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고신대 신학과 역사신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오늘의 고신대학교의 전신인 고려신학교 설립 70주년을 맞으면서 고신의 신학을 점평(點評)하는 일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1946년 9월 20일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에서 개교한 고려신학교는 1947년 3월 5일에는 초량교회 유치원으로, 한 달 후인 4월 19일에는 광복동 1가 7번지 적산 건물로, 1955년 미군 AFAK의 원조로 부산시 서구 암남동 34번지에 교사 3동 594평을 건축하고 1956년 4월 이곳으로 이전하여 25여년을 지내고 1984년에는 영도구 동삼동 149번지로 이전하였다. 신학대학원의 경우 송도교정에서 44년을 보내고 1998년 1학기부터 천안시 삼용동 40번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신학교는 1946년 9월 20일, 17명의 첫 입학생을 받아 무인가 사설신학교로 출발했으나 1964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직영신학교가 되었고, 1968년 2월 28일에는 문교부로부터 대학에 준하는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69년 9월 6일에는 대학동등학력인정 지정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러다가 1970년 12월 30일에는 신학과 40명 정원의 고려신학대학 설립인가를 받아 정규대학이 되었다. 이때까지는 대학입학예비교사와 상관없이 누구나 입학 할 수 있는 학교였다. 일부의 탁월한 학생이 없지 않았으나 이 시기 한국의 신학교는 대체적으로 타 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었다는 세간의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1971학번 이후 대학입학학력을 인정받은 학생들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 신학과 외에도 기독교교육과(1977) 종교음악과(1978) 의예과(1980)가 신설되면서 고려신학대학은 고신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고(1980.10), 그해 11월에는 신학대학원이 인가를 받아 정부가 인정하는 석사학위(M.Div.)를 수여할 수 있게 되었다. 1993년 3월에는 교명자율화조치에 따라 ‘고신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금년으로 설립 70주년을 맞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정리한 바처럼 고려신학교는 이름 그대로 목회자양성을 위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으나 1981년 이후 일반대학, 곧 기독교종합대학을 지향하여 현재 20여개 학부 혹은 학과를 개설한 중형대학으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대학교는 신학교육이 교육의 근간을 이루어왔고,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 혹은 선교사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와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난 70년간의 우리의 신학 여정을 헤쳐 가는 일은 후대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신의 신학 70년의 역사를 몇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우선 개혁주의 신학의 정초기에 속하는 1946년부터 1960년까지의 신학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후 고신 신학의 제2세대에 속하는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와 하도례(Theodore Hard) 교수의 신학, 고신 제3세대에 속하는 김병원 박성복 안영복 이보민 전호진 허순길 교수의 신학에 대해 순차적으로 논구하고자 한다. 그 동안 고신신학에 대한 논구가 없지 않았으나 고신신학 전반을 개관하거나 분석적으로 연구한 일은 없다. 이런 점에 이 연구가 후일의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2. 고려신학교의 신학

2.1. 초기 교수들(1946-1960)

1946년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후 첫 교수는 박윤선(朴允善, 1905-1988)과 한상동 목사(韓尙東, 1901-1976)였다. 곧 한부선 선교사가 귀환하여 11월 13일부로 교수단의 합류했다. 이듬해에는 만주에서 귀국한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가 송상석의 인도로 귀국하여 1947년 10월 14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불과 1학기도 채우지 못하고 1948년 4월 교장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여 장로교신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1948년에는 이상근(李相根, 1911-2011)이 조직신학 교수로 취임하였고, 그해 5월에는 함일돈(Floyd E. Hamilton, 1890-1969) 선교사가 내한 즉시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9년부터 강사로 구약을 가르치던 김진홍(金鎭鴻, 1906-1988)은 1955년 8월 이후 고려신학교 교수로 활동하게 된다. 1940년부터 헤라를 가르치며 강사로 참여하였던 박손혁(朴遜赫, 1901-1968) 목사는 1954년 4월 1일부로 점임교수로 임명되었다. 또 평화중고등학교 교장이자 문필가, 전기작가였던 안용준(安瑢濬, 목사는 1957년부터 고려신학교 교수단에 합류했다.

이들이 고려신학교 교수로서 고신 제1세대 신학자들이었고, 1960년까지 신학교육을 담당했다. 그 외에도 마두원(馬斗元, Rev. Dwight Malsbary), 최의손(崔義遜, Dr. William H. Chisholm) 선교사도 강사로 일했지만 이 시기 고려신학교의 신학을 주도한 인물은 박윤선과 그의 동료들인 김진홍, 이상근이었다. 물론 한부선과 함일돈의 기여도 적지 않았고, 이들의 기여 또한 경시될 수 없다. 특히 함일돈은 메이첸이 인정했던 우수한 제자이자 저명한 변증학자였고, 창세기 주석과 변증학 등을 저술한 탁월한 학자로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믄 준비된 인물이었으나 언어의 장벽과 학생들의 학적 수준 때문에 심화교육이 불가능했던 점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고신 신학의 제1세대 중심인물은 박윤선이었고, 박윤선 교수가 고신신학 형성의 정초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외형을 준비했다면 박윤선 교수는 내실을 갖추었다. 박윤선은 1946년 9월 고려신학교 개교이후 1960년 10월 고려신학교를 떠나기까지 14년간 고신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의 신학이 어떠했는가를 말하는 것은 진부한 물음일 수 있지만 그는 개혁(주의)신학, 혹은 칼빈주의 신학을 확립하여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제시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 고려신학교가 지향한 신학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몇 가지 측면, 곧 고려신학교의 신학 배경, 설립 취지서 공개적 표명, 고려신학교의 공식적인 문서들, 대외관계에서 표명된 신학적 견해를 소개한 후 고려신학교 교육을 담당했던 초기 신학자들의 신학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 초기 교수 및 강사 명단

구분

성 명

근무 기간

전 공, 비 고

교수

 

박윤선

한상동

한명동

한부선

박형룡

이상근

함일돈

박손혁

김진홍

안용준

 

1946. 9 – 1960. 9

1946. 9 – 1974. 1

1946. 9 - 1955.

1946. 11 – 1976. 2

1947. 10 - 1948. 4

1948. 3 – 1960. 9

1948. 5 - 1950. 6

1954. 4 - 1967.

