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오만에서 벗어나기를

박창진 목사

세계 역사와 교회 역사에서 지성우월주의를 추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이성, 감성, 의지로 구성되는 인간의 인격을 이야기하면서 이성의 우월을 주장하였습니다. 자신과 같은 철학자나 통치자에게 이성이 가장 크고 군인에게는 의지가 크며 일반인들은 감성이 가장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철학자는 이성이 가장 커서 형이상적인 추구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성우월주의입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유형에 있어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성우월주의는 존재하였습니다.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앉아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그러한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성우월주의의 다른 쪽에는 반지성주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느낌을 중시합니다. 느낌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지성적인 추구는 따분하며 재미없고 피곤한 일로 생각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의지 곧 실천을 중시합니다. 실천 중시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실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만 지성에 대한 거부감을 깔고서 강조되는 실천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풍조입니다.

지성우월주의는 시대에 관계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 비평학은 그 한 유형입니다. “성경비평학”이란 성경을 보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생겨난 제 비평 방법들을 소개하고 각 비평 방법들의 독특성과 한계성을 평가하는 학문을 뜻합니다. 1771년에서 1775년 사이에 요한 잘로모 제믈러(Johann Salomo Semler)가 ‘자유로운 정경 연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논문은 문자적 영감에 대한 정통적 교리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성경의 역사적-비평적 연구의 길을 닦아 놓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성경비평학은 그 분야에 있어서 세분화되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과학적 방법을 통한 학문 연구라는 관점으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구체적인 방식에 있어서 여러 가설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우에 성경이라는 표현 자체가 거부되고 성서라고 불려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반석으로 하여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6:18). 베드로를 가리키는 헬라어(페트로스-남성)와 반석을 뜻하는 헬라어(페트리아-여성)는 의미에 있어서 같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받치는 흔들리지 않는 터를 염두에 두셨는데, 그 단어가 여성형이어서 남성인 베드로를 직접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지칭하면서는 남성형인 페트로스를 사용하셨다가 성의 제한을 받지 않아도 되자 페트리아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라는 말은 로마교에서 말하는 사도권 계승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사도권이 교황을 통하여 계승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가 반석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는 사도적 복음이 교회의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세워간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사도적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고 하나님의 복음이 사도적 복음인 것입니다. 사도의 한 사람인 바울이 ‘내 복음’(롬 2:16, 몬 1:13), ‘우리 복음’(고후 4:3, 살전 1:5, 살후 2:14)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우리 복음이라고 할 때에 ‘우리’는 사도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터로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신학적으로 창성직원이라고 불리는 이들로서 사도들, 선지자들, 전도자들입니다(엡 4:11). 그들은 교회의 터가 굳건하여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직분자들입니다. 교회의 터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통하여 굳건하게 된 사도적 복음이 바로 신약 성경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교회의 터로 세움을 입은 이들이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열 한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셨고 이해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요 14:26). 바울 사도의 경우는 열 한 사도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동일한 역사를 누렸습니다.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 계시를 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가르쳤던 이들과 함께 사도적 복음을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베드로 곧 사도적 복음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엉터리가 아니라면 이는 부인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도적 복음을 확증하여 터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터 위에 세워진 교회에게 지속되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한 창설직원들에게 직접 듣고 배웠던 사람들이 그 당대의 교회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도적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들 중에 지식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자신들의 글로서 그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터로 주어진 사도적 복음을 즐거워하였고 자랑하였습니다. 누구라도 그 사도적 복음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필요에 의해서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사도적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27권의 책이 정경으로 말해졌습니다. 교회가 정경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것을 교회가 공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누가 성경을 만들었는가’(야콥 판 브럭헌 저, 김병국 역, 총신대학교출판부)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비평학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신들의 지성을 앞세워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처사입니다. 사도들을 포함한 창설직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배웠던 그 당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였던 바를 임의로 나누고 해부하면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시 기독교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를 읽고서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자신들의 관점으로 임의로 나누고 해부하는 것과 같은 처사입니다. 고구려 시대의 다른 문헌에 기초하여 다른 내용이 발견되어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것이 없이 임의로 가설들을 만들어서는 그 가설에 입각하여서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일 뿐입니다. 이는 서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서울에 대해 더 잘 안다며 큰소리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지성을 낮추고 스스로의 지성을 높이는 지적 오만인 것입니다. 그 시대에 살지도 않았으면서 그 시대에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을 자신들이 더 잘 안다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의 글을 통해 나타난 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적 오만을 이어받아 성경에 대하여 여러 말들을 하고 있는 이들이 진보, 안티 기독교인들입니다. 2000 여 년 전에 기록된 글을 살피면서 그 당대의 사람들의 생각은 무시하고 그들과 다른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 대한 기록들을 살피는 일반적인 태도와 전적으로 상반된 태도입니다. 과거의 기록은 그 기록과 상반되는 기록이 별도로 발견되지 않는 한 사실로서 존중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그 당대에 남겨진 기록이고 그 내용의 거짓됨이 밝혀지지 않는 한에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태가 지적 오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고서는 계속 그 길을 걷고 있으며 걸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 자체에 대하여 바르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진보 기독교인들과 안티 기독교인들의 성경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어찌 그렇게도 지성에 반하는지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의 이찬경 대표의 발표문을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따로 적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사도는 교회를 떠나는 일단의 무리들에 대해 처음부터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요일 2:19). 그리고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말하면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한 지체를 구하라고 합니다(요일 5:16). 진보이든지 안티이든지 보수이든지 간에 그곳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 애초에 부르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던 이들은 불신자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라지에 해당합니다. 교회를 떠나든지 남아 있든지 간에 그들을 구할 힘이 신자에게는 없습니다. 반면에 알곡으로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이들은 보호되어야 합니다. 알곡으로서 교회를 떠난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수고하여야 합니다. 지적 오만의 표출인 성경비평학과 그 결과물로 인하여 알곡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수고입니다.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되며 중단할 수도 없는 수고입니다.

