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8.23 금 06:08
상단여백
HOME 주장과 논문 논문
고신의 교의학자들: 박윤선, 이근삼, 이환봉을 중심으로

 

이신열 교수(고신대 신학과 교의학 부교수)

우병훈 교수(고신대 신학과 교의학 조교수)

1. 들어가는 말: 고신대학교 교의학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1946년 9월 20일에 개교한 이후, 고려신학교는 교의학을 담당할 교수를 물색하던 중, 만주 봉천에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오게 되었다. 박형룡은 1947년 10월 14일에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강의를 시작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이듬해 5월 사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상근 목사가 교의학을 1948년부터 짧은 기간 동안 교수했지만, 1960년까지 교의학은 거의 박윤선 박사에 의해 가르쳐졌다. 박윤선은 원래 주경신학자이었지만, 성경신학, 교의학, 변증학 등의 거의 모든 과목을 담당하였다. 그가 1960년에 서울의 총회신학교로 떠난 후 그의 제자로서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근삼 박사가 1962년부터 1994년까지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의학 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박윤선과 유사하게 교의학을 위시하여 변증학, 윤리학 등의 다양한 과목들을 아울러 교수하게 되었다. 1979년에 화란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전공하고 학위를 취득한 이보민 박사는 고신 최초의 윤리학자로서 윤리학과 변증학 등의 과목들을 1991년까지 20여 년간 담당하였다. 이환봉 박사는 1981년부터 2015년까지 고신대학교 학부과정에서 교의학을 교수하였는데 그의 학문적 관심은 주로 개혁주의 성경관에 집중되었다. 고신대학교 설립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고신의 교의학이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위에 지난 70년 동안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그동안 교의학 과목을 담당했던 교의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박윤선, 이근삼, 이환봉 3명의 교의학자들의 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들의 교의학적 사고에 나타난 개혁신학적 내용과 특징들이 어떻게 고신의 교의학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왔는가를 논의하게 될 것이다.

 

2. 교의학자 박윤선(1946-1960)

박윤선은 메이천(J. Gresham Machen)의 지도하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학 전공으로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1934-1936)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서 성경 원어학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교수 사역의 시작이었다. 1938년에 두 번째 미국 유학길에 올라서 반틸(Cornelius VanTil)의 지도하에 변증학을 1년간 연구한 후 2차 대전으로 인해 잠시 일본에 체류하다가 만주 봉천에 가게 되었는데, 1940년 3월에 이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봉천 오가황교회에서 목회하였으며(1940-1941) 만주신학원에서 신약학 교수로 사역에 임하게 되었다(1941-1943).

해방 후 귀국한 박윤선은 1946년부터 1960년까지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의 전신)에서 교수, 그리고 교장으로 사역했다. 교수로 사역하던 중 1953년 10월에 네덜란드로 세 번째 유학길에 올라 자유대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으나 아내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어 1954년 3월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기에 네덜란드에서 수학한 기간은 6개월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짧게나마 가질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성경 주석 집필에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약 15년 동안 고려신학교 교수로 사역하면서 박윤선은 주경신학자로서 주로 성경원어 및 성경과목을 교수했으나 미국과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에도 박식하여 하지 (Charles Hodge), 워필드 (B. B. Warfield) 등의 미국의 신학자들과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 헤르만 바빙크 (Herman Bavinck), 그리고 클라스 스킬더 (Klaas Schilder) 등의 네덜란드 신학자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임무도 아울러 맡았다. 또한 그는 칼 바르트 (Karl Barth)를 위시한 당대의 위기 신학 또는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에 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집중적으로 이를 비판하였는데 박윤선의 개혁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애정이 그의 바르트 비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박윤선은 신구약 성경 전권을 주석한 유일한 국내의 개혁주의 주경신학자이었다. 그는 1960년 까지 고려신학교 교수로 사역하는 동안 요한계시록(1949)을 시작으로 공관복음(1953), 로마서 (1954)를 주석하여 발행했는데 계시록 주석은 사실상 1943년부터 집필한 것이었다. 고려신학교 교수 사역기간 동안 그는 바울서신, 히브리서 · 공동서신, 시편, 그리고 요한복음을 포함하여 모두 7권의 성경주석을 발간하였다. 여기에서는 박윤선이 집필했던 7권의 성경주석을 중심으로 교의학자로서의 박윤선의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3. 박윤선의 교의학의 내용과 특징

3.1. 계시론

박윤선은 먼저 계시를 자연계시와 성문(특별)계시의 이중 계시로 이해한다. 자연계시는 천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인데 이는 편재성을 지니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목적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간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롬 1:20). 인간에게 자신의 특수계시는 성경에 주어지고 기록된 계시로서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고 사람이 이를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는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지혜를 제공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두 계시의 공통점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주어졌다는 점인데 이런 이유에서 이중계시로 명명된다. 박윤선은 자연 계시의 결과로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사람이 자력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다는 점에 있어서 자율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자율종교를 부인하고 타율종교를 내세우는 취지에서 그는 ‘계시 의존 사색’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이 용어는 아마 반틸이 자주 사용했던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사고를 사색하는 것(thinking God’s thoughts after Him)’이라는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 추측된다. 자율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따라서 사고하는 것은 편견없는 중립적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절대화하는 사고이다. 그러나 계시의존사색은 인간의 이성적에 근거한 자연적인 사고가 아닌 초자연적 사고이며 인간의 자율적 사고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타율주의적 사고에 해당된다. 박윤선은 이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반틸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의 스승의 견해와는 약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 차이는 자연계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반틸은 자연계시는 인간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하며 그 결과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졌다는 전제적 태도를 취한다. 반면에 박윤선은 사람이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지만 인간은 자신의 죄악으로 이를 왜곡하고 억누르게 되었으므로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3.2. 기독론

박윤선의 그리스도 이해에 대해서 다음의 몇 가지 주제에 한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박윤선은 시 2:7을 해석하면서 여기에서 ‘아들’은 끝이 없으시며 영원한 아들이시므로 하나님과 일체이시며 그의 영원한 형상이라고 지적한다.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대신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그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라는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은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이제 단순히 선포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영원부터 절대적인 생명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무시간적으로 부여받은 성자 하나님이시며, 그 안에는 신성의 총량(總量)이 영원히 거한다는 차원에서 그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양자 사이에는 삼위일체론적 차원에서 연합을 통한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동일성의 관계가 존재한다.

또한 박윤선은 하나님의 아들을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로 지칭한다. 그의 전지성을 깨달은 자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된다. 베드로와 나사로도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는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들과 메시야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주어지는 오묘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메시야이므로 그는 또한 중보자로 이해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자이며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시의 중보자이시다.

둘째, 그리스도는 인자이시다(마 16:13,16). 박윤선은 인자라는 단어가 단 7:13에 사용된 단어를 염두에 두고 사용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로서 주전 1세기 문서인 에녹서 31-32절이 언급된다. 이는 단순한 사람을 지칭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가 메시야와 중보자이심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인자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이시며 신성을 지닌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이시다. 또한 그는 메시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데 이는 성령을 부어주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해된다. 인자는 일반적 선지자들과 달리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시며 이런 점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만 하시는 참된 선지자이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는 메시야로서 하늘이나 땅에서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니신 분이시다. 인자가 높이 들리셔야 한다는 표현(요 3:14)은 그가 십자가에서 완성하실 구속사역을 가리키는 것인데 박윤선은 여기에 사용된 ‘들리우다’라는 동사는 복음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는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의 견해에 동의한다.

