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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한국교회, 개혁의 주체인가, 개혁의 대상인가?

한국교회사학회(회장 김수한 회장),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 박용규), 한국장로교신학회(회장 이승구)가 공동주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개혁과 부흥'이라는 주제로 지난 18일 양재동 횃불회관 온누리교회 예배당과 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서 개최됐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부산장신대학교 탁지일 교수는 “한국교회, 개혁의 주체인가, 개혁의 대상인가: 교회를 향한 이단들의 도발적 질문들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에 매우 시의 적절한 논문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탁지일 박사

한국교회, 개혁의 주체인가, 개혁의 대상인가:

교회를 향한 이단들의 도발적 질문들을 중심으로

 

탁지일(부산장신대학교)

 

I. 개혁주체의 ‘예견된 몰락’과 ‘예정된 회복’

 

한국교회는 ‘개혁의 주체’인가 아니면 ‘개혁의 대상’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는 스스로 개혁되고(reformed) 개혁하기(reforming)를 요구받고 있다. 이단에 대한 연구는 동시대 교회가 상실하고 있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교회사 속의 이단들은 정통교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자신을 그 대안으로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단대처’와 ‘교회개혁’은 동전의 양면이다.

윤리적으로 패배한 교회가, 양의 옷을 입고 활동하는 이단을 비판하기 어렵다. 도덕적으로 패배한 교회지도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이단교주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교리적인 잣대로 이단을 정죄하는 동안, 사회는 공공성을 기준으로 이단 문제를 바라본다.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을 자행하는 교회지도자가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이단 문제에 접근하는 동안, 사회는 윤리적 기준으로 이단 문제를 바라본다.

상식적인 교회가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비상식적인 세습이 아니라, 상식적인 지도력의 승계가 필요하다. 비상식적인 양적성장주의와 대형화가 아니라, 상식적인 공동성장과 고통분담이 필요하다. 교회의 문제는, 교세와 규모의 약화가 아니라, 오히려 상식과 공동체성의 결여에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상식적인 이단 대처가 이단 문제 해결에 효과적이다. 주변사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상식적 수준의 이단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이단 대처는 교회 내의 ‘정적 제거 수단’이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수 있다.

정결한 교회의 이단 대처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교회가 이단들보다 거룩할 때, 사회는 교회의 이단 대처에 공감하게 된다. 교회지도자가 이단교주들보다 도덕적으로 구별될 때, 교회의 이단 대처는 사회적 공신력을 가질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도덕적 가치를 상실한 교회의 이단 대처에 대해, 사회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냉소적인 한 마디를 던질 것이다.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향한 한국사회의 냉혹한 비판이 고맙기만 하다. 한국 사회는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행한 한국교회의 순기능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시기에 펼친 교회의 헌신을 경험한 사회는, 교회의 변질과 영향력 감소에 대해 날카로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경고에 대해 변명만 늘어놓거나 혹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반면 진지하게 응답한다면, 개혁된 교회는 스스로를 새롭게 개혁해 나아갈 영적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회가 거룩함과 구별됨을 소유하고, 상식적이고 공신력 있는 이단 대처를 해 나아갈 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 교회가 불확실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 개혁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다.

 

II. 최순실 사건으로 드러난 한국교회의 민낯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은 ‘목사’의 모습으로 활동한 ‘사이비’였다.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다. 문제는, 다수의 ‘진짜 목사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가짜 목사‘ 최태민을 이용했고, 최태민 자신도 신분 세탁과 정치적 활동을 위해 이들 ’진짜 목사들‘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1973~75년 기간 동안 고 탁명환 소장은 원자경(최태민)을 여러 차례 만났다. 1973~74년에는 무속인 원자경이었으나, 1975년에는 목사 최태민으로 변신해있었다. 월간 「현대종교」 자료실에는 탁 소장이 수집한 최태민 관련 일차자료들과 관련 증언들이 보관되어있다. 이를 통해 최태민의 신분세탁이 진행된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1973~74년에 탁명환 소장이 만난 최태민은 무속인의 모습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즉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교류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길흉화복과 질병치료를 주관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탁 소장이 수집한 1973년 5월 13일자 「대전일보」 광고와 최태민이 스스로 배포한 “영세계(靈世界)에서 알리는 말씀 찾으시라!! 그리고 들으시라!!”라는 제하의 홍보물을 보면 최태민은 의심할 여지없는 무속인의 모습이었다.

샤머니즘적인 모습을 노출했던 원자경은 1975년 이후에는 갑자기 목사 최태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시 우연히 대한구국선교단에 관한 신문 보도에서 최태민의 모습을 발견한탁명환 소장은 그를 찾아갔고, 원자경이 목사 최태민으로 변신한 사실을 확인한다. 그것도 평범한 목사가 아니라, 막강한 핵심 권력층을 배경으로 갖고 있던 ‘가짜 목사’ 최태민이었다.

