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미포 모임을 정리하면서

2016 미래교회포럼(이하 미포)은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라는 주제로 모여서 토론 한 결과 종교개혁의 참된 이신칭의는 값싼 구원의 면죄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오히려 문제는 성화이다. 성화는 칭의 다음의 순서인가? 아니면 성화와 칭의는 동일한 것인가?

미래교회포럼 사무총장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장)가 연동교회당에서 2016 미포를 진행하고 있다.

먼저 박영돈 교수의 견해 정리

박영돈 교수는 ‘이신칭의는 이 시대의 면죄부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논의를 시작했다. 먼저 칼빈의 칭의론을 개진하면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분명히 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된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심지어 칼빈의 말을 인용해서 성화 없는 구원은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둘째는 종교개혁자들이 의의 법정적 측면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관계적 측면 모두를 주장했음을 밝혔다. 셋째는 우리 밖에 있는 의가 칭의의 근거임을 밝히고 이것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우주적 차원의 규모로 확장함으로, 칭의론이 가진 포괄적 함의를 밝혔다.

박영돈 교수의 강의에 대한 질문

먼저 그는 김 세윤 교수가 『칭의와 성화』에서 주장한 구원의 탈락을 명백히 말하는 성경 본문은 없다고 주장한다. 구원의 탈락처럼 보이는 본문은 성도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본문을 다룰 형편이 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질문이 생긴다. 구체적인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 경고를 경고라고 할 수 있는가? 구원을 놓고 경고를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는 이런 본문이 들어있는 듯 한 야고보서, 히브리서, 유다서 등을 정경에서 제외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만큼 말 한마디로 결론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둘째는 박 교수는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는 김세윤 교수의 해석학적 결과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율법적 상황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칭의와 이방인의 부정한 상황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성화라는 그림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런 해석학적인 발전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셋째로 박 교수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별된다는 용어를 사용한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도 이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한다(대교77문). "성화는 칭의와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지 있지만, 그 둘은 서로 다릅니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의 양성 교리를 정리한 칼케돈 언어와 유사한다.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양성간의 관계를 정리한 방식으로 정리하는데, 그러나 강조는 칭의에 있다. 순서의 먼저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의 양성 관계의 우열이 있는가?

김세윤 교수의 견해 정리

김세윤 교수는 바울 신학을 전공하면서 바울이 예수님의 발언을 어떻게 소화했는가에 집중한다. 즉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질문한다. 로마서1:16-17절의 하나님의 의의 복음은 로마서1:3-4절에서 다윗의 씨 되심과 언약의 대속제물의 죽으심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의 왕권을 받으신 주의 복음의 적용으로 본다. 바울이 전한 왕권의 복음은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래서 바울의 구원론의 중요한 적용인 칭의론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긴장아래 들어간다. 여기서 칭의와 성화는 바울의 구원론의 상황화의 그림 언어라고 주장한다. 성경해석의 결과물이다. 유대적 법적 상황에서 칭의 언어로, 헬라의 부정적 제의 상황에서 성화의 언어가 등장한다. 또한 칭의는 법정적 측면과 동시에 언약적 언어로서 관계적 요소를 강조했다. 바울 신학이란 거대한 관점에서 칭의론의 위치를 정위시킨 강점이 있다.

김세윤 교수에게 질문이 있다.

첫째는 칼빈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가 있는가? 독일과 유럽의 신학적 배경으로서 루터교적 배경의 문제가 아닌가? 칭의라는 교리를 다루면서 교리 형성 배경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상황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이다. 루터란의 칭의론의 반성을 한국교회에 적용시킬 때,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서 구원파적 칭의론을 문제 삼았다.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는 맞지만, 신학적인 입장의 문제 제기가 될 수 있는가? 칼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가능하지만 칼빈에 대한 선호도와 그의 영향력에 의해 만들어진 신조들을 채택하는 신학적 입장에 대한 비판은 정당했을까?

둘째는 탈락 가능성을 주장하고, 성도의 견인과 예정을 동시에 주장하는 모순점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알미니안과 칼빈주의를 동시에 아우르는 노력은 가능하다. 그러나 극복을 위한 주경적인 노력이 더 필요한 상황은 아닌가?

이렇게 양자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향후 논의의 과제들을 생각해 본다.

먼저 전가 교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칭의가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로서 전가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이런 전가 이론을 중세의 공로적 개념과 연결되었다고 비판을 한다. 톰 라이트가 이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이다. 칭의의 법정적 개념과 함께 전가 교리를 같이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이해에 충격이 된다.

둘째는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이다. 과연 김 교수의 말대로 상황화의 그림 언어인가? 이런 해석학적인 결과를 수용해야 하는가? 이런 결과가 수용되면 구원의 서정으로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단어는 같지만 개념이 다른 것이 된다. 성경학과 교리의 언어 사이에 심한 괴리 현상이 있다. 이와 더불어 반대로 구원의 서정이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가?

셋째로 탈락 가능성의 본문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탈락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단지 성도에 대한 경고만인가? 경고가 효력을 발휘하는 것 없는 경고만 일수 있는가를 본문에 대한 검증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두 교수가 모두 성화를 말한다. 그런데 이 성화가 인간만의 행위인가? 아니면 성령의 역사인 은혜인가? 만약에 은혜라고 한다면 행위가 은혜가 되는 것은 어떤 차원인가?

김세윤 교수는 칭의의 현재적인 단계를 성화라고 부를 수 있겠다고 하면서, 성령의 도우심과 보좌 앞에 예수님의 중보적 사역을 언급한다. 이는 성화라고 부르는 인간의 행위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함을 말한다. 따라서 성화의 행위 혹은 칭의의 현재적 측면은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된다.

반대로 박영돈 교수의 입장에서 성화는 어떤 행위인가? 칭의의 필연적 열매이기에 우리 밖에 있는 의가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교리문답은 칭의와 함께 성화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성화가 은혜이다.

양자의 주장에서 성화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난 행위인데, 이 행위가 성령의 도움으로 드러나는 은혜라는 측면이다. 따라서 양자의 주장에서 차이가 없다. 우리가 성화라고 부르는 행위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에 대한 은혜로운 행위가 될 때 비로소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위치할 수가 있다. 칭의를 이미 얻은 자가 현재의 삶에서 공로적 행위를 할 때는 은혜로서의 행위가 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을 맘몬적 가치아래 둘 것인가 아니면 은혜의 복음적 가치로 담아갈 것인가가 우리의 구원의 향방 그리고 우리의 의의 가치를 결정할 것이다. 우리의 행위를 은혜답게 만드는 구체적인 차원을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메시야의 우주적인 주권적인 측면을 다루는 실질적인 자리가 될 것이다.

미포를 통한 논의와 문제 제기가 향후 한국교회를 더 견실한 교회로 세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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