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인과 외국인 노동자들

2004년 7월에 생긴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 전용 병원이 설립 2주년을 맞았다.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다. 작년 7월에 이미 3억의 부채로 인해서 부도의 지경에 처했지만 조선일보의 우리 이웃 캠페인을 통해 3억이 후원되어 격려를 얻고 지금까지 오고 있지만 현재도 3억 5천만원 이상의 부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매일 150-20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찾고 있고 현재 36000명 가량 치료의 도움을 주었다. 이 병원의 이사장인 김해성 목사는 운영의 어려움이 있지만 끝까지 무료로 치료를 하려는 마음을 표시했다. 카톨릭도 이런 류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병원의 소식을 접하면서 반드시 살려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진료비 삼천원이 없어서 병원문을 두드리지 못하면서 생명을 소진하고 있다. 병원문이 얼마나 높이 있겠는가?

1. 객과 나그네됨

성경에 타국인에 대해서 레19:33-34은 이렇게 표현한다.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타국인은 권리가 자국민과 같이 없을 수 있기에 학대를 당하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타국인을 자국민과 같이 여기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애굽에서 타국인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한다. 애굽에서 학대받던 것을 기억하면서 타국인을 학대하지 말라고 한다.

개역 성경은 타국인과 객을 다르게 번역했지만 동일한 단어이다(게르). 타국인 즉 객을 사회적 한 계층으로 신명기는 접근한다. 특히 타국인 혹은 객은 그 신분적 위치를 고아와 과부 그리고 레위인과 동일한 취급을 하고 있다. 아래의 다섯 구절이 명백히 증거한다.

[신14: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6:11]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신16:14]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신26:12]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신26:13]그리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타국인이 함께 살면서 생존의 위협을 겪지 않도록 먹을 것을 공급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회 내에 힘을 가지지 못한 약한 무리들인 고아 과부 그리고 레위인을 함께 배려하라고 한다. 이제 이들에게 때를 따라서 먹을 것을 공급하라는 신명기의 명령이 성경이 지향하는 구속된 사회 즉 창조의 회복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다루어보고자 한다.

2. 레위인에게 거할 성읍을 주라
타국인이 신명기에서 객이나 고아 과부 그리고 레위인과 동일한 차원에서 언급됨을 살폈다. 특히 레위인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소유 재산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12지파들이 가나안에서 기업(inheritance/ possession)을 얻을 때 레위 지파는 얻지 못했다. 그들을 가나안 전역에 흩어져서 이스라엘의 형제들이 배려해 주는 48성읍에 흩어져 살도록 했다. 그래서 형제들의 배려가 아니면 살수 없는 부류가 레위인이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배려가 없기에 방황하는 경우를 볼수 있다. 사사기 17장 이후에 나오는 미가의 집 제사장으로 봉사하다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레위인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말라기 서에서 십일조를 강조했다. 그 배경은 이렇다. 바벨론 포로 이후 귀환했을 때 성전이 재건된다. 그때 성전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느13:10을 보자
"내가 또 알아 본 즉 레위 시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레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성전 봉사를 버리고 생존을 위해서 도망을 했다. 백성들의 십일조 드리는 일과 이것의 분배가 원할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느혜미야는 이것을 바로 잡았다. 레위인들은 백성들의 십일조나 혹은 백성들이 배려하여 주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부류였음을 확인한다.

이런 레위인들과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 바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된 객과 타국인이다. 신명기서가 이들을 동일한 부류로 묶어서 취급한다는 것은 그 중에 한 부류에 대한 태도와 함께 연결된다. 특히 필자가 살피려 하는 레위인에 대한 태도를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보고자 한다.

여호수아서는 일반적으로 소위 "신명기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진다. 신명기 역사라 함은 여호수아부터 열왕기상하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기록되었다는 놋이란 구약신학자의 입장을 반영한다. 물론 포로라는 실패의 역사이지만 다윗 언약과 같은 긍정적 요소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소위 신명기 역사는 신명기를 역사 해석의 근거로 삼고 있다. 따라서 신명기 역사의 일부분으로 간주되는 여호수아를 신명기와 밀접하게 연결해서 해석하는 일에 일반적 공통점이 존재한다.