1957. 9 – 1961. 3

1957 - 1960. 12

 

성경신학, 변증학, 신학 일반

목회학, 강도학, 교회정치

교회사, 교회정치(1946년부터 강사로 활동)

실천신학, 선교학, 성경 일반

조직신학, 변증학

조직신학, 기독교윤리학

변증학, 창세기

헬라어 및 신약 신학(1950년부터 강사로)

구약학 (1949년부터 강사로 활동함)

교회사

 

강사

오종덕

마두원

최의손

하도례

 

 

 

 

 

성경, 성경주해

교회음악, 성경 일반

성경일반, 자연과학반

헬라어, 히브리어

 

2.2. 고려신학교 설립의 신학적 배경

고려신학교는 과거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 점은 고려신학교 설립의 신학적 배경이 된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설립된 이래 보수주의 신학을 지향해 왔으나 1930년대 이후 진보적 신학의 도전에 직면했고, 그 첫 충돌은 박형룡과 김재준의 대결이었다. 보수와 진보 양 입장을 대변,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국 장로교사상 최초의 신학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논쟁은 한국에서의 신학적 경계선을 보다 구체적으로 예시해 주었다. 1935년 이후 장로교 총회에서 직접적으로 진보신학이 문제시 되지는 않았으나 한국교회의 신학적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1935년 이후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었고, 장로교의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었던 평양신학교는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폐교되었다. 보수주의 지도자들은 탄압을 받거나 투옥되었고 일부는 목회현장에서 인퇴(引退)하거나 망명의 길을 갔다. 한국교회 부수주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던 선교사들도 1940년 귀국하거나 추방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40년대 이후 진보적 신학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이때의 신학적 상황에 대해서 김양선(金良善)은 “보수주의는 붕괴되고 지금까지 저들의 손에 있던 교회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적 인사들에 의해 신속히 대치되었다.”고 지적했다. 비교적 일제의 식민정책에 순응적이었던 이들은 1940년 4월 19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가 개교되었다. “복음적 신앙에 기(基)하여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되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첫 전임 교수는 김재준, 윤인구, 그리고 서울의 일본인조합교회 목사였던 미야우찌 아키라(宮內 暁)목사였다. 이 조선신학교는 공개적으로 옛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거부하고 신학적 자유를 주창했다. 평양신학교는 미국장로교회에서 소위 ‘유명 5개조’(Famous five point)로 불리는 5대 근본교리인 그리스도의 처녀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The physical resurrection of Christ), 성경 무오(The inerrancy of the Bible),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The substitutional atonement),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The imminent second coming of Christ)을 굳게 신봉하고 있었으나, 조선신학교 교수들은 우선 축자영감설을 반대하고 성경무오설에 도전했다. 특히 당시 세계신학계의 주류로 인식되던 신정통주의 노선(Neo-orthodox line)을 옹호하였다. 교회사가 보여주듯이 성경관의 변화는 신학적 변화의 단초가 된다.

정리하면, 1940년대는 보수주의 신학의 폐허 위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지경을 넓혀 갈 수 있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조선신학교는 96명의 졸업생을, 1945년 12월 말까지 125명을 배출했다. 해방 당시 장로교계 신학교는 조선신학교 뿐이었고, 1946년 6월 11일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회집한 ‘남부총회’는 이 조선신학교를 장로교회 직영 신학교육 기관으로 승인했다. 이런 상황이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을 재촉했던 현실적인 이유였다. 따라서 신정통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은 고려신학교 설립의 배경이 된다. 그래서 고려신학교의 설립초기부터 보수주의 혹은 개혁주의신학을 지행했고, 이 신학의 파수를 고려신학교 존재이유로 제시했다. 1949년 고려신학교가 교지를 창간하면서 ‘파수군(把守軍)’이라고 명명한 것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실제로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신학교육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이 점은 설립취지서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2.3. 설립취지서와 신학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는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6년 여름 박윤선에 의해 작성된 이 취지서의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 한국교회가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였으나 질적으로는 신학이 미천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정통신학운동의 시급성과 칼빈주의 신학을 확립하겠다는 의지를 공표하고 있다. 둘째, 성경진리에 기초한 국가건설을 위해서도 정통신학운동을 추진해야 한다. 셋째는 신학운동은 참된 문화운동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정통신학운동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신학이란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를 의미하는데, 설립취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우리 조선교회(朝鮮敎會)는 과거 60여 성상(星霜)에 양적으로 장족진보(長足進步)를 하였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질적으로 신학이 어리고 경건이 여무지지 못한 것은 유감으로 느껴지는 바입니다. 제2차 전쟁이 있을 동안 일정하의 포학한 핍박은 우리 교회의 품질을 드러낸 불 시험이었습니다. 그 불시험의 결과에 대하야 그리스도의 신이 있는 자로서 분개하여 반성하고 정립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교회의 품질을 좌우하는 정통신학운동, 곧 명백한 정통체계(正統體系)에 잇는 진리운동을 시급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신학운동이라고 하야 오인(吾人)은 백과사전식(百科辭典式) 종교적 지식을 교수하는 것을 목표하지 않고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αύτοπιστις)을 믿는 개혁교신학(改革敎神學)의 원칙에 확립하야 밝히도 정왜(正歪)와 시비(是非)를 단(斷)하는 칼빈주의의 신학을 수립코자 하는 바입니다. 그리하여써 우리 교계의 신앙사상 혼란을 교정 또는 통일하려고 간원(懇願)하야 마지않슴니다.

이 설립 취지문에서는 정통신학의 시급성만을 말하면서, “정통신학에 기초한 교역자 양성을” 고려신학교 설립정신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개혁주의 신학의 재확립과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성경에 기초한 정통신학의 확립과 국가건설을 주창하고 있다.

우리 조선은 성경진리에 기초하여 건립되는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은 너무도 급박한 요구입니다. 그리하려면 성경의 진리가 진리 그대로 이 강산에 높이 들리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의미에서 정통진리의 운동을 필요로 하는 바이지만 보통은혜원리의 영역에서 조국을 주님의 진리대로 받들어야 합니다. 먼저 천국을 구하는 진리운동이야말로 참되고 건실하고 성과 있는 건국협력까지 되어 진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 의미에서도 성경진리를 그대로 바로 해명하여 전하는 정통신학 운동을 급무하려 합니다.