이 시기 탁명환 소장이 수집하고 조사한 자료들에 따르면, 최태민이 급조된 ‘가짜 목사’였다는 사실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무속인처럼 활동하던 사람이 단 일 년 만에, 그것도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기독교 단체의 수장이 된 사실은, 그가 필요에 의해 비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목사가 된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백만 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여의도광장에 모였던 1974년의 엑스폴로 74를 통해, 나름 기독교라는 조직의 힘을 느끼고, 그 안으로 숨어든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하지만 최태민이 ‘목사’라는 호칭은 급조할 수 있었으나, 그 역할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탁명환 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최태민은 그가 주최한 “고 육영수 여사 추모예배”에서 작은 순서 하나 맡지 못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고 한다.

주목할 점은, 그의 어설픈 ‘가짜 목사’ 행세는, 권력에 기생해 영화를 누리려고 최태민 곁에 모여들었던 많은 ‘진짜 목사들’ 덕분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최근 국정 농단 파문과 관련해 자유롭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탁명환 소장은 최태민과 그 측근들을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이라고 불렀다. 최태민은 물론이고, 그를 통해 정치권력 핵심에 접근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최태민을 이용한 기성교회 목사들에게 탁명환 소장은 더욱 실망했다.

최태민의 측근 목사들은 소위 구국십자군 소속임을 내세워 카키색 군복을 입고 십자가 모양의 별을 달고 허세를 부렸다고 한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장군 지휘봉을 들고 탁명환 소장을 찾아와서 최태민에 대한 조사와 비판을 중단하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들은 탁명환 소장을 찾아와서 “말조심하라. 이분[최태민]이 어떤 분인줄 알고 함부로 말을 하느냐. 그런 식으로 하면 신상에 좋지 않다.”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이 일을 겪은 탁명환 소장은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진짜 목사가 가짜 목사를 비호하고 두둔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한탄한다. 탁 소장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마저도 탁명환 소장을 찾아와 최태민에 대한 비판을 중지해달라는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가짜 목사 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이 활보했던 세상이었다.

심지어 ‘가짜 목사’ 최태민 마저도 자신을 이용해 권력 핵심에 접근하려는 ‘진짜 목사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이들은 최태민이 권력 핵심에 다가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탁명환 소장은 최태민 주변에 몰려든 “해바라기성 아부파들이 최태민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염려했다.

최태민도 이들 목사들이 무엇을 노리는지를 알았지만 그들은 최태민에게 불가원불가근의 필요악이었다. 최태민은 이들에 대해 “더러운 xx들... 시장 바닥의 술주정꾼만도 못한 인간들. 싹 쓸어버려야 하는데”라고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고 탁명환 소장은 기록하고 있다. 과연 한국교회는 이번 최태민과 최순실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탁명환 소장은 이들 “권력의 시녀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비록 당사자들의 명예를 위해 성명을 밝히지는 않으나, 역사의 기록과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과 역사 앞에 권력의 시녀인 꼭두각시놀음을 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사건이 실제로 기독교역사에 실명으로 기록될 때가 올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30여 년이 지난 후 실제로 이루어졌다.

탁명환 소장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거짓말하는 아이와 같이 정권유지를 위해 부단히 북괴의 남침위협을 이용하였으며 기독교마저 목사로 둔갑한 계룡산 교주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고 비판한다. 탁명환 소장은 최태민의 구국십자군 활동을 보며, ‘가짜 목사’ 최태민에게 수많은 ‘진짜 목사들’이 자발적으로 이용당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권력의 언저리를 넘겨다보고 기생하기 위해서 성직자들이 앞을 다투어 근혜 양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최씨 앞에서 설설기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고 탁명환 소장은 한탄한다.

최태민과 최순실 사건을 지켜보며 한국교회를 향한 여러 질문들이 떠오른다. 가짜 목사 최태민과 그의 자녀 최순실이 한국사회에 끼친 해악에서 한국교회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소위 정치적 영향력과 교권에 집착한 일부 정통 교회 목회자들이 최태민의 등장과 성장을 위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가? 최태민이 이들 목회자들을 이용한 것인가, 아니면 목회자들이 기꺼이 능동적으로 이용당한 것인가? 한국교회는 진정 ‘개혁의 주체’인가, 아니면 ‘개혁의 대상’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목전에 두고 터진 최태민과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은, 한국교회가 겸허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스스로 파문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이번 파문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들 중 한국 교계 지도자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역사와 민족 앞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III. 이단, 한국교회에게 묻다

1. 가정도 포기하는 이단, 소유에 집착하는 교회에게 묻다

이단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생긴 한 가지 궁금증이 있다. 다소 불만스럽더라도 안락하고 안전한 가정과 교회에 머무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왜 굳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불편하고 불안전한 이단을 선택하는가이다.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도 졸업하고, (부자가 되기는 어려워도) 직장생활을 유지하며, (그다지 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진 않아도) 가정에 남아 있으면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왜 이 모든 걸 냉정하게 팽개치고 스스로 이단을 찾아 그 안에 고집스럽게 머무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명분이 이런 불합리한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까?