셋째,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시며 심판자이시다. 박윤선은 그리스도를 먼저 창조자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창조에 있어서 방법이며 수단이실 뿐 아니라 그 원인과 배경에 해당된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창조에 앞서 존재하시는 선재하시는(pre-existent) 분이시다. 만유는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이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다. 박윤선은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되 인격적 신으로 계시하신다고 주장한다. 만유는 그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므로 그는 만물 가운데 먼저 나신 자, 즉 만유의 대주재이시다. 그리스도는 만유에 생명을 주시고 이를 친히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분이시므로 만유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 창조와 섭리의 진리에 대해서 시편 33편을 주해하면서 박윤선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공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정직한 말씀이 성립시켰고(v. 6 & 9), 섭리는 그의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인자하신 행사가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박윤선은 그리스도는 만유의 머리로서 이를 통치하시며 또한 교회의 머리로서 이를 보호하신다고 밝힌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유가 존재하게 되었고 섭리를 통해서 만유는 하나로 통일되고 보존된다. 여기에 만유의 존재 목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곧 창조의 목적이며 이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인자됨을 통해서 심판자가 되신다(요 5:27). 성육신하신 인자는 그의 신성과 인성 모두에 근거해서 심판의 권세를 지니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로서 피조되지 않고 만유를 기쁘신 뜻대로 다스리시는 대주재이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만유를 임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우주의 최종적 귀정(歸正)을 하실 무소불능하신 분이시다. 그는 백마를 타고 재림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데 그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며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계 19:11). 박윤선은 이 구절에 나타난 ‘충신’과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그가 온 우주가 기다리던 진정한 구주이심을 각각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그는 초림 시에 어린 양, 즉 죽임을 당할 자로 오셨지만, 재림 시에는 정복자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가리킨다. 그의 심판은 자기 이름을 신뢰하고 높이지 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형벌을 초래하는 심판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는 삼중직을 수행하신다. 박윤선은 ‘삼중직(threefold office)’이 아니라 ‘삼직 (three offices)’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계 1:5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직분이 전체적으로 선지자(충성된 증인), 제사장(죽었던 자), 왕(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심)의 ‘삼직’을 가리킨다고 주해하였다. 또한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6)에 언급된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기름 부음 받은 자에 해당된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삼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왕이라 함은 만물의 왕을 가리키고(계 19:10), 대제사장이라 함은 영원한 대제사장(히 7:12) 곧,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대언하시는(요일 2:4) 영원하신 중보를 가리키고(히 8:6; 9:15), 선지자라고 함은 본래 아버지 품 안에 계시다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 주시고 기타 모든 하늘의 일들을 계시하신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박윤선이 사용했던 ‘삼직’은 어떤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삼중직’에 해당되는가? 삼중직이라는 표현에는 그리스도께서 세 직분(왕, 제사장, 선지자) 모두를 자신이 직접 수행하시므로 이들이 상호관련성을 맺는 하나의 사역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박윤선의 시편 110편 주석에는 그리스도의 직분이 삼중직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는 자신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시는 선지자이신데 이 사역은 궁극적으로 그의 제사장적 사역에 근거한 복음 또는 말씀 사역으로 나타나게 된다. 시 110:3은 신약시대에(“주의 권능의 날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 사역의 결과로 성령의 역사 가운데 구원의 대열에 동참하게 될 것을 노래하고 있다(“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이는 지상에서 그리스의 중보자적 속죄 사역과 천상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되시는 중보자적 기도로 가능한 것이다. 또한 복음 사역은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는”(시 110:2) 왕적 통치는 그리스도의 영과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시 110:1에 비추어 볼 때 이 통치는 복음 사역이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완전히 정복하시는 시기까지(“내가 네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기 까지”) 시행되는 통치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그의 선지자적 사역으로서 복음 사역과 왕적 사역이 중첩된다는 사실이 파악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왕적 사역의 핵심에 해당되는데 이는 장차 천국에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미래적 통치(“네 우편에 앉으라”)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미래적인 왕적 통치를 온전히 실행하시기 위해서 시 110:5-7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공의로운 진노로 온 우주의 심판자로서 재림하셔서(“그 노하시는 날에”)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나라들의 임금들을 심판하시게 될 것이다.

 

3.3. 구원론

여기에서는 박윤선의 구원 이해를 중생, 신앙, 칭의, 그리고 성화의 4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중생은 진리와 성령에 의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요 3:5). 여기에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벧전 1:22-23; 딛 3:5)을 가리킨다. 이는 중생이 인간의 노력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전적으로 신적 능력에 의해서 가능하므로 복음을 들음으로서 주어짐을 뜻한다. 칼빈은 물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는데 박윤선도 견해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생한 자는 물과 성령으로 씻어 깨끗함을 받은 결과로 그의 육은 중생한 영과 대립하게 된다. 또한 중생의 결과로 생명을 누리게 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중생이 우리 죽을 몸의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다. 중생은 성령의 이끄시는 역사를 통해서 발생하는 것(요 6:44)이며 그 결과로서 신앙을 제공한다(히 10:22).

둘째, 신앙은 중생의 결과로서 주어지는데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박윤선은 역사적 신앙과 구원 얻는 신앙을 구분하면서 후자에 있어서 겸손이 신앙이 기본 정신이며 여기에는 반드시 간절한 요청 또는 애걸이 동반된다고 밝힌다. 또한 마태복음 16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관련해서 신앙은 군중을 맹목적으로 모방하거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독특한 절개를 가진 자립성을 가지고 주님과 연결된 거기에서 생명력을 띠는 것”으로 정의된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능력, 노력, 체험, 지식으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을 배격한다.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식적이나 감정적으로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신앙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아무런 외식이 없다. 박윤선은 신앙과 외식에 대해서 “요컨대 신앙은 진실을 그 본질로 하고 생명으로 한다. 외식과 가명은 신앙이 아닐 뿐 아니라 신앙의 적이요 또 방해물이다. ... 그러므로 성경은 신앙을 주력하여 가르치는 동시에 외식을 적시(敵視)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신앙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를 마음에 믿는다(롬 10: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그의 말씀을 믿는 놀라운 일인데 이 놀라운 역사는 참된 신앙을 지닌 자들 안에서 전파되는 말씀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받고 그분을 믿되 사랑으로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영생이 발견되므로 말씀은 영생을 누리는 유일한 수단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영으로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요 6:33).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구절에서 말씀에 해당되는 떡과 대조적으로 언급된 만나는 가시적 하늘에서 내려왔지만, 생명의 떡은 비가시적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셋째, 칭의는 오직 신앙을 통해서 주어지며 인간의 모든 선행이나 공로는 전적으로 배제된다. 달리 말하자면, 칭의는 아무 행한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얻어 의인으로간주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간주하다’라는 단어는 칭의 이해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인데 박윤선은 이를 ‘대리적 인정’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에서 신앙은 비록 칭의의 유효적(effective) 근거가 될 수 없지만 주어진 ‘의’로 간주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신앙이 은혜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드러난다. 박윤선은 신앙은 그 자체로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수단(요 1:12)에 불과하며 이 근거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에서 발견된다. 박윤선은 로마서 5:9을 주해하면서 이 구절에 언급된 ‘피’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연쇄관계를 보여준다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 칭의의 소극적 측면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죄인의 속죄자가 되신 것을 지칭하며, 적극적 측면은 율법의 성취를 통해 우리의 의(righteousness)가 되신 것을 가리킨다.

넷째, 성화는 믿음으로 칭의함을 받은 자가 점차로 죄의 세력에서 깨끗함을 받는 과정을 가리킨다. 신자들이 거룩한 이유는 객관적 차원과 주관적 차원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덧입어 거룩하게 간주되었음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어 궁극적 완성을 지향하는 것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자면, 성화의 객관적 차원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도 속죄함을 받아 거룩해지는 것을 뜻한다. 성화의 주관적 차원은 성화의 방편 또는 수단과 관련을 맺고 있다. 성화는 진리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성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박윤선은 주장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으로서 사람을 죄악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말씀에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되 자신의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말씀에 나타난 전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의 능력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세상에서 선한 일을 힘쓰게 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받을 만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배격된다. 왜냐하면, 믿는 자가 선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를 행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먼저 제공해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화의 관점에서 선행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신자가 자신의 힘으로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완전주의 (perfectionism)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요일 1:8-9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이러한 완전주의적 사고는 전적으로 배격된다.

 

3.4. 종합적 평가

지금까지 그가 작성했던 7권의 성경주석을 중심으로 살펴본 박윤선의 교의학에 나타난 개혁신학적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박윤선은 주경학적 기초가 확고한 교의학을 추구한다. 그는 주석 작업을 자신의 신학적 소명으로 여기고 이에 매진했는데 그 결과 성경 전 권에 대한 주석이 완성되었다. 성경적 주석의 토대 위에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를 더욱 철두철미한 방식으로 세우는 교의학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사고를 대변하는 표현에 해당하는 ‘계시 의존적’ 사고에 의해서 그의 교의학이 확립되었음을 뜻한다.

둘째, 박윤선의 교의학에는 변증학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반틸에게서 받은 변증학적 교육은 그의 교의학의 색채를 결정지었다. 이는 다양한 현대신학자들의 교의학 이해에 드러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함으로서 개혁주의 신학을 변증하는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던 특히 바르트의 계시론과 성경관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타협없는 비판을 통해서 개혁주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절대적 진리를 변호하려는 변증학적 성격이 그의 신학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셋째, 박윤선의 교의학에는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네덜란드의 신학자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높이 평가하고 빈번하게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윤선은 개혁주의 교회가 종교개혁 이후에 전통적으로 고백해 왔던 역사적 신앙고백서에 대한 언급과 해설, 그리고 이를 교의화 작업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교리와 성경과의 관계가 교의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다는 방식으로 자신의 근본주의적 사고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후에 발간된 유작의 명칭이 개혁주의 ‘교의학’이 아니라 ‘교리학’으로 명명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놓여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4. 교의학자 이근삼(1962-1994)

이근삼은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개교될 때 첫 입학생으로 입학하여 제 5회로 졸업한 후에(1951.6.27), 미국의 고든칼리지(B.A.)와 카버넌트 신학교(M.Div./Th.M.)를 졸업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네덜란드로 가서 자유대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62년 교수로 임용되어 32년간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 및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 학장, 총장으로 봉사했다. 그는 고려신학대학원과 고신대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치면서 1989년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저술했다. 이 책과 그가 쓴 원고들을 바탕으로 그의 사후에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라는 작품이 두 권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교의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아래에서 총 8개의 부(部)로 이뤄진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의 중심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이근삼의 교의학의 내용과 특징을 설명하고자 한다.