안티 기독교인들은 기존 기독교의 잘못으로 인해 생겨난 사람들이라는 시각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무조건 배격할 수 없으며 배격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나 지체들의 비윤리적이며 반윤리적인 행동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고맙기까지 한 일입니다. 교회는 그들에게서 들어야 할 내용에 대해 정중하고 감사하는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해 눈감고 귀막으려고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티 기독교인들의 태도가 전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사안이 아님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되어서 하나님의 양들을 해칠 수도 있음을 직시하고 바르게 대처하여야 합니다.

성경책 자체는 하나의 책일 뿐입니다만 그 안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나타내는 그 내용이 자신에 대해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역사하셨다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사도적 복음을 글로서 남기는 당사자들이 인식하였든지 못하였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들은 것을 기억하고 이해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동일한 원리입니다. 이를 유기적인 영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인간적인 지성을 앞세워 나누고 찢는 것은 지적 오만에 기초한 파괴일 뿐입니다. 성령님의 존재와 역사를 부인한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님의 존재와 역사를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진보, 안티 기독교인들에게 정중하게 권합니다. 지적 오만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바르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일에 힘을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길은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밝히고 그것을 원리화하여서 교회에게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평학을 따라 성경을 읽어서 성경 이해가 깊어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 원리를 인지하고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로의 회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부흥입니다. 성경해석 잘해야 부흥이 보입니다.

저는 삼위이시며 한분이신 하나님, 한 말씀, 한 교회, 한 믿음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한 말씀은 한 교리이기에 한 교리에 토대를 둔 한 교회를 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CLC), '성경해석 잘해야 부흥이 보인다‘(영교회)에서 부족하지만 교리 일치를 위하여 필요한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를 나누는 5대 교리와 하나님의 성회가 나뉘는 성령론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성경 이해의 무지에서 벗어나기를

성경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언어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닙니다. 지금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로부터 기록되기 시작하여 약 1900년 전에 사도 요한에 의해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어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 기록에 있어서 이해 차이와 그 내용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가설들을 제시합니다. 대부분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발생하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책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에 기록된 내용들이 편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아주 비상식적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책이기도 합니다. 어떤 역사가 있었는데, 그 사실을 남김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방식은 그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직후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는 것입니다. 구전으로 몇 백년이 흐른 후에 기록한다는 것은 너무도 비상식적입니다. 일반적인 역사에 있어서도 구전에 입각하여서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대에 기록되지는 않습니다. 그 시대나 그 직후 시대에 기록된 단편들을 통하여 후대에 정리하는 방식으로 역사 기록이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과거 역사에 대한 기록은 그 내용에 있어서 반대되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한에는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성경만이 여기에서 예외라고 말할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의 내용에 있어서의 역사성도 수긍하기 힘든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일반적인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법칙 안에만 있는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이성으로서는 쉽게 수긍되는 것입니다.