한편, 이단을 선택하는 이유가 이단 단체들이 가진 미혹의 기술이라는 외적 요인과 함께 교회와 가정이 가지고 있는 내적 요인들 때문은 아닌지 불안하다. 그렇다면 내적 요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아무리 노력해도 소위 흙 수저밖에 잡을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속에 살아가는 청년들이 주어진 운명을 천지개벽하듯 바꾸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이단을 찾는 것은 아닐까? 청년 실업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기성세대 지도자들과 청년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재빠른 손익 계산으로 자기 잇속만 차리는 데 능숙한 정치인들이 판치는 세상을 한 번에 뒤집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청년들로 하여금 이단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둘째, 지도자들의 비상식적이고 부정직한 모습이 상식적이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에게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 겉으로는 거룩하고 점잖은 척 스스로를 대중 앞에 노출하지만 속으로는 명예와 이권에 연연하며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을 연합으로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다시 말해 세속 정치인 못지않은 눈속임과 술수에 능수능란한 교회 정치꾼들의 모습이 싫어 차라리 기성 교회를 거칠게 비판하는 이단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이단을 찾는 것은 아닐까?

셋째, 겉보기엔 평온하고 화목하게 비춰지지만 실제로는 통제와 차별 및 폭력과 무료함이 곳곳에 내재되어 있는 집이라면, 그래서 하루하루 탈출을 모색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들이 있다면, 그러던 중 집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정과 돌봄을 이단 단체 안에서 경험한 후 차가운 집을 떠나 따뜻하고 푸근한 이단의 품에 안기려는 이들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혹시 불만족스러운 가정에서 불편하지만 안전하게 사는 것보다 설령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행복과 따뜻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단이 문제라면 교회가 정답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이단 피해가 문제라면 가정 회복이 정답이라는 믿음에도 변함은 없다. 하지만 교회가 더 많은 소유와 양적 성장에 집착하는 동안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이단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그렇다고 ‘거짓의 장막’ 신천지에도 속할 수 없고, ‘종말을 팔아 장사하는’ 하나님의교회에도 속할 수 없고, ‘이율배반’의 구원파에도 속할 수 없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초상이 아프다.

 

2. 여성 중심적인 이단, 가부장적인 교회에게 묻다

최근 주요 이단 단체의 후계자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통일교의 “재림주”이자 “6천 년 만에 탄생한 독생녀” 한학자, 하나님의교회의 “어머니 하나님” 장길자, 신천지 보혜사 이만희의 “‘영적 배필”로 등장한 김남희, 기독교복음선교회(JMS)의 2인자 정조은, 중국 이단인 전능하신하나님교회(동방번개)의 “재림 그리스도” 양상빈 등 바야흐로 여성 이단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영역에서, 그것도 남성 일색이었던 이단 교주들 사이에서 여성 지도력이 급부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국내외 대통령과 총리에 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사회 핵심 지도력으로 여성들이 급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이단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존 전략상 시대 트렌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60년대 이후 정부의 반공(反共)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이렇게 시류에 편승하는 이단들의 전략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국내외의 영향력 있는 여성 지도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무임승차한 이단들이 신격화된 여성 지도자들을 앞 다투어 내세우는 것이다.

둘째, 이단 단체에 소속된 여성 신도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퍼포먼스적인 성격도 있다. ‘가정을 위해 가정을 포기한’ 여성 신도들에게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남편과 자녀들을 버리고 가정을 떠난 무책임한 아내와 엄마가 아닌, 인류와 가정의 구원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일시적으로 가정을 포기한 소영웅들로 이들의 정체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교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셋째, 김백문, 문선명, 박태선으로부터 이어지는 한국 이단 교리의 성(性)적 특징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한국 이단들은 교리적으로 온전한 음양의 결합을 죄 사함과 구원의 행위라는 상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JMS의 경우처럼 비윤리적인 성적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고, 여성의 신격화에 대한 자의적인 성경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넷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여성 지도력 배후에는 일반적으로 전권을 가진 남성 실세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남성 창교자(創敎者)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남성 2인자들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배신할 우려도 있고, 자신으로부터 이탈하거나 조직의 분란과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일교 한학자의 핵심 측근들도 남성들이고, 하나님의교회의 전권을 가진 총회장 김주철도 남성이며, 신천지의 남성 12지파장 등을 비롯해 카리스마적인 남성 창교자의 뒤를 잇는 여성 후계자 뒤에는 남성 실세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단 후계자들의 여성 시대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단 조직 내 남성 중심의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은 지속될 전망이다.