여기서 정통신학 운동의 급무를 말하고 있는데, 박윤선은 이 과제 수행을 자신의 과제로 인식했다. 이런 점에서 고려신학교는 비록 정통체계 혹은 정통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개혁주의 신학의 교수와 고수를 강조하고 있다.

 

2.4. 공식문서들을 통해 본 신학

신학교육 책임자인 박윤선은 신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신학 입장을 처음부터 분명히 제시했다. 그것이 ‘진리운동’이라는 이름의 연속 간행물이었다. 그 첫 선언이 『정통신학에서 본 빨트와 뿌른너의 위기신학』이라는 소책자였다. 박윤선 교장이 집필하고 고려신학교 학우회가 1950년 1월 발행한 이 문서는, 1949년 10월말과 11월 초 존 메카이(J. A. Mackay) 박사와 에밀 부른너(Emil Brunner)의 방한을 계기로 이들의 신학이 역사적 장로교신앙과 어떻게 다른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제작된 것이다. 박윤선은 이 글을 통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칼 발트의 위기신학을 비교하면서 고려신학교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변증하고자 했다. 특히 이 문서에서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바르트와 에밀 부른너의 성경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창조, 인간의 죄와 죄의식, 예수그리스도와 중보, 칭의, 구원얻는 믿음 등 신학 전반을 비교하고, 위기신학이라고 불리는 신현대주의(新現代主義) 혹은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신학은 비성경적이며 우리의 신조와는 다른 따라서 따라갈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고려신학교가 지향하는 신학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다. 당시 메카이 혹은 에밀 부른너의 신학이 한국에 알려지지 제대로 않았을 때임을 고려해 볼 때 박윤선의 활동은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50년 4월에 출판된 ‘진리운동’ 제2권,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어디로 가나?』는 「십자군」 제2호에 게재된 김재준의 논문 및 「대전 전후 신학사조의 변천」이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제시된 김재준의 신학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정통주의의 성경관을 제시하면서 영감과 성경무오론을 주창하고 있다. 특히 이글에서는 ‘특고特考’라는 이름으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표명된 성경관을 제시하고, 세계기독교연합회(WCC)와 국제기독교연합회(ICCC)를 비교하며 WCC를 비판하고 있다. 또 치리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음과 부당한 결정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고려신학교 그리고 경남법통노회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며 개혁신학을 변증하고 있다.

진리운동 3권인 「우리의 신앙」과 4권, 「신앙노선과 생활원리」에서는 고려신학교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생활을 해설하려는 목적에서 기술된 것으로서, 성경관을 비롯하여 기도(祈禱), 교회(敎會), 신앙(信仰) 등 고려신학교가 지향하는 신학노선, 곧 개혁주의신학의 일면을 제시하고 있다. 1954년에 간행된 「우리의 신앙노선」은 보다 구체적으로 고려신학교의 신학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현재의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 알미니안 주의 혹은 신비주의와 다른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처럼 박윤선으로 대표되는 고려신학교는 정통신학 혹은 개혁주의 신학과 다른 신정통주의 혹은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개혁신앙과 신학을 파수하려는 방어적 활동에 주력하였과 이를 통해 신학사상의 옳고 그름을 획별차천명(劃別且闡明)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박윤선은 박형룡과 동일하게 신학적 변증을 자신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박윤선은 이미 미국 유학시 반틸을 통해 바르트 신학을 알고 있었고, 이 신학적 도전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수호하고자 했다. 박윤선이 이해하는 개혁신학은 바른 성경관에 기초한 타율주의 신학으로서 근대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와 다르고, 반 지식주의(anti-intellectualism)가 아니라는 점에서 근본주의와도 다르고, 계약신학을 강조하지 않는 복음주의와도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주의는 ‘성령적 신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은 칼빈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5. 대외관계와 신학적 표명

박윤선은 바르트, WCC, 그리고 김재준의 신학을 비판하지만, NAE도 알미니안주의와 타협한다고 보아 이를 배격하고 있다. 반면에 ICCC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것은 ICCC를 WCC에 대한 상대적 기구로 파악한 이유로 보인다. 이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가 1949년 12월 방콕에서 아시아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이 대회에 참석차 출국했던 최의손 선교사 편으로 지지 성명서를 보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는 중요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숙지된 바 없으므로 성명서 전문을 소개한다.

 

국제 기독교연합회에 드림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세계는 불신앙으로 움직이는 이때에 여러분이 우리의 주를 위하여 진리를 선히 보수하는 일에 대하여 반갑게 생각하나이다. 우리 고려신학교와 고려고등성경학교 직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가 우리의 신앙을 위한 신앙 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신앙체계로 110여명의 신학생과 189명의 고등성경 학생을 교육합니다. 우리 중에 70여명이 교회를 섬깁니다.

우리는 현제에 신신학과 빨트신학이 우리나라에 소게됨에 대하여 매우 놀내나이다. 우리는 세계기독교연합회를 반대합니다. 그 리유는 그 기관은 신신학주의 혹은 신신학 무관주의의 입장인 까닭입니다. 그 기관은 절대로 우리의 신앙입장을 대표할 수 없음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 가판을 반대함니다. 역사적 기독신앙은 성경무오의 도리와 우리 주님의 동정여 탄생과 그의 무죄하신 생활과 그가 이적을 행하신 것과 그의 대속교리와 그의 몸으로 다시 사신 것 등의 중대한 도리를 굳게 보수함니다. 그러나 이런 중대한 교리들에 대하여 세계기독교연함회가 선교사의 파송권을 장악하리라고 생각하여 크게 의분을 품으며 근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국제기독교연합회 입장을 지지하며 기뻐함니다. 그 리유는 이 기관은 우리가 믿고 직히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믿고 직히는 까닭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그 마지막 큰 명령에 의지하여 성신께서 보내시는 그 사람들만이 선교사가 될 줄을 믿습니다.