 

5. 이근삼의 교의학의 내용과 특징

5.1. 서론

서론에서 이근삼은 현대 신학계에서 신학의 구분은 주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1:13-15). “조직신학”이냐, “교의신학”이냐 하는 명칭 문제에 있어서 이 박사는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 유럽 계통의 신학에서는 “교의학”을, 영미 계통의 신학에서는 “조직신학”을 선호하지만, “그 근본적인 개념은 동일하다.”라고 주장한다(1:17, 19).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부터 출발하여 조직신학을 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진리와 사실들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관계, 인간 창조, 섭리, 구속, 구원의 과정, 교회, 종말에 관한 일들을 논하는 학문이다.” 조직신학의 유일하고 기초적인 원천은 특별계시인 성경이다. 조직신학의 방법론은 성경에서 신학을 인출하는 종합적 방법이 가장 적절하다(1:22-23). 조직신학의 구조는 신론, 인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이다.

조직신학에서 일반계시(창조역사와 일반적 섭리와 인간 존재구성에 주어진 계시)가 무시되어서는 아니 된다. 하지만 계시의 주요 자료는 성경이며, 조직신학은 오직 성경에 충실할 때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이근삼은 기록된 성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서, 브룬너나 바르트의 실존주의적 계시관을 비판한다. 이어서 그는 자연신학은 독립된 학문 분야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서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성경의 권위성, 충족성, 명료성 등을 다룬다. 또한 성령의 조명이 없이 성경이 정당하게 해석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개혁신학은 이단과 비정통적인 견해에 맞서 신학을 전개하면서도, 스스로 항상 개혁한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 위에 세워지지 않은 신학은 역사에 대한 빛을 무시하고 현재가 역사로 말미암아 조건 지워진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그리고 과거에 의존하는 신학은 현재의 도전을 회피한다.”

 

5.2. 신론

신론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를 다루는 신지식론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이란, 하나님은 완전한 계시를 주시지만 인간의 유한한 이해를 가지고는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완전무결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한다(1:45). 하지만 하나님의 불가해성 교리를 회의주의나 불가지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1:46). 이근삼은 계속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 역시도 초월적 인격신이 아니라 무인격적 원리에 대한 추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비판한다. 또한 자연신학과 함께 일반계시마저도 부인했던 칼 바르트를 비판한다. 일반계시의 존재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시 19, 롬 1-2, 행 14:15-17, 17:22-31). 죄인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 받기 위해서는 특별계시가 필요하다. 이 박사는 특별계시가 인격적 계시임은 인정하지만, 기록된 성경의 객관적 진리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바르트, 브룬너 베일리(John Baillie), 이종성 등을 비판한다.

하나님은 이름에서부터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 특별히 이근삼은 언약적 이름인 “야웨”와 신약에서 중요하게 의미가 부여된 “아버지”라는 이름을 길게 다룬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비공유적 속성(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영원성, 편재성, 유일성[단수성, 단순성])과 공유적 속성을 다룬다(1:100-130).

삼위일체론을 다룰 때에는 성경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을 두루 접목시키면서 이 교리를 교의학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때 유럽의 신학자들과 영미계통의 신학자들을 두루 참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차영배의 작품을 중요하게 소개한다. 먼저 삼위일체론을 정의하면서 신의 한 본체 속에 삼위가 구별되어 존재하시지만 이것은 양태론이나 다신론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겸허설(케노시스 이론) 즉 성자가 성육신 할 때에 신성을 포기했다는 이론과 성부수난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로 나타나서 죽음의 고통을 당했다는 이론은 모두 거부한다. 그리고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소키누스파의 견해 등을 모두 비판한다. 삼위일체론의 다양한 각론들을 다루는 부분은 독립된 책으로 내도 될 만큼 완결성을 갖춘 훌륭한 서술이다.

삼위일체론 이후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다룬다. 하나님의 작정에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하지만 죄행(罪行)은 작정에는 포함되지만 하나님 스스로 행하지 않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 이 근삼은 “허용적 작정”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선택과 유기 모두를 예정 교리의 내용으로 설명한다(1:235, 240). 선택론을 성부, 성자, 성령의 관점에서 설명함으로써 구속 언약 교리의 내용을 설명하며, 실제로 그 교리를 소개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1:235, 292).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성을 다루면서, 둘 다 칼빈주의 내에서 취할 수 있는 입장으로 소개하고 있다(1:240-42). 신론에서 창조와 섭리 또한 다루는데 이 또한 전통적인 방식이다. 창조에서는 삼위일체의 사역으로서 창조, 목적을 가진 창조, 말씀으로 창조, 무에서 유로의 창조를 설명한다(1:243-47). 특히 유출설, 진화론 등을 배격한다(1:24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점을 강조한다. 섭리를 보존(perservation), 협력(concurrence), 통치(government)로 나눠서 설명한다(1:254-57).

 

5.3. 인간론

이근삼은 인간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여러 가지 인간론의 유형들을 다룬다(1:260-64). 그러나 성경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인간론을 가르쳐 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계획 속에서, 직접,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몸과 영혼으로 구분된 인간을 창조하셨다(1:264-65). 이근삼은 “진화론을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작업방법으로 생각”하는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은 창세기 2:7의 진술에 모순된다고 주장한다(1:266). 하지만 6일 창조와 인간 창조에 대해서는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욤”이라는 단어는 24시간인 태양일뿐 아니라, 긴 시대를 가리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넷째 날에 창조된 것도 역시 곤란한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1:301-2).

형상론에서는 구조적 하나님의 형상, 기능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논의를 모두 소개하면서 이근삼은 안토니 후크마를 따라 두 가지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조적 또는 광의적 형상은 보존하고 있으나 기능적 또는 협의적 형상은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형상의 회복을 소망해야 한다(1:273-74). 그럴 때에 하나님, 동료, 피조물을 향한 삼중적 관계성이 회복될 것이다(1:275-76).

이근삼은 이분설과 삼분설 가운데 영혼과 육체의 이분설을 선호한다(1:276-78). 또한 영혼의 기원에 대해서는 선재론과 유전론을 거부하고 창조론을 받아들인다(1:278-79). 타락 전 인간의 상태를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 속의 인간으로 묘사한다. 아담은 인류의 언약적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써 사망이라는 형벌을 받았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죄책과 오염이 발생했다(1:285). 아담의 죄는 그의 후손에게 전가된다. 원죄교리에 있어서 이근삼은 펠라기우스, 반(半)펠라기우스, 바르트주의를 거부한다(1:286).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로 죄인이 된다. 죄의 형벌은 영적 죽음, 고난, 육신의 죽음, 영원한 죽음이다(1:289-90). 이근삼은 일반은총의 개념도 성경적이라고 하여, 스킬더가 아니라 바빙크와 카이퍼의 입장이 옳다고 본다(1:288-89).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타락한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1:287). 이근삼은 인간의 구원을 논할 때에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의 개념에서 다룬다. 구속언약을 짧지만 삼위일체론적으로 잘 풀어내는 것이 특징이다(1:292).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은 구속언약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인간과 맺은 언약이다. 이 언약은 무조건성과 조건성을 함께 지닌다. 하지만 인간의 공로는 절대 개입할 여지가 없다(1:293).

 

5.4. 기독론

기독론에서 이근삼은 그리스도의 명칭을 길게 다룬다(2:17-22). 이때 워필드, 보스, 리델보스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주, 구주라는 명칭이 다뤄진다(2:73-79도 참조). 이어서 그리스도의 신성, 인성, 무죄성, 신인성의 통일성을 다룬다(2:23-36). 이때 칼케돈 회의의 결정을 존중한다(2:34-35).