한편, 이단에 미혹당하는 교회 여성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염려스러운 점은, 권위적인 교회와 가부장적인 가정 안에서 상처 입은 여성들이 교회와 가정을 떠나 자의적으로 이단을 찾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교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교회의 영광의 자리에 앉기보다는 헌신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을 운명적으로 강요당해 왔던 여성들. 이들이 노력하는 만큼 영생도 얻고 영화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의 허망지설에 빠져 그들의 손을 잡고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또한 가정에서 가사와 양육이라는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남성 중심의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참고 인내해 왔던 수많은 아내들과 어머니들. 이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가정의 행복도 되찾을 수 있다는 이단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스스로 이단을 찾아가 변화된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이단들은 자신들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고리타분하고, 이율배반적인 교회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교리 교육(세뇌 과정)을 통해 자신들은 모두가 평등하며(물론 신격화된 교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평등해 보인다), 신도들이 서로 따뜻하게 보살피고(물론 가정과 사회로부터 고립된 신도들 간의 결속력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며(물론 전통적인 기성 교회를 흠집 내기 위해 혁신적인 모습으로 위장한다), 윤리적이라고(물론 자가당착적인 교주의 삶은 감춘 채 신도들에게만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댄다) 주장한다.

분명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안전한’ 교회와 가정을 떠나 손가락질 받는 ‘위험한’ 이단의 길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 여성들이 이러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이단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남성 중심의 ‘권위적인 교회’가 교회 여성들을 이단에게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정’이 아내와 어머니를 이단에게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 교회 여성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적절하고 합당한 인정과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

교회는 모두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회 설립 기념 예배에서 우렁차긴 하지만 영혼 없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한 남성 장로님의 지루한 교회연혁이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줄까, 아니면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주일 일찍부터 교회 청소와 음식 준비로 한 번도 마음 편히 예배하지 못했던 연로한 권사님이 수줍은 듯 조용하고 구수하게 전하는 교회의 지난 이야기가 감동을 줄까? 우리에게는 ‘신격화된 여성 하나님’이 아니라 ‘평범한 아내와 어머니와 딸’들이 소중하다. 여성의 소중함을 아는 교회가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교회와 가정을 지킬 수 있다.

 

3. 신격화된 이단 교주,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에게 묻다

신격화된 이단 교주와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 누가 더 문제일까? 만약 신격화된 이단 교주가 친사회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를 비판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반응할까? 최근 한국 사회의 기독교를 향한 비판 정서를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사회는 친사회적인 이단 교주에게 호감을 표시할 가능성이 있다.

교회의 선택은 어떨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교회는 이단 교주만을 정죄하고 소위 정통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런 결정을 과연 합리성과 형평성을 중요시하는 교회 구성원들이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이것이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교회 이탈을 촉진하는 명분이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단 교주들의 문제는 심각하다. 신격화는 이단들의 주요한 특징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지만 이단은 사람을 하나님, 구세주, 보혜사로 신격화한다. 이는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본격적으로 뿌리 내리기 시작한 한국의 이단들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한국 이단의 뿌리인 통일교 문선명은 자신을 구세주, 재림 그리스도, 하나님으로 신격화했고, 또 다른 뿌리인 전도관의 박태선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신격화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정명석, 이만희, 안상홍 등도 자신의 신격화에 여념이 없다. 한국전쟁 전후로 나타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한편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의 죄 또한 이단 교주의 죄보다 덜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정통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사회·윤리적 죄악은 그 죄질에 있어 더욱 나쁘다. 어떻게 보면 신앙 공동체에 더 위협적인 것은 외부의 적인 이단 교주보다 내부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들이다. 동일한 죄를 저질렀는데도 이단 교주는 이단이기 때문에 정죄하고 교회 지도자는 정통이기 때문에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다.

비윤리적이라 할 순 없지만, ‘섬기는’ 지도자가 아니라 오직 ‘다스리는’ 지도자로만 군림하려는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도 심각하다. 실정법에 위법하지 않다고 비성경적인 행위를 일삼거나, 교회법에 위법하지 않다고 주변 사회가 공감하지 않는 비상식적인 언행을 일삼는 교회 지도자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훼손할 수 있다.

문제는 비상식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단 교주들 못지않게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교회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단 교주들의 잘못된 행위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엄격한 윤리·도덕적 기대치를 반영하여 쓴 소리를 해 주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모범과 귀감이 되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의 일탈 행위를 정통이란 미명하에 포용할 사람은 이제 한국 사회에는 없다. 이제 개혁은 교회의 운명이 되었다.

돈 문제가 복잡한 교회 지도자가 이단 교주의 탐욕을 나무랄 수 없다. 성적 문제를 일으킨 교회 지도자가 이단 교주의 성범죄를 고발할 수 없다. 사회 문제를 야기한 교회 지도자가 이단 교주의 반사회성을 고발할 수 없다. 이단 교주들이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지 자못 궁금하다.