 

1949년 11월 26일

대한예수교장노회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

교장 박윤선

교감 한부선

교수 함일톤

강사 박손혁, 오종득, 최의손, 마두원

 

이 때 고려신학교 학우회도 성명서를 송부했는데,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이 문서 또한 중요한 문서임으로 여기 전문을 소개한다.

 

성명서

우리 대한장로교회는 성경적 정통신학을 고수한 칼빈주의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받았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신앙을 고수하며 성경 진리를 보수하며 오든바 일제의 탄압적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직히지 못하고 일본의 강요하는 우상을 섬기고 대한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나라의 외래세력이 물러가고 종교의 자유를 찾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받처 충성하는 성도들이 옥에서 나오게 되어 대한교회의 죄과를 지적하고 회개 재건을 부르짖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프리스톤 신학교장 마카이 박사와 서서국의 신학자 에밀 부룬너 두 분이 와서 서울에서 일부 신학자들에게 강연회와 신학강좌를 열어서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대한교회가 다 환영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믿는 우리들은 성경을 무시하는 그들을 환영하지도 않거니와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절대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사상이 우리와 다른 까닭입니다. 마카이 박사로 말하면 그는 “웨스트민스터 판 성경”의 편집자의 한사람으로써 그 책에는 모세5경을 모세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고 하였으며(p. 20-21) 이사야서는 38이 기록 하였다고 하며(p. 923-924) 다니엘서는 BC 168년에 기록하였다고(p. 1236) 요나서는 요나의 기록이 아니라(p. 1311)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1918년 여름에 서서나라 산골에서 새 신학의 봄이 움터 나왔다.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알프촌의 목자를 통하여 말씀하였다. 최근 25년 간의 종교와 문명의 역사는 재발견된 성경 안에 있는 새 세계에 다른 의미를 더욱 주고 있는 것이다 … 이른바 빨트주의 운동은 과장이 아니고 근대기독교사상에 가장 큰 감화를 준 것이다. 이 운동은 기독교회에 신학을 회복 식히는 큰 역할을 한 것이다(현대신학, 1944년 4월 호에서 번역)라고 빨트주의 위기신학의 운동을 찬성하고 환영해 드렸던 것입니다. 빨트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다시 말하지 않아도 에밀 뿌룬너 박사의 우리나라에 와서 공개한 말 가운데 다음 몇 구절들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 … 정통파에서는 성경을 우상화 한다. … 나는 사도신경의 어느 신조도 순종하지 않었다. … 웨스트민스터 신조에도 나는 복종치 아니하려고 한다.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유대사람이 가졌던 견해이다. … 문자적 령감은 글짜 그대로 믿으라 함이나 이것은 성경을 비양심적으로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 현대 청년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어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배척하는 것이며 기독교 진리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밀이올시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이 성경을 죽도록 보수하며 이 말씀에 죽도록 충성하려는 고로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이 두 분들이 우리 대한나라에 와서 누구에게 환영을 받었겠습니까? 그들을 환영한 사람들은 과거에 신앙의 성조를 잃고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자율적(自律的) 인본주의(人本主義) 신앙사상을 좋아하는 분들이며 대한교회 전부는 않입니다. 또한 총회의 대표가 아니고 전국 신도의 의사로 선택되지도 않는 대표는 없는 것입니다. 금번에 시암나라 반곡에서 모인 세계기독교연합회 아세아대회에 대한 대표 5명이 참석한다고 하나 그들이 우리 대한전국의 대표가 될 수 없음니다. 개인으로는 모르거니와 결코 우리 대표는 아니올시다. 우리는 그와 같이 히랍정교와 합작하며 비 진리와 짝하는 연합 즉 성경진리를 토대로 한 신앙적 연합이 아닌 곳에 연합하고저 하지도 않습니다. 그 연합의 지도자 대부분이 이번에 우리나라에 왔든 마카이 박사 부룬너 박사들과 같은 신앙사상으로 세계교회를 지도지배 하려는 것이 아님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도 않인줄로 암니다. 이와 같은 연합운동을 우리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1949년 12월

고려신학교 학우회 회장 송명규,

서기 홍반식.

 

에밀 브른너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그리고 WCC를 반대한다는 점을 피력하는 이런 문서는 고려신학교가 지향하던 신학입장을 보여준다. 고려신학교 학우회는 1949년 10월과 11월 매카이와 에밀 브른너가 한국을 다녀간 후 이들의 신학을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 문서는 현존하지 않으나 이 문서에서 매카이와 브른너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라고 비판하면서 WCC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상의 문건을 통해서 볼 때 고려신학교가 지향한 신학적 성격을 헤아릴 수 있고, 고려신학교의 신학교육을 주도했던 박윤선의 신학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박윤선에게 있어서 1920년대 이후 특히 1940년대 풍미하던 바르트 신학에 대한 거부는 신학교육 책임자로서 당연한 과업이었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를 신정통주의의 위험으로 파수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박형룡을 한국 보수주의 신학의 변증자라고 말하지만, 박윤선 또한 신학적 변증가였고, 그것이 신학교 교장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무로 인식하고 있었다.

 

3. 고려신학교 초기 교수들의 신학

고려신학교 혹은 고신 신학 형성에 기여한 초기 신학자들의 신학에 대한 검토는 초기 고신신학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김진홍, 이상근 교수의 신학교육에 대해 소개하고, 박윤선을 중심으로 전개된 고신신학을 정리해 두고자 한다.

