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 목사

금년 들어서 가장 강력한 한파가 몰려온 날,

땅거미 채 가시지 않은 차가운 새벽, 얼어붙은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김해 장유행 버스에 올랐다. 영하 12도의 매서운 날씨에 몸이 후들거렸다. 아내와 동행하고 싶었으나 장거리 여행과 혹한의 부담 때문에 혼자 나선 것이다. 새벽길 경부고속도로의 교통 흐름은 비교적 원활했지만 종점까지는 약 다섯 시간이 걸렸다.

며칠 전 지인과 전화 중에 신정순 전도사님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격조(隔阻)했다는 생각이 앞섰다. 게다가 ‘평소의 건강이 아직은 괜찮으시리라’했던 막연한 기대는 순간 빗나갔다. 경남 김해시 어느 요양병원에 계신지 한 해가 더 지났다니, 세상에 이렇게 무심할 수 있었나 싶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요즘은 병원이 제공하는 미음조차도 겨우 드신다니, 여생(餘生)이 얼마 남았을까라는 방정맞은 생각이 더해 서두르게 된 것이다.

도대체 김해시 장유가 어디일까?

노트북을 열고 구글 지도 검색에서 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었고, 알아본 대로 아직은 의식은 있으시고, 사람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에 다소 안도했다. 마음의 여유가 좀 생겼다. 일단 병문 날짜를 최대한 앞당겨 잡고 인터넷으로 교통편을 알아봤다. 열차를 이용할 경우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을 것 같아 서울에서 바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신정순 전도사님은 고려신학대학원 제28회 ‘홍일점’(紅一點) 동기다.

부산 송도, 암남동 시절의 강의실 옆자리에서 노트를 서로 빌려보면서 학점 따기에 급급했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양병원에 계신다니 마음이 이를 데 없이 착잡했다. 졸업 후에도 서로 기도로 함께 했으며, 가끔은 근황을 살피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전도사님은 학구열이 남달랐고,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이 특별했던 것 같다.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은퇴하신 후에도 교인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신 걸로 안다. 신 정순 전도사님은 한 평생, 한 교회,「오직 한 일」(But one thing, 只有一件事; 빌3:13)을 위해 몸과 마음 전부를 헌신하신 걸로 알고 있다.

전도사님의 이름은 고신 역사 기록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신대학교 이 현철 교수는 신정순 전도사님에 관하여 ‘경북 여성 지도자 신정순 전도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생애사(Life History) 연구’ 논문(춘계학술대회, 통권21호, 2014.05)을 발표한 적이 있다. 논문에서 이 현철 교수는 ‘개혁주의 신앙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신 정순 전도사에 대한 심층 분석을 통해 고신 신앙의 전형(Model)을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며, (생략)대구 서문로교회의 설립과 사역, 고신정신, 개혁주의, 서문로교회, 생애사, 질적 연구’라는 초록을 덧붙이기도 했다.

역사의 기록물이 한 인물을 조명할 때는 그 역사적 가치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신 정순 전도사님은 일찍이 대구 서문로교회 전도사로서 한 길 인생을 살아오셨다. ‘고신의 대구 경북지역 모체교회’ 서문로교회에서 꽃다운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치셨다. ‘주의 일’, 병상에서 몇 번이나 되뇌신 말씀에는 그의 고결한 헌신의 삶을 상기시키는 듯 했다.

신정순 전도사님의 병실을 찾은 이병길 목사(김해시 장유리 우리요양병원 Jan 23, 2017)

병원 관계자의 안내로 전도사님의 병상에 다가섰다.

얼굴이 몰라보게 변형돼 있었다. 세상 온갖 시름 잊은 듯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근엄하게만 보였던 모습이 순진한 어린이처럼 해맑았다. 차라리 빛이 날 만큼 밝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았다. 한 평생 세상 질곡 건너오신 아름다운 삶의 소망 탓이었던지 유난히도 눈망울이 총총했다. 마주친 시선에 대뜸 ‘누고?’라고 물으셨다. 신분을 밝히면서 알아보시겠느냐고 여쭈었더니 ‘알지!’라고 대답하셨다. 뜬금없이 먼저 연세를 물었더니 남의 말 하듯 ‘93세란다.’ 라고 단 답을 하셨다. 어디가 많이 불편하시냐는 말에는 ‘아픈 데는 없다’면서 오른쪽 손으로 왼팔 상박부를 만지셨다. 묻지도 않은 말에 ‘주의 일이 귀하쟤?’라면서, 다소 생뚱맞게 ‘부인은 없고 혼자 사느냐?’라고 물으셨다. 기억력이 분명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답 대신에 ‘주기도 문’을 아시느냐라고 여쭈었더니 ‘모른다.’고 대답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는 눈빛이 더욱 빛났다. 전도사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일 위해 사셨습니다.’라는 말에는 반색하는 반응을 보이시기도 했다. 평소 무슨 일 하시다가 여기 오셨느냐라고 여쭌 말에는 어김없이 ‘주의 일’이라고 대답하셨다.

‘주의 일’, 그 일만 오롯이 기억에 남은 것 같았다.

오직 주의 ‘한 일’ 위해 신앙과 삶의 순결을 지키신 신 정순 전도사님, 병원 국장님과 함께 기도를 맺자 분명한 어조로 ‘아멘!’이라는 말로써 화답하셨다. 병상을 떠나면서 ‘대구에서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드렸더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보이셨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내내 짠한 마음을 지을 수 없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꼭 한 번씩은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숙연한 마음까지...

얼마 전 고(故) 허 순길 목사님께서 산소 호흡기를 차고 전도사님을 병문하신 후 먼저 주의 부르심을 받으셨다고 했던가. 가실 길 미리 예측이라도 하신 듯 인사차 오셨던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해 간 봉투에 쓴 시편35:9절의「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남은 날에 심어야 할 삶의 씨라 여겼다.

신 정순 전도사님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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