기록 방식은 인간의 언어입니다. 성경이 쓰인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히브리어와 몇 부분에서의 아람어 그리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신약 가운데 가장 뒤늦게 기록된 경우라도 지금부터 1900년 이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 문서라는 말입니다. 감사하게도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되었기는 하지만 고대 문서입니다.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현대어로 번역되었다고 현대어를 읽듯이 하면 잘못된 이해를 가지게 될 여지가 많습니다.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와 표현법을 포함한 언어의 특징 등을 정당하게 고려하여야 합니다. 문자만 읽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고대 문서이기에 해석이 필수적입니다. 본문 자체가 그 본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한 바를 바르게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원리화하여서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독법은 대부분 잘못된 이해에 도달하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한 안티기독교인의 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을 죄악시하며, 사람을 제물로 받쳐 피로 구원을 얻으며, 사형틀 십자가를 숭배하고 죽음을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사람을 제물을 받던 중동의 부족신이였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것은 좀비, 강시, 프랑켄슈타인,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진작 사탄은 사람을 죽인 게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야훼는 수많은 인간을 학살했습니다.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유는 교회의 부정 부패 때문만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휴머니즘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사랑의 종교라고 위장을 하더라도, 그 근본 교리와 성경이라는 살인책은 사라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주장입니다. 반기독교시민연합의 이찬경 대표의 주장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 다르게 말하면 언약에 대하여 모르고서 하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와 무관하게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그 역사 안에서 그 역사의 진행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인데, 그것은 그 당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인간다운 삶과 동의어이기도 합니다. 가장 신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정복 및 정착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왕은 자기 백성의 안전과 복지 그리고 왕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합니다. 이집트 탈출 이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집트로 인도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자기 백성을 돌보심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보호를 받으며 많은 수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조가 바뀌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새 왕조는 이전 왕조와 친한 이스라엘을 위협 세력으로 보고 억압 정책을 펼치는 것입니다. 최소한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고 하나님은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려고 합니다. 이집트의 입장에서는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긴요한 노동력인데, 보내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수행하시는 전쟁입니다. 이집트는 대패하고 이스라엘은 탈출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이들과 전쟁을 하게 되고 승리하여 땅을 차지하고 생활하게 됩니다. 이는 고대 세계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다. 아주 일상적인 일입니다. 여자들을 남겨두고 다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이집트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러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의 국가 존재 방식을 함께 생각하여야 합니다. 땅을 차지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비일비재했던 전쟁을 함께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 죽이는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비상식적 태도입니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웃 나라가 영토 확장을 위해 침략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의 죄가 그 땅에서의 삶을 더 이상 영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모두 죽일 것이 요구된 이유입니다. 그들을 모두 죽여서 자기 백성들이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서 자기 백성을 지키기 위한 왕으로서 당연한 조치입니다.

하비루-히브리인-의 출현과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 이집트 탈출이나 가나안 정복을 부인하는 것도 비상식적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이집트의 입장에서는 결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켜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히브리인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이민족들과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적인 힘의 개입으로밖에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들이 결코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목민으로 떠돌아다니던 히브리인들의 후예가 가나안 땅에 왕조를 세웠습니다. 다윗, 솔로몬 그리고 그 후대의 왕들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에 자신들이 살던 땅을 고스란히 상납하였습니까? 그러한 일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빼앗긴 것이 분명합니다. 유목민들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만의 힘이 아니라 외부적인 힘이 개입으로만 설명 가능합니다. 그들 자신만의 힘으로 결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합니다. 건전한 상식을 활용하면 하나님의 개입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율법의 경우 그 내용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같은 언약의 백성- 사랑입니다. 그 실현 방식에 있어서 살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 안의 죄가 허용됨으로 인해 그 사회 전체가 죄로 가득하게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의 돌로 사람을 쳐 죽이는 사형은 범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국가법이기도 한데, 그 당대의 다른 나라들의 법과 한번 비교해보면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의 경우만 보아도 분명합니다. 현대의 유대인들과 이슬람에 의해 오용되고 있는 이 율법은 재판을 통하여 당한 만큼 되갚아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자나 권력자나 가난한 자나 힘없는 자라고 해서 예외가 없습니다. 단순한 보복법이 아니라 약자 보호법이며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함을 추구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율법 아래에서 다른 민족과 국가들과 다른 차원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열방을 하나님께로 이끌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계와 같이 대하지 않으시며 역사를 무시하고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회복은 역사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고대 근동의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남은 부족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등의 역사적 계보는 그들을 통하여 회복을 역사를 행하셨던 것일 뿐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시며 언제나 열방의 회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일차적인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떻게 부족신이 열방의 회복을 말하며 한 민족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안티 기독교인들은 아무런 여과없이 현대인의 관점으로 구약을 읽고 있습니다. 고대의 시각으로 읽어야 할 고대 문서를 현대의 시각으로 읽는 것입니다. 역사가 진행되어 민주주의가 정착한 현대의 입장을 그대로 대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이 주장이 옳은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만 기본적이며 상식적인 글 읽기에서 벗어난 잘못일 뿐입니다.

