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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가늠 하는 시금석이다.
김영수 장로/ 고려신학대학과Midwest Univ.에서 공부하였으며, 고신대에서 교무부처장, 기획부실장, 사무처장을 역임하였다.

Ⅰ.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단 하루라도 기도하기를 그치면 내게 타오르던 믿음의 불이 확 식어버린다.”고 하였다.

루터의 이런 고백은 로마가톨릭교회에 항거한 자신의 열정이나 확신과 같은 종교개혁 소명은 기도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간증과 같은 고백이다. 그는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논제를 게시한 사건 이후,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1521년 보름스회의 논쟁에서 당당히 대처하였으며, 신성 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루터가 출판한 책들과 책에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과 요구를 받았을 때 역시 거절했다. 결국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선고 받았고, 또한 삭권 박탈당했다. 카예탄 추기경과의 논쟁과 칭의론 논쟁, 라이프치히 논쟁, 로마가톨릭교회로 부터의 이단 선고와 파문을 당하는 이런 와중에서도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는 등 종교개혁을 멈추지 않았다. 비텐베르크 대학 설립자이며, 비텐베르크를 다스리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보호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으로 소환되어 이단으로 취급되는 악의적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았다. 그가 흔들리지 않고 종교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연구를 통한 믿음의 확신과 기도의 능력에 힘입어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성경만으로 라는 신학 사상도 말씀 연구가 맺은 결실과 기도 능력의 복합체이다.

19세기 영국의 스펄전(C.H. Spurgeon 1834-1892) 목사는“기도하지 않고 성공을 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고 경고 했다. 이는 믿음으로 획득하지 아니한 “우연한 어떤 이득”까지도 탐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들린다. 또 다른 각도에서는 불법적이고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사업성공, 목적 달성 등에 대해 자기반성이 없으면,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신 cosmos(질서와 조화를 주관하는 우주)를 운행하시는 주인에 의해, 불합리한 방법으로 취득한 성공은 걸림돌이 될 것임을 경고한 것이다. 기도와 동떨어진 어떤 모사(謀事, trick)는 악인의 꾀를 쫓는, 죄인의 길에 서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행위와도 같다는 언급일 수 있다.

루터와 스펄전의 신앙경험(faith experience)을 돼 새겨보면, 신앙인의 삶은 전반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모든 일을 시작해야 하고,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스펄전은 또 말하기를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젖은 눈이란, 날마다 애통해 하며,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통회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조언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눈가에 젖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Ⅱ. 기도에 대한 칼빈의 견해

칼빈(1509~1564)은 개혁주의 신학의 산실(cradle)로서 기도를 생활화하고 직접 체험한 목회자이다. 그는 24세 젊은 나이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1533년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의 파리대학 총장 취임 연설문을 초안한 관계로 프란시스 1세 왕실의 미움을 사게 되어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콥의 취임 연설문에는“세상과 악한 세력들은 신자들이 복음을 순수하고, 진지하게 접근하려고 하면, 이단 또는 미혹하는 자들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악한 말을 하는 자로 지칭되기도 하며 그리고 사기꾼 이라고도 불러왔다. 그러나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 어려움을 태연히 잘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기뻐하라. 감사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한 내용이 담긴 연설문을 발표함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고국을 떠나 제네바에서의 온갖 위험을 무릅쓴 칼빈의 생활은 기도의 힘과 능력에 힘입어 개혁주의 교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본다.

칼빈은 기도를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택을 입는 주된 체험이 된다.”(Ⅲ.20.1).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서“믿음의 참 증거를 내놓게 된다.”(딤전 2:1-2 인용). 칼빈은 믿음이 있는 자라면 기도에 게으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 믿음은 당연히 기도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서“우리는 천부께서 우리를 위해 쌓아 놓으신 부(富)를 얻게 된다.”그리고 기도와 내세에 대한 묵상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권유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욕구를 표출하는 믿음(참고 주석 시편 91:15)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도가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한 영혼의 내면에 고루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1. 기도의 교리적 위치

하나님은 본질상 영원하시고, 자존하시며, 무한하시고 또한 불변하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창조자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기도는 만물의 다른 모든 것들을 변화 시킬 수는 없지만,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변화시킬 수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인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명하셨다.(Ⅲ.20.3).

주전 3세기경 철학에서 스토아 학파는 인간의 아파테이아(apatheia, 헬라어 pathos 즉 외계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를 인간생활의 이상으로 삼았으나 스토아 학파의 그런 학설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1) 기도의 은택 여섯 가지(Ⅲ.20.20,3).

