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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 Refo500 신학 유산 21세기 개혁의 힘으로 발전시켜야김세윤 교수 2016 미포 강의 녹취 -1

이 글은 지난 2016년 12월 5(월)~6일(화), 1박 2일 일정으로 종로 5가 서울 연동교회에서 열렸던 2016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에서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를 주제로 강의한 김세윤 교수의 강의를 구어체 그대로 녹취한 글이다. 녹취를 위해 서동수 목사(하늘목장교회)가 수고했다. -편집장 주

 

2016 미래교회포럼에서 강의하는 김세윤 교수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한국교회의 현실을 많이 걱정하시면서 이 교회를 더 굳건히 세워지는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시는 분들로 알고 여러분들의 이번 모임에 제가 초청을 받고 응했습니다. 아주 뜻 깊은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서 개신교, 전 세계의 개신교회가 다 종교개혁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기면서 우리가 그 신학 유산을 어떻게 21세기의 오늘의 상황에 더 잘 반영을 하고 더 큰 개혁의 힘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 모색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바로 그런 모색을 하기 위해서 이번 모임을 주최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번에 먼저 강의 시작하기 전에 제가 왜 이번 월요일부터 화요일 오전까지 하는 강의에 제가 욕심이 많아가지고 제 시간만 그렇게 많이 들어가게 되었는가. 조금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함께 강의하시는 여러 교수님들이 계시는데 제가 너무 많이 시간을 차지해서 제가 제일 중요한 사람같이 등장을 해서 미안합니다. 동료 교수님들께 미안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박은조 목사님의 초청을 받았을 때는 저 혼자 강의하는 줄 알았어요. 그것도 월요일부터 수요일 오전까지 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아 이거 제가 전에 두란노에서 한 번 한 강의인데. 그 뒤에 제가 두어 곳에서 이걸 해 보니까 제가 개진하는 칭의론이 많은 분들에게 새롭게 들리고 생소하게 들려서 충분히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한 8시간은 필요 합니다. 그래서 한 8시간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시겠다고. 그래서 저 혼자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가령 하루에 한 2,3시간씩 강의하고 토론하고 이런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러분이 함께 강의하는데 그것도 화요일 오전까지 하루를 단축을 시켜 놓았어요.

그래서 야 이거 어떻게 하나. 짧은 강의를 위해서 태평양을 건너 갈 수도 없고.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최소한도 6시간은 좀 강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국내에서 여러분들이 자주 모여서 서로 공부하고 토론하고 이런 모임이 자주 있는 줄 알고 이번에는 제가 강의하고 이다음에 그런 모임에서는 국내에 계시는 이번에 함께 강의에 참여하시고 논찬으로 참여하신 분들이 또 원하는 만큼 6시간이면 6시간 8시간이면 8시간. 이렇게 강의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결과를 보니까 제가 6시간 강의하고 다른 분들은 겨우 한두 시간 강의하도록 해서 그분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전히 생소한 칭의론을 여러분에게 제시한다는 이유로 제가 좀 길게 강의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칭의론에 대한 지난 한 백 한 30여 년간에 길게 잡으면 한 150년간에 서양 신학의 격렬한 토론을 좀 더 간단히 간략하게 요약하면 우리가 오늘 왜 칭의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하는가를 좀 더 뚜렷이 알게 됩니다. 그럴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다만 19세기 말 쯤 오면 성경신학자들이 신약 신학자들이 바울의 칭의론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 제기한 사람들 중에 가장 예리하게 제기한 사람이 여러분이 잘 아는 알버트 슈바이처인데 이분은 바울의 칭의론이 바울 복음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바울 복음의 사실은 곁다리에 불과하다. 바울 복음의 중심은 바울이 자기 복음을 선포하는 복음이 폭발하는 주 분화구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그 안에 내포되어 옛 아담은 죽고 새 아담쪽 인간으로 부활함이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 이것이 바울의 복음의 주 표현이다. 주 분화구라고 그렇게 표현했어요. 이 사람은 그것이 바울 신학의 중심이다. 그런데 이 칭의론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할례와 율법을 받지 않고 행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인으로 칭함 받는다는 복음을 선포하니까. 유대주의자들이 그게 아니고 할례를 받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언약에 또는 시내 언약에 편입이 되어야 시내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오신 메시아 예수의 구원의 사건에 덕을 입는다. 이렇게 해서 논쟁이 벌어지니까 바울이 자신의 이방 선교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논쟁용 교리로 순전히 이방 선교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개발한 임시방편적인 복음 선포 양식이지 이게 바울 복음의 중심이 못된다. 그래서 두 가지로 첫째 이 칭의론은 바울 서신에 다 나오지 않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3장에만 나온다. 고린도 서신들에도 안 나오고 데살로니가 서신들에도 안 나오고. 반면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 이것은 훨씬 더 보편적으로 바울 서신에 나온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바울의 칭의론에서는 윤리가 나올 수 없다. 이미 우리가 믿는 자 될 때, 우리가 공식적으로 교회 정통에서 언제 믿는 자되는 시점으로 정하죠. 세례 때라고 해요. 그러니까 신학자들은 길게 우리가 믿는 자 될 때라고 하지 않고 그냥 세례 때라고 해요. 세례 때 세례 때 그 말을 내가 많이 쓰는데. 신학자들의 공통 언어인데. 어느 사람들은 내가 세례를 굉장히 중시해서 로마 가톨릭 식으로 그래서 그런가? 오해하는데 절대 그런 것은 아니고 우리는 세례 때 정식으로 그때부터 믿음을 정식적으로 고백하고 그 고백한 믿음을 그것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그때부터 믿는 자 됨이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어떤 사람들만 교회의 구성원으로 생각해요. 세례 받은 사람들만. 누구만 성찬식에 참여해요? 세례 받은 사람들만. 그 전까지는 믿는 자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학습을 받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세례 때라는 말에 오해가 없기를. 세례 때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그 당시는 순전히 법정적 개념으로만 무죄 선언됨. 부정적으로 말하면 무죄 선언됨. acquittal. 긍정적으로 말하면 의인이라 선언됨. to declare righteous, to reckon as righteous. 의인으로 인정됨. 또는 의인의 신분을 얻은. 최후의 심판 때에 얻을 의인이라 칭함 받음을 선취해서 이미 세례 때 다 받은 걸로. 그리고는 이제 전통적인 조직신학에서 루터교단이든지 개혁 교단이든지 함께 구원의 서정 개념을 개발해 가지고 칭의는 세례 때 다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뒤에 성화의 과정. 구원의 현재 단계는 성화라고 이름을 붙이고 최후의 심판 때에 얻을 구원의 단계를 영화라. 이런 식으로 규정을 했는데 일단 칭의 자체가 세례 때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믿는 자 될 때 얻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윤리와 근본적으로 분리가 되었어요. 윤리는 어디서 이루어져요. 성화와 함께 이루어진다고.

