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로 고려신학대학과 Midwest Univ. 에서 공부하였으며, 고신대에서 교무부처장, 기획부실장, 사무처장을 역임하였다.

Ⅰ. 들어가는 말

1. 현대 기독교인의 문제점

21세기 우리 시대의 종말론적 상황에서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교회 직분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인 생활”에 집착하고 있으나 구원관이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2016년 12월 초순 코닷 미래포럼 당시 미국의 에반겔리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이단 연구가 한 분은 교인 1,000명을 상담한 결과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필자에게 일러 주었다. 이런 현상은 진정한 “회개와 죄 사함”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결과이며, 형식적 신자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종교인 생활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전언이다.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믿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 반증(disproof)되는 심각성이 노출(exposure)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2. 회개와 구원의 상관관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이 말씀은 2,000년 전의 말씀이지만, 지금도 유효하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들이 되새겨야 할 중요한 메시지이다. 역사와 시대를 불문한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럼에도 아주 옛날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지금에 이르러서도 진정한 통회와 죄를 자복하는 회개는 신자만이 갖는 특권이다. 회개는 선민이 구원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며 유일의 요소이다. 이에 “회개”를 주제로 한 논고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

 

3. 인류 범죄는 황금에 대한 탐욕이 주류를 이룬다.

금년 2017년은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래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500년 전 그 시절에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추기경 사제들의 농단이 심했다. 당시는 교회가 국가권력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 점이 바로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하게 된 원인이었는데, 면죄부 거래와 같은 오욕(disgrace)도 주로 돈(gold, money)과 관련된 탐욕이나 명예가 원인이었다.

왜 성경에는“돈을 사랑함(탐욕, avarice)이 모든 악(all evil)의 근원(뿌리)이 되나니”(딤전 6:10)라고 하였을까?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라고 지적한다. 돈에 대한 미혹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인류사의 여러 농단은 질서 문란을 획책한 돈에 대한 탐욕에서 출발한다.

 

4. 고전에서 말하는 농단

근간에 이르러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농단이다. 고전에 나오는 농단은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하다.”라는 뜻이 있다. 농단은 맹자(B.C. 372 ~ B.C. 289)의 공손추(公孫丑)에서 유래한 것으로“시장 상인이 물건을 사 모아 되팔아서 이득을 취해 보겠다.”는 상술 동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고전이 말하는 농단은 상거래 질서를 문란케 하는 근본적인 모순에서 유발되었다. 농단은 국가권력 주변에도 있을 수가 있고, 기관, 단체 등 모든 조직체에는 항상 무질서와 같은 농단이 발생할 개연성이나 요인들이 농후하다.

 

5. 학원에도 실제 농단이 있었다.  

과거 고려학원 산하기관에서도 기관장이라는 권력자들 주변에는 농단이 있어 왔다. 판단력이 부족한 무자격자들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최고위층 자리에 오르게 되면, 학사 질서를 문란케 하고 실제 농단을 일삼고자 하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근친관계를 이용하기도 하였고, 이합집산으로 모이기도 하였다. 일약 스타덤(stardom)에 오른 자들은 대개 정한 임기를 반도 못 채우고, 영욕이 교차되는 상황에서, 지위에서 급히 내려오는 불명예와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농단을 부추긴 무지한 자들은 거의가 무너졌음을 목도하였다.

국가, 사회, 교회 등 조직체에서의 여러 형태의 농단은 근본적으로는 계명을 위반하고 질서를 무너트리는 탐욕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회개가 있는 곳에는 회복과 같은 은총과 자비하심이 또한 그들을 되살리기도 하고 연장시킨다. 질서의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형태의 농단들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면 일시적인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

 

Ⅱ. 본론

1. 회개가 무엇인가?

특히 칼빈은“회개와 성화”를 동의어로 보았다. 엄밀히 말하면“성화”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사는 전 과정 전체를 가리키나“회개”는 마음의 변화와 그 변화가 외적 행위에 끼치는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개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죄의식과 사죄를 갈구하는 반응이지만, 성화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다. 칼빈은 회개(repentance)라는 말은 회심(conversion)이나 중생(regeneration)이란 말과 뜻이 거의 같다고 보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제88문. 참다운 회개 또는 회심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답.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옛사람이 죽은 것이고, 또 하나는 새 사람으로 사는 일입니다.