칼빈은 하나님은 후회하실 수도 없고, 언약에 대해 변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은택(benefit, grace and thanks)들은 열정(ardor), 정직(honesty), 감사(thank), 묵상(meditation), 기쁨(pleasure) 그리고 확신(confidence)을 갖게 된다.(Ⅲ.20.3).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이 얼마나 다양하며 소중한가를 알 수 있다.

 

2) 올바른 기도의 규칙 네 가지 조건(Ⅲ.20.4-15).

기도를 드릴 때는 다음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① 경외심(awe) - 여호와 하나님의 신에 대한 경외심

② 참회(confession) -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뉘우치며 회개해야 한다.

③ 겸손(modesty) -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해야 한다.

④ 확신(convince)에 찬 소망 - 구원의 확신은 물론, 기도 응답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위 네 가지의 “기도 규칙”은 경건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는 샘이다. 우리는“하나님과 대화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갖추어야할 정신과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Ⅲ.20.4), 또한 “정신과 노력”을 다 기울이되, “자주 발생하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산만해져서는 안 된다.”(Ⅲ.20.4). 특히“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넘어서서 구해서는 안 된다.”(Ⅲ.20.5).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과연 얼마나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깊이 생각한 뒤에, 그것을 얻으려는 진실한, 아니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Ⅲ.20.6). 참으로“우리는 두려움 자체에서 한시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Ⅲ.20.7).

그리스도인의 경건 자체에는 하나님의 주목을 끌 만한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며”그리고“악한 양심이 우리에게 문을 닫아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한다. 기도하는 자는 “자랑하려는 생각을 다 접어 두어야 하며, 자기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다 버리며, 일체의 자신감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조금 이라도 자기 것을 내세운다면 공연히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할 수 없게 된다.(원문 - 공연히 우쭐대다가 하나님 앞에서 멸하고 만다.)”는 점이 칼빈의 신학이다.

칼빈은 기도에 관한 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인 줄로 여기어, 주께서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Ⅲ.20.8f.) "기도할 때는 겸손하고 진지하게 죄를 자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며, 심지어 그것으로 기도를 준비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이다.(Ⅲ.20.9).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하심”을 의지하지 않는 기도는“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Ⅲ.20.9).

기도 응답의 확신은 “개인의 모든 공로에 대한 생각을 떠나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만 달려있다.”(Ⅲ.20.10). 칼빈에 따르면 두려움은 기도할 마음을 일으키는 유용한 동기이지만, 소망을 잃을 정도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르도록 자극하는 가장 좋은 상황은 “그들이 자신의 결핍 때문에 근심하다가 분별력을 잃을 정도로 크게 불안해 하다가 결국은 믿음으로 위로하심을 받게 되는 때다.”(Ⅲ.20.11). “요약하지면, 무엇이든 기도응답으로 내리시는 것을 얻는 것은 믿음이다.”(Ⅲ.20.11). 그리고 “복음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배우고, 그 자비하심이 자기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분명히 깨닫는 사람들 이외에는 하나님을 부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두려움(fear)과 믿음(faith)과 확신(confidence)은 항상 붙어 다닌다.(Ⅲ.20.12). 믿음은 “자신의 곤궁(poverty), 결핍(destitute), 부정(corruption)을 인정하는 것과 합해야(combine) 한다.”

 

2. 기도는“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전체를 통해서 권능(절대적 권능 - potentia absolute 와 작정적 권능 - potentia ordinata), 두려움, 자비, 소망이란 주제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보완하며, 논의 곳곳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명령과 약속이 강조된다.(Ⅲ.20.13). 하나님은 하늘에 계실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우리 아버지시다.(신명기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위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시다.

칼빈은 권능(authority)을 언약(covenant)의 배경 안에서만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언약은 조건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서 히브리어 berith(끊는다)는 어원을 가진다. 구약시대는 세 가지 형태의 언약이 있었다.

① 양쪽이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언약과(삼상18:3-4)

② 유력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맺는 언약(겔17:13-14)과

③ 하나님과 사람 간에 맺는 언약이 그것이다.(창17:9-14, 창9:8-17, 출 24:8, 슥9:11 렘7:23, 호8:1).