언약의 역사가 진행되어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으며 과거와 같은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국가의 형태로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던 때와는 다른 하나님의 요구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헌신, 희생-과 같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자기 백성에게 제시된 삶의 원리는 그 당대의 다른 국가들보다 한 단계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율법이 주어졌던 시대의 다른 국가법과 비교할 때에 그렇습니다. 복음은 복음이 주어졌던 시대와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와 비교할 때에 그렇습니다. 과거 십자군 전쟁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나타난 현상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보다 못한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모습을 근거로 하나님과 그분을 신앙하는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억지일 뿐입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한 안티기독교인이 전혀 예상치 못한 최강의 바이블 모순이라고 하며 올린 글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는 말씀이 있는데,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 21:3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는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또한 표면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만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에서 많은 부분들이 고대 글에서 많이 확인되는 바와 같이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될 경우에 구약에서 땅은 언약의 백성들을 가리키고 바다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대상 16:31-32). 여기에서 하늘이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이 기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이 즐거워한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다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바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바다라고 이해하면 물고기와 다른 바다 생명체들이 외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을 기록한 이가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은 그 본문이 기록된 그 시대를 나타내며 나아가 그 시대의 언약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통치 안에서 언약 밖의 이방인들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언약의 시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 언약 시대, 노아 언약 시대, 아브라함 언약 시대, 모세 언약 시대, 포로 후 회복 언약 -새 언약 - 시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새 언약 시대. 이러한 언약 시대의 진행과 관련하여 이전 언약 시대에서 다음 언약 시대로 넘어가는 것을 창조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합니다. 노아 홍수와 방주를 통한 노아 가족들의 구원을 말하면서 옛 세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입니다(벧후 2:5). 홍수 이전의 언약의 시대에 비교하여 홍수 이후의 언약의 시대는 새 세상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합니다(사 65:17, 22). 그 이전의 언약의 시대는 옛 하늘과 옛 땅이 됩니다.

눅 21:33은 그러한 관점으로 쓰인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을 언약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서 열방에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했던 언약의 시대가 끝나는 것을 뜻합니다. 계 21:1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멸망과 돌성전 파괴는 물리적으로 노아 홍수와 전혀 다르지만 신학적으로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가 이전 언약에서 진전된 새 언약의 시대 곧 새 세상이 되듯이 예루살렘 멸망과 돌성전 파괴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언약의 시대가 마감되고 새 언약만의 시대 곧 새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영원히'가 항상 시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강조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여기에서 '영원히'는 강조이지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 이후의 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신의 부어주심이 이야기되고 교회에게서 성취됨은 그 본문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에 대한 안티기독교인들의 비판은 대부분 이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많은 것들을 제기하는데, 성경 본문이 그들의 주장과 같이 잘못된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숫자상의 오류는 성경 자체의 오류로서 이야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알고서 제대로 된 내용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안티기독교인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보기독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그들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비평학에는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성경 자체의 이해는 너무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중히 권합니다. 성경 자체에 대한 이해의 무지에서 벗어나십시오.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의 조명 안에서 가능한 일이기에 어려움이 많으리라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보수기독교도 성경 자체에 대한 이해의 무지에서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일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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