그런데 바울 서신을 보면 칭의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바울 서신들의 뒷면에 전부 윤리적 권면들이 아니에요. 너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그걸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으로, 가령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어쩌라 이제? 의인으로 살라. 그런데 바울 서신들의 후면은 전부 윤리적 권면입니다. 그걸 옛날에는 성화라고 그랬다고 그런데 바울의 그 의인으로서 삶을 어떻게 정당화 하느냐. 로마서 6장을 한번 보세요. 세례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내포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에 호소해서 너희가 옛 아담적 존재로 죄에 대해서 죽어 버린 존재이고 장사된 존재이고 의인으로 부활했으니 이제 의롭게 살아야 한다. 바울은 칭의 자체에서는 윤리가 안 나오니까. 그러나 윤리는 필요하지. 그러니까 윤리를 가르칠 때는 어디에 호소해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이 바울 신학의 주 분화구이고, 칭의론은 이방선교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대주의자들과 논쟁용으로 그러니까 fighting doctrine. 영어로 말하면 독일말로 캄피스 레레로 이 주 분화구 안에 곁다리로 복발한 곁다리 분화구다. 독일말로 레빈 크라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이 홉트 크라터, 주 분화구. 이런 식으로 하면서 슈바이처가 뭐라고 합니까. 그때까지는 개신교에서 칭의론이 바울신학의 중심이고, 바울 신학만 중심이 아니고 우리 신학 전체의 신학 중심, 신학 복음의 중심이고, 신학 복음의 요체고, 아니 신학만이 아니고 신구약 전체의 요체라고 이렇게 개신교인들이 늘 생각해 왔는데 그래서 심지어 누가가 복음을 선포할 때도 어떻게 칭의론적으로 선포하려고 하고, 마태가 선포한 복음도 어떻게 칭의론적으로, 바울신학에서 어떻게 칭의론 적으로 하려고 하고, 창세기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출애굽기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그게 우리 개신교의 전통이었는데 슈바이처가 어떻게 한 거예요. 그것을 과격하게 칭의론의 의미를 축소한 거예요.

둘째로 이것의 근본적인 문제, 윤리로부터 분리된 문제를 아주 예리하게 지적한 거예요. 그게 서구의 신학 학자들에게 굉장히 공감을 얻어가지고 칭의론이 그때부터는 굉장히 평가 절하되는 그런 것인데. 아이러니칼하게도 20세기 한 천구백. 아 지금까지도 이 전통적인 칭의론. 특히 루터식의 칭의론을 바울 신학의 요체로 중심으로 지켜 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 사람들이 그게 볼트만 학파예요. 그 중에서도 볼트만이 가장 예리하게 그렇게 편을 한 거예요. 그 볼트만 학파 내에서. 아 그런데 이건 문제다. 이 칭의론의 복음이 윤리와 분리되는 이것은 문제다. 그래서 본회퍼의 싸구려 은혜도 나오는 것이고. 빌리게그나 데라는 말도 나오는 거고. 60년대부터 이 제가 많이 영향을 받은 에니스터 케이지만의 이 칭의론은 주권의 전이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우리에게 사면해주고 우리에게 의인의 신분을 선물로 주는 것만이 아니고 선물로 주시는 이는 그 선물과 함께 우리에게 주권을 주장하면서 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의인이라 만들 때는 우리를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전이 한 것으로. 주권의 전이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 속에 이 예수의 주권에 순종을 요구하는 그 요구와 함께 이 구원의 선물, 의인이라는 선물이 함께 오는 것이지. 이 주권의 요구와 분리된 선물만 받으려고 하는, 독일말로 하면 깨버를 무시하고 그 선물 까배만 받으려고 하는 것이 칭의론의 근본 오해다. 그래서 까베와 함께 항상 깨버가 함께 주권을 우리에게 주권을 주장하면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이제 선물, 의인의 신분 얻음, 선물과 윤리적 요구를 통합하려고 했는데. 그게 굉장히 많이 70년대 80년대는 굉장히 많이 호응을 얻었어요. 그러는 중에 1977년 이래로 또 바울 신학의 새 관점 E. P. 샌더스의 신약시대의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마디로 언약적 율법주의다. 유대교가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일방적인 먼저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은혜의 행위이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그게 언약이지요. 그게 또 은혜지요. 은혜에 의한 선택 그리고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로 진입을 한 것이다. getting in 은혜의 의한 진입. 그래서 이 사람이 유행시킨 단어가 몇 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은혜의 의한 언약의 관계 getting in. 그런 사람들은 어찌한다. 그 언약의 인간 쪽에, 이스라엘 쪽에 부과된 의무. 그게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는 거야. 그러니까 그것을 성실히 함으로 해서 하나님과의 그 은혜의 관계에 머무르는 것이다. staying 하는 것이다. staying in. 그러니까 은혜로 getting in하고 그 언약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쪽의 의무를 다해요. 하나님 노릇 해 주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은 어찌해야 해. 자기 쪽 의무를 다 해야 해. 자기 쪽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기 쪽의 의무를 다 해야 해요. 그게 뭐에요.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서 그 공로로 최후의 심판에서 의인이라 판정받고 구원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이 하나님 은혜에 의한 이 선택과 언약의 관계에 staying in 하기 위한 방도로 율법을 지킨다. 그러니까 자기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고 함. 그런 종교개혁 이래로 우리 개신교 신학들이 너무 유대교를 그렇게 잘못 이해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유대교를 그러니까 옛날 중세 가톨릭 교회의 공로 신학의 선구자로 그렇게 폄하한 것이 그게 잘 못된 것이다. 거기에 대항해서 바울의 칭의론 알려진 것이 잘 못되었다. 그렇게 보지 말고 유대교의 진면목 언약적 율법주의의 진면목을 이해하고 바울의 칭의론을 새롭게 해석해 달라. 그게 샌더스의 제안이었는데 그것을 이어 받아서 이에 새롭게 칭의론을 발전시킨 것이 소위 새 관점 학파예요.