그리스도의 신분은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말하는데, 벌코프는 이를 그리스도의 인격에 분류하고, 벌카우워는 이를 그리스도의 사역에 포함시켰다. 이근삼은 벌카우워의 입장에 손을 들어준다(2:41).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탄생, 수난, 죽음, 장사되심, 지옥 강하,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 좌정, 재림에 대해 길게 상론한다(2:41-56).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룰 때, 일본 루터파 신학자 기다모리가조의 『신의 고통의 신학』을 길게 소개하고, 지옥 강하에서는 상징적 해석(지옥의 고통을 겪으셨다)을 취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종말론을 함께 논하는 것이 특징이다.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을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의 순서로 길게 논한다(2:57-66). 이 부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논문이 될 만큼 매우 성경적, 신앙고백적, 실제적으로 잘 서술하였다.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서 다루는데, 현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깊이 있게 조사하여 적었기에 학문적으로 아주 깊이가 있다. 조직신학자가 20세기 신약학에서 뜨거운 이슈였던 역사적 예수 논쟁과 공관복음서 문제를 이토록 깊이 다룬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여러 문헌들과 성경 연구를 토대로 이근삼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재구성을 제시하는데, 탄생, 나사렛에서의 생활, 세례 요한과의 관계, 세례, 40일 시험, 유대 선교, 갈릴리 선교, 비유와 이적, 수난,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과 승천을 다룬다(2:88-117). 보통 기독론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간략하게 취급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상세하게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것은 이근삼의 성경신학적 안목과 깊이의 탁월성을 의심할 여지없이 잘 보여준다.

 

5.5. 성령론

이근삼의 조직신학을 읽으면서 또 한 가지 감탄한 부분은 그의 성령론이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교의학 서적들에서 성령론에 대한 집중적 서술은 매우 취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근삼의 조직신학은 성령론을 한 장(章)을 할애하여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것은 그가 성령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따로 연구를 진행했음을 말해준다.

먼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나타난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세밀하게 다룬다. 그리고 교회사에 현대신학에서 나타난 잘못된 성령이해를 소개하고 논박한다(2:135-43). 성령의 신성을 성령의 명칭, 성부/성자와 일치성, 사역에서 설명한다(2:144-50). 이것은 교부시대로부터의 전통이다. 특히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성을 다루는데, 영-기독론을 제시하지 않고서도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성을 이렇게 밀접하게 연결시킨 것은 매우 성경적이며 탁월한 시도이다.

이근삼의 성령론에 나타난 특징은 매우 실제적이라는 데 있다. 성령과 특별구원의 은혜를 다룬 대목에서는 중생, 성령세례, 성령의 내주, 성령충만, 성령의 은사 등을 심도 있게 다룬다(2:161-88). 특히 이근삼은 성령세례가 믿고 나서 주어지는 두 번째 은혜와 같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신자가 됨과 성령 받음은 일치하며, 이때 성령 받음이 바로 성령세례이다(2:169).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유일회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았다(2:171, 173).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영속적 결과를 낳는다(2:173). 그는 오순절파에서 말하는 성령세레 이론을 자세히 소개하지만 로마서 6장을 근거로 거부한다(2:174-77). 중생한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내주하신다(2:177-79). 성령의 내주는 모든 신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일평생 주어지는 은혜이다. 하지만 성령충만은 순종이 조건적이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충만은 반복적으로 경험된다. 그 조건은 성령을 소멸치 않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으며,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2:181-82).

성령은 신자들의 성화, 영적이해, 확신, 봉사, 기도, 예배, 은사 등을 발생시키는 분이시다(2:183). 특히 성령의 은사 교리를 잘 이해해야 한다. 사도 시대에만 주어졌던 일시적 특수 은사가 있는데, 사도권, 예언, 기적, 신유, 방언의 은사 등이다. 그러나 이근삼은 오늘날에도 병고침의 체험은 가능하며, 방언도 계속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성경적 사용을 위해 유의해야 한다(2:187-88, 266). 성령의 주요 사역은 구원의 서정에서 잘 나타난다(2:188). 이것을 이어지는 제 2권 3부에서 다룬다.

 

5.6. 구원론

구원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이 이를 가르쳐 준다. 구약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며, 역사 안에서 성취되었고, 적으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여호와께로 해방이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고, 종말론적 전망을 가진다(2:194-95). 공관복음에서 구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병행된다. 요한복음에서 구원은 영생을 얻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구원의 가장 완전한 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속물로 희생제사로 주셨고, 희생적·대표적·대리적 죽음을 당하셨다. 이것이 과거 사건으로서의 구원이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2:198-99). 이근삼은 속죄의 역사성과 완전성을 옹호하면서 불트만을 비판한다(2:205). 특별히 그는 칼 바르트의 만인구원론을 강력하게 비판한다(2:209, 254-59). 대신에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도르트 신조(1619)로 제시한다(2:210).

구원의 적용은 삼위일체적으로 진술된다(2:211).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는 “부르심-중생-믿음과 회개-칭의-양자 삼으심-성화-인내-영화”의 순서를 제시한다(2:215). 이 각각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성경적이고 삼위일체적이다(2:215-53). 특히 그는 “흥분된 부흥주의에서 일어나는 일시적 변화에는 내용 없는 신앙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값싼 결심”에서 나오는 신앙을 비판한다. 칭의를 설명하면서 소극적으로는 벌 받을 의무에서의 해방으로, 적극적으로는 양자의 신분을 받는 것이라 설명한다(2:233). 능동적 혹은 객관적 칭의와 수동적 혹은 주관적 칭의를 모두 인정한다(2:234). 성화론에 있어서는 완전주의 성화론을 배격하면서도, 성화의 실제적 과정을 중시하여 기도, 말씀 묵상, 예배를 매우 강조한다. 또한 선행이 절대 공로가 될 수 없음을 매우 강조하면서도 선행의 필요성을 또한 힘주어 말한다(2:246-48, 227). 이처럼 이근삼의 구원론은 매우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성도의 견인(인내) 교리를 설명하면서 그 증거로 예정론, 구속언약,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능,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영생의 약속, 구원의 확신의 증거를 제시하는데, 오늘날 횡횡하는 반(半)펠라기우스적 구원론과 바울에 대한 새 관점주의자들의 이중칭의론을 반박하는 데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2:250-51). 이처럼 이근삼의 구원론은 성경적으로 형성된 구원론은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신선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5.7. 교회론

교회론을 다룰 때에는 가장 중요한 네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피조물, 신앙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이 그것이다(2:262-68). 이근삼은 칼빈을 따라,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개념을 모두 인정하지만, 현실의 교회를 절대로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2:264). 이어서 교회의 명칭으로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택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소개하는데 이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권을 따른 것이다(2:269-72). “교회는 말씀을 소유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믿음을 유지시키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곳이다.”라고 이근삼은 주장한다(2:270). 직분자를 세운 것도 역시 하나님의 권위의 지속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그의 교회론은 매우 하나님 중심적이다(2:271). 교회관에 대한 루터, 멜랑히톤, 칼빈, 부써, 낙스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2:273-82). 이근삼은 교회의 참된 표지에 말씀 전파, 성례(세례와 성찬)의 집행, 권징을 넣는다(2:283-96). 그는 직분자에게 말씀을 주신 것을 강조하며, 성례의 집행자도 안수 받은 목사임을 강조한다(2:283, 290). 성찬론에 있어서는 루터의 공재설, 츠빙글리의 상징설,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모두 거부하고,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2:291-92, 112, 323).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한다(2:293). 이 부분에서는 전반적으로 칼빈을 많이 따르지만, 교회의 속성으로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설명할 때에는 벌카우워의 교회론을 소개한다(2:297-304). 특히 사도성은 목사직의 직무 속에서 전수됨을 강조한다(2:303). 이처럼 교회론을 논할 때에 직분론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이근삼의 교회론의 특징이다. 그는 칼빈을 따라 목사, 교사, 장로, 집사직 가운데, 교사직은 목사직에 흡수된 것으로 본다(2:306-8). 이어지는 장에서는 흥미롭게도 성부와 교회, 성자와 교회, 성령과 교회라는 식으로 삼위일체와 교회의 관계성을 다룬다(2:309-12). 교회론의 마지막 장에서는 역사적 교회의 유형들을 다루는데 일종의 비교교회론이다(2:313-41).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퀘이커 교회, 오순절교회를 매우 심도 있게 다룬다. 이것을 보면 이근삼이 교회론에 대해서도 수준 있는 연구들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5.8. 종말론

먼저 종말론이 현대 성경신학에서의 강조로 인해서 기독론, 인간론, 교회론에 두루 접목되어 있음이 지적된다(2:345). 종말론을 다룰 때에도 역시 구약과 신약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성경적인 접근이 눈에 뛴다. 재림에 대해 다룰 때에는 현대 성경신학에서의 실현된 종말론, 철저 종말론(슈바이처), ‘이미’와 ‘아직’의 구조(쿨만) 등을 다루는데, 소개할 뿐 아니라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성경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천년왕국설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룬다(2:388-98). 천년왕국 후 재림설을 주장한 후천년설과 천년왕국 전 재림설을 주장한 전천년설을 모두 비판한 후에, 무천년설이 “개혁주의 교회의 가장 우세한 종말론적 사상”이라며 옹호한다. 종말론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심판에 대해 다룬 후에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서술한다(2:399-409). 그리스도인은 재림을 대비하고, 대망하고, 인내로 기다리며, 주의 재림을 기뻐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며, 전도를 하며, 진리에 충성하며, 은혜 중에 성장하며,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재림을 기다리는 자는 주어진 일에 열심하고 영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임무를 충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자신의 삶과 신학의 태도를 요약하는 것처럼 들린다(2:409).