 

3.1. 김진홍(金鎭鴻, 1906-1988)

김진홍 목사는 1949년부터 강사로 고려신학교 교육에 참여하던 중 1955년부터 전임교수로 활동했다. 박윤선, 방지일과 더불어 동향인이었던 김진홍은 1937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하여 1940년 5월까지 공부하고 칼빈신학교 연구과(1940.9-1941.5)를 거쳐 다시 페이스신학교로 옮겨가(1941.9-1944.5)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친 그는 미국 정부 전술협조처, 외국경제행정처에서 근무하였으나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미 육군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49년부터 주한 북장로교 선교부 주석부(註釋部)에서 근무하던 중 박윤선의 천거로 고려신학교 강사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서울장로교신학교 교수(1949. 9-1950. 6)로 일한바 있는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주한미군에서 근무하게 된다. 종전이 되자 잠시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근무하였고, 1955년 8월부터 1957년 7월까지는 칼빈학원 교수로, 1957년 9월부터 다시 고려신학교 구약교수로 활동했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펴낸 등사본 강의안 5종이 남아 있는데, 『구약총론』, 『출애굽기 강해』, 『여호수아서 강해』, 『지혜문학』, 『예레미아서 강해』 가 그것이다. 이 중 구약총론은 자신의 독자적인 교안이라기보다는 찰스 어드만(Charles R. Erdman)의 『구약총론General Introduction to OT』을 번안한 것이었다. 찰스 어드만은 메이첸과 함께 미국장로교회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약간의 신학적인 차이가 있었다. 어드만은 1925년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는데, 메이첸에 비해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장로교회의 신파에 속했던 부친 윌리엄 어드만과 디 엘 무디의 영향을 받았는데, 신학적 논쟁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중시했던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교리적 엄격성보다는 복음전도의 열정을 강조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장로교의 구학파, 곧 아치발드 알렉산더, 찰스 하지, 에이 에이 하지, 벤자민 워필드 등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을 따랐던 메이첸과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드만의 『구약 총론』은 보수주의 학계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있었는데, 김진홍은 이 책을 교본으로 사용했다. 그 외의 강의안도 당시 읽혀지던 보수주의 신학계의 서적을 근간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그는 어드만의 구약총론에 더하여 『구약총론(특별총론)』을 남겨 주고 있는데, 이것은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의 구약총론에 근거한 강의안이었다. 이런 점은 김진홍 교수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는 당시 일기 시작하던 진보적 신학자들의 ‘파괴적 비평’을 거부하고, 보수주의적 전통을 그의 신학의 기초로 받아드렸음을 보여준다.

그가 남긴 강의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문서설이나 전승이론, 이사야 저작 문제, 시편의 구조 등에서 보수주의 견해를 수용하고, 당시 서구의 구약학계가 주목했던 소위 과학적인 연구방법을 추수하지 않았다. 또 종교사학파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스라엘 종교도 고대 중동의 종교처럼 저급한 종교에서 고등종교로의 발전 과정을 거쳤다는 당시의 주장을 비판했다. 말하자면 그는 역사비평, 편집 비평, 전승사 비평을 거부했다. 그는 당시 구약학계의 중요학자로 회자되는 벨하우젠(J. Wellhausen), 쿵겔(Herman Gunkel), 폰 라트(von Rad), 아이히로트(Walter Eichrodt), 노트(Martin Noth) 등을 언급했으나 비판적으로 소개했다.

김진홍은 교안으로 작성된 강의안 외에도 고려신학교 교지 「파수군」에 1955년 이후 1958년까지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연제논문을 게재했는데 이래와 같다.

 

“성경해석의 역사적 고찰1” 49(1955. 10), 22-25.

“성경해석의 역사적 고찰2” 50(1955. 11/12), 14-17.

“성경해석의 역사적 고찰3” 51(1956. 1), 13-16.

“성경해석의 역사적 고찰4” 53(1956. 4/5), 7-10.

“성경해석의 역사적 고찰1” 49(1955. 10), 22-25.

“성경해석의 역사적 고찰1” 49(1955. 10), 22-25.

“성경해석의 역사적 고찰1” 49(1955. 10), 22-25.

“성경의 문화적 해석1” 54(1956. 7/8), 25-28.

“성경의 문화적 해석2” 56(1956. 10), 18-21.

“성경의 문화적 해석3” 57(1956. 11), 15-16.

“성경의 문화적 해석4” 58(1956. 12), 34-39.

“성경의 문화적 해석5” 59(1957. 1), 35-49.

“성경의 문화적 해석6” 60(1957. 2), 25-28.

“성경의 문화적 해석1” 54(1956. 7/8), 13.

“성경의 신학적 해석법1” 60(1957. 2), 14-17.

“성경의 신학적 해석법2” 61(1957. 3), 14-22.

“성경의 신학적 해석법3” 63(1957. 6), 29-31.

“성경의 신학적 해석법4” 65(1957. 8), 4-10.

“성경의 신학적 해석법5” 67(1957. 10), 10-14.

“성경의 신학적 해석법6” 68(1957. 11), 12-16.

“성경의 역사적 해석법7” 71(1958. 2), 24-26.

 

이상의 것은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라기보다는 루이스 벌코프의 『성경해석법 The Principles of the Biblical Interpretation』을 요역(要驛)한 것인데, 그는 철저하게 개혁파교회의 신학을 추수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초기 교수로서 고신신학의 기초를 정통교리적 입장에서 정립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이 점은 그가 뵈트너(L. Boethner)의 성경관을 소개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바른 성경관을 교회가 간직해야할 기초로 인식했다. 그래서 뵈트너의 『신학의 연구 Studies in Theology』 중 제1장 The Inspiration of the Scripture를 번역하여 『성경의 권위』 (개혁주의신행협회, 1958)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김진홍은 1958년 5월 파수군 74호에 “하나의 교회운동이란 무엇인가?”(14-18)를 기고하고 WCC의 연합운동에 대해 비평하고 WCC의 교회관과 연합운동은 수용할 수 없는 신정통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운동이라고 주장했다. 도리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중시하여 고든 클락(Gordon H. Clark)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서 해설을 번역하여 『장로교인이 믿는 신조』 (한국개혁중의신행협회, 1956)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또 1959년에는 박윤선과 함께 헨리 미터(H. Henry Meeter)의 The Basic Ideas of Calvinism을 번역하여 『칼빈주의』를 출판했다. 이런 그의 학구의 여정은 그가 보수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의 신봉자이자 파수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박윤선만큼의 애정은 지니지 못했으나 초기 고려신학교의 신학형성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3.2. 이상근(李相根, 1911-2011)

평양신학교에서 1년 간 수학하고 도일하여 고베중앙신학교에서 3년간 수학한 이상근은 박윤선의 천거로 1948년부터 고려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봉사했다. 1949년 1월에는 한부선 선교사의 추천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2년 6개월간 수학하고 1951년 귀국하였다. 그해 9월 4일 마산 문창교회당에서 개최된 제55회 경남노회에서 박태수, 오병세, 윤봉기, 이성옥, 임성은, 장경재, 정순국, 최익우, 홍반식 등과 같이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고려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1960년까지 9년간 교수로 봉사했다. 거의 모든 일에 박윤선과 의견을 같이 했던 그는 승동측과 합동한 후 환원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환원에 동참하지 않고 서울 총회신학교 교수로 남았다. 처음에는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에서 가르쳤으나 후에는 서울 총회신학교로 옮겨 1976년까지 활동했다.

