 기복적인 기도들이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가르치신 주님의 기도가 무색하다. 마치 하나님은 하늘에서나 뜻을 이루시고 땅에서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재치고 달려가지 않는가? 

잘되고 잘 사는 것을 위해 교회에 출석하는 목적이 되어 버린 한국교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은 복을 받지 못했다는 인식이 지배하는 한국교회, 큰 교회가 성공한 교회로 인식되는 한국교회 모두가 기복적 이기주의에 빠진 것이다. 이기주의는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한국교회처럼 사분오열이 없다. 장로교 합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단만 300여 개라는 소문이 있다. 너무 유동적이어서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다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교단을 설립할 때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겠지만 그중에 몇 개 교단 외에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을까?

이제 국가적 난국을 바라보면서 한국교회는 스스로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했던 과거를 회개하여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가 기도의 불씨를 가져오는 근원인데, 자기를 십자가에 내려놓은 기도를 했다면 어떻게 이런 결과가 올 수 있을 것인가?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또 누구에게 질문을 받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되나깨나(아무에게나) 물으면 패망한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에게 물어야 하고 우리는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현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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