 

5.9. 교의학의 특징에 대한 평가

이근삼의 교의학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은 아래와 같다.

첫째, 성경적이다. 책 전체에 성경을 계속 인용하고 있다. 또한 성경신학자들의 글을 종종 인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예수의 생애를 다룰 때 아주 두드러진다. 어떤 주제든지 구약과 신약의 중요 구절들을 다룬다.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주석도 첨가한다.

둘째, 교의학을 저술하면서 고대의 자료뿐 아니라, 현대의 자료들을 두루 인용한다. 칼빈과 바빙크를 종종 참조하지만 일변도는 아니다. 대륙의 개혁신학자와 영미계통의 개혁신학자를 모두 참조한다.

셋째, 신앙고백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벨직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등 개혁교회 신조들을 두루 인용한다.

넷째, 삼위일체론적이다. 비록 구조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잡지는 않았지만, 어떤 교의든지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다루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다섯째, 성령론을 포괄적으로 다룬다. 다른 개혁주의 교의학 서적들보다 훨씬 풍부하게 성령론을 다룬다. 그리고 단지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신앙과 실제적인 주제들(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의 내주, 성령의 은사 등)을 다룬다.

여섯째, 현대 독일 신학자들의 신학을 줄기차게 비판한다. 불트만, 브룬너, 바르트, 슈바이처 등 현대 독일 신학자들의 문제점을 자주 거론하며 비판한다.

일곱째, 개혁주의적 특징이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다룰 때나, 교회론을 다룰 때에 개혁주의적 특징이 매우 잘 나타난다.

 

6. 교의학자 이환봉 (1981-2015)

이환봉의 신학적 여정과 주요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신득일이 잘 다룬 바 있다. 신득일은 “이환봉 교수의 신학적 키워드는 성경관, 역사비평, 칼빈신학, 개혁주의, 기독교대학”이라고 규정하고 각각의 주제들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아쉽게도 이환봉이 교의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와 사상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과연 고신대학교에서 35년(1981-2015년) 가까이 교의학 교수로서 봉직한 이환봉의 교의학은 어떤 내용과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아래의 내용에서는 그 점을 다루고자 한다.

 

7. 이환봉의 교의학

7.1. 교의학의 명칭과 요소와 정의

교의학자로서 이환봉에 대해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사실상 그가 썼던 글 전체를 살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수는 어떤 주제든지 교의학적인 안목과 방법론을 가지고 글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 교수의 교의학에 대한 견해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교의학이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교의학에 대한 그의 관점들을 정리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오늘날 “교의학”에 해당하는 신학서들의 역사적 개관을 한 다음, 이환봉은 “‘조직신학’과 ‘교의학’ 중에 어느 명칭이 더 타당한가?”라는 굵직한 질문을 다룬다. 그는 반틸과 틸리히를 비판한 후에, “조직신학”이라는 명칭보다는 “교의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는 성경을 인위적 원리에 따라 조직하려는 태도는 경계하지만,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쫓아가는 중생한 이성의 지성적 행위를 통해 조직적으로 연구하고 형식적으로 잘 정돈하여 새롭게 진술”하려는 노력은 긍정한다. 이런 점에서 이환봉은 균형을 잘 잡고 있다. 그런 균형 감각은 하나님에 대한 가지성과 불가해성을 다룰 때에도 나타난다. 한편으로 이환봉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본질 전체를 다 파악하고 완해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 지식의 불가완해성”은 “하나님 지식의 가지성(可知性, knowability)”을 전제로 함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진리 안에서는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교의학을 정의 내리는 부분에서 이환봉은 그의 글에서는 아주 보기 드물게 바빙크를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교의학이란 성경에 철저히 복종하면서 교회가 고백한 교의들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새롭게 설명하고 표현함으로써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라고 교의학을 정의한다. 여기서 그는 “성경에 철저히 복종하면서” 교의를 연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렇게 성경의 권위와 중요성을 천명한 것은 이환봉의 평소 관심사를 잘 드러내 준다. 그는 신학자가 오직 성경을 따라 그리고 모든 성경을 따라 연구하고 표현할 때에만 온전히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7.2. 교의학의 학문성과 위치와 다른 신학 분야와의 관계

이환봉은 교의학이 “학문”의 성격을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 하여 그가 신학을 “지혜”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을 떠난 것은 아니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루터 등을 다룬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이후의 지적 풍토를 언급한다. 이런 견해들을 총체적으로 고찰한 후에 이환봉은 신학(좁게 보아 교의학)도 학문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스코투스, 루터 등이) 말한 신학의 실천적인 요소는 (아퀴나스 등이 말한) 신학의 학문적 요소와 대립되지 않으며, 오히려 신학을 모든 학문의 정상에로 올려 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교의학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교의학과 윤리학의 관계와 교의학과 변증학의 관계를 다루면서 교의학의 위치가 정치(定置)된다. 이환봉은 교의학과 윤리학의 유기적인 관계성을 강조한다. 그는 “교의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체계이며, 윤리학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체계다.”라고 한 바빙크의 말을 의미 있게 인용한다. 이어서 이환봉은 교의학과 변증학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 그는 워필드를 비판한다. 워필드가 변증학을 일종의 무전제의 중립적인 학문분과로 보고 다른 모든 신학과목들(주경신학, 교의신학, 역사신학, 봉사신학) 앞에 두어 그 과목들의 기본적 규범원리들을 수립시켜 주는 학문분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하고 카이퍼와 바빙크를 따라 이환봉은, 지성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기 전에 먼저 성경이 어떤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변증학을 교의학 뒤에 두고자 하는 그의 관심은 결국 성경을 중심으로 신학을 하려는 그의 기본적 입장을 잘 반영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교의학과 성경신학이 상호의존적이어야 하며, 상호 풍요화를 위해 협력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 외에도 역사신학과 교의학의 관계, 봉사신학과 교의학의 관계도 강조한다. 특별히 이환봉은 설교학과 교의학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긴 지면을 할애한다. 그는 “설교는 교의학의 심장과 영혼이고 교의학은 설교의 지성과 양심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둘의 관계를 정립한다. 그는 “신학은 설교자들을 위해 설교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라는 에벨링(G. Ebeling)의 말과 그 말을 역으로 표현한 “설교는 신학자를 위해 신학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모두 소개한다.

요약하자면, 이환봉에게 교의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세상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 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뜻”(the whole counsel of God, 행 20:27)을 체계적이며 포괄적인 형태와 정확하고도 효율적인 서술을 통하여 드러내는, “모든 신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7.3. 교의학의 분류와 방법론

이환봉은 교의학을 서술하는 구조에 따라서 교의학을 분류한다. 제일 먼저, 삼위일체론적 방법이 논의된다. 그는 바빙크의 주장에 근거하여 모두 6가지 이유를 들어서 이 방법론이 교의학의 구조를 결정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 방법론은 삼위의 각 위의 사역을 상호분리하여 삼위의 일체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방법론은 삼위의 사역을 다루기 전에 선행하는 별도의 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취급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다. 셋째, 이 방법론은 하나님의 외적 사역들을 위격들의 사역들로 이해하고서 삼위의 공동적 사역으로 거의 살피지 않게 된다. 넷째, 이 방법론은 삼위일체를 단지 경륜적으로만 파악할 위험이 있다. 다섯째, 이 방법론은 교의학의 논제들을 삼위일체의 위격들 아래에 두고 나눔으로써 그 논제들은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다. 여섯째, 이 방법론은 쉽게 사변화 될 수 있고, 신통기(神統記)적 서술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이환봉은 삼위일체적 구성을 따라 교의학을 서술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어서 그는 분석적 방법, 언약론적 방법, 기독론적 방법, 왕국 개념에 기초한 방법론을 다루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검토되는 방법론은 종합적 방법론이다. 이것은 바빙크의 “발생론적-종합적 방법론(Genetic-Synthetic Method)”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환봉은 이 방법론이 “가장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통일성을 산출할 수 있는 분류 방법”이라고 규정한다. 이 방법론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사역으로 내려가지만, 그것은 다시 그 사역들을 통해 하나님께로 올라가 하나님에게서 끝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이 시작과 중간과 끝”이 되는 방법론이다. 바빙크가 말하듯이 이 방법론은 (1) 하나님의 계시에 예시된 것과 같은 역사적 과정을 따르는 방법론이며, (2) 선험적인 사색에 대한 기회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신학의 실증적 특성을 가장 잘 보존하며, (3) 다른 학문들처럼 가장 단순한 요소들 혹은 원리들에서 시작하여 복잡한 체계로 진전하는 방법론이기에 교의학의 방법론으로 가장 적절하다. 이환봉은 이 방법론에 따라서 신학의 주제들을 신론, 인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구성하는 교의학 구성을 제안한다.

