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주도할 사회문화적 추세 중 중산층이 많아야 안정적이라고 보는 '종형곡선'에서 '우물형 곡선'으로의 이동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극단을 피하고 협상과 타협을 통해 중간지대를 찾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크리스티애니티투데이에 기고한 채드 홀의 글에 보면 극단이 우세해지는 '우물형 곡선'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 스크린을 보라. 60인치의 대형 플라스마TV와 함께 아이팟의 극소형 화면으로 TV를 시청하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상점들은 월마트와 같이 대형화되는 한편, 희귀한 물건이나 명품을 파는 상점들은 더욱 소형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유기농 건강식품을 찾는 동시에,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를 즐긴다. 이와 함께 중산층은 감소하고, 중소기업은 위기를 맞고 있다. 무엇이든지 평균적인 것은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신학적으로 진보와 보수는 '우물형 곡선'의 양극단을 달린다. 중도는 사라지고 있다. 신자들은 대형교회가 아니면 소형교회를 선호한다. 중형교회는 외면당한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은 '우물형 곡선'을 그리고 있는 교회 안팎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첫째, 교인의 개념부터 재고해봐야 한다. 교적부에 기재된 교인이 모두 같은 성향의 교인이 아니다. 아마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열성적 부류와 지극히 미온적으로 참여하는 양극의 교인이 존재할 것이다. 이 모두를 동일하게 교회 구성원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둘째는 재정이다. 평균적 액수의 헌금이란 없다. 커다란 액수를 기부하는 교인과 아주 작은 액수를 기부하는 두 부류의 성도가 존재한다. 이들 모두 귀하게 여겨야 한다.

셋째, 대예배와 소그룹이 중요하다. 중간 크기의 모임은 매력을 잃고 있다. 어중간한 규모의 모임이나 행사에 에너지를 소진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평신도 사역자에 대한 부분이다. 철저한 헌신자와 제한적 참여자로 이뤄질 것이다. 한 주일도 거르지 않고 수년째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필요한 때만 잠깐 나타나 일을 돕는 부류가 있다. 교회는 후자를 위해 순환교사제, 사역등록제 등 선택적 봉사를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 편리한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중산층, 즉 중간계층이 두터울 때 건강한 사회로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 양극단이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그것도 활기차게 말이다. 교회여, 중간을 포기하라. 이제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할 것이다.

번역=김영래 스피릿벤처미니스트리스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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