선지자들이 이 언약을 계속 상기시켰다.(렘7:23, 호8:1).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피로 맺은 은혜로운 약정이다. 그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인간은 수혜자가 되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신 언약이다. 인간 구원과 영생은 작정적 권능 언약(covenant)에 의해 성취된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둔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주저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두려움이 없이 가까이 나아가 아버지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열매를 받게 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 다정한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친히 고안한 이름이다.(Ⅲ.20.14). 우리의 기도와 소망의 가치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둔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칼빈 신학 전반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주제가 강조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망을 가진다.(Ⅲ.20.14).

기도란, 본질상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의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경외(fear of God)하는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 그리고 굳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참고. 시편 22:26 의“겸손”은 히브리어 Phonetic ‘aw - nawv’는 poor, meek의 뜻을 가지므로 심령이 가난한자, 온유한자로 해석된다.)

“바른 기도를 위한 네 가지 규칙”은 비록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우리가 온전한 믿음이나 회개가 만족할 만한 열정도 간구도 없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를 물리치신다고 할 만큼 엄격하게 요구하지는 않으신다.(Ⅲ.20.16). 하나님은 지극히 자비하심으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사죄하는 마음) 손을 들어야(항복하는 마음)한다.(Ⅲ.20.16). 믿음의 기도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기도이며, 확신과 소망의 기도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철저한 신뢰의 기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영원히 효과 있는 중보를 하실 만한 권능을 가지셨으며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얻으신 - 보혈의 공로를 가지시고 - 나 같은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다.(Ⅲ.20.20).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아뢸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입(mouth)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눈(eye)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오른 손(right hand)이시다.”라고 한다.(Ⅲ.20.21).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지 아니하시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중보해 줄 이가 없다. 어떤 성자라도 우리를 도울 수가 없다.(Ⅲ.20.22). 어떤 천사라도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 전할 수 없다.(Ⅲ.20.25). 어떤 부족의 족장이라도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전달할 수가 없다.(Ⅲ.20.25).

칼빈의 이런 견해를 학자들은 4세기의 교부 암브로시우스(Sanctus Ambrosius, 337-397, 독일태생, 이탈리아 밀라노 주교)에 비교하기도 한다. 당시 아리우스파는“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325년 니케아공의회가“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 아니며,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내용의 니케아 신조를 발표하면서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는 암브로시우스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역사로서, 이 사상은 칼빈에게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우리의 입이요, 눈이요, 손이라고 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제사가 기도를 효과 있게 만들었듯이,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사는 하나님 우편에서 친히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중보를 효과 있게 만들었다.(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2:6). 승천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얼마나 중요한 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3. 공기도와 개인 기도에 관한 원칙

칼빈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유익한 행위이며, 공기도와 개인기도 모두 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은밀한 기도를 게을리 하는 자는 아무리 집회에 열심히 참석한다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허공을 치는 기도를 드릴 뿐이다.(Ⅲ.20.29).특히 예배 때는 소리 내어(통성기도) 기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고 한다.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예배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예배시에 모든 기도를 목사가 다 드린다는 개념은 성직자와 신도(편신도)를 강하게 구분한 후기 칼빈주의에서 침투해 들어왔다. 이는 칼빈주의 개념이 아니다. 공기도는 과시 하듯 해서는 안 된다.(Ⅲ.20.29). 부연하자면 “평신도”라는 용어와 호칭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사제와 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로서 로마교회 사제들의 우월주의가 내포된 단어이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을 가진

무엇보다 기도할 때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깨달음에서 나와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의 정신과 동일한 믿음으로 경배함으로써, 다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 경우 입술의 주된 용도는 성도들의 모임에서 한 목소리로 드리는 공기도를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Ⅲ.20.31). 칼빈에 의하면 혀는 주로 공기도와 찬송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그 중요성을 주장한다. 그것은 회중이 예배인도에 참여하면 혼란과 무질서가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 일부 칼빈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른 견해이다. 개혁주의 교회들의 예배학의 정립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더욱이 우리의 공기도는 아주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 기도를 하면서 광(형식이나 꾸밈이 있거나)을 내거나 채색(사람을 의식하고 하는 기도, 순수하지 못한 기도)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알아듣기 쉬운 “민중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people)”로 기도를 드려야 한다.(Ⅲ.20.33). 기도는 성도들 모두가 다 알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공기도 든 개인 기도이든 생각 없이 하는 방언을 하나님은 싫어한다.” 따라서 칼빈은 방언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도할 의욕을 잃을 만큼 쳐져 있거나, 반대로 너무 격양되어서 저절로 방언이 나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기도에도 방언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견지해야 한다.(Ⅲ.20.33).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기도의“전형(model)”을 제공한다.(Ⅲ.20.34).