 

제89문.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죄를 마음 깊이 슬퍼하고, 그것을 더욱 더 미워하고 피하는 일입니다.

 

제90문. 새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선을 즐거이 행하는 것입니다.

 

제91문.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 자신의 의견이나 사람의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된 믿음으로만 행하는 일이 선입니다.

 

정리 - 88은 옛 사람으로 살면 회개가 없다는 뜻이 되고, 89은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고, 피하지 아니하면 아직도 옛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는 의미이고, 90은 선을 즐거이 행하지 아니하면,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91은 자신의 의견이나 관습에 따라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지 아니하면 결단코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이라고 규정해 놓았다.

 

혹자는 말하기를“회개와 회계(accounting)는 각기 다른 용어이지만 발음은 같다. 주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반은 회계(돈)와 관련하여 회개할 일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며,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 경우 회복이 가능하나,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되면 회복이 어렵게 된다고 한다. 귀 담아 들어야 할 대목인 것 같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탐심은 제1계명을 거역한 위반자로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는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2. 참 믿음과 회개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회개는 믿음의 소산물이며 참된 신앙의 반응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회개는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입장․정신․자세 마음가짐과 같은 믿음의 의지에서 내놓게 되는 결과이다. 믿음의 확실한 반응이 회개로 연결된다. 칼빈은 말하기를 “회개는 외적 행위에서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의 변화도 내포한다.”(Ⅲ.3.6)고 하였다.

도널드 윌리스(1911 ~ 2006)에 의하면 저서 『칼빈의 생애와 기독교 교리』 p.95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회개를 외적인 수양으로 보아 왔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회개는 철저한 마음의 작용과 같은 중요한 일로, 즉 한 인간의 내면적이고 감추어진 쇄신(reform)으로 정의”하였다. 칼빈은 “회개”라는 용어를 이 외적인 신앙고백에 적용하게 되면 그 참 뜻에서 벗어나게 된다.(Ⅲ. 3.18)고 한다. 생활의 외적인 변화는 당연히 뒷받침되어야 할 일이긴 하지만, 다만 내적인 회개의 은혜에 대한 가시적인 면이자 증거일 뿐이다. 그러나 내면의 회개가 없이는 외적인 변화가 발생할 수가 없다.

신자의 회개와 믿음은 항상 붙어 다닌다. 그 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존립할 수가 없다. “참다운 회개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둘은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분리해서 생각해 본다면, 믿음이 소망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지만, 믿음과 소망은 서로 다르다. 회개와 믿음 역시도 항구적인 띠로 서로 결합되어 있지만, 뒤섞이지 않고 정연하게 결합된다.” 여기에서 칼빈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칼빈은 “회개는 항상 믿음에 의하고 근거하여 따라 나올 뿐만 아니라, 회개는 믿음에서 발생한다(Ⅲ.3.1)고 단정(conclusion) 하였다. 믿음이 회개에까지 이르게 되는 동안에는 시간의 여유가 없다(Ⅲ.3.2). 믿음은 회개 곧 하나님께 돌아서는 행위의 일부로 포함시키며(Ⅲ.3.5), 믿음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쇄신 작업이 시작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 속에서 생길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감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믿음이 항상 회개나 중생보다 앞선다(참조 요 1:13 주석). 특히 칼빈은 믿음, 회개, 자기부인, 미래의 삶에 대한 명상, 칭의, 성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기도를 논하면서도 후기 정통 신학에서처럼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를 인위적으로 정립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믿음과 회개를 이렇게 구분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은혜로운 면에 대한 반응이고,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진지하고 심각한 두려움”에서 나온다(Ⅲ.3.5)고 한다.

 

3. 육신의 정욕에 대한 어거스틴과 칼빈의 견해

어거스틴은 신자들 안에 있는 정욕(욕구)을 죄라고 하지 않고 단지 연약이라고 하였다. 그것에 동의를 할 때에야 비로소 죄라고 하였다. 반면 칼빈은 정욕(욕구)이 행동으로 발전했든 발전하지 않았든 그 자체를 가리켜 죄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신자들이 죽을 육체 안에 거하는 동안에는 무절제한 욕구들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무절제한 욕구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질병을 가리켜 “죄”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연약”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한 뒤에 행위나 동의가 뒤따랐을 때에야 비로소, 즉 최초의 강력한 성향에 굴복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은 “죄”가 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칼빈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욕구에 자극을 받았을 때 그것을 “죄”로 파악한다(Ⅲ.3.10).