교의학의 주재료를 얻는 출처는 성경, 교회의 가르침, 신자의 의식이라는 세 가지가 있는데, 각각을 앞세우는 방법론을 성경적 방법, 전통적 방법, 주관주의적 방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이환봉은 성경적 방법, 전통적 방법, 주관주의적 방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해서는 안 되고, 통합적 방법을 취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 철저히 복종하면서” 교의학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환봉의 교의학 방법론이 균형을 추구하면서도 성경에 근거를 두려는 방법론임을 알게 된다.

 

7.4. 교의학의 기능과 원리

교의학의 기능을 다룰 때 이환봉은 세 가지 기능 즉, 재생적 기능(orthodoxy), 생산적 기능(orthopraxy), 예견적 기능(orthopraedixy)을 제시한다. 재생적 기능이란 교의들의 성경적, 전통적 근거를 살피는 것이다. 생산적 기능이란 교의를 현실과 관련시켜 기독교적 의미와 행위를 창출하는 것이며 예견적 기능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 교의의 미래 관련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교의학의 원리를 다룰 때에 이환봉은 신칼빈주의와 같은 견해를 제시한다. 일반 학문에서 존재 원리는 하나님이다. 모든 지식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일반 학문에서 인식의 외적 원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혹은 일반계시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내적 증거에 근거한 신앙이 신학의 내적 인식 원리가 된다. 이환봉은 교의학을 위한 인식의 내적 원리로서 이성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는 박형룡을 비판한다. 박형룡은 신학에서 이성의 자리를 높이고, 인간 이성에 의한 합리적 유신논증인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에 대한 신뢰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환봉은 이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성이 신학 작업의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원리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환봉은 개혁주의적 견해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앎에 이른다(per fidem ad intellectum).

 

7.5. 교의학 연구의 자세와 개혁신학의 과제

교의학 연구 자세의 기본은 “기도”와 “겸손”과 “찬양”이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종교개혁 이후 경건주의, 합리주의, 칸트, 슐라이어마허, 체험 신학, 리츨, 트뢸취, 사신신학, 본회퍼, 몰트만, 정치신학, 해방신학 등을 간략하게 다룬 이후, 이환봉은 “오직 성경” 즉, 성경 무오성에 근거한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신학이라 역설한다.

 

7.6. 이환봉의 교의학의 특징

이환봉의 교의학 서론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세 가지이다.

첫째, 성경적 신학을 추구한다. 이것은 그의 교의학 정의나 교의학과 타 신학 분과와의 관계성을 다룬 곳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변증학을 교의학 뒤에 두고자 하는 이환봉의 관심은 신학에서 성경을 가장 우위에 두고자 하는 그의 기본적 입장을 잘 반영한다.

둘째, 균형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교의학에 대한 지혜 전통과 학문 전통을 두루 소개한 후에, 비록 학문 전통에서 교의학 작업을 하고자 하나, 지혜 전통 역시 무시하지 않는 대목에서 이런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교의학의 방법론을 다룰 때에도 역시 성경과 전통을 대립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 조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주의적 극단과 로마 가톨릭의 극단을 둘 다 피하고, 성경과 전통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사대주의적이지 않고 독립적인 신학을 추구한다. 비록 이환봉이 교의학 서론 전반에 걸쳐서 헤르만 바빙크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인용하지만, 때로는 그를 비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교의학을 정의내릴 때에 바빙크의 정의를 여러 면에서 비판한 것이다. 또한, 교의학과 변증학의 관계를 다룰 때에도 찰스 하지나 B. B. 워필드를 비판하였다. 이성을 신학의 원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때에는 박형룡도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이 교수의 신학은 전통을 마냥 반복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성경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8. 나가는 말

고신대학교 설립 70주년을 맞이하면서 본 논문에서는 고신의 교의학자들이 지난 70년 동안 어떻게 개혁주의 교의학을 형성, 계승, 그리고 발전시켜 왔는가를 박윤선, 이근삼, 이환봉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주경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박윤선은 당시 고려신학교의 거의 모든 교과목을 교수하는 가운데 교의학을 교수하면서 바르트를 위시한 다양한 현대신학의 도전에 맞서서 개혁주의 신학의 변증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 글에서는 그의 교의학적 사고를 재고하기 위해서 특히 1960년까지 발간된 성경주석 7권을 중심으로 박윤선의 계시론, 기독론, 그리고 구원론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주석들에는 당대의 신학, 특히 칼 바르트의 초절주의적 신학에 대한 비판이 집중적으로 제기되었으나 근본주의적 신학 성향이 여전히 잔존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박윤선의 뒤를 이어 1994년까지 교의학을 가르쳤던 이근삼은 2권으로 구성된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를 남겼는데 이 글을 통해서 그의 교의학적 사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교의학은 칼빈과 바빙크의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히 수용하고 이를 해설하였다. 이근삼의 공헌은 박윤선이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비판을 가했던 바르트를 위시한 다양한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이를 날카롭게 비판했을 뿐 아니라, 박윤선의 근본주의적 경향을 신앙고백서를 중요시하는 역사적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수정 발전시킴으로써, 고신 교의학의 지평을 더욱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2015년까지 교의학자로서 봉직했던 이환봉은 특히 개혁주의 성경관을 전공한 학자로서 성경의 원리에 충실한 교의학 서론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그의 교의학은 칼빈과 바빙크를 위시한 개혁신학의 원리와 방법론에 충실한 개혁주의 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환봉은 바빙크나 워필드, 그리고 박형룡을 비롯한 개혁신학의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는 사대주의적 경향을 탈피하여, 이들의 신학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성경적 원리를 중심으로 비판하는 독자성을 지닌 개혁주의 교의학을 표방했다고 볼 수 있다.

 

Abstract

 

Dogmaticians of Kosin University: With a Tribute to Park Yoon Sun, Lee Kun Sam & Lee Hwan Bong

Samuel Lee & Woo, Byunghoon (Associate Prof. & Assistant Prof. of Dogmatics in Kosin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articles is to evaluate dogmatics of Kosin University in its commemoration of 70th anniversary of its foundation. In order to achieve this goal, three dogmaticians of Kosin have been chosen and their theologies are evaluated: Park Yoon Sun (1946-1960), Lee Kun Sam (1962-1994), and Lee Hwan Bong (1981-2015). First of all, Park Yoon Sun, despite being the biblical theologian of Korea Theological Seminary, had been given a role to teach dogmatics. Three dogmatic characteristics in Park’s understanding of the doctrine of revelation, christology and soteriology as following. First, his dogmatics is founded on the background of his biblical theology. Second, his dogmatics exhibits a strong apologetic flavor. Third, an appreciation for historic Reformed theology is relatively lacking due to a fundamentalistic tendency in his dogmatics. Lee Kun Sam, in his pursuit of dogmatics based on historic Reformed theology, has established a uniquely biblical pneumatology. He has been effectively dealing with many problems raised by different kinds of modern theologians while being faithful to the Reformed tradition of John Calvin and Herman Bavinck. The dogmatics of Kun Sam Lee was biblical in its overall characteristics, and confessional as well as trinitarian in its details. Lastly, Lee Hwan Bong, trained as a Reformed dogmatician in the doctrine of Scripture, has substantiall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prolegomena in dogmatics. By reviewing views of many Reformed theologians without losing balance, he has pursued dogmatics in his own way not by simply following understandings of many Reformed theologians including Charles Hodge, B. B. Warfield and Park Hyong Nong, but by critically pointing out difficulties and problems initiated by them with a deep sense of respect for the principles derived from Holy Scriptures.

 

Key Words

Kosin University, Dogmatics, Reformed Theology, Park Yoon Sun, Lee Kun Sam, Lee Hwan Bong

고신대학교, 교의학, 개혁주의 신학, 박윤선, 이근삼, 이환봉

 

◆미주

1) 이근삼,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교회』, 한국의 개혁주의자 이근삼 전집 2 (서울: 생명의 양식, 2007), 405.

2)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고신의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간략한 평가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신원하, “개혁주의 윤리학과 도덕적 실천: 고려신학대학원 윤리학에 대한 회고와 제안”, 『하나님 앞에서: 개교 50주년 기념 논문집』 (부산: 고려신학대학원출판부, 1996), 85-91.

3) 참고로 현재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에 재직 중인 교의학자들 (유해무, 박영돈, 이신열, 우병훈)에 대한 평가는 이 논문에서 제외되었다.

4)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정암 박윤선 목사 자서전』 (서울: 영음사, 1992), 107.