 

4. 주기도(the Lod's Prayer)

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는 이미“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뜻이 포함되고 함축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자녀로 입양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영예를 주장하는 경솔한 행동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근거.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헬라어 uihothesia, 양자)들이 되게 하셨으니”(Ⅲ.20.36).

더욱이 우리가“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때는 다시금 확신을 갖게 된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자녀를 팽개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음으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Ⅲ.20.36).(근거. 마태 23:37).

이처럼 기도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확신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을 신뢰하는 토대위에서 성립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하늘에 계시며, 권능과 자비가 결합될 때, 우리는 확신을 갖고 기뻐할 이유가 있으며“형제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Ⅲ.20.3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과 이 땅위에 거하는 모든 민족들을 감싸고 하나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한다. 이것이 경건한 자의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보다도 믿음의 권속에게 특별한 사랑을 품어야 한다.(Ⅲ.20.38).

② “나라이 임하옵시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또한 요한도 그랬거니와 칼빈도 마찬가지로 회개와 겸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권력 구조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아지려면 겸손해야 한다.(빌립보서 2:6-8). 하나님 나라는 유추(inference)로서는 볼 수가 없고, 세상 나라들과 대조하는 방법으로 볼 수 있다.(마23:8-12, 막12:38-40, 눅 22:25-27 등).(Ⅲ.20.42). 하나님 나라는 칼빈의 신학에서 주된 개념이다.

부연하자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동시에, 세상과 세상 적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되, 나그네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를 동경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원하신다. 칼빈의 문화관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은 동일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지체로서의 각각의 임무와 책임이 있을 따름이다. 눈은 눈이 하는 일이 있고, 귀는 귀가, 손은 손이 할 일이 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또 덜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은 동일하다. 이것이 칼빈주의 문화관이다.

학자들 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현재와 미래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국 천상천국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힘과 통치 또는 지배(power, rule or dominion)에 의하여 다스려 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흔히 이 땅위 위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윤리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하심, 언약적 불변성과 일관성을 가리키는 성실하신, 신실 성을 의미한다. 불변성은 하나님의 언약행위를 가리킨다.

③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이 구절을 칼빈은 전통적 해석을 취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육체에 필요한 것들과 음식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내 놓는다. 기도는 우리가 땅에서 미리 바라보는 종말론적이고 미래적인 천상의 양식을 가리킬 수도 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종말론적 양식)을 미리 주옵시고,”라고 한다면 그럴 경우 이 기도는 우리의 영적 완전과 성숙에 관계된다.

④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칼빈은 이 기도를 쉽게 해석한다. “…로 인해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들을 용서해 주지 않고서, 하나님께 사죄를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남에게 하듯이, 우리에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한다. 실로 이 기도는 우리가 남을 용서해 주기 전에는 우리를 용서해 주지 말라고 간구하는 것이다.(Ⅲ.20.45). 남을 용서해 주지 않고 주기도를 하면, 스스로 정죄하는 것이 된다.(Ⅲ.20.45).

주기도문의 이 구절은 우리의 관용(아량, tolerance)을 전제로 한 청원 기도(petition pray)라고 보면 된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관용이 있어야,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위의 첫머리 기도는 두 번째 기도와 연결된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시험이 닥쳐와도 악의 세력에 정복당하거나 압도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힘)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대 세력에 맞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해 주실 것과, 우리를 구해달라는 간절함이 내포된다.(Ⅲ.20.46).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집단이 드리는 기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기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Ⅲ.20.47).

 

5.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기도

1) 공적 기도에서 유의할 점

공적 기도는 공동체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대표로 드리는 기도이므로, 기도 내용은 공공성(public)을 띄는 기도여야 한다.

① 교회의 덕을 세우는 기도이어야 한다.

흠결이 없는 기도라야 한다. 덕을 세움에 부족한 기도는 부작용과 화근을 초래한다. 칼빈이 앞에서 제시한 “기도의 규칙 네 가지”를 따르지 않는 기도는 자기 만족감은 채울 수 있을 런지 모르나, 공동체를 큰 시험에 빠지도록 한다. 이런 자는 아직 신앙의 깊이가 얕은 자라고할 수 있다.

② 신자들의 사귐을 증진시키는 기도이어야 한다.