 

4. 세대교체 중인 이단, 세습 중인 교회에게 묻다

이단 운동의 성패 여부는 후계 구도의 성공적 정착 여부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성공적 세대교체는 종교사회학적으로 이단 운동이 안정적 시기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근 주요 이단들의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다. 우선 눈에 띄는 단체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하나님의교회)다. 자칭 “재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인 설립자 안상홍이 1985년에 사망한 후 “어머니 하나님”을 자처하는 장길자가 이 단체를 이끌어 오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장길자의 지도 아래 교세가 급증하고, 국내외에서 체계적인 조직 확장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한편 장길자의 권한도 제한적으로 보이며, 그녀 곁에는 영구직 총회장 김주철이 실세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교회를 제외한 여타 이단들의 세대교체는 실패했거나 현재 진행 중이다. 해방 이후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 이단들인 박태선의 전도관과 문선명의 통일교의 경우가 주목된다. 박태선의 경우 자녀들의 스캔들 등으로 인해 세대교체가 어려워지고, 추종자들이 분열되면서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물론 현재도 천부교와 신앙촌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기는 하다.

하나님의교회와 함께 한국 이단의 쌍두마차 격인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의 세대교체도 주목받고 있다. 설립자 이만희가 측근인 김남희를 소위 ‘영적 배필’ 후계자로 지명한 뒤 순조롭게 후계 구도를 구축하는 듯 보인다. 최근 신천지의 홍보는 두 사람의 관계와 김남희에 대한 신격화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영생불사한다는 보혜사 이만희가 후계자를 둔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신천지의 2인자들이 김남희의 후계 승계를 가만히 두고만 볼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이만희의 사망 혹은 통제력 약화 시기에 유력 지파들을 중심으로 이합집산 혹은 분리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신천지는 세대교체를 둘러싼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단들의 세대교체 실패는 곧 이들의 몰락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 이단들의 세대교체 시기는 한국 교회 이단 대처와 이단 피해 회복의 주요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신중한 전략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이단들의 세대교체가 진행 중인 현재, 교회는 세습 문제로 교회 안팎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세습’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회 세습에 비판적인 이들은 일부 교회 지도자의 부와 권력이 합법적 혹은 변칙적으로 세습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할 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반대 운동까지 펼치고 있다.

세습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하나는 ‘고난의 승계’이고, 다른 하나는 ‘부와 힘의 대물림’이다. 후임 목회자를 찾기 어려운 도서 산간 지역의 작은 교회를 담임하는 부모님의 뒤를 이어 그곳에서 사역하기로 결단하는 자녀들을 과연 누가 세습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된 이들을 묵묵히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목회자 부모님의 뒤를 이어 희생의 길을 걷기로 결단하는 자녀들에게 누가 세습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신실하고 성실한 목회자 부모의 애틋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 고난을 승계하는 신앙의 자녀들을 통해서 한국 교회의 소중한 신앙 유산도 이어지고 있다.

반면 사회적 동의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진행되는 교회의 세습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교회의 세습을 기업의 비윤리적 세습에 빗대어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자녀들을 위해 십자가의 길보다 면류관의 길을 마련해 주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사회적 공인으로서 떳떳하지 않은 대물림을 시도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 및 지도력 부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있다.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의 작은 실수에도 높은 윤리적 잣대를 적용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도가 넘는 내리사랑을 걱정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윤리·도덕적 우위를 점해야만 주변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세대교체 중인 이단들이 세습하는 교회를 비판한다면, 과연 한국 교회는 어떤 방어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을까? 신행일치의 높은 도덕성을 지닌 교회만이 사회와 이단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부의 세습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고난의 승계에 고마워할 줄 아는 교회만이 세대교체 중인 이단들의 몰락과 소멸을 앞당길 수 있다.

 

5. 종말을 파는 이단, 종말을 잊은 교회에게 묻다

종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종말을 소망 가운데 기다린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 고난, 죽음, 부활, 재림을 세상에 선포하고, 하루하루 어그러지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정결하고 신실한 삶을 살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요구받고 있다. 종말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반면 이단 교주들은 종말을 팔아 세력 확장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단 신도들은 종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점은, 믿었던 종말이 거짓이거나 단지 사리사욕을 위한 사기극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종말론 집단을 이탈하기보다는 또 다른 종말을 기다리는 이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다. 이단 교주들에게 종말은 목적이 아니라 항상 탁월한 사업 아이템이다.