새 관점 학파가 여러 갈래로 나왔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제임스 던이고 엠티 라잇인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나중에 굉장히 다른 견해를, 칭의론을 결국 펴게 되는데 그들의 공통점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된다고 할 때, 율법의 행위라고 할 때 율법을 다 지켜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후 심판에서 의인이라 판정 받는다. 이렇게 이해하지 말고 어떻게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때 그때의 율법은 유대인들의 언약 백성으로서 표징들로만 사회학적 개념으로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언약백성 선민, 백성으로서의 그 정체성을 정의하는 그걸 이방인들과 분리 시켜서 그 정체성을 정의하는 이 경계선 마크, 바운더리 마크, 또는 그 아이덴티티 마크로만 이해해야 한다. 그게 뭐예요. 할례고 그 다음에 뭐예요. 정결예법. 그래서 음식 가리고 이방인들과 교제하지 않고 그 다음에 안식일 지키고. 이 서너 가지에 포커스를 맞춘 개념이다. 그게. 그러니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어떻게 신의 언약의 체계에 할례 받고 성결의 법들, 청결의 법들, 특히 음식 가리는 일 이런 거 안 지키고 안식일 안 지키고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덧입는가? 이게 칭의론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칭의론의 의미는 교련적인 의미이고 선교학적인 의미이다. 어떻게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방인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편입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편입이 되나. 이 뜻이다. 그래서 칭의론을 굉장히 교회론적 선교적인 의미로만 축소해서 해석을 했어요. 그래서 많은 반발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반발한 사람들이 소위. 나중에는 그런 사람들을 뭐라고 이름 지었어요. 옛 관점, 옛 종교 개혁적 관점을 아직도 고수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 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을 Old Perspective라 표현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여기 서서 말하는 김세윤이도 그 중의 하나예요. 그래서 그 칭의론의 새 관점 학파의 칭의론에 굉장히 비판적인 책도 제가 쓰고 그랬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데 그 새 관점 학파의 잘못이 이 율법의 행위를 좁게 해석하는 것이 잘못이고 그 다음에 칭의론의 가장 기본 의미는 이 법정적 개념이거든.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무죄 선언됨. 의인이라 판정 받음. 이게 기본적인 의미예요.