5) 그의 <로마서 주석>에는 바르트 비판을 위한 섹션을 따로 둘 정도로 엄청난 심혈을 기울였는데 거의 1-8장에 대한 주석에는 거의 모든 장에 걸쳐서 바르트의 신학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계시, 성경신앙, 중생, 칭의, 성화 등의 다양한 교의학적 주제들에 대해서 바르트의 견해를 소개하고 어떤 차원에서 그의 주장이 비개혁신학적인가를 자세하게 논증하였다. 바르트 신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통해서 교의학자로서 박윤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바르트 비판은 이미 그가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박윤선, “바르트의 성경관 비판”, 「신학지남」, 1937년 7월; “바르트의 계시관 비판,” 「신학지남」, 1937년 9월. 그의 사후에 유고로 출판된 <개혁주의 교리학>에는 해방신학, 폴 틸리히의 신학, 세속화 신학, 희망의 신학, 그리고 과정신학을 포함한 다양한 20세기 신학자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다룬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박윤선, 『개혁주의교리학』 (서울: 영음사, 2003), 579-600.

6)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장동민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242; 박형용, “박윤선의 생애와 신학 사상”,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 합동신학교출판부 (편) (수원: 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104. 서영일은 계시록 주석의 출판을 1949년 3월로 언급하지만, 박형용은 이를 1955년으로 간주한다. 서영일이 주장하는 1949년 판은 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것이 아니라 고려신학교에서 인쇄되었다. 박윤선은 ‘머리말’에서 1934년 유학길에 오르면서 계시록 주석을 작성하기로 결심한 후 15년간의 연구 끝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7)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108. 이 기간 동안에 발간된 단권 주석은 모두 7권인데 주석의 대상이 되었던 신구약 성경은 모두 14권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는 25권에 해당된다(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로마서, 요한계시록,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 시편, 요한복음).

8) 박윤선, 『구약주석 시편 (상)』 (서울: 영음사, 2002), 176-88 (시 19 강요). 자연계시를 가리키는 천연계시라는 용어와, 특별계시 대신에 특수 계시와 성문계시라는 용어들도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9) 박윤선, 『신약주석 로마서』 (서울: 영음사, 1994), 37.

10) 박윤선, 『구약주석 시편 (상)』, 180-81 (시 19:7 주석).

11) 박윤선, 『신약주석 로마서』, 38 (롬 1:22 주석); 권성수, “박윤선 박사의 성경해석학”,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 202-203.

12)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상)』 (서울: 영음사, 2000), 276-82, 286-87 (마 11:25-30 설교). 이는 또한 추론적 사색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박윤선은 어거스틴의 인식론이 계시에 근거한 계시 의존적 사색임을 밝히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은 어거스틴의 추론적 사색을 받아들이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아울러 취하는 이원론적 사색에 임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추상적 사색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신론적이며 계시 의존적 사색에서 벗어나서 만유재신론적 사고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13) 김영재, 『박윤선: 경건과 교회 쇄신을 추구한 개혁신학자』 (서울: 도서출판 살림, 2007), 205.

14)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부산: 고려신학대학원출판부, 1996), 89; 이근삼,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교회』, 405. 이근삼은 박윤선으로부터 개혁주의 신학, 계시의존 사색, 하나님 말씀중심,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영광 등에 대해서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고 밝혔다.

15) 김영재, 『박윤선』, 208.

16) 선행연구로는 다음을 참고할 것. 김정우, “박윤선 시편주석에 나타난 기독론적 해석”,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 합동신학교출판부 (편), 131-50.

17) 박윤선, 『구약주석 시편 (상)』, 54-55.

18)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289 (골 1:15 주석).

19)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상)』, 117 (마 3:17 주석).

20)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188 (요 5:26 주석).

21)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293 (골 1:19 주석).

22)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하)』, 435 (요 14:10 주석), 508 (요 17:21 주석).

23)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85 (요 1:50 주석).

24)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하)』, 440 (마 16:17 주석).

25)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하)』, 451 (마 17:5 주석).

26)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86-87 (요 1:51 주석); 『신약주석 공관복음 (상)』, 245 (막 2:28 주석).

27)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하)』, 438 (마 16:16 주석).

28)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131-32 (요 3:34 주석).

29)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상)』, 234 (눅 5:23 주석).

30) I. Calvinus,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Brunsvigae: C. A. Schwetschke et filium, 1863-1900), vol. 47, col. 63 (요 3:14 주석). 이하 CO로 표기함.

31)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290 (골 1:15 주석).

32)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62 (요 1:3 강해).

33) 박윤선, 『구약주석 시편 (상)』, 301 (시 33:6 주석).

34)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128 (엡 1:22 주석).

35)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291 (골 1:17 주석).

36)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66 (요 1:3 주석).

37)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189 (요 5:27 주석).

38)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계시록』 (서울: 영음사, 2002), 51-52 (계 1:8 주석).

39)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계시록』, 323 (계 19:11 주석).

40)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계시록』, 324 (계 19:13 주석).

41)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계시록』, 46.

42)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하)』, 438-39 (마 16:16 주석).

43) 박윤선, 『구약주석 시편 (하)』, 882-83 (시 110:1-3 주석); 김정우, “박윤선 시편 주석에 나타난 기독론적 해석”, 142-43. 박윤선이 이 시편의 구약적 배경 지식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44) 칼빈은 이 구절을 ‘우리 구원 전체의 성패가 판가름 나는 기로’라고 밝힌다. 『기독교 강요』, 2.15.6.

45)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하)』, 539 (요 18:37 설교).

46) 그의 성령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에 대한 평가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최윤배, “정암의 성령신학”, 「한국개혁신학」 25 (2009), 34-83; 이승구, “정암의 개혁파적 교회론에 대한 한 고찰”, 「한국개혁신학」 25 (2009), 118-51; 이신열, “박윤선의 개혁주의적 종말론”, 「한국개혁신학」 25 (2009), 182-213.

47)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119-20 (요 3:5 주석).

48)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187 (요 5:25 주석).

49) CO 47, 56.

50)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132 (엡 2:5 주석); 『신약주석 로마서』, 195 (롬 6:4 주석).

51)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217-18 (요 6:44 주석).

52)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하)』, 425-29 (마 15:21-28 설교).

53) 박윤선, 『신약주석 공관복음 (하)』, 437-38 (마 16:15 주석).

54) 박윤선, 『구약주석 시편 (중)』, 479 (시 51:7 주석).

55) 박윤선, 『신약주석 로마서』, 288 (롬 10:14 주석).

56) 박윤선, 「파수꾼」 (1950.5), 24.

57)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하)』, 415-16 (살전 2:14 주석); 『신약주석 로마서』, 289 (롬 10:15 주석).

58)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126 (요 3:16 주석).

59)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하)』, 363 (요 11:16 2석).

60) CO 47, 143;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상)』, 215.

61) 박윤선, 『신약주석 로마서』, 130 (롬 4:3 주석).

62) 박윤선, 『신약주석 로마서』, 170.

63) 박윤선, 『신약주석 로마서』, 286 (롬 10:4 주석);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254 (빌 3:9 주석). 참고로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칭의를 위해서 획득하신 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고 다른 곳에서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박윤선, 『개혁주의교리학』, 332.

64)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299-300 (골 1:22 주석).

65) 박윤선, 『신약주석 요한복음 (하)』, 507-508 (요 17:19 주석).

66) 박윤선, 『구약주석 시편 (하)』, 925 (시 119:10-12 주석).

67)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하)』, 415-16 (살전 2:13 주석).

68) 박윤선, 『신약주석 바울서신 (상)』, 135 (엡 2:10 주석).

69) 박윤선, 『신약주석 히브리서 · 공동서신』, 310.

70) 이상규, 『교회 쇄신 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서울: 생명의 양식, 2016), 418.

71)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이근삼 전집 5)』(생명의 양식, 2007), 해제 참조. 이 1권은 서론, 신론, 인간론을 다루고 있다.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이근삼 전집 6)』(생명의 양식, 2007)은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다루고 있다. 이하에서 이 책들의 쪽수를 간략하게 표기할 때에 “권수:쪽수”의 표기법을 따르겠다. 예를 들어 1:17은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17을 뜻한다.

72)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1. 이 정의를 위해서, 워필드, 바빙크, 카이퍼, 하지 등을 인용한다.

73) 이것은 박형룡도 인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환봉 교수는 박형룡의 이런 경향성을 비판했다. 박형룡, 『교의학 서론』, 177;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31 참조. 문제는 이근삼 박사는 나중에 신 존재 증명을 구체적으로 다룰 때, 우주론적 증명 및 목적론적 증명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74)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7.

75)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7-28.

76)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9.

77)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36-42. 하지만 이런 구조는 편집자의 것인지, 이근삼 박사의 것인지 불확실하다. 이 글에서는 책의 구조를 따르되, 중복되는 부분은 함께 엮어서 다룰 것이다.

78)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30-31.

79)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32-35.

80)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34-35.

81) 하나님 존재 증명에 대한 비판은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79-86에도 발견된다. 여기에서는 존재론적, 우주론적, 목적론적 증명을 비롯한 제 증명들을 모두 비판한다.

