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한 2016 미포 후기

한국교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2016 미래교회포럼 내용에 대한 다양한 의견 수렴 차원에서 미포후기를 실습니다. 후기내용은 미포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16 미래교회 포럼이 열린 연동교회당

 

박광서 목사(큰사랑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라는 주제로 개최된 미래교회포럼은 근래 보기 드물게 많은 이들이 참석한 의미 있는 행사였다. 강사들의 관점의 차이로 인해 평행선은 달렸지만, 교회의 문제, 학자들의 문제, 그리고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미 포럼과 관련된 다양한 기사가 언론매체에 소개되고 있으니 독자들이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금번 포럼을 통해 느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거시적 측면의 몇 가지 단상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통합적 신학을 위한 겸손한 학자적 자세의 필요성

신학에는 여러 제분야가 있다. 각 분야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공통분모에 있어서는 신학적 개념이나 용어 선택에 있어서 통일된 합의가 있어야 혼란을 줄일 수 있다. 만일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면 상호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번 포럼에서 특히 김세윤교수에게서 그런 면을 적잖이 발견한다. 오랜 세월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신학 개념을 자기 식으로 재정의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듯한 태도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그동안 전문성을 강조하는 시대 흐름에 부응하여 신학 역시 여러 전문 영역을 발전시켜왔다. 소중한 결실이 있었지만 신학 제 분야 간의 ‘대화의 단절’이라는 단점도 노출시켰다. 전문성의 한계를 인지한 세상은 이미 ‘융합’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적인 학문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번 포럼에서도 드러나듯이 신학 역시 통합적 신학을 위한 신학자들 간의 대화가 더욱 절실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다원화 시대의 위협 앞에 ‘나홀로 신학’은 교회의 혼란과 분열을 조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호협력을 통한 통합 신학의 정립과 함께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대다.

루터와 칼빈을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현대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을 능가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저들의 열매가 통합적 신학의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하나같이 성경주해가, 조직신학자, 법학자, 사회의 개혁을 이끌었던 실천적이고 통합적인 영적 지도자들이었다. 결코 특정 분야만을 고집하는 ‘나홀로 신학’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진리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현장의 땀을 소중히 여긴 신학자들이었다.

정통 개혁주의와 새 관점 신학의 혼합적 행보의 위험성

정통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김세윤 교수의 또 하나의 위험한 행보는 새관점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주장의 이면에 새 관점의 강조점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김교수의 강의가 혼란스러운 것은 어떤 때는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고, 어떤 때는 새관점에 서 있는 갈지자의 행보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전가’(imputation)교리의 부인에서 볼 수 있다. 6시간 강의 후 가진 질의응답 시간에 그는 개혁주의의 전가교리가 중세 스콜라 공로 신학을 답습하는 것이라며 자신은 전가교리에 있어서 새관점의 입장에 긍정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의 주장대로 개혁주의가 로마 가톨릭의 공로신학을 따르고 있을까? 그가 비판하는 공로 신학의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공로신학에 날선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 이유는 중세 신학이 구원의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두지 않고 ‘인간의 공로’에 두려는 자력구원관(autosoterism) 때문이다. 이처럼 동일한 공로라도 누구의 공로냐는 전혀 다른 신학을 낳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결코 로마 가톨릭의 신학을 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개혁주의가 중세신학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가 개혁주의 ‘전가’(imputation)교리를 ‘주입’(infusion)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가는 “하나님께서 법정에서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는 법정적 선언” 개념이다. 상태의 변화가 아닌 신분의 변화를 뜻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에 의해 성취하신 완전한 의를 우리의 의로 ‘간주’(reckon)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사셀 희생 제물 머리에 안수를 통해 죄악을 대신 담당하게 했던 것과 같은 개념이다. 개혁주의 전가 교리는 주사기를 놓듯 실제적으로 의가 주입되어 의화(義化)된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교수는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로마 가톨릭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정통 개혁주의 입장에 서있는 박영돈 교수가 김세윤 교수와 신학적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원인은 성경 해석의 차이에 있다. 예를 들어 “신자가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박교수는 불가이고 김교수는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그것은 박교수는 범죄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교훈으로 해석하고 있고, 김교수는 문자적(literal), 실제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는 박교수를 논찬한 최갑종 교수도 김교수와 동일한 입장이다. 이처럼 그동안 보편적으로 경고와 교훈으로 해석하던 성구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이 누적되고 골이 깊어지면 교회는 지지하는 견해에 따라 앞으로 큰 분열의 아픔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놓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교리와 경건의 능력