그가 남긴 한 권의 강의안이 『조직신학 서론(緖論)』인데, 이 교안은 반틸의 조직신학 서론,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 서론,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1장을 종합하여 편집한 것인데, 보수주의교회 조직신학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교안에서는 조직신학의 분류와 역사, 도그마의 개념, 조직신학의 방법, 신학의 성립원리, 계시론, 그리고 성경의 영감을 다루고 있다. 그는 성경관과 계시론의 정립을 중시했는데, 이 점이 이 교안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후일 조직신학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조직신학의 7개 영역에 대한 강의안과 기독교윤리, 변증학,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요해, 예배학 강의, 에베소서 주해 등의 강의안을 남겼는데 발행일자가 없어 단정할 수 없으나 다수의 교안이 그가 고신을 떠난 이후 재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서들이 그의 신학을 점평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상근은 「파수군」에 아래와 같은 연재논문을 기고했다.

 

“성령의 영감” 47(1955. 8), 5-7.

“성령의 영감2” 48(1955, 9), 5-8.

“신앙의 확신” 50(1955. 11/12), 25-32.

“이성과 신앙” 55(1956. 9), 34-43.

“은혜계약” 74(1958. 5), 19-26.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58(1956. 12), 24-28.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2” 63(1957. 6), 7-14.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3” 64(1957. 7), 8-13.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4” 76(1958. 7), 28-33.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5” 77(1958. 8), 23-28.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6” 78(1958. 9), 23-29.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7” 79(1958. 10), 15-2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8” 81(1958. 12), 17-2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9” 82(1959. 1), 12-16.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69(1957. 12), 34-3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2” 70(1958. 1), 24-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3” 73(1958. 4), 30-3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5(1958. 6), 29-3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0(1958. 1), 24-27.

 

이런 글쓰기의 여정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정립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특히 “신앙의 확신,” “이성과 신앙,” “은혜계약” 같은 논설은 당초의 예단과는 달리 훌륭한 논문으로 이런 주제는 신학적 정초 수립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판단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또한 성경에 근거한 교리 체계를 중시했던 필자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다섯 차례 연제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는 신앙고백서의 단순한 번역이지만,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거부와 역사적 기독교신앙의 고수를 신학교육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침례교 세례관에 대한 논평”은 개혁신앙과 교회생활을 파수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이상근은 벌코프의 조직신학에 기초하여 자신의 강의안을 작성하였음으로 전통적인 개혁교회 신학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사 제시한 논설 외에도 이상근은 1958년 6월 「신학지남」 118 (25/1)에 “요한복음의 나타난 부성”을 기고했는데, 이 논문 또한 이상근 교수의 신학세계를 헤아릴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상근 교수는 성경신학에 기초한 조직신학 수립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연학방법으로서 범 복음주의 계 조직신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조직신학 강의는 신학의 주제에 대한 성경강의였고, 성경에 근거한 교리 체계 수립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요한복음의 나타난 부성(父性)”도 한 가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이상근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은 37회 사용되었지만 ‘아버지는 161회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부성론을 언급하였고, 이 부성론에서 독생자 예수님과의 관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을 깊이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이상근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그의 조직신학 수립의 중요한 근거로 활용했다. 그의 조직신학 체계는 이 신앙고백서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후일 33장으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번역과 해설이 첨가된 등사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요해』를 발행했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체계였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이상근은 보수주의 혹은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을 충실히 추수하는 개혁주의 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근 교수는 박윤선의 권고로 1959년 반틸의 『칼 바르트는 정통신학자가 되었는가?』(Has Karl Barth Become Orthodox?)를 역간했는데, 그는 박윤선을 보좌하면서 개혁주의 산학의 파수와 신정통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와 변증, 양면의 길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3.3. 박윤선

박윤선 교수의 신학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저들이 있고, 필자 또한 그의 신학과 설교에 대해 논구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상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 설립 때부터 고려신학교에서 철수하기까지 가장 많은 강의와 가장 많은 설교를 했고, 가장 많은 집필을 했다. 그가 등사본 강의안을 보면 그가 신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강의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수집한 그의 강의안을 신학분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신학 분야

『신약총론』, 『신약신학』, 『공관복음 통해』, 『구약총론』, 『성경신학』

2. 역사 및 교리

『교리사』, 『조직신학』, 『칼빈주의』

3. 철학, 종교학, 변증학

『철학개론』, 『비교종교학』, 『변증학』

 

성경신학은 게르하르트 보스(Geerhardus Vos)의 『성경신학』 (Biblical Theology)을 주로 초역하고 저명한 개혁신학자들의 저서를 참고하되 진보신학자들을 비평했다. 그 외 다른 분야의 강의안도 개혁주의 노선의 신학자들의 논저가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철학개론’은 서양철학만이 아니라 동양철학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컨대 플라톤을 소개한 후 노자(老子)를, 아리스토텔레스를 소개한 후 유가(儒家)의 철학을 소개하고 그 이후는 서양철학사적으로 기술하여 중세, 어거스틴, 스콜라철학, 그리고 근대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박윤선 교수는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고려신학교에 재직하면서 「파숫군」에만 218편의 논문 혹은 논설을 기고했다. 이는 연 15.6편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고신 신학의 전성기이자 박윤선 개인의 생애에서도 가장 학구적인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에도 심취하였고,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의 신학자와 하지, 워필드, 메이첸 등 미국신학자들은 물론, 잔 메이어(Jahn Meyer), 델리취(Delitzsch) 등 독일 신학자들과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보스, 리델보스, 스킬더 등 화란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섭렵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을 석명하고 이를 구체화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일관되게 개혁주의 신학에 자리 잡고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다.

