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개혁주의 교회를 비롯한 남아공 17 개 교회 동성 결혼 허용

푸어트래커 기념관

위 사진은 남아공 수도 프레토리아 지역에 세워진 푸어트래커 기념관이며 아래 사진은 이 기념관 맨 밑바닥에 “온스 퍼 요우 스위드 아프리카 (우리는 당신을 위하여 남아공화국 비문)” 라는 비문.

1620년 11월 9 일 102명의 칼빈의 영향을 받은 자들인 영국의 청교도들이 기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미국에는 유럽의 이민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설하였다고 전해져 오는 것은 “바람직한 질서 수립과 보존을 위하며, 정의롭고 공평한 법률과 법령의 결정과 준수” 라고 하는 그들의 메이플라워 서약 때문이다. 이 서약에는 "민주정치"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이 청교도들은 미국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에 따라 전 세계에 모범이 될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는 것이 목표라고 규정하였다. 현대어로 표현하면,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었고 이 개혁주의가 미국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개혁주의에 입각한 건국정신을 팽개치고, 2015년 6월 26일 동성결혼을 합법화 하였다. 청교도들이 미국이 도착한 이후 396년 만에 만난 미국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다. 법제화된 소고현상이다.

1652년 4월 6일 얀 판 리벅이 이끄는 일련의 함대 (배 3척과 88명의 화란인들) 가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칼빈의 영향을 받은 화란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의 도착 목적은 언덕위의 도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도로 가는 길의 중간 기착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4월 7일에 남아공 최초의 화란 개혁주의 교회가 얀 판 리벅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물론 얀 판 리벅이 도착하기 이전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케이프 타운에 도착하였지만 이들은 정착하지는 않았다. 1688년도에는 약 200명의 불란서의 위그노들이 당시의 로마교의 박해를 피해서 케이프 타운에 도착하여 정착하였다. 이들 역시 칼빈의 후예자들이었다. 남아공의 첫 이주자들이 화란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그 이후로 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과 선교사들에 의해서 남아공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건설된 국가가 되었다.

남아공 백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1838년 12월 16일은 영원히 기억될 날이다. 이날에 남아공으로 이민 온 화란계 백인들 즉 아프리카너들 470명은 3만명 정도의 남아공 흑인 왕국 줄루 왕병들과 전쟁을 한 날이다. 이날의 전쟁을 대비하여 아프리카너들은 12월 9일 하나님에게 서약하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념관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자손들에게 까지 영원히 주님의 명예를 기념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는 필자가 영문을 요약한 것임).

그리고 아프리카너들은 1:60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후에 남아공 정부는 푸어트래커 (아프리카너 개척자) 기념탑을 건설하였다. 매년 12월 16일 12시가 되면 기념탑 천정으로부터 햇빛이 기념탑 내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온스 퍼 요우, 스위드 아프리카” (문자역: 우리는 당신을 위하여, 남아공화국) 이란 비문을 비춘다. 이날이 되면 인근의 초고교생들이 이 기념관을 방문하여 기념식을 행하곤 하였다. 만델라 정부시절에는 이날을 화해의 날로 정해서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남아공의 아프리카너들은 화란 개혁주의 후손들이며 이들은 하나님이 다른 족속이 아니라 자신들 아프리카너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아주 강하게 믿고 있었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서 1949년도에는 아프리카너들이 인종차별주의 정부를 설립하였고, 이들과는 정반대로, 인구의 90 퍼센트에 해당하는 남아공 비 백인들은 법적으로 제도화된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제도는 1994년도에 막을 내렸다.

이 인종차별정부 시대에 남아공에서 화란개혁주의 교회는 신학적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화란개혁주의 백인 교단을 위한 목사 양성기관은 새 개의 대학들에 소속한 신학대학들이었고, 또한 이 외의 몇 몇 대학의 신학대학은 화란 백인 교단이 세운 화란개혁주의 선교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이 당시 남아공의 주류의 신학자들은 이 두 교단 소속의 교수들이었다. 참고로 한국의 고신 교단과 자매결연을 맺은 포체스트룸 대학이 소속된 교회는 이 화란개혁주의 교단과는 다른 남아공 개혁주의 교단이다.

흑인정부가 1994년도에 들어서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인종차별정부에서 유린당했던 인권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는 2006년도에 남아공 정부가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해에 17 개의 독립교회들과 교단들이 이 정부 시책을 지지하였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도 동성애들을 환영하였다. 그런데 이 17 개 교단들은 남아공 기독교 사회에서 그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단들은 아니었다. 2015년도 10월에 남아공 교회는 또 하나의 위기를 자초하게 된다.

남아공의 주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화란개혁주의 교회가 시??nbsp;(총회) 에서 동성결혼을 지지하고 동성애자의 목회자도 허용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법제화된 소고현상이다. 그 결정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동성애자들을 포함) 예수님께로 인도 할 기회를 공적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화란개혁주의 후손들이 남아공에 도착한 이후 364년 만에 남아공의 화란개혁의 주의 교단은 새로운 역사에 진입하였다. 그런데 화란개혁주의 교단의 총회장은 개교회가 실제적으로 이 동성결혼에 대해서 결정을 하도록 모든 권한을 남겨두었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교단의 결정대로 이 법제화된 사회적 소고현상에서 정말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

혐오발언법이 아직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이 법이 제정된다면 공적인 공간에서 더 이상 성경의 교훈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이미 몇 군데서 발생되었다. 남아공 화란개혁주의 교회는 스스로 복음 전파의 문을 잠그고 소고의 문화 (소돔과 고모라)를 사회의 한 양지 문화로서 수용하였다. 이 결정에 대해서 분명한 것은 남아공 화란 개혁주의 교회는 신학적으로 창조의 질서를 부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이후에 제일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하나의 가정을 설립하셨다. 그래서 가정은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그리고 이 가정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였다. 이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에게 계속적으로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도 주셨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는 이 기본이 다른 사람이 아닌 성경을 최고의 규범으로 가진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되었다. 그 결과로 동성 결혼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동성연애가 주 문화를 이루고 있던 한 사회의 운명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유다서는 이를 본보기로 지금도 보여 주고 있다 (헬라어 현재시제가 사용되었다).

화란개혁주의 교회를 비롯한 남아공 17 개 교회는 동성 결혼 허용이란 결정을 내림으로 해서,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를 사회의 한 양지 문화로서 인정하였다. 그런데 화란개혁주의 교회가 원하던 대로 복음의 문은 더 넓혀진 것이 아니라 좁아질 것을 이미 내다 보고 있다. 더 나아가서 남아공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위기의 시대가 열려졌다. 도처에서 성경에 말하는 운명의 시간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현자유비 우자 무비 (마 25).

김재수 (남아공 선교사/고신 총회 성경 연구소 객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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