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해 같으면 거리에 캐럴이 가득해야 하는데 금년은 그렇지 못하다. 하필 대통령 선거가 성탄절 직전에 있어서 캐럴 대신 각 후보의 로고송이 넘쳐흐르고 있다. 노래가 바뀐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축복의 계절에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와 내용들이다. 사랑과 축복, 평화와 기쁨에 대한 내용들은 자취를 감추고 격렬한 어조의 규탄과 살기가 느껴지는 비난의 소리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원래 성탄절은 평화를 노래하고 기도하는 계절이다. 신앙인들에게는 속죄와 구원의 큰 감격이 있는 계절이지만 그렇지 않는 이들에게도 사랑과 평화를 맛보고 기원하게 해야 하는 계절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젊은 시절 유학을 하면서 만났던 유대인 친구가 있다. 지금까지도 교분을 유지하는 그에게 여러 차례 예수님에 대해 말하려 시도했는데 그 때마다 그는 사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메시야의 시대는 평화의 시대인데 오늘의 기독교는 평화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21세기를 살면서 세계 도처에 충돌과 갈등이 격심해짐을 보면서 그 모든 갈등의 이면에 종교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때마다 우리는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이 시작된 것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여러 해 전 유네스코는 이런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윤리적 가치를 정립하고 이 공통분모의 확산으로 갈등을 예방하자고 했다. 그 내용으로 인권과 책임,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요소, 소수 민족에 대한 보호, 분쟁 해결을 위한 위임과 공평한 협상원칙,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적 관심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윤리적 기준들은 옳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종교들이 지닌 본질적 특수성, 차별성 등을 생각하면 그리 실효가 있을 법하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는 유대교 랍비인 요나단 삭스의 말 '차이점에 대한 존중'을 더 좋은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도 발견하는 평화의 원리다. 1세기의 로마 교회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유대인 신자들과 비유대인 신자들 사이에 전통과 문화 그리고 교리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충돌이 생겼고 자칫 이 문제가 교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큼 어려운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때 바울은 롬15:7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가르쳤다. 1997년 한 해는 유난히 교회와 사회의 갈등이 심했고 우리 마음속에 섭섭함으로 남아 있다. 세상의 논리들에 대해 비록 찬성하지 않더라도 경청하고 이해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또는 우리의 근본진리가 아닌 문화와 방법에 대한 것들에 대해 가능한 범위에서라도 수용의 자세를 보인다면 한결 화평으로 가는 길에 도움이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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