고려신학교 재임기간 중 박윤선의 신학 여정에서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신학적 역할을 두 가지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첫째는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 천착 교수 광포하는 한편,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편,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 특히 바르트주의와 신정통주의 그리고 김재준의 신학을 부단히 비판하고 경계했다. 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중시하고 이를 교수하는 한편, WCC와 그 신학을 비판하고 경계했다.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파수군」에 4회에 걸쳐 연재했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위기신학”이다. 동일한 제목의 거의 유사한 내용의 논문이 전국학생신앙운동 제7회 동기대회 문서에 개제되었다.

박윤선의 메이첸의 문하에서의 수학을 통해 바르트 신학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첫 신학 논문도 바르트 신학에 대한 비판이었고, 두 번째 논문도 바르트 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박윤선은 1937년 7월 「신학지남」 94호(19/4)에 쓴 첫 신학논문인 “빨트의 성경관에 대한 비평”과 1937년 9월에 쓴 두 번째 신학논문인 “빨트의 계시관 비평”(「신학지남」 95호, 19/5)에서 성경관적 오류를 지적하고 사변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그 이후의 일관된 확신이었다. 1957년 파수군 62호에 쓴 “바르트신학 소고”도 이런 맥락에서 기술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가 고려신학교 신학정립을 위한 목적에서 저술한 소책자들도 바로 이런 목적에서 집필된 것이었다.

그는 이런 목적을 위해 동료였던 김진홍과 이상근과 동역했다. 즉 박윤선은 김진홍과 더불어 헨리 미터의 『칼빈주의』(개혁주의신행협회, 1959)를 역간했고, 이상근과 함께 반틸의 『칼 바르트는 정통신학자가 되었는가?』(개혁주의신행협회, 1959)를 역간했다. 또 박윤선은 조용석과 함께 반틸의 『기독교냐 바르트주의냐』(n.d.)를 역간했다. 이처럼 박윤선은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신정통신학 및 혼합주의 신학의 배격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이렇게 볼 때 박윤선은 신약학자이자 변증신학자였고, 한국교회라는 성루의 파수군의 역할을 자임했다. 이렇게 하여 박윤선은 고려신학교를 개혁주의 신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정리하면, 고신신학 제1기에 해당하는 1946-1960년까지의 고신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위한 고투의 기간이었고, 그 결과 개혁주의 신학을 고신신학의 기초로 제시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윤선 교수가 고신을 떠난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측으로 광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종합과 결론

이상에서 고신 신학 제1기라고 할 수 있는 1946년부터 1960년까지의 고신신학이 어떠했던 가를 고려신학교가 지향했던 신학적 성격과 고려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을 통해 정리하였다. 고려신학교는, 1940년 설립된 진보적이고 타협적인 신학교육기관에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자각에서 출발하여, 1930년대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새로운 신학사조, 곧 신정통주의와 바르트 주의에 대항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신학교육의 과제로 인식했고, 박윤선을 비롯한 김진홍 이상근 한부선 함일돈 등 신학자들은 이 일을 위해 동역하였다. 이 글에서는 김진홍 이상근 박윤의 신학에 대해서만 언급했지만 특히 박윤선은 고신 신학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제2차 미국 유학시 반틸(Conelius van Til)에게서 변증학을 배웠는데, 신학이란 어떤 자연론적인 유추나 철학적 사변에서 출발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한 성경계시에서 출발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이 계시의존사색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신학을 확립하고 고려신학교의 교육을 주도하였다. 그는 양면의 과제, 곧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경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바르트의 변증법은 한국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초기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의 요람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Abstract

Korean Theological Seminary and Reformed Theology: The first 14 years from 1946 to 1960

Lee, Sanggyoo(Prof. of Church History in Kosin University)

This paper traced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the 'Kosin theology'(theology in the Korea Theological Seminary) for 14 years from the inception of the Seminary in 1946 to 1960 when the Seminary merged into General Assembly Theological Seminary in Seoul.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was to research and provide the theological standpoint of the seminary and professors, such as Jin Hong Kim, Sang Kun Lee and Yun Sun Park who involved in theological education in the above years. By analytical review on the various activities of the seminary and books or papers written by theology professors, the writer concluded that the Seminary consistently pursued Calvinistic traditions in their adminstration and research, and Reformed theology had been dominant in the seminary, which influenced life of the Kosin church onwards.

 

Key Words

Korean Theology, Korean Church, Korea Seminary, Reformed Theology, Yun Sun Park

한국신학, 한국교회, 고려신학교, 개혁신학, 박윤선

 

▼미주

1) 대학입학 예비고사(大學入學 豫備考査, Preliminary College Entrance Examination)는 대학교육과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1969학년도부터 1981학년도까지 실시해 온 대학입학을 위한 대한민국의 예비시험 제도인데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대학 지원 자체가 불가능했다.

2) 고신신학에 관해서는 1977년 8월 15-19일 송도교정에서 개최된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대성회”에서 오병세 교수는 “고려파 신학 정립문제”, 허순길 교수는 “고려파신학의 역사적 전망”에 대해 각각 발표한 바 있다. 또 유관 논문으로는 이근삼, 허순길, “한국개혁신학의 발전사” 「논문집」 4 (1976.4), 11-52, 나삼진, “고신신학연구의 현황과 과제,” 「고신대학보」 107 (1986. 4. 22)가 있다. 그 외에도 필자는 『한상동과 그의 시대』 (SFC, 2006)에서 박형룡, 박윤선, 함부선, 함일돈, 박손혁의 생애와 신학에 대해 논구한바 있고,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생명의 양식, 2016) 제2부 제1장(293-328)에서 박윤선, 김진홍, 이상근, 박손혁, 한부선, 함일돈, 하도례,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의 생애여정과 신학에 대해 약술한 바 있다.

3) 안용준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행적기와 손양원의 전기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 자신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논구되지 못했다. 그는 1949년 『사랑의 원자탄』을, 1956년에는 『태양신과 싸운 이들』을 출판했다. 1941년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했고, 1948년에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954년 평화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일하던 중 1957년 고려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승동측과 합동 이후 총회신학교 교수로 일했다. 1963년에는 기독신문사 편집국장으로, 1964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총무로 봉사했다.