그런데 이게 원래 새 관점 학파가 자기들의 새로운 통찰을 개진할 때에 그걸 거의 완전히 무시했어요. 그래서 반발을 많이 받은 거예요. 그러면서 또 함께 반발을 받은 것이 유대교가 넓은 의미로는 특히 구약에서 그렇고 중간사 시대의 유대교 랍비 시대 같으면 성전이 다 무너지고 그래서 더 이상 질서가 없고 그러니까 제사를 대신한 의의 행위가 뭐예요. 그게 율법을 철저히 지킴이예요. 그런데 심지어 랍비 시대까지 해도 크게 보면 구약의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샌더스의 개념이 그건 옳다. 그건 처음부터 거의 모든 심지어 옛 관점 지지자들도 수긍을 한 거예요. 다만 이 포로기 이후에 구약의 선지자들의 선지서들부터 점점 개인주의가 발달해서 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고 이스라엘이라고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실제로 그들 중에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이 누구예요. 언약의 법을 신실히 지키는 사람들, 이 사람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이고 이 사람들만 의인들이고 이 사람들만 지혜문서에서는 지혜로운 자들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으로 출생을 했고 할례도 받고 형식을 갖추었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은 패역한 자들은 아니다. 이렇게 그 내에서 분별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 개별적으로 율법에 신실한 것이 중요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시대에 여러 유대교 부흥 운동이 일어나지요. 우리가 아는 에센파도 그런 파 중의 하나고 바리새파도 그 복음 운동이고. 세례요한의 부흥도 복음운동이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운동도 사실은 이스라엘의 갱신과 부흥운동이지. 그래서 종말에 참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는데, 그 속에서 전부 자기들이 이해하는 대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들만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패역한 자들이라. 유대교의 중간사 시대의 유대 문서들을 보면 그래요. 그러니까 거기에 뭐가. 그러니까 크게 보면 언약적 율법주의가 맞는데 그 안에서 뭐가 나온다고요. 그래도 더 율법에 신실해야 더 충실해야 더 철저하게 지켜야 의인이다는 그런 사상도 점점 뭐가 발달해요. 공로 사상도 그 속에 분명히 발달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랍비 언어를 보면 실제로 이 죗가와 율법을 순종해서 지키는 그 공로를 저울로 달아서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에 따라 심판한다는 언어도 나와요. 실제로 나온다고 그런 언어가. 그런데 샌더스는 그런 것을 싹 무시해 버렸어요. 이런 것은 설교용으로 율법에 대한 신실한 순종을 북돋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무슨 조직 신학적으로. 신학적인 교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될 수 있으면 무시해 버렸다고. 그러니까 심지어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가 한참 나왔을 때 유대 신학자들 중에서도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이건 순전히 샌더스는 철저하게 기독교적 입장에서 율법지키는 것을 보는 그런 편견이 지금 나와 있다. 아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 받으려고 하는 것이 뭐가 잘 못되었느냐. 그런 유대 신학자들도 있었어요. 이것도 하나의 논점이었어요. 크게 보면 언약적 율법주의가 맞는데. 전혀 율법을 철저히 지켜 그것을 공로로 인정 받으려고 하는 것은 유대교에 없었다. 너무 이것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그런 것도 이제. 그러니까 성전시대의 유대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대해서 논쟁도 많이 벌어지지만 이 강연을 위해서 초점을 맞추면. 제가 예정했던 것보다 그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시간을 많이 낭비했는데. 초점을 맞추면 그 칭의론을 이렇게 교회론적으로 선교론 적으로 축소하는 것이 그래서 법정적 dimension을 거의 무시해 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전통적인 종교개혁적 신의 유산을 견지하는 것이 이른바 old Perspective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반론이었는데, 한 2000년 쯤에 오면 지금부터 한 13~4년 쯤 전에 오면 제임스 던이나 엔티 라잇, 엔티 라잇은 굉장히 솔직하게 제임스 던은 뭐 본의가 아니었는데 어쩌고 어쩌고 한다고 하는 식으로 해서 한국 정치인들 하는 식으로 핑계대듯이 비슷하게 핑계대면서 아 우리가 전통적인 칭의론이 무시했던 칭의론의 의미를 새로 발견해서 그것을 개진하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본의 아니게 법정적 개념을 경시했는데 그건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바울의 칭의론을 처음 개진할 때가 갈라디아서에서 안디옥에서 식사 교제에서 싸우고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이 침투하니까 그때부터 바울의 칭의론이라는 복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논쟁용으로 개발한 것이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아직도 그 새관점 학파가 그 백 몇 십년 전에 슈바이처가 했던 그 통찰에 그대로 서 있어요. 이것은 순전히 이방 선교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논쟁용으로 개발한 것이다. 그것을 그 사람들이 견지해요. 칭의론이 후대에 개발되었다. 원래부터 바울 복음의 요체가 아니다. 그 점에 있어서 제가 제임스 던하고 논쟁을 많이 했어요. 나는 바울의 회심과 관계있다. 거기서부터 기원한 것이다. 처음부터 바울 복음의 요체라고 하는 등 그 논점이 아주 중요해요. 그런데 이 친구들은 그게 아니고 이게 안디옥에 그러니까 ad 48~9년 바울이 ad 한 32~4년 그 시대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회심하고 사도로 부름받고 이방의 선교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 십몇년은 칭의론이 없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제임스 던에게 물은 거예요. 그럼 33년부터 48년 49년까지 기나긴 16년 동안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무슨 복음을 전했느냐. 율법의 요구없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선포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니까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갈라디아서에서 도전해서 갈라디아를 쓰면서 칭의론적인 바울 복음을 개발했다는데 바울이 무슨 신학적인 정당화로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요구하지 않느냐. 유대인의 틀 속에서는 율법없이 의인됨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이방인들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내가 물은 거에요. 제임스 던은 한번도 저에게 그것에 대한 시원한 답을 안해. 이 친구가 기다란하게 답을 했는데 그 부분은 피하고 안해요. 하여간. 그런 이야기 할려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이 새 관점 학파가 지난 40년 동안 거의 40년 동안 논쟁을 하면서 이 칭의론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가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 새관점 학파가 그 자체로서는 이 천년대 초부터 자기들이 아, 우리가 너무 옛 관점 학파의 기본 관심사인 법정적 개념을 무시한 것은 잘못이다. 그것도 살리고 그런데 옛 관점이 알지 못했던 칭의론의 컨텍스트 이방 선교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인이라 칭함 받는다.

그리고 그 의인이라 칭함 받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소리이고 유대인과 함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소리이고 유대인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소리인데 그 교회론적인 선교론적인 dimension 새관점 학파가 자기들이 발견했다는 그것과 옛 관점의 중심 관심사인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 선언받은 이걸 통합해야 한다. 그렇게 상호 접근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논점이 많이 약화되었는데. 여기서 새 관점과 소위 옛 관점 학파의 토론에서도 계속 무시된 것은 뭐예요. 새관점 학파식으로 칭의론을 전개해도 칭의에서 윤리가 나올 수 없는거야. 옛날 같이 그대로 이해하는 한. 이른바 구원 서정의 틀 속에 이해하는 한. 세례 때 칭의는 다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성화가 있는 것이고. 최후의 심판 때에는 성화의 정도와 관계없이 옛 세례 때 미리 선취되었던 이미 받았던 은혜의 선물로 받았던 칭의의 선언이 자동적으로 확인이 되는. 자동적이라는 말은 절대 안쓰죠.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보니까 19세기에 브리드나 바이스나 슈바이처 이런 사람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그냥 남는 거예요. 윤리로부터 분리된 칭의론 그것을 성화로 이야기 하는데 바울의 언어 사용을 보면은 성화는 칭의 다음에 나오는 것이 아니야. 전혀.