 

인용 - 예레미야 17: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 마는”

칼빈은“육체의 모든 욕구가 죄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이 불쏘시개(부싯깃 tinder, 육욕; 연기 나는 악의 숯)이라고 부르는 무절제한 정욕의 병이 죄의 원천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부인한다.”(Ⅲ.3.11). 그리스도인은 회개의 열매를 내놓기 위해 항상 더욱 더 분투해야 한다(Ⅲ.3.16). 회개는 안과 밖으로(겉과 마음) 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흐려 놓아서는 안 된다(Ⅲ.3.16). 우리는 육체의 감옥에 거하는 동안 부패한 본성의 결점들과 실질적인 우리의 본질적인 영혼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Ⅲ.3.20).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체가 철저히 죽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다스리실 때까지 육체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다(Ⅲ.3.20).

 

4.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가 과연 있는가?

예수님이나 히브리서 저자, 사도 요한은 모두 동일한 죄를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즉 성령훼방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새롭게 될 수 없는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는 동일한 하나의 죄를 각기 다른 시각에서 부르는 이름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성령훼방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성령훼방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고 성경에서 규정해 놓았다. 이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짐짓 범하는 죄 등으로도 불리는 참으로 무서운 죄이다. 이 죄는 구원받은 성도의 죄가 아니다. 성도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이다. 불신자의 죄가 아니다. 고의적인 죄이며,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이며,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 죄로서,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는 죄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함부로 어떤 행위에 대해서 성령훼방죄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중한 자세로서 자기 자신을 살피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만일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기꺼이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해야 한다.

이 소제는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가 처음“회개와 구원”의 논제를 생각하면서, 뇌리를 스쳐간 단어가“고범죄와 성령훼방죄”였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2장 31절“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32절“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 훼방”은“신성 모독”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성령 하나님(the Holy Ghost)은“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로서 거룩한 영이시며,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시며 영원토록 함께하신다.”(The third person on the triune God, the Holy Spirit, coequal, coeternal with the Father and the Son) 이다. 신성 모독 즉, 성령 훼방은 그리스어 blasphēmia가 어원으로 영어 blasphemy로 번역된다.

칼빈은 성령훼방죄를 “하나님의 밝은 진리로 감화를 받은 까닭에 무지를 내세울 수 없으면서도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거슬려 범죄한다.”고 말한다(Ⅲ.3.22). 어거스틴은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한 인간이 죽을 때까지 사죄를 거역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일관된 완고함”이라고 정의한 점에 대해, 칼빈은 만족스러워 하지는 않았다(Ⅲ.3.22).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칼빈 자신도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논할 때,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주로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으로 치중 표현하였다.

 

5. 사제에게 죄를 공개 자백하는 점에 대한 칼빈의 견해

칼빈은 공개 자백을 사제들에게 국한(局限, localize)하는 생각에 분명히 반대하였다(Ⅲ.4.7).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해야 한다(Ⅲ.4.9). 그렇지만 칼빈은 하나님께 자백한 죄를 사람들에게, 심지어 공중 앞에서 자백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마음속의 비밀을 한 사람에게 한번 은밀히 자백할 필요도 있겠지만, “온 세상이 듣도록”공중 앞에서 “자신의 수치와 하나님의 엄위 및 영예”를 낱낱이 이야기할 수도 있다(Ⅲ.4.10)고 하였다. 특히 공적인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공개 자백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Ⅲ.4.11). 사적인 자백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다(Ⅲ.4.12)고.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서 서로를 위로하고 붙들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목사와 사제는 조금 구분하였다.(중략)

 

그러면서도 칼빈은 사제에게 하는 자백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① 모든 죄를 낱낱이 자백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Ⅲ.4.16).

② 철저히 자백을 요구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고문이다(Ⅲ.4.16f).

③ 모든 죄를 다 자백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좌절하기 쉽다(Ⅲ.4.18).

④ 로마교회의 주장은 천국 열쇠의 권세를 오해한 데 근거한 오류이다(Ⅲ.4.20).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 충만함을 받게 한 뒤에 비로소 매고 푸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열쇠의 권세가 누구든지 먼저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을 부정한다.”고 한다.