82)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55-62.

83)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63-66. 특히 이종성은 신론에서 여러 번 비판 받는다(1:64, 각주 48, 246, 각주 198, 248, 각주 200).

84)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87-99. 신약에서 “아버지”는 300번 이상 살아계신 인격으로 나타난다고 한다(175).

85) 이런 방식은 17세기 개혁파 신학의 속성론 분류와 설명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방식을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바빙크도 이런 방식을 따른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2』, 박태현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30, 31장. 속성론에 대한 분류법을 자세히 소개한 문헌으로 아래를 보라. 리처드 멀러,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김용훈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251-344.

86) 성경적 접근은 특히 아래에 잘 나타난다.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156-98.

87)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131-151. 차영배, 『삼위일체론』(신론)으로 소개되어 있다(139, 각주 118).

88)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182, 201. 그런데 “우리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이 십자가에서 죄의 심판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속한다.”라는 말을 남겼으며(『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07), 또한 기다모리 가조의 『신의 고통의 신학』을 길게 소개한다(『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 43 이하). 이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는지 서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성부수난설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89)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03-228. 발출과 발생의 구분도 다룬다(225). 특히 성령의 사역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접촉의 완성이며 온갖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종결이다”라고 멋지게 요약한다(227).

90)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31. 그런데 여기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3.23.7을 인용한다. 하지만 인용한 부분을 보면 칼빈은 “허용”의 개념을 매우 비판하였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허용”의 개념을 중요하게 제시하였다. 한편, 벌카우워도 허용설을 반대한다는 사실이 지적된다(1:255). 하지만 아담의 타락과 죄에 대해서는 허용설이 개혁주의 신학자의 견해라고 소개한다.

91)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72-73. 스킬더가 바빙크의 실재적이고 존재론적 형상론을 거부하고 윤리적 해석을 내세운 것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윤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현대 철학의 인간학의 방향과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라며 일침을 놓는다(1:305-6). 여기서 말하는 현대 철학의 인간학의 방향이란 인간의 본질을 되어감에 두는 실존론적 인간학을 가리킨다(1:297-98).

92)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79-80. 인간론은 여러 면에서 헤르만 바빙크의 구조와 어휘가 유사하다.

93)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07;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 379도 참조.

94) 이것은 개혁신학이 성령론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론, 창조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등에서 개혁신학은 언제나 성령을 말해왔다. 하지만 몇몇 예를 제외하면 성령론을 하나의 독립된 장(章)이나 책으로 깊이 있게 다룬 개혁신학자는 많지 않다. 바빙크조차도 성령론을 구원론과 교회론에 포함시켜 다룬다.

95)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 133에서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는 사상에 대해, 어거스틴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인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출처가 없다. 이러한 근거가 없는 인용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인용할 때도 한 번 나타난다. 2:157에서 『기독교강요』, 2.2.16을 인용하면서 물리학, 논리학, 수학 등이 “일반은혜의 사역의 결과”라고 따옴표를 쳐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은 “일반은혜”라는 말을 거기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

96) 바르트의 만인구원론에 대해서는 아래 논문을 보라. B. Hoon Woo, “Karl Barth’s Doctrine of the Atonement and Universalism,” Korea Reformed Journal 32 (2014), 243–91.

97)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 240-246. 완전주의에 대한 비판의 일부는 오늘날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비판할 때에도 유용하다. 새 관점주의자들 역시 완전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법의 표준을 낮추고 죄의 관념을 약화시킴으로써만 미래 칭의를 종말까지 살아낸 삶에 근거하여 받는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98) 1541년과 1561년의 교회 헌법에서 칼빈은 목사(pastores), 교사(doctores), 장로(presbyteri), 집사(diaconi)의 네 가지 형태로 직분을 구분했다. 오토 베버, 『칼빈의 교회관』, 김영재 옮김(서울: 도서출판 풍만, 1985), 65. 칼빈이 이렇게 직분론을 구체화시킨 것에는 부서(Bucer)의 영향이 컸다. 빌름 반 엇 스페이커르, 『칼빈의 생애와 사상』, 박태현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131. 스페이커르는 “교회관에 있어서, 칼빈은 전적으로 부서와 외콜람파디우스의 발자취를 따랐다”고 말한다(앞의 책 ,130). 그러나 나중에 칼빈은 목사직 안에 교사직을 포함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삼중직의 직분론을 전개했다. 1561년에 나온 벨직 신앙고백서 30조에도 세 직분을 구분하며, 1618년에 나온 도르트 교회정치 2조에서도 세 직분을 제시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헌법 해설』 (2014), 160.

99)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 324-27. 특별히 개혁교회의 교회론을 다룰 때에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 4권을 집중적으로 다룬 점이 특색이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말한 부분(325)에서는 바빙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오순절교회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참고하라(340-41).

100)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 376-87. 이근삼은 쿨만이 예수와 초대 교회가 조기 재림 예언설을 주장했던 것을 비판했던 이유는 성경비평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383, 384, 387).

101)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 398. 이것은 박형룡, 박윤선 등이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한 것과는 대조된다.

102) 신득일, “이환봉 교수의 신학적 여정과 주제,” 『고신신학』 17 (2015), 27-56.

103) 신득일, “이환봉 교수의 신학적 여정과 주제,” 30. 이하에서 이 글의 중요 주장들을 요약한다.

104) 결어에서 신득일은 자신의 글이 이환봉의 “교의학 과목과 이단사상, 교리교육에” 대한 부분은 제한된 지면 때문에 제외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신득일, “이환봉 교수의 신학적 여정과 주제,” 55.

105) 이환봉의 생애와 학문 여정을 서술한 자전적 기록으로는 이환봉,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갱신과 부흥」 16 (2015), 5-31을 보라.

106)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서울: 프라미스키퍼스, 2014).

107)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7-10(개관), 10-16(질문). 한편, 이 질문에 대해서 이근삼 박사는 “조직신학은 ‘교의신학’ 혹은 ‘조직신학’으로 각각 불리우는데, 이 명칭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유럽 계통의 신학에서는 ‘교의학’을 즐겨 사용하지만 영국과 미국 계통의 신학에서는 ‘조직신학’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개념은 동일하다.”라고 주장했다.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17.

108)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3.

109)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3-14. 그러면서도 이환봉은 “마침내 하나의 체계를 전체로서 파악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한다(같은 책, 14쪽). 인간이 가진 신지식의 미완성적 성격을 “도정(道程)의 신학”이 가진 한계로 파악한 것이다.

110)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29-30. 그의 비판을 아래와 같다. 첫째, 바빙크의 교의학 연구의 대상은 하나님의 계시일 뿐이고 교회가 결정한 교의는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바빙크의 교의학 정의는 교의학의 부정적 기능만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바빙크의 교의학 정의는 교의학의 역사적, 교회적인 측면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11)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31.

112)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32.

113)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38. 구체적으로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신학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분명하고도 객관적인 내용을 연구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으며, (2) 신학은 그 내용을 연구하는 분명하고도 일관된 방법론을 가지고 있고, (3) 신학은 일관성 있게 서로 연결된 계시의 내용 속에 있는 명제들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도 있으며, (4) 신학은 다른 학문들과의 어느 정도의 공동지반 즉 공유하는 주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교수는 바르트와 밀라드 에릭슨을 참조한다.

114)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39.

115)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46; 바빙크, 『개혁교의학』, 1:103.

116) Robert L. Reymond, 『개혁주의 변증학』, 이승구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12.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50.

117)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58-60.

118) G. Ebeling, Word and Faith (Philadelphia: Fortress, 1963), 474;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70에서 재인용.

119) Thomas H. Troeger, “A Poetics of the Pulpit for Post-Modern Times,” Intersection: Post-Critical Studies in Preaching, ed. R. L. Eslinger (Grand Rapids: Eerdmans, 1994), 43;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71.

120)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73.

121)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78-79; 바빙크, 『개혁교의학』, 1:165-66 참조.

122)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84.

123)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85.

124)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86-87.

125)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89-90.

126)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13-14.

127) 이런 구분은 밀라드 에릭슨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vol. 1, pp. 75-76; Millard J. Erickson, Where Is Theology Going?: Issues and Perspectives on the Future of Theology (Grand Rapids: Baker Books, 1994), 13-25.

128)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17-21.

129)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24-26.

130)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36-38.

131) 박형룡은 찰스 하지의 입장을 따라 “하나님의 진리의 인식에 있어서 신앙이 수위에 있음은 사실이나 이성은 그 차석에서 종속적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사역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상당한 고위의 존재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박형룡, 『교의학 서론』, 177).

132) 이 점에 있어서 이근삼 또한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이 부분적으로 유효하게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27.

133)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31.

134)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39-42.

135) 이환봉,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144-

이신열 & 우병훈  webmaster@kscoramdeo.com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신열 & 우병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