종말론은 특정한 때의 종말을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과 특정한 조건의 충족을 주장하는 조건부 종말론으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시한부 종말론은 ‘그날이 곧 온다’고 주장하며 신도들의 맹신(盲信)을 강요한다. 시한부 종말론은 한국 근현대사의 혼란기에 늘 등장해 왔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세상의 고통이 정해진 날에 곧 끝난다는 희망은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기성 교회가 임박한 종말과 회복을 내세워 다가오는 이단들의 접근을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최근 시한부 종말론의 대표적인 사례가 하나님의교회다. 하나님의교회가 1988년, 1999년, 2012년의 반복적인 종말 주장을 해 온 것은 최근 법원 판결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2012년 종말은 오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의교회가 한편으로는 2012년 종말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2012년 한 해 동안 전국 29개 지역에 부동산을 매입해 대형 교회를 설립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교회 지도자들이 2012년 종말을 믿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드는 대목이다. 과연 곧 종말이 오는데 땅을 사고 건물을 지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시한부 종말은 실패로 끝났지만, 하나님의교회는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교회 관계자에 따르면 그들의 재산이 3~4조에 이른다고 한다. 사업을 하지도 않는 하나님의교회가 이 거액의 재산을 어떻게 모았을까? 혹시라도 여기에 시한부 종말을 믿고 헌금한 신도들의 재산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면, 이는 시한부 종말론을 통해 위기감을 조성하고 헌금을 유도한 것으로 볼 만한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종말은 ‘판매용 사업 아이템’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성실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강한 영적 힘’이다.

다음으로, 조건부 종말론은 ‘그날이 오면’ 일어날 일들을 선전하면서 신도들의 맹종(盲從)을 강요한다. 요한계시록의 144,000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수가 144,000에 이르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와 교회와 가정에서 흔들리는 이들에게 144,000에 속해야 한다는 어긋난 선민의식과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다.

조건부 종말론의 대표적인 사례는 신천지다. 신천지는 자신들의 신도 수가 144,000에 이르면 두 가지 일이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영원히 죽지 않고 육체 영생한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주장이다. 육체의 영생을 얻고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가정과 직장과 학업을 포기하고 신천지 포교에 인생을 거는 수많은 평범한 가장, 가정주부, 청년·대학생들이 있다. 심지어는 만약 그들의 앞길을 막는 가족이 있다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가족을 포기하는 결정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144,000 교리는 허구로 드러났다. 2015년에 이미 신천지 신도들의 수가 144,000을 넘어선 것이다. 2017년 1월 5일의 신천지 총회의 녹취록에 따르면, 현재 신천지 신도 수는 172,775명이다. 144,000은 넘었지만,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도 없고,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는 작은 단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144,000 교리의 변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144,000명이 차야 한다고 하더니, 얼마 전부터는 144,000이 단순한 신도 수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들의 숫자”라는 주관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종말은 교회의 소망이다. 모든 죽은 자들과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고 신앙고백하며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을 소망 가운데 하나님에게 먼저 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종말과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고 고백하며 하루하루를 시한부 종말의 위기감이 아닌 평범한 소망 속에 살아간다. 또한 144,000의 완성도 인간 노력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믿는다.

 

6. 교회가 정죄한 이단, 사회가 외면한 교회에게 묻다

사회적 위상과 공신력이 약화된 한국 교회의 이단 대처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의 납득할 만한 이단 규정에 대해 이단들은 한국 교회의 문제점과 이단 규정의 공정성을 운운하며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단 규정의 ‘주체’인 교회가 사회의 비판에 직면해 있는 반면, 그 ‘대상’인 이단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감춘 채) 친사회적인 봉사활동을 펼치며 사회적 공신력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 오늘날의 형세다. 교회의 이유 있는 이단 규정에 대해 이단들은 상식과 형평성을 내세우며 교회의 문제점들을 노출시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이단들의 사회봉사활동이 진심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단지 사회봉사라는 행위와 그 결과에만 관심을 갖는다. 아마도 종교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기독교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영남이나 제주 지역에서의 이단 대처는, 주변 사회로부터 교회 내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인식되기도 한다.

아무리 고상한 성경적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행함과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반면 아무리 비성경적인 이단이라 하더라도 이타적인 봉사활동이 사회에 노출될수록 주변 사회의 긍정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서다. 교회가 정결한 모습으로 새로워지고 개혁되지 않으면 이단 대처의 명분과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객전도 현상은 한국 교회 이단 규정의 영향력, 공신력, 구속력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만약 교회가 ‘이기적’이고 이단이 ‘이타적’이라면 교회의 이단 규정을 주변 사회가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착한 이단’과 ‘나쁜 교회’ 중 어느 곳을 더 선호할까? 단지 교회의 역사가 더 길고 양적으로 우세하다는 힘의 논리만을 가지고 교회가 이단을 정죄할 수 있을까?

만약 교회가 정통이라는 우산 아래 몸을 피한 채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정통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면 이단 규정의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교회만이 종교적 다양성과 관용의 시대에 뿌리내리는 이단들의 도전에 당당하게 응전할 수 있는 것이다.