칼빈은 면죄부와 연옥이 모두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로 개념, 특히 성인들의 잉여 공로(공덕의 행위) 개념에 의존해 있다고 한다. 칼빈은 이런 견해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로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명확한 속뜻과 결합할 때,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Ⅲ.5.4).

 

6.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의 구원론 사상

1) 제임스 아르미니우스(AD 1560~1609)는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의 제자였다. 1603년 43세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49세에 죽었다. 그는 칼빈의 예정론을 부정하는데 초점을 맞춘 인물이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攝理, providence), "하나님께서 세상 또는 우주에서 행하시는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행위”를 부정하는 사상으로서 “창 22:14, 여호와 이레” 자체를 부정하는 신학이라고 본다. 그의 신학사상은 인간의 기여(contribution)가 구원의 중심이 돼 버린 격이다. 아르미니우스 사후 아르미니우스주의 추종자들에 의한 신학논쟁(항의)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이 대응하므로써 촉발된 것이 1618년의 도르트회의이다.

1610년은 아르미니우스(Dutch seminary professor)가 죽은 지 1년이 지난 해이다. 42명의 사역자들이 네델란드 교회회의에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견지(堅持)하도록 보호해 줄 것을 청원(Remonstrance)하는 글이 담긴 문서를 발간하였다. 이 청원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5대 요점”으로 간추려 항의식으로 제출되었다.

 

① 조건적 선택

② 보편적 구속

③ 전적인 부패

④ 충분하나 저항 가능한 은혜

⑤ 성도의 견인의 불확실성으로 요약된다.

 

이들은 벨직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화란교회의 공식적인 교리 표준)은 자기들이 제기한 교리적 입장에서 바꿔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듬해인 1611년 칼빈주의자들이 이에 대한 반청원서를 제출하여 대응하게 된다. 원래 칼빈주의자들은 체계화한 5대 교리라는 것이 없었다. 이 논쟁으로 인해서, 국가 문란(disorder)과 같은 혼란에 직면한 상황에서, 화란 정부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1618년 11월 13일 ~ 1619년 5월 9일까지(7개월 동안 154번의 회의) 도르트회의가 화란, 영국, 스코트렌드,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파견한 학자(네델란드 칼빈주의자 102명 -> 84명의 회원, 18명의 정부 관리와 외국의 칼빈주의자 28명)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다.

1618년은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지 9년이 되는 해이며, 칼빈 사후(死後) 54년이 되는 시점이다. 도르트회의에서, 항의문서(Remonstrance)를 제출한 13명의 아르미니안주의 신학자들은 자신의 신학을 변호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국가 반역죄가 적용되었으며, 발언권, 선거권을 박탈시켰다. 결국 도르트회의는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벨직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지지한다는 재확인 결의를 하게 된다. 도르트회의가 작성한 신조는 93개 조항으로, 개혁주의 교회들의 주요 내용이 천명되었다. 300명이 넘는 아르미니안주의 목사들이 공직을 박탈당하였고, 극단적 아르미니안주의자 15명이 구속, 수감되었다.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추방되기도 했다.

도르트회의는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5대 교리에 대응하기 위해 도르트의 규범(Canon of Dort)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이다.

①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also known as Total Inability and Original Sin)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자연적 무능력”에 대한 반론)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also known as Particular Atonement)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조건적 선택”에 대한 반론)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만인 구속”에 대한 반론)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선행적 은총”에 대한 반론)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also known as Once Saved Always Saved)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조건적 견인”에 대한 반론)

 

아르미니우스는 원래는 칼빈주의자이다. 그는 어느 날 칼빈주의 견해에 반대하는“드릭크 쿠른헤르트”의 견해를 비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것을 연구하다가 오히려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구원관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응답해야 하는)의 공동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요점이다.

웨슬레안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부분 타락 혹은 부분적 자유의지, 신인협동에 의한 구원, 만인구원론 혹은 보편적 속죄, 거부할 수 없는 선재적(先在的) 은총 혹은 내재적(內在的) 은총, 확신할 수 없는 구원 혹은 구원의 상실을 주장한다.

