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대안교육 칼럼 4>

자녀의 관계지수는 얼마입니까?


“싫으면 안놀면 되니까”
일반 공립중학교를 다니다가 독수리고등학교로 입학한 한 여학생이 내뱉은 말입니다. 같은 반 학생과 갈등 관계를 심각하게 겪으면서 일반학교에서는 안 해도 될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일반학교에서는 마음이 안맞는 친구가 있으면 그 아이와 놀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관계로 인해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독수리학교에서는 친구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경우 반드시 그 갈등을 해결해야 합니다. 교사와 학생, 심지어 부모까지 고통하면서 함께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허물도 많고 실수도 많은 까닭에 함께 부대끼며 다듬어지고 충돌하며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싫으면 안놀고, 갈등이 생기면 피해버리고, 미운 친구가 있으면 왕따시켜 버리는 태도로 관계맺는 법을 배운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학교니까 싫으면 안놀면 그람이지만 직장이나 사회에 나가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학교에서 싫은 사람을 용납하는 연습을 하지 못한 사람이 나중에는 용납할 수 있을까요? 용납은 어느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법을 지금 배워야 합니다. 이를 훈련하는데 있어서 친구보다도 더 좋은 훈련상대는 없습니다.

   자신도 용납 받아야할 연약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란게 항상 상대편의 잘못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항상 관계는 상호적이어서 나도 잘못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더더군다나 상대편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내가 잘못한 부분이 훨씬 많이 보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 내가 용납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용납 받는 자의 존재감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거기서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용납을 받아본 사람, 그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납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 발생함과 동시에 결별이 일어나는 일이 계속된다면 ‘용납할 기회가 없다’는 심각성보다 ‘용납받을 기회가 없다’는 심각성이 훨씬 큽니다.

   용납을 넘어 서로에 대해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관계에는 ‘허니문 기간’이 있습니다. 직장 동료든, 교회성도든, 취미활동에서 만난 사람이든 모든 인간관계에는 허니문 기간기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허기문 기간은 반드시 끝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허니문 기간에 서로를 기뻐하고 양보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허니문 기간이 끝났을 때 ‘밥맛없는’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인내라는 성품은 바로 이 때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꾸려가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성품이 바로 인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친구의 허물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조직에 속하든 그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신뢰를 쌓으며 여러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 공부 때문에 학교를 쉽게 옮기고 쉽게 포기한다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친구를 깊이 있게 사귈 기회도 없고 관계 맺는 법을 배울 기회는 더더욱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공부 때문에 관계의 소중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관계지수가 높은 사람을 선호하는 까닭을 교육의 책임을 맡은 부모가 교사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