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한 마리가 잠에서 깼다. 마음 한 구석에 뿌듯한 자부심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우물 곁으로 잔뜩 점잔을 빼며 다가섰으나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러분은 왜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입니까?" 화가 나서 막 소리쳤다. 사람들은 기막힌 표정으로 나귀를 쳐다봤다. 어떤 이는 막대기로 꼬리를 내리치면서 빨리 꺼져버리라고 버럭 고함까지 질렀다. "세상에 이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다 있나? 내가 누군지를 모르다니!"

나귀는 방향을 틀어 시장쪽으로 갔다. 그러나 반응은 매한가지였다. 고개를 까딱대며 한껏 폼을 잡고 시장 한가운데를 걸어갔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 사람들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란 말이야! 어제 일을 잊었는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뿐 나귀를 외면했다. 자존심에 금이 간 나귀는 몹시 혼란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겪은 수치를 들은 엄마 나귀가 말했다. "이 바보야,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너는 그냥 나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니."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들어간 나귀 이야기의 속편이다. 나귀가 세상 사람들이 질러대는 환호성을 자기에게 보낸 것으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나귀는 그냥 짐이나 부릴 뿐이다. 단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때로 분에 넘치는 존경과 대접을 받는다. 하물며 제왕적 목회자, 유명 부흥강사는 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예수님 때문이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올라타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헛된 자만심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누군데." 아,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숱한 칭찬과 환호, 박수소리, 모두 다 주님께 보내는 것인데, 내게 오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착각인가!

타락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나귀의 본분을 잊을 때 찾아온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멀어지는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주님보다 더 유명해지고 더 힘세지려고 할 때 시작된다. 중세 군주 부럽지 않은 절대적 권위, 수많은 교인, 웅장한 건물, 막대한 예산,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모신 나귀가 되기 어렵다. 그리스도를 깔고 앉은 나귀가 되기 십상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한 것은 가난과 병고"라고 말했다.

한국 교회가 정화되기 위해 가장 긴요한 것은 고난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온갖 성취를 뽐내며 주님 위에 걸터앉은 교회가 아닌, 땀을 뻘뻘 흘리며 힘에 겨워 주님을 태우는 교회, 대강절을 앞두고 곱씹어야 할 교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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