 

2) 존 웨슬리(AD 1703~1791)는 성공회 신부로서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다. 잠시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실패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영국 국교회 사제로 남았다. 존 웨슬리의 신학사상은 칼빈주의와는 극명하게 대립된다. 특히 예정론, 성화에서 다르다. 영국 국교회 사제들과의 마찰이 심하여 사제들의 비협조로 사제 직무자격이 정지당하기도 했다. 결국 독립교단으로 분립되어 감리교의 실질적인 창시자가 되었다. 그 역시도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를 부정하는 신학 사상이다.

감리교는 초기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개혁주의 교회와는 구분된 흔히 복음주의 교회라고 부른다. 복음주의교회라는 용어는 독일, 프랑스 등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서 개혁주의 교회와는 완전히 구분된다. 복음주의는 신복음주의, 급진적 신복음주의, 온건적 신복음주의, 사회복음주의 등으로 나눈다.

웨슬리가 말하는 구원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선행하시는 은혜(A precedent grace)

회개시키는 은혜(repentance grace)

칭의시키는 은혜(justifying grace)

성화시키는 은혜(sanctifying grace)

영화시키는 은혜(glorification)

감리교의 신학은 성경, 전통, 이성, 체험을 신학적 토대로 삼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응답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자유의지이다. 구원은 예정되어 있지 않고, 예지(foreknowledge)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예정론은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유사하다.

감리교는 루터교회와 함께 복음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한 조직신학, 기독교 사상 부분과 성경신학에서 새로운 연구에 대해서도 포용적 성향이 있다. 다양한 신학을 존중한다.

구원론에 관한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나 실제는 배반한 자칭 칼빈주의자들이 있다. 다양한 구원론 견해를 들어보면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제임스 아르미니우스 는“죽음 이전 보편적 기회론”을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복음(심지어 천사들이나 꿈을 통해 주시는)이나 죽는 순간이나 혹은 중간 지식이 그런 기회를 준다.”고 주장한다. (증거로 - 단 2장, 행 8장을 든다.)

유스티누스, 존 웨슬리, C. S. 루이스는 “포괄적 구원론”을 주장한다. “미전도인이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시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증거로 - 요 12:32, 행 10:43, 딤전 4:10 근거로 든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조지 맥도널드는“신적 견인론 혹은 사후 전도론”을 주장한다. “미전도인은 죽은 이후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한다(증거로 - 요 3:18, 벧전 3:18~4:6을 든다.).

오리게네스, 슐라이어마허, G. C. 베르카워는“보편적 구원론”을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사실상 예수님 때문에 모두 구원받게 된다. 누구도 영원히 정죄받지 않는다.”(증거로 - 롬 5:18, 고전 15:2-28, 요일 2:2을 든다.).

 

Ⅲ. 맺는 말

우리는 다음 성경 말씀을 주목하여 되새겨 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8)고 하심과 “그러므로 이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로마서 8:1)고 한 말씀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12장 31절에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32절“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한다. 이 말씀에 대해서 어거스틴과 칼빈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완고함”이라고 정의 해석하였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blasphēmia가 어원으로 영어 blasphemy로 번역된다. 우리말로는“신성 모독”이나“성령 훼방”으로 번역하였는데, 문자적으로“모독”과“훼방”은 어의(語義)가 조금 다르다. 인간에 대한 모독(모욕, 남을 깔보고 욕되게 하고 능멸하는 것, insult)과 신성모독(blasphemy)은 정도의 차원이 다르다. 신성 모독은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데 기인(원인, cause)한다. 우리말 훼방은 “헐뜯거나 남의 일을 방해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성령 훼방은 성령 하나님을 헐뜯거나, 성령님의 사역을 거부 또는 방해하는 일로서, 자신의 과오를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완고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끝까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거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형벌을 면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경우는 구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천국시민으로서의 지위나 신분을 얻지 못한) 자로서 “천국 시민권”이 주어지지 아니한 자라고 판단할 수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 7:21)에서“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란, 문맥상으로 보면 ① 이단들이거나 ② 참 믿음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믿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로서 ③ 실제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해석된다. 이들은 사실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자들이다.

다만, 우리가 유의할 점은 어떤 사안이나 대상을 두고, 분별없이 함부로 말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사람이 하면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거나, 말하는 것 또한 삼가해야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경우는 이렇게 말씀하셨고, 저런 경우는 또 그렇게 가르쳐 주셨음을 전파해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믿음, 회개, 칭의,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면, 궁극적 구원 견인을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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