6시간에 걸친 김 교수의 강의 내내 피곤이 엄습했다. 도대체 무엇이 마음을 이토록 무겁고 힘들게 할까 돌아보니 김교수의 강의 속에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재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관심가져야 할 사람보다는 사람의 그림자에 집착한 것과 같았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나 정작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빠졌다. 예수님의 양성 중 진정 신성(神性)을 고백한다면 최소한의 신적 경외심이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하대하듯이 예수님의 언어습관을 ‘말버릇’이라 말하는 장면은 급기야 버르장머리라는 말까지 나올 태세였다. 필자는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의 구원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죄의 비참을 생각하면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은 더한다. 이는 루터나 칼빈,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수많은 신앙고백자들의 공통된 현상일 것이다. 학자는 경건이 메마르게 되면 차디찬 이성만 지배하게 됨을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유익보다는 독으로 작용하기 쉽다.

은혜를 가장한 차디 찬 이성 위에 세워진 메마른 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의를 드러내는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구원의 근거를 인간의 선행에 두고 싶은 유혹을 피하기가 어렵다. 최종 칭의, 유보적 칭의, 어떻게 불리든 궁극적인 것은 인간의 선행에 의해 구원이 결정된다고 믿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에 따라 강조되는 것이 도덕 혹은 윤리다. 물론 신자는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신자의 삶은 도덕 이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해서는 J.C. Ryle의 <성결>(Holiness)과 같은 저서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김교수와 최갑종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가장 아쉬운 성경적 개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지 않으나 구별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칭의가 성화의 근거가 되고, 성화는 참된 칭의의 증거요 열매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도가 끝까지 구원을 놓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 연합 속에서 구원의 서정이 전개된다. 인간의 선행조차도 그리스도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때로 신자도 영적 침체에 있을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의 선행을 통해 최종적인 칭의가 결정된다면, 과연 그 인간의 의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준이 될 수 있을까?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 만일 가능하다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는 월터 마샬(Walter Marshall, 1628-1680)의 <성화의 신비>(The Gospel Mystery of Sanctification)를 읽으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필자는 김교수가 박영돈 교수의 강의안을 읽고 칭의와 성화, 둘의 관계에 있어서 분리되지 않으나 구별된다는 분리성과 구별성의 특징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고백을 듣고 조금 당황스러웠다. 개혁신학에 있어서 두 개념의 분리성과 구별성은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학자라 불리는 분이 그런 상식도 모르면서 칭의와 성화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교회를 세우고 지키는 것은 신앙고백을 위한 성경적 교리적 바탕이지 슈바이처와 같은 독일 신학이 아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믿음에 기초한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죄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세주요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져 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감사의 신앙고백의 증거가 인간의 선행인 것이다. 인간의 선행은 구원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참된 구원의 증거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칭의와 성화의 기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에 기인한다.

사실 신학이 타락하면 신자의 삶도 타락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차원에서 강의자들이 바른 신학을 가르치지 않은데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은 합당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의 본질을 그렇게만 볼 수 없다. 비난 듣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방종과 죄악은 교회 속에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이른바 거듭나지 않은 ‘유사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이 많기 때문이요, 이 시대의 세속화의 힘이 교회의 영성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거듭나지 않은 목회자, 신학자, 교인들이 많은 것은 아닐까? 사실 청교도들이 고민한 문제가 이점이고, 이 시대가 청교도 시대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참된 복음이 선포되려면 공교회의 교사나 목사들의 근본적인 영적 문제가 선결되어야 참된 복음의 선포도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참된 경건과 학문을 잃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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