 

7.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이단, 므두셀라 증후군을 앓는 교회에게 묻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위험 요소는 ‘사실 왜곡’과 사료의 ‘취사선택’이다. 사실 왜곡은 거짓을 진실로 믿게 만들고, 사료의 취사선택은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학자들에게 사료의 ‘비교분석’은 필수적이다. 비교분석을 통해 ‘사실’과 ‘진실’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단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 중 하나는 거짓말의 종교적 합리화다. 포교 활동과 신도 통제를 위해 소위 ‘모략’ 혹은 ‘거룩한 거짓말’ 등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하지만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기지 않으며, 복음을 결코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이단 사 이비 종교의 가장 뚜렷한 표징이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윤리적 포교 행태를 보다 보면 공익광고협의회의 최근 광고 카피가 그 대처 방안으로 떠오른다. “의심되면 의심하세요! 의심이 안심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증후군이 나타난다. 이들 중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라는 것이 있다. 리플리 증후군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자신이 꿈꾸고 동경하는 허구의 세상을 진실로 믿고 거짓말과 행동을 합리화하게 되는 증상이다. 자신이 절실하게 원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단에 소속된 신도들에게도 리플리 증후군이 나타난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 혹은 불만족스럽고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 등으로 인해 이단에게 미혹된 후, 허구적인 이단 교리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진위 여부와 관련 없이 맹목적으로 믿게 된다. 이들에게 거짓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향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만 이해된다.

예를 들면, 이단 신도들은 신격화된 교주가 사망해도 이단 단체를 이탈하기를 주저한다. 교주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단 단체에 몸담았던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도무지 설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교주의 죽음을 미화하거나 신격화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존재 이유를 찾게 되고, 주위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할 수 있으며, 계속 이단 단체에 남을 수 있는 명분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공허함과 혼동을 막는 유일한 길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진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리플리 씨(Mr. Ripley)가 되는 것이다.

이단에 소속된 신도들은 교주의 죽음이나 교리의 허구성 앞에서도 진실을 직면할 용기를 갖지 못하게 된다. 오직 거짓을 진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길만이 자신의 연약한 자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후군이 이단 신도들 안에 스며들어 자리 잡고 있다. 리플리 증후군의 치료는 ‘의문’과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한편 교회는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을 앓는 듯하다. 므두셀라 증후군은 과거의 기억들 중 좋은 추억은 기억하고 나쁜 기억은 지우려 하는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 선별 기억을 통해 부담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성을 보여 준다. 과거의 기억들 중 기억하고 싶은 일들만을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선교 130년을 맞은 한국 교회는 새로운 영광을 만들기 위해 애쓰기보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과거 용감했던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들을 되풀이하거나 근현대사 속에서 한국 교회가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일들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도, 지난 날 교회가 신앙의 이름으로 행했던 오류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입을 닫는다.

전체 국회의원의 40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인 나라, 수많은 사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인 나라,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내는 선교 강국, 그리고 양적 성장이 극대화된 ‘아름다운’ 한국 교회의 모습만을 기억하기 원하는지, 영광의 그늘 뒤에 있는 참담한 교회의 모습으로부터는 애써 고개를 돌린다.

순교자들의 이야기에는 감동하지만, 사리사욕에 집착해 교회와 민족을 저버렸던 친일 지도자들의 행적을 언급하기는 거북해한다. 복음 전도에 헌신한 선교사들의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친일 협력과 교회 분열을 조장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애써 외면한다. 대부흥 운동의 강권적이고 공개적인 회개 사건들은 드러내려고 애써도,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축소하는 데 급급했던 이율배반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에는 놀라우리만치 관용적이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명예를 포기한 신앙의 선배들의 이야기는 자랑스럽게 되풀이하지만, 손익계산에 집착했던 교회 정치꾼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거북해한다. 한국전쟁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피난지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연을 착취하고 이웃에게 무관심한 현대 교회의 모습은 자꾸 감추려고만 한다.

현재에 불만족하며 과거의 좋은 기억만을 취사선택하여 기억하려는 한국 교회가 므두셀라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제와 오늘의 과오를 직시하고 직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용기다. 이 용기를 통해 어제의 잘못을 겸허히 노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지혜와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하루하루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교회 스스로가 지난 아픔을 보듬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교회를 대신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교회가 나쁜 기억을 지우고 잊는 데 급급하기보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좋은 기억들을 창조해 나갈 때 한국 사회의 교회를 향한 부정적인 인식은 긍정적인 기대로 변화될 것이다.

이단과 교회 모두에게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이단이 므두셀라 증후군을 앓는 교회에게 도전하는 형세다. 거짓을 진실로 믿으며 사실을 왜곡하는 이단에게는 자신이 믿는 진실이 거짓말일 수 있다는 의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좋은 모습만 취사선택하려는 교회에게는 역사가 증언하는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도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회개하는 진솔한 자세가 요구된다.

 

8. 모략과 모함에 익숙한 이단, 모순에 빠진 교회에게 묻다

신천지는 ‘모략’을 사용한다. 모략의 성경 원어적 의미는 ‘거짓말’이 아니라 ‘충고’다. 모략을 거짓말로 오역하고 교회와 사회 곳곳에서 거짓말을 합리화하는 신천지의 모습이 안타깝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신천지 신도들이 결코 144,000에 포함될 수 없다는 성경적 근거들 때문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144,000의 자격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계 14:5)이다. 성경은 오히려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21:8)에 던져질 것이고,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며(계 21:27), “성 밖”(계 22:15)에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거짓말하는 신천지가 144,000에 포함될 수 없는 성경적 반증이다.