4) 해방 전에는 숭실학교 교수로 활동했던 그는 고려신학교 강사로 성경, 음악 등을 가르쳤고, 1960년대 초에는 “교회음악과 현대 신앙사조”를 가르쳤다(제일영도교회, 「고려」 6 (1965. 5. 20), 4.

5) 의사였던 그는 해방 전 한국에서의 사역에 대한 기록인 Vivid Experience in Korea (Chicago, 1938)라는 기록을 남겨두었다.

6) I. F. E. 함일돈, 『표준 창세기 주석』 (등사본, n.d.). 변증학자로서 함일돈은 유신론적 창조관을 견지했던 인물로서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하여 창세기 연구를 중시했고,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보수주의적 성경해석을 시도했다.

7) 그의 변증학은 처음에는 등사본 『기독교변증론』 (n.d.) 발간되었으나 1929년 조선야소교서회에 의해 13x20cm 348면의 『기독교변증론』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The Basis of Christian Faith, The Basis of Evolutionary Faith, The Basis of Millennial Faith, 그리고 The Reformed Faith in the Modern World 등의 소책자를 저술했다.

8) 김재준은 1933년 일본과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남궁혁에 의해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천거되었으나 그의 신학사상 때문에 거부되었다. 그러나 남궁혁의 배려로 「신학지남」의 정규 기고자가 되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기 시작했다. 즉 그는 1933년부터 35년까지 9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들에서 그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였다. 이 때 1928년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던 박형룡은 김재준의 신학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고 신학지남 편집위원직을 사퇴하였다. 이렇게 되어 이 두 사람은 1935년까지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재준은 장로교 총회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고, 신학지남에도 더 이상 기고 할 수 없게 되었다.

9)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회의록(1940. 9), 43.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원 이사장 함태영 명의의 보고서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는데, 목적, 수업연한, 주요교과목, 입학 자격, 정원, 학생현황, 교사, 운영비, 이사 및 교직원 등에 대해 보고했다(43-44).

10) 오덕교, 『장로교회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10), 322; 존 피츠미어, 『미국장로교회사』 (CLC, 2004), 123; 홍치모, 『영미장로교회사』 (개혁주의신행협회, 1998), 242.

11) 조선신학교 졸업생 명단은 『한신대학 50년사』 (한신대학, 1990), 497; 『한신동문회 주소록』 (한신대학 동문회, 1979), 14-18을 참고하였음. 졸업생 수는 1회(1942.3.31): 11명, 2회(1942.12.2): 48명, 3회(1943. 12.3): 23명, 4회(1944.12.2): 14명, 5회(1945.12.12): 26명이었다.

12) 이때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키로 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교로 하기로 함.” 이 결의문은 총회록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총회회의록』, 11 (1946-1956)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n.d.), 1-6 참고. 이 총회에 주남선 목사가 총대로 참석하였다.

13)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SFC, 2006), 34.

14) 이상규, 『교회갱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생명의 양식, 2016), 128-29.

15) 스코틀랜드 출신인 매카이는 애버딘대학교에서 수학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수학한 석학이었다. 남미 선교사로 20년간 일한 그는 1936년 프린스턴신학교 교장으로 초빙되어 1960년까지 24년간 재임했다. 한국교회가 신학문제로 혼란한 와중이던 1949년 10월 말 한국을10일 간 방문했다. 에큐메닉스를 강의하며 교회 연합과 일치를 주창했고,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는 말을 처음 한 인물이기도 한다. 1983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그가 사망하던 날 그가 바라던 남·북장로교가 연합하여 ‘미국연합장로교회’가 탄생했다. 그의 주저 『에큐메닉스』는 민경배에 의해 번역되어 1966년 기독교서회를 통하여 발간되었다.

16) 스위스 취리히 출신인 그는 1911년 베를린에서 수학하고 1913년 영국으로 가 영어를 공부했다. 1916년에는 목사가 되었고 1919-20년에는 Adolf Keller의 소개로 유니언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924년 취리히대학 조직신학 및 실천신학 교수가 된 그는 1938-9년에는 프린스턴신학교 방문교수를 지냈다. 1948년 아시아 여행 중 동경의 국제기독대학에 체류하며 강의했는데, 이런 일로 1949년 11월 초 한국을 방문하여 일주일간 체류하며 서울 YMCA 강당에서 공개강연을 했는데, 현대신학 외에도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자연신학’ 문제로 바르트와 논쟁한 일은 유명한 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1955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17)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350-58.

18)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359.

19)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413-16.

20) 이 문서는 고려신학교 주최로 1950년 1월 회집된 제4회 청소년수양회 「회보」에 게재되었다.

21) “Korea Seminary Declaration,” Presbyterian Guardian (1949. 12), 238.

22) 이상규,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297-8.

23) 찰스 어드만의 동생이 1906년 내한하여 대구선교부에서 개척 전도자로, 1916년 이후 평양신학교 교수로 일했던 어도만(魚涂萬, Walter C. Erdman, 1877-1948) 선교사였다.

24) 이상근, “성경의 역사적 해석법7”, 71 (1958. 2), 26.

 

25) 이상규,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302.

26) 김길성, 『총신의 신학전통』 (총신대학교 출판부, 2013), 118.

27) 이상근, “요한복음의 나타난 부성,” 「신학지남」 118 (1958. 6), 72-79.

28) 김길성, 136.

29) 이상규, “박윤선의 신학과 설교,”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생명의 양식, 2013), 212-44. 이상규, “박윤선의 목회, 교회분열, 소송문제 및 주일성수 이해,” 『해방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5), 487-518.

30) 간하배(Harvie Conn)는 박윤선의 신학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박 박사는 옛 평양신학교가 너무나 제한된 분야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반은총의 여러 분야들을 인식하지 못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는 단순한 근본주의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 즉 한국교회가 칼빈주의라는 보다 원시적(遠視的)인 안목(the larger perspectives of Calvin)에서 바라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개혁신앙에서 동료였던 박형룡과는 달리 박윤선은 조직신학 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신약연구를 통해서도 이런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고 평가했다. 그가 말한 칼빈주의에 대한 ‘원시적인 관점’이란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의미했다.

31)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생명의 양식, 2014), 216-17.

32) 박윤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위기신학” 『영광은 하나님께』 (전국학신 제7회 동기수양회, 195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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