성도 간의 서로 사귐(교통)을 증진시키는 기도는 참으로 은혜롭다. 화평을 저해하는 기도는 악한 기도이다. “들어보라는 식”의 기도는 자랑하는 기도이거나, 남을 원망하거나, 악담이나 분노까지도 기도에 담겨 노출된다. 이런 기도는 공적기도로는 부적합(incongruity)하며 모순된 기도로서 회중을 시험에 들게 하는 위험성이 있다.

기도하는 자는 간구가 끝나면, 우리가 간구한 것을 진심으로 얻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아멘”으로 마쳐야 한다.(Ⅲ.20.47).

 

6. 기도는 언제, 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특별히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Ⅲ.20.50).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 제정되었다.(Ⅲ.20.3).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언제 - 아침에 일어날 때, 일과 시작 전에, 식사 전에, 하나님의 복으로 식사를 마쳤을 때, 잠자리에 들 때(칼빈은 미신적으로 기도 시간을 엄수해서는 안 된다고 함)

이 밖에도 특별히 시험을 당할 때, 그리고 모든 일의 계획 등 일상은 기도로 시 작하고 마친다.

② 왜 - 위와 같은 시기, 상황, 목적에는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일상은 기도로서 아버지께 아뢰고 논의를 해야 한다.

③ 어떻게 - 기도의 전형(model)은 주기도문이다.

 

Ⅲ. 글을 마치면서

다니엘처럼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17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격랑의 세월들을 많이 보냈지만, 지금처럼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한 시기도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위에 바로 세워지는 위정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된다.

일시적 혼란과 자유분방은 조화와 화음으로 회복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예술의 가치 추구를 위한 법칙에는“자유분방과 다양성을 토대로 한 조화와 화음이라는 통일성에 기반을 둔다.”는 원칙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비록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보다 성숙한 질서가 회복되는 국가 사회로의 변화와 발전을 기대해 본다. 미중일소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북한의 핵실험 위협과 미사일 발사 등은 발등에 떨어진 화근과 같아서 생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긴장감을 풀 수가 없다. 안일한 대처와 만성된 무감각은 더 큰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민족에 대한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기대한다.

기도는 신앙의 순도를 측정하는 시금석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상(everyday)이다. 특히 기도는 신앙인의 삶(life)의 본질을 가늠 하는 시금석(touchstone)이다. 기도가 한 개인의 신앙을 측정하는“시금석”이라고 한 것은 기도가“신앙심의 순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심오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금이나 은의 순도(purity)를 판정할 때는, 검은 색의 현무암이나 규질의 암석에다 금이나 은을 이 돌들의 표면에 문질러 - 나타난 흔적(trace)의 빛깔과 표면의 금 빛깔(light)을 비교하여 순도를 시험(exam)하고 측정한다.

공중기도는 영적 상태를 대중 앞에 발표하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의 영적 신앙상태를 측정하는 데는,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을 유심히 들어보면 판단할 수가 있다. 따라서 기도할 때 기도자의 마음가짐(mental attitude)이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기도자의 겸손하고 낮은 자세(low attitude)와 태도(거동, bearing)와 입장(관점이나 견해, stance, 그리고 목적, purpose 등)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신앙인격을 측정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기도 내용은 영적 상태와 정비례한다.

겸손과 자기 부정은 기도 자의 기본자세이다.∣

칼빈은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겸손의 참된 의미는 먼저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점과 특히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자는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물리치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칼빈은 기도로 말미암은 열매는 매우 유익한 이점이 있고, 기도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위대한 선진들은 온갖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기도로서 잘 견뎌내셨고, 승리하셨음을 상기하면서, 기도 생활을 통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하는 삶이 필요하다.

기도의 이상 목표는“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요한복음 17: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야고보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기도응답 여부 원인은 자신에게서 찾아야 옳다.

칼빈은 믿음과 기도의 상관관계를 신앙의 결합체로 보았다.Ⅰ

칼빈은 기도를 통해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택을 입게 되며, 믿음의 참된 증거를 내놓게 되고, 믿음이 있는 자라면 기도에 게으를 수가 없다고 한다. 믿음은 당연히 기도로 표출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천부께서 우리를 위해 쌓아 놓으신 엄청난 부(富)를 얻어야 한다. 기도를 통해 내세에 대한 묵상을 할 수도 있게 되며,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욕구를 표출하는 믿음의 행위이다. 믿음은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영혼의 내면에 고루 퍼져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로서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기도로 말미암아 얻은 열매는 많은 유익이 있게 될 것이다.

 

 

김영수  kys70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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