아무리 교리적으로 합리화해도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 거짓말이 결코 미화될 수는 없는 것이 상식이다. 결국 신천지의 ‘모략’은 신도들을 미혹하고 통제하기 위한 종교적 자기합리화의 수단일 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거짓말로 전도하지 않으며, 거짓말로 사랑하는 이들을 속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숨기지도 않으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롬 1:16).

신천지의 모략과 모함 포교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는 자체 ‘모순’에 빠져 이단 대처의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2014년 2월 발표한 ‘2013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 현재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19.4%인 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비신뢰도는 44.6%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언행일치가 되지 않아서’(24.8%)였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이 개선해야 할 점’에도 역시 ‘언행 불일치’(14.2%)가 가장 높았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은 ‘믿음’과 ‘선행’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이 없는 선행도, 선행이 없는 믿음도 경계의 대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고(칭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거룩하게 살며(성화) 죄를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칭의를 통해 죄를 사함 받고, 성화를 통해 죄를 억제해 나가는 과정이다. 교회에서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거룩한 모습으로 찬양한다 해도 사회에서 이웃에게 손가락질 받는 잘못된 삶을 산다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볼 수 없다.

모순에 빠진 한국 교회가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한국 교회 신뢰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교회를 향한 비판들 속에서도 그래도 교회가 신뢰받는 이유는 ‘정직/양심이 바르기 때문’(18.6%)이고, ‘봉사를 많이 하기 때문’(17.5%)이라고 나타났다.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주의, 교파주의, 개교회주의, 지도자의 도덕적 문제들로 인해 교회 안팎의 비판에 직면해 있지만, 그래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며 지켜 가고 있는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국내외 곳곳에서 헌신하고 있다. 수많은 작은 신앙 공동체들이 도시와 도서 산간 지역 곳곳에서 건강한 신앙을 지켜 가고 있다.

이해관계에 얽힌 이기적인 교파주의 정치가 판을 쳐도 지역의 당면 과제들을 풀어 나가기 위한 이타적이고 효과적인 연합 운동이 활발하다. 개교회의 성장을 위해 수평이동도 불사하는 삭막한 목회 현장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이름도 빛도 없이 목회하는 목회자와 그 가족들이 있다. 정치적 야합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교회 정치꾼들도 있지만, 하나님의 품 안에 조용히 거하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신실한 교회 지도자들도 있다. 이들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한국 교회의 새로운 모습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비판에 대한 변명이나 비판으로 인한 자괴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미스바(삼상 7:3~6)에 모여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믿음의 언약을 갱신하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개혁하는 정결한 삶을 모색하는 모습이다. 이단들이 ‘모략’으로 ‘모함’하는 오늘, ‘모순’에 빠진 교회가 건강한 자기 개혁을 통해 새로운 비상을 ‘모색’하고 있다.

 

IV. 개혁을 위한 선한 연대

이단대처에 있어서 연합적 대처는 가장 효과적이다. 개인이나 개교회 차원의 이단대처는 고립적이고 수세적일 수 있지만, 연합적 이단대처 활동은 효과적이고 영향력이 있다. 만약 여기에 주변사회가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교회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단대처 전략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강력한 이단대처의 조건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최근 교회의 연합활동이 오히려 이단대처 현장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과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이단문제를 명분으로 정치적인 이합집산과 내홍을 오랜 기간 겪고 있다. 연합기관이 이단대처의 중심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불건전한 개인과 단체들이 신분을 세탁하고 면죄부를 받는 장소로 악용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해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은 연합기관의 공신력을 조롱하며, 자신들의 활동과 존재이유를 합리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주변사회도 이러한 연합기관의 파행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교회의 시급한 당면과제인 이단, 이슬람, 각종 비성경적 문화에 대해 교회가 목소리를 높이면, 교회 스스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반대자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것이 오늘 교회가 직면한 현실이다.

교회의 연합적 이단대처는 교회역사의 오랜 전통이다. 이방인 선교와 관련된 교회의 첫 위기를 예루살렘과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극복했고, 이단과 관련한 초대교회의 문제를 모든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신학적 변증과 대처의 길을 찾았다. 이러한 연합적 이단대처는 중세교회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특히 교파주의를 운명적 특징으로 하는 한국교회에서 연합적 이단대처는 운명적인 과제이다.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절실하다. 이단대처 현장은 반드시 교단정치의 청정지역이 되어야 한다. 이단대처는 ‘정적제거와 교권장악을 위한 마녀사냥’이 아니라, ‘교회와 복음을 정결하게 수호하기 위한 선한 싸움’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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