여호수아서는 내용적으로  삼 구분될 수 있다.
정복(1-12장)
분배(13-21장)
안식(22-24장)

이야기가 설교나 아이들을 위한 교훈을 위해서 잘 선택되는 경향으로 인해서 여호수아서 중에 정복부분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서 분배에 대한 본문은 구약 특히 이스라엘의 상세한 지역명이 나오는 부분들이기에 이것을 메세지화 하는 일이 상당히 드물다. 세 번째 부분은 세겜의 언약으로서 적절히 언급되기도 한다.

필자의 관심은 두 번째 단락 분배 부분이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는 신앙에 근거한다. 따라서 정복 부분의 핵심 메시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셨다"는 약속에 근거한다. 그런데 정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세울 나라의 시작에 불과하다. 정복된 그 곳에 어떤 성격의 나라가 존재해야 하는가가 더욱 큰 문제이다.

한국교회가 숫자적으로 부흥하였다. 그런데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성경은 숫자의 부흥과 동시에 어떤 존재형태를 지녀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 원형적 성격이 바로 가나안 땅의 정복 이후에 나타난 분배에서 드러난다.

가나안 땅의 분배는 세상에 복을 주는 나라로 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여호수아13-19장까지는 레위 지파를 제외한 12지파의 분배를 말한다. 가나안 동편에 2지파 반(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와 가나안 서편에 9지파 반이 분배를 받았다. 복잡한 지역명이 소개되지만 분배의 원칙은 두 가지이다. "가족대로"와 "제비뽑기"이다. 각 지파를 소개하는 첫부분과 마지막 부분에는 이 사실을 고지한다. 예를 들어 수19:1이다.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가족대로와 제비를 뽑는 것은 공평한 분배를 담지하는 두 방편이다. 가족대로라는 말의 구체적인 내용은 민33:54에 제시된다.
너희의 가족을 따라서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뽑힌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열조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얻을 것이니라

"가족을 따라서"라고 번역된 것은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족대로'라는 말과 동일하다. 따라서 여기서 가족대로 혹은 가족을 따라서의 내용은 바로 숫자이다. 양이다. 숫자가 많으면 많이 주라고 한다. 물론 적으면 적게 가져야 한다.

그러면 제비뽑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질의 문제이다. 숫자는 힘으로 돌변할 수 있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의 본질이다. 따라서 숫자의 힘이 질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제비를 뽑는다. 제비를 뽑는 것의 의미를 잠16:33은 이렇게 규정한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인간적인 외적인 조건 특히 숫자의 힘이 어떤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제비뽑기이다. 공평의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두 가지의 원칙을 따라서 공평한 땅의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런데 12지파라는 이스라엘 대중에 대한 분배가 끝이 났을 때 이스라엘 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안식이 도래했다고 선포하지 않는다.

정복이 이루어졌을 때도 아니다. 그리고 대중의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졌을 때도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안식이 도래했다는 선포는 12지파의 분배가 완료된 수19장 마지막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장을 더 지나서 21장 마지막에 선포된다. 수21:44에 비로소 안식을 주셨다고 기록한다.

왜! 아직 어떤 일들이 이 두 장 사이에 전개 될 필요가 있어서 안식을 언급하지 않는가?
수20장은 도피성을 말하고, 수21장은 레위인의 거할 48성읍을 소개한다. 무고한 죄인들의 피난처와 거처없는 레위인들에 대한 배려가 제시된 후에 성경은 안식 혹은 평안이 도래했다고 선언한다.