두 구절만 읽어 보세요. 고린도전서 1장 2절만 읽어봐. 거기에 뭐라고 써 있어. 바울이 누구에게 편지든다고요? 고린도에 있는 성화된 자들에게. 거기 있는 성화를 거기는 한국말로 썼어요. 순수 한국말로 거룩해진 자들에게. 즉 성도들에게 그건 또 한문으로 썼어. 무슨 소리냐면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쓰면서 그 대상 고린도의 막나니들 자기가 막 꾸짖을 막나니들이 이미 성화 되었다는 말을 두번을 되풀이 해. 그래서 그들이 성도들이라는 두번을 어느 바울 편지에도 그 대상을 성화된 자들에게, 성도들에게, 영어로 the saints 라고 쓰지 한번 더 되풀이 해서 거룩함을 받은 자들, 즉 성도들이라고 두번 되풀이 한 일이 없어요. 고린도 교회에 그것을 강조한 이유가 있어요. 그들이 이 고린도전서 6장 7절부터 11절 보세요. 거기 어디 중요한 구절들을 다 써 놓으라고 했는데. 거기 뭐라고 써 있어요. 너희들이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도적질하고 사기치고 이러한 불의하고 더러운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짓을 계속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6장 9절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이 말은 최후 심판에서 탈락한다는 말이예요. 완성된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그 말이예요. 그 말을 바울이 한번 더 되풀이 해요. 어디서 똑같은 맥락에서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 그래요. 육신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음행하고 술수쓰고 우상숭배하고. 이게 육신의 열매들. 고린도전서 6장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어쩐다고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못 받는다고요. 너희들이 그런 자들이었는데 어떻다고요. 이제는 씻겨졌고 이제는 성화되었고, 거룩해졌고, 이제는 의인이라 칭함 되었고. 아, 거기는 성화가 먼저 나오네. 의인이라 칭함 받음보다. 이거 큰일 났네. 여기 고린도전서 1장 2절과 6장 11절에서 지금 문제가 발생한거야. 고린도전서 1장 2절이 뭐야. 이미 여러분들이 성화된 자들이야. 언제 성화된거예요. 6장 11절 너희들이 씻겼고 너희들이 뭐하고? 성화되었고 너희들이 의인이라 칭함 받았고. 환자들인데 다시 세상 오염 속에서 허우적 거리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계속 그러는 한 하나님 나라 구원 못 받는다. 이렇게 경고하는 거예요. 거기서 이 시제가 과거 시제예요. 이미 성화되었다는 거예요. 언제 성화된 거예요. 성화란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예요. 여러분들 구약 신학에서 다 배웠지. 거룩성 성화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윤리적 개념이 아니고 무슨 개념이라고요. 물리적 개념이라고. 범상으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짐. 그게 성화의 기본 의미예요. 물리적으로 분리된 것. 세상, 오염된 세상. 그런데 유대인들에 있어서 이방인들의 오염을 생각할 때는 두 가지가 아주 대표적이예요. 우상숭배와 음행. 그것도 구약도 그래요. 마이 종교가 우상숭배와 음행이 겸해졌듯이 헬라 종교도 이 숭상숭배와 성찬의 음행이 아주 겹쳐졌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 하면 저 더러운, 오염된 놈들. 우상숭배하고 음행하는 놈들, 대부분 그래요. 오염. 그 오염으로부터 씻겨서 거룩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 됨. 그게 성화예요. 기본적으로 물리적 개념이예요. 그게 언제 돼. 그게. 그러니까 성화는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됨.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됨. 그 말이예요. 언제 돼요. 그게. 아 그게 세례때 되는 거야. 그런데 고린도 서신들과 데살로니가 서신들에서는 칭의 언어는 별로 안나와요. 고린도서에는 그래도 두어번 나와요.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서신들에도. 제가 지금 데살로니가 WBC 주석을 여러해 쓰고 있는데 데살로니가서를 깊이 분석하면 칭의론이 거기 다 나와요. 그래서 내가 데살로니가서의 복음도 로마서의 칭의론 복음과 똑같다.

그런데 바울은 그래도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더 많이 쓰는 언어가 성화의 언어야. 고린도나 데살로니가나 다 헬라의 메트로폴리스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 항구도시로. 고린도는 아가야의 항구도시로. 우상숭배와 음행이 아주 심했던 곳이예요. 아직 그 도시들에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율법의 요구가 침투하지 않은 상태예요. 그런때는 바울이 복음을 무슨 범주로 카테고리로 선포해요. 성화의 카테고리로서. 어떻게 우리가 이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백성이어서.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에 진보해야 되나. 그게 어디 써 있어요.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 13절 그래서 최후의 심판에서 어찌해야 한다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흠잡을 수 없는 거룩한 자들로 판결을 받아야 한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말은 무슨 소리에요. 법정적 언어지요. 거기서 쓰는 언어는 뭐예요. 그건 의의 언어지 칭의의 언어지. 그러니까 칭의의 틀 속에서도 데살로니가서에서는 성화의 언어를 써요. 고린도서에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여러번 말해요. 1장 7절부터 9절까지에서부터 시작을 해. 그런데 거기서도 성화의 언어를 주로 써. 왜 그 오염에서. 그런데 그게 세례때 이루어진 거란 말이야. 그런데 언제 완성이 된다고. 데살로니가 3장 12절 13절 최후의 심판에서 완성이 돼. 그러니까 성화도 세례때 이미 이루어져 최후의 심판때 완성이 이루어져.

