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하이패밀리 동산에 있는 청란교회당

 

 

송일병 구하기   /송길원 목사

 

 

“최대한 잘 살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최소한 대위님의 눈에 대위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보였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황혼녘, 라이언 일병은 자신의 목숨을 건져준 밀러 대위(Captain Miller: 톰 행크스 분) 무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이어 자신의 곁에 다가온 아내에게 다짐받지요.

“훌륭히 살았다고 말해줘”

‘물론’이라고 답하는 아내에게 다시 건네는 말,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 줘”

라이언 일병의 이 한마디에 모든 인생의 열망이 담겨 있지 않나요?

사진은 2014년 38회가 졸업 30주년 기념대회를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지고 교직원과 함께 단체사진을 담은 것이다.

저는 고신대신학대학원을 1981년도에 입학했지요. 당시 교단 내 신학교로 존재하던 학교는 문교부의 정식 학위를 주는 신학대학원으로 바뀌었죠. 마치 정규사관학교생만 같았죠. 졸업을 앞둔 83년 말, 시골교회나 도시개척교회를 해야만 목사 안수를 준다는 교단의 방침에 따라 졸업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지요. 그 때의 고생들 때문인지 모두들 마치 야전 사령관들처럼 야성과 개성이 강한 목회자들이 되었죠. 저는 총회교육위원회에 대표간사로 발탁이 되면서 낙오생(?)이 되었고요. 동기들은 수습기간이 끝나고 부목사로 담임목사로 자리를 옮겨가며 교단 내 중요한 역할들을 하게 되지요. 저는 끝내 담임목사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복음간호전문대학 교목과 고신 의과대학 교목으로 일하다 지금의 하이패밀리(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를 세워 기독교 NGO를 이끄는 무관(無冠) 송일병으로 남게 되었죠.

졸업한지 30년이 되던 2014년, 동기들은 5천 만 원의 장학금을 모아 쾌척했죠. ‘모교 방문의 날’을 정해 모든 동기들이 모여 1박하며 우의를 다지던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30년의 세월이 비껴간 듯 학창시절 그대로였지요. 서로 부둥켜안고 안부를 묻고 장난치며 하룻밤을 보냈죠. 생존해 계시는 스승님들은 물론 자리를 함께한 부인들에게는 전원, 작은 위로금과 선물까지 건네었지요.

궂이 말하지 않아도 촉촉한 아내들의 눈망울이 대신 말해 주었지요. ‘당신, 훌륭히 살았네요’ 아니 서로들 ‘자넨 참 좋은 사람이야’ 소리치고 있었지요. ‘이런 게 행복이로구나!’ 했지요.

송길원 목사가 아끼는 청란교회당 앞에서 담은 사진이다. 그는 이제 동기들의 마음을 모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교회를 섬기게 될 예정이다.

 

그날로부터 3년이 지난 2월, 저희 38회 동기들은 또 다시 창원에서 정기총회를 가졌죠.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놀라운 결정 하나를 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교회>를 공동개척하기로 한 것이었죠. 어안이 벙벙했죠. 막내들의 나이가 60에 이른 38회 동기들은 아직도 개척교회에 대한 선교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던 셈이죠. ‘종교개혁’의 또 다른 부름에 응답하는 엎드림도 함께였죠. 경이롭기만 했지요. 모든 동기들이 존경스러웠죠. 제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럽기만 했고요.

제게는 마치 아직도 무관으로 남아있는 송일병을 구출하려는 특별작전처럼 느껴졌죠. 무슨 말이냐고요? 공동개척의 기념교회를 양평 하이패밀리에 세우기로 결의를 했으니까요. 미운오리새끼처럼 뒤처져 있던 송일병에게 ‘우분트’(Ubuntu-‘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고 외치는 동료들의 응원가였지요. 이 감동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훗날 동기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이렇게 고백할 날 있을 거라 다짐하고 다짐했지요.

“최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열심히 뛰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최소한 동기들의 헌신과 사랑이 헛되지 않아보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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