도피성은 무고한 죄인들의 피난처이다. 살인이라는 결과 때문에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이들을 배려한 곳이 도피성이다. 또한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이나 소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살아야 한다.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한 부류이다. 레위인들을 위해서 각 지파가 몇 성읍씩을 각출해서 48성읍을 제공해야 한다(수21:41). 레위인의 거할 성읍과 사역을 위해서 목축을 할 주변의 들을 제공하는 원칙도 공평의 원칙이다. 많이 받은 지파는 조금 더 많이 낸다. 민35:8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산업에서 레위인에게 너희가 성읍을 줄 때에 많이 얻은 자에게서는 많이 취하여 주고 적게 얻은 자에게서는 적게 취하여 줄 것이라 각기 얻은 산업을 따라서 그 성읍들을 레위인에게 줄지니라

공평한 땅의 분배에 이어서 레위인의 거할 성읍도 역시 공평한 분배를 하여야 한다. 레위인이 배려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에는 안식이 없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구조적 메시지이고 이를 수21:43-45절이 증거한다.

3. 레위인은 누구인가?
그럼 레위인을 배려하지 않으면 안식이 없다는 이 명제가 주는 함의는 어떤 것일까?

서두에 언급한 신명기의 5본문은 레위인을 타국인을 말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와 동일하게 취급됨을 보았다. 그리고 신명기는 소위 신명기 역사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살핀 여호수아의 기업 분배와 레위인의 언급은 신명기와 연결할 때 얻어지는 결론이 있다.

레위인에게 거할 48성읍을 온 이스라엘 백성이 공평하게 배려하라는 요청은 단지 레위인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타국인과 고아 과부라는 사회적 주류에 형성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라는 요구이다. 사회의 대중으로부터 소외되는 즉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거나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회가 될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이 의도하신 안식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 여호수아의 주장이다.

양을 늘리는 정복에만 관심을 가지는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중산층 대중의 요구에만 부응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것과 동시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안식을 완성한다. 레위인을 돌보라는 명령은 한국교회에서는 십일조와 깊이 관련을 가진다. 십일조는 단지 레위인만을 위한 것을 아니었다.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타국인과 고아와 과부는 항상은 동일 선상에서 취급을 받았다.

4. 안식은 선에 기반한다.
레위인들의 거할 성읍과 그들이 역할할 수 있는 목축을 위한 주변의 들을 제공하는 일이 비로소 완성되었을때 수21:44은 안식이 주어졌다고 선포한다. 그런데 이러한 안식이나 평안의 도래는 창조시에 있었던 제 7일의 안식과 방불하다. 그러면 안식이 있기 위해서 육일 동안에 있어야 하는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좋다는 단어는 선이다. 안식은 선에 기반을 둔다.

성경이 말하는 선은 무엇인가? 성경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은 어떤 상태를 말할까?
수21:45은 이런 언급을 함으로 우리에게 조명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안식이 도래함과 선한 일이 응한 것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선은 바로 무고한 죄인들의 도피처와 거처없는 레위인의 쉴 곳이 마련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창1:29-30은 다시 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관심을 표명하는 본문은 창1:26-28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부여받은 권리들을 언급한다. 정복하고 충만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29-30절은 간과된다. 동물과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이 두절이 있고 난 후에 창1:31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았더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어서 제 칠일의 안식이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선을 기반으로 안식이 형성되었다. 그 선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굶는 자가 있지 않아야 한다. 생존의 위협을 받는 자가 없어야 한다.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안식이 없다.

나와 내 가정만이 먹고 살고 치료 받으면 선한 세상을 살고 있고 안식이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침몰하는 배에서 잠시 기쁨을 연장하고 있을 뿐이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는 여객선의 큰 무도장이 닥치는 수압에 견디지 못해서 물바다가 될 것이다.

5. 글을 마치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의원이 2년간 잘 버텨주었다. 4만에 이르는 환자를 치료해 주고 그들을 위로한 일에 대해서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계속해서 운영의 존패를 가름해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이제 성도들과 교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잘 운영되도록 돕자. 이게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아닌가? 크기도 중요하고, 오늘 우리 성도들도 중요하지만 저 소수의 고통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신음소리는 우리의 안식의 가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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