그러니까 성화의 카테고리도 어떤 구조 속에서요? 종말론적인 유보의 구조 속에서 이미 첫 열매를 얻고, 이미 최후의 것을 미리 선취함. 그러나 아직도 완성이 안됨. 이 구조 속에서 있어요. 칭의도 똑같아. 그런데 이 슈바이처가 먼저 제기하고 최근에 새관점 학파들이 주장했던 대로 바울의 칭의의 언어를 집중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유대주의자들과 논쟁의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 그러면 바울의 칭의론이 겨우 이방인을 위한 논쟁용으로 이방선교를 정당화하기 위한 임시 방편으로 개발한 것인가? 그건 아니고 전형적인 구약 유대교의 신학 유산을 이어받아 가지고 바울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하나님의 뜻을 거슬린 죄의 문제로 본 거예요. 오염의 문제라기 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로 본 거에요. 그러니까 그런 때는 칭의의 언어를 써요. 그래서 가령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 바울이 그들에게 선포한 복음을 요약하는데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한 하나님께 회심을 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셔서 우리를,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실까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무슨 말, 최후 심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기다린다. 진노로부터 구한다. 그게 칭의론이지 뭡니까. 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아 데살로니가전서, 심지어 새관점 학파 누구지 제임스 던까지도 아 데살로니가전서 이것 쓸 당시는 AD50년에 쓰여졌다고 하는데 그때 까지도 칭의는 없었다. 갈라디아서 쓸 때, 갈라디아서 쓸 때, 갈라디아서 쓸때 써진 것으로 보아요. 그때야 벌써 칭의론 이야기 한다. 하나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출한다는 말이 그게 칭의론이지 뭐야. 3장 아까, 이야기한 12절 13절에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 우리가 흠 잡을 수 없는,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아니 흠잡을 것이 없는이 아니라 책망할 것이 없는, 흠 잡을 것이 없는 그건 성화의 언어예요. 흠없는 제물을 바침, 그게 성화의 언어야. 성전 리춸 언어예요. 책망할 것이 없는, 이건 법정적 언어야. 성화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언어. 어디에서 최후의 심판에서 이건 칭의의 언어야. 아무리 성화의 언어로 쓰지만 사실은 칭의의 틀을 깔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칭의론이 기본인데 저기 고린도 서신이나 데살로니가 서신에서 성화의 언어를 앞세우는 것은 그들을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이들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우상숭배와 음행등 세상 오염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서정에서 순서로 칭의는 다 세례때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지금 구원의 현재 단계는 성화고. 지금 세계 신학계에서 바울 신학 전공한 사람치고 옛 그 우리 저기 개혁신학의 또는 루터 신학의 조직신학자들의 설정했던 구원의 서정으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람은 하여간 제가 읽어본 것으로는 하나도 없어요. 이 두 언어는 병행언어야. 하나님의 자녀됨, 그것도 병행언어예요. 한 마디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은 구원을 여러 그림들로 표현해. 왜냐하면 그 구원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가 칭의요. 그건 법정적 언어요. 하나가 뭐요. 성화요. 그건 리춸 언어야. 컬트 언어야. 하나는 페밀리 언어야 어뎁션 하나님의 자녀로 상속, 뭐가 입양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빠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로 덪입어서 지금 살수 있어.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언제 상속 받아요. 아주 심판 때 예수 재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도 already but not의 구조 속에 있어. 그것도 구속이라는 언어. 또 저기 화해의 언어. 이런게 다 다양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설명하는 그림언어예요. 그래서 이게 다 병행된 거예요.

그런데 하여간 그 말을 지금 하려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많이 가 버렸습니다만은. 그런데 아까 지금 내가 칭의론에 대한 논쟁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을 했는데 심지어 새 관점 학파의 논쟁을 통해서도 이 윤리와 분리된 칭의. 이것에 대한 증보는 없었다고요.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에니스터 케이지만의 칭의론을(아까 제가 소개한) 주권의 전이로 이해를 해야 한다. 거기서 많이 감동을 받았는데. 그런데 1993년쯤에 미국의 IVP에서 신약 사전들을 만들면서 제2권의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그 사전을 만들면서 저더러 바울서신에 나오는 예수 서신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들에 대한 아티클을 쓰라고 요청이 왔었어요. 그때는 제가 한국에 있었어요.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내가 썩고 있었지 사실은. 그런데 저를 잊어 버리지 않고 편집자들이 저더러 assignment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걸 바울 서신을 얼핏 보면 예수의 말씀들이 겨우 두 세개 인용되고 없어요. 그렇잖아요. 왜 일반적인 볼트만 학파의 영향으로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깡그리 무시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는데 바울을 위시한 그의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 싹 잊어 버리고. 예수의 복음을 싹 잊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복음이예요. 다른 복음이다. 누구부터 예리하게 지적했어요? 윌리암 프레디부터 19세기 말에.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버지되고시고 자애로운 아버지 되시고 그의 구원의 통치의 복음을 선포했는데 이 선포자를 그의 사도들이라는 자들이 선포의 대상으로 더 프리쳐를 The preacher를 The preached 선포의 대상으로 만들고 그를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그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사건이라고 해서 헬라식 복잡한 구원론의 구조를 만들어 이것은 전혀 새로운 종교다.

그러니까 프레디의 유명한 책 바울과 예수라는 책의 결론에 이 기독교의 창시자가 둘이 있는데 예수와 바울이 있는데 그 중에 더 영향력있었던. 교회사에 진짜로 영향력 있었던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이 기독교의 founder예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완전히 분리 시켜서 서로 다른 복음으로 그 사도들의 복음의 대표자가 바울이라는 말이에요. 이게 자유주의 이른바 비판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기본 이해가 되었어요. 지금까지도. 그래서 이 바울서신의 이른바 비판적인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울서신들에는 하나님 나라가 8번 나와요. 그런데 이른바 그리스도의 나라 이 말도 포함하고 이른바 소위 제2 바울 서신들까지 포함하면 11번 나와요. 그러니까 겨우 8번밖에 안나온다고해. 그런데 제가 여기 원고에 뭐라고 썼어요. 바울의 하나님 나라를 8번이나, 8번 밖에가 아니고 8번이나. 11번이나 쓴다. 제가 이렇게 써 놓은 이유가 있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어는 공관복음을 떠나면 안 나와요. 요한복음에도 몇번 안나와. 누가복음을 쓴 사도행전을 쓴 누가도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나라를 몇 번 안써요. 서신들에는 어느 서신에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안나와요. 이건 예수의 언어인데. 왜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어가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언어로 전환되는가 이 논리를 이해하는게 중요하다는 말이야.

