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 황 목사(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담임)

요한복음 5장 5-9절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의욕을 가진 사람만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의욕이 있어야 성경을 가르칠 수 있으며 의욕이 있어야 찬양도 하고 봉사도 할 수 있다. 의욕이 있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의욕이 있어야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나아가 의욕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도 확장된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의욕을 주기를 원하신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 병이 이미 오래된 줄을 아셨다"는 말씀 다음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물으시고, 그 다음에 병을 고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기도하고 주께 헌신하기 이전에, 또한 주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치유를 체험하기 이전에 반드시 우선되어야 할 것이 "의욕"을 되찾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낫고 싶어하는, 은혜를 받고 싶어하는 의욕이 이 모든 치유의 과정을 좌우하고 있다. 이에 본문을 보니 주 예수께서는 제일 먼저 질문을 통해 의욕이 생겨나게 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사실 우리에게 삶의 강한 의욕이 있으면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의욕이 사라지면 매우 작은 시련 앞에서도 좌절하여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삶의 의욕을 잃는가? 

첫째, 38년의 오랜 고통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는다. 여기서 우리는 38년된 병자의 마음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 없이 진행되는 삶의 질병이나 고통은 누구에게서든지 삶의 의욕을 앗아간다. 현실 속에서 닥치는 계속되는 질병과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쉬지 않고 방해하며 핍박을 가하는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는 우리의 의욕을 저하시킨다.

둘째, 외로움에 시달릴 때 삶의 의욕을 잃는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다는 병자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의 외로움을 볼 수 있다. "고독만큼 무서운 살인자가 없다"는 격언이 있다. 그 만큼 고독은 무서운 것이다. 외로움이 지속되면 삶의 의욕을 잃는다.

셋째로, 계속되는 실패와 패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욕을 잃게 한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된 병자는 다른 사람과의 경주에서 늘 실패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물이 동할 때 훨씬 빨리 달려 가지만 이 병자는 늘 꼴찌였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적극적으로 무엇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삶의 의욕을 잃었다.

한편, 신자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되어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미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삶의 의욕을 잃는 가장 주된 이유는 죄악의 늪에 빠져 그 결과를 맛볼 때이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죄의 늪에 빠지면 삶의 의욕을 잃고 무능한 존재가 되더니 죽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 참된 삶의 의욕을 얻는 비결을 알려준다. 38년이나 된 고질적인 불가능한 병자라 할지라도 그의 삶의 의욕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의욕을 잃은 자가 어떻게 참된 의욕을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는, 자신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정직한 기도가 있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된 병자는 자신의 사정을 그대로 주 예수님께서 정직하게 아뢰고 있다. 부끄러움, 실패, 좌절 등을 그대로 주께 아뢴다.

둘째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병자는 예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말씀을 들었다. 그 순간 그 병자는 낫기를 원했다. 이는 주의 말씀에 의해 병자의 마음 속에 의욕을 발생됨을 의미한다. 의욕 상실과 성경을 멀리하는 것은 반드시 함께 한다. 그러나 성경을 가까이 하면 다시 의욕이 생긴다. 누군가가 살아있는 주의 말씀을 들려주면 의욕을 잃었던 자가 그 말씀에 마음을 합할 때 의욕이 생겨난다. 즉, 말씀이 살아 역사하면 신앙적 의욕, 믿음의 의욕, 다시 주님과 함께 하길 원하는 의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욕을 잃은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것이다.

셋째는, 순종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의욕이 생길 때 주께서는 지시를 내리셨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병자는 순종했다. 주님의 요구는 언제나 어렵지 않다. 믿고 순종하면 된다. 그러나 병자가 자기 이성을 믿고 환경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의심하게 되면 결국 좌절 속에 계속 거하게 된다. 이러한 교만과 불신은 주의 말씀에 순종을 거부한다. 불신의 상태에 있는 자들은 순종을 해 보지도 않고 다시 의욕을 잃는 자리로 떨어진다. 

요약하면, 의욕은 주님을 만나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생겨난다. 복음을 들을 때 생겨난다. 성령께서 복음과 함께 역사하시면 그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 속에 의욕이 생긴다. 이때 무력한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낫고자 하느냐’는 주의 음성에 간절하게 ‘아멘’하고 주의 지시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의 의욕이 생긴 상태에서 주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게 되면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나 힘차게 살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아멘.

앞으로 사회는 점점 악해지고 공의와 정의와 윤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신앙으로 살려고 할수록 좌절될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욕을 잃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한 십자가의 생수와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 안에 거한다면 우리의 삶은 영원토록 의욕을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시간 주의 말씀을 들었으니 다시 의욕을 갖고 일어서자.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잠시 잊고 주님을 만나보자. 그리고 간절히 고백하자. “낫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믿고 순종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생 마치는 그날까지 강한 삶의 의욕으로 붙드실 것이다. 의욕을 잃기 쉬운 이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강한 의욕을 지니고 힘차게 달리는 주의 백성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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