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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리시단 영주들과 임진왜란(1)
이청길 선교사(동경성서교회)

1549년 최초의 선교사 프란시스코 쟈비엘 신부가 선교한 이후 70년간 남부지역에는 빠른 속도로 기독교가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 예수회 선교본부에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 자신들도 흥분할 정도이었다.

1569년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는 기독교의 포교를 용인하게 되었는데 이는 배불정책(排佛政策)에 기인한 불교 사원을 견제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통한 대포와 화약구입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처음에는 포교활동을 허용하였으나 기리시단 영주들의 세력이 점차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부분적으로 금령을 내리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 전국 통일국가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가장 큰 장애는 기리시단 영주들과 종교 세력의 단결이었다. 기리시단 영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종교 세력의 단결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대륙 침략에 대한 망상을 꿈꾸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86년에 일본 카토릭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인 코엘료(Coelho, Gaspar) 선교사를 만나서 중국대륙 침략에 대한 계획을 토로하면서 정복 후에 대륙 선교와 일본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혹하였다. 이 때에 코엘료(Coelho, Gaspar) 선교사는 기리시단 영주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도와서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포르투갈 함선도 제공하기로 제의하였다고 한다. 카토릭 예수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어떻게 전쟁을 권유하고 동참하였는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카토릭이 지난 역사가운데 가장 악랄하고 비참하였던 십자군전쟁의 참상을 알기 때문에 소름이 끼친다. 카토릭 예수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의 야망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예수회는 로마 카토릭 교회를 위하여 비밀리에 수행해야 할 중요 목적을 가지고 창립된 단체이다. 첫째는 세계 정치 권력의 장악이며, 둘째는 세계 종교의 통합을 수행하는 일이다. 예수회는 로마 카토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모든 활동을 전개하는 정치적인 조직으로 점차 발전하게 된다.

이를 위해 카토릭 내에서 교황의 강력한 독제 체제를 추구하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기독교를 교황권 아래로 편입시키려 하며, 각국의 정치가가 교황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황의 말에 절대 순종하기로 충성을 맹세한 단체이기에 교황의 명령에는 죽음도 불사한다.

그 당시에 카토릭은 동방진출을 위한 야망을 가지고 일본을 근거지로 하여 조선, 대만, 중국 대륙의 선교를 꿈꾸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카토릭 세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개신교의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고, 또한 동양권 카토릭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예수회 선교사들은 상호간의 유익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륙 침략을 합의하고 협력하게 되었다. 이렇게 종교가 전쟁의 도구로 이용됐을 때 그 얼마나 허망하며 그 결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대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청길  ckleejp@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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