그래서 내가 그 사전 아티클에서 이렇게 놓고 바울 서신에 있는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예수의 말씀들을 찾아 보니까. 굉장히 많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가 뭘 발견하게 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걸쳐서 이쪽 편에서, 이 죽음과 부활의 이쪽 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일어난 구원을 되돌아보는 사도들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삼게된다. 근본적으로 쉽게 말하면 원고에 쓴대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 한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이 죄를 회개해서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 초대를 하고 그러면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해 주고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참여하게 했다. 예수께서는 종말에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를 두개 그림으로 그렸지요. 상속의 그림으로, 그리고 잔치의 그림으로. 이 두개를 합병한 것이 탕자의 비유지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그 아담 이야기예요. 인간의 그 아담적 실존의 모습을 그렇게 그린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의 부요함을 등지고 자기 내제의 자원으로 자기의 분깃, 자기 내전으로 살려고 할 때 금방 자기의 결핍 속에 한계성 속에 떨어져서 그것이 죽음에 이름. 여기에 하나님 나라 복음. 회개하고 돌아올 때 어쩐다고요.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고. 가락지를 끼우고 예복을 입혀서 상속자로 회복을 시키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 나라 구원을 이 두개의 그림으로 상속과 잔치의 그림으로 그려 주면서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초대하는 거야. 뭘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나님의 충만함, 신적 충만함, 초월자의 충만함. 플레로마를 상속받게 해 주겠다. 그 잔치에 참여하게 해 주겠다. 이 그림으로. 다시 말하면 영생을 주겠다. 영생은 성경적인 숙어죠. 그것의 기본 의미는 오는 세상의 생명이라 그 말이에요. 그런데 오는 세상은 누가 무슨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생명. 영생의 기본의미가 그 말이야. 그것의 신학적인 의미는 신적 생명이라는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충만에 참여하는 생명. 우리 인간의 한계성으로 이루어지는 결핍으로 이루어지는 고난으로 누더기진 삶이 아니고 신적 충만, 하나님의 전지 하심과 전능하심과 영원하심과 무한하신 사랑으로 이루어진 생명. 그래서 거기에는 뭐가 없어요? 결핍이 없지. 거기에는 뭐가 없어요? 고난이 없지. 그걸 성경 숙어로는 영생이라고 해요. 그냥 이런 삶을 기다랗게 늘리는 것이 영생이 아니고. 그걸 약속하면서 사단의 나라에서 회개하면서 돌이켜서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서 이 구원의 힘을 시위하면서. 하나님 나라 영생의 구원의 힘을 시위하면서 어떻게요? 예수가 어떻게 했어요? 두 가지 했지요. 가장 많이 한 치유가 뭐에요. 죄인들을 하나님께 회복시키는 그러나 가끔씩 스펙타클한 이 치유의 시위로, 그 치유의 시위를 그가 장애자들을 일으키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피부병자를 고치고 이것이 시위이다. 왜 이것이 시위의 효과가 가장 크기 때문에. 예수가 언제 꼭 그것을 고집해요. 안식일에 한다고요. 안식일이면 자기가 망가진 이 피조 세계를 완전히 갱신해서 다시 한번 원래의 심히 좋았더라. 생명으로 충만한 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시위를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고난이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죽음병 걸리지 않는, 죽음이 없는, 신적 생명 영생 오는 세대의 생명 하나님 나라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선포한 복음이 하나님 나라 복음이야. 그런데 그가 그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했어요. 최후의 만찬에서 두 범주로 해석을 했지.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 대속의 제사는 뭐하는 제사? 우리 죄를 씻어 버리는 죄값을 치러버리는. 자기 목숨을 뭐로 왔다고?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했지. 죄값을 치르고 죄를 씻어 버리는 제사로. 새 언약을 세운다. 언약 세운다는 말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신다는 말이야. 하나님이 일단의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기로 약속하는 거예요. 이게 구약의 covenant form이라고 해요. 여기 구약을 전공한 이교수님도 계시지만 내가 너희 하나님이고 너희가 내 백성이라.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노릇 해 주겠다. 약속하는 거야. 그러니까 언약 세우는 것은 항상 백성을 창조하는 것. 그러니까 옛 시내 언약에 근거한 이스라엘에서 거기에 상응하는 새 언약을 세우는 거야. 그래서 최후의 만찬의 이 잔의 말씀이 자기 죽음을 대속의 제사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그래서 옛, 저 출애굽기 4장 24장 8절 시내 언약의 상응하는 언약의 피라. 새 언약의 피라. 그래서 새 언약을 위해서 뭐가 창조돼요. 하나님의 새 백성이 창조돼요. 종말의 새 백성. 이들에게는 뭐가 되는 거야. 죄 값을 치뤄 버리고 죄를 씻는 속죄의 제사가 이루어 지는 거야. 그러니까 의로운 새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 자기 죽음인데. 그렇게 해석을 해 준 거예요. 예수께서 주의 만찬 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그것이 옳다고 확인 한 거거든. 예수를,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 시킨 것은 뭐야. 예수를 vindication한 사건이야. 옳다고 확인한 사건이야.

여러분들이 제자들 입장에 서 보세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듣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이쪽 편에서 보았을 때에 뭐가 중요해요. 예수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구원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했다는 것이 중요해요? 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약속한 바라를 그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했다가 중요해요? 어디가 중요해요? 그래서 죽음과 부활로 성취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사도들의 복음은 전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저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포커스가 맞춰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잊어 버렸느냐. 잊어 버리지 않았어. 왜 부활하신 예수를 어떻게 해석해요. 시편 110편 1절에 예언의 성취로 해석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자기 우편에 높여. 우편에 높인다는 말은 자기 대권을 위임해서 대행하게 했다는 그 말이예요. 고대 근동의 궁중의식에서 이 왕의 우편에 앉는 분은 누구야. 총리대신이야. 총리. 대권을 위임받아 대행하는 분. 이게 시편 110편 1절이야. 예수께서 벌써 그걸 제시했어요. 그런데 이 초대교회가 예수의 부활을 보고. 예수께서 그렇지 않아도 서기관들에게 다윗이 노래하기를 어디서 시편 110편 1절에서 야훼께서 나의 주에게 말하시되 내 우편에 앉으라. 메시야가 하나님, 야훼의 우편에 앉아 대권을 대행하는 분인데 어찌하여 너희들 서기관들의 메시야론으로는 메시야가 기껏해야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냐? 예수가 좀 시비를 하지요. 알송달송한 말이거든. 그런 것을 마샬이라고 해요. 알송달송한. 예수의 전형적인 말버릇이 알송달송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비유로 말하는 것도 알송달송 하게 해. 들을 귀 있는 자는 직감적으로 이해를 해. 그런데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고 하는 거야. 이게 전형적인 예수의 어법이예요. 그 110편 1절을 가지고도. 그런데 부활 후 이편에서 보니까 아 그말이 그말이구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자기 우편에 앉히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게 했다. 그걸 깨닫고 아 그래서 땅 위에서도 예수가 세례 때, 이 하늘이 열리고, 세례요한의 세례 때 예수가 어떻게 선언이 되었어요? 메시야로 선언이 되었지.

시편 2편 7절과 이사야서 40장 1절의 혼합 인용으로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는 시편 2편 7절에서 왔어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한다는 말은 어디서 왔어.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왔어. 그런데 시편 2편 7절은 제왕시로 사무엘하 7장 12절부터 14절까지 있는 나단의 신탁인 선지자 나단을 야훼 하나님이 다위에게 보내서 약속을 하지요. 뭐라고? 네 수가 다하면 내가 너의 씨를 일으켜서 너의 왕위에 앉히겠다. 그렇게해서 내가 너의 집을 세우겠다. 너의 왕조를 세우겠다는 말이예요. 그가 내 대신 나의 백성을 통치한다는 의미로 나의 아들로 삼겠다. 내가 그의 아비가 되고 그가 나의 아들이 되리라.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상속자라는 뜻이예요. 아들의 기본 의미가 상속자.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속 받아서. 그림으로 말하면, 요새 말로 하면 위임 받아서 대행하는 자가 이스라엘의 왕이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위에 앉혀 자기 아들로 삼아서 그게 뭐예요. registration이 하나님의 통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통치를 대행하게 하리라. 그리고 그가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게 하리라. 성전을 짓다. 짓는다는 말이예요. 그게 솔로몬을 통해서 성취되었지. 그런데 솔로몬과 함께 그게 끊어지면서 남북조로 나뉘고 북조는 그냥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남조 유다가 근근히 지탱하다가 BC547년이 되니까 바벨론의 침공으로 다윗 왕조가 끝나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다윗 왕조가 지속될 때 까지만 해도 사무엘서 7장 12절에서 14절에 근거해서 다윗의 씨가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마다 가령 시편 2편 7절같이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함으로 해서 왕으로 등극을 했는데 그게 다 끝나 버렸다고. 그러니까 거기서 뭐가 발달해요. 종말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왕위에 앉혀서 다윗 왕조를 세워서 다윗 왕조의 영광. 모든 열방을 정복하고 통치하는 때가 오리라. 이게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지. 그런데 그게 세례 때, 예수님 세례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예수의 머리에 Anointment 기름, 성령의 기름 부으면서 메시야적 기름 부으면서 하늘의 선포.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메시야적, 다윗의 아들 메시야로 선언이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대권 하나님 나라 통치를 위임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대권인 죄용서 권리를 행사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치유, 회복, 죄인들을 회복하고 죄인들을 치유하고 안식일을 안식일 되게하고, 회복하고. 이 고장난 세상을 고쳐서 다시 한번 아름답게 한 일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가 속죄 제사로 새 언약을 세운 제사로 죽은 뒤에 하나님의 뜻을 일으켜서 자기 우편에 앉혀서 자기 대권을 위임했다. 그러니까 이 예수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정당화 하면서 다시한번 자기 대권을 위임한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 신앙고백이 어디가 있어요. 그것이 로마서 1장 3절 4절이야. 로마서 1장 3절 4절 한 번 보세요. 거기 뭐라고 되어 있어요? 바울이 자기가 이 사도, 내가 뭐하는 사도라고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라.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은 뭐냐?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3절 전반부 그의 아들은 어떤 분이냐. 두 구절로 되어 있는 신앙고백이예요. 그 아들은 다윗의 씨로 낳고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씨로 낳고, 다윗의 씨는 어디서 온 말? 사무엘서 7장 12절 우리 말로하면 혈통이라고 되어 있는데 혈통 지워 버리고 씨라고 쓰세요. 씨가 중요해요. 지금. 문자적으로 씨가 사무엘서 7장 12절이구나.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져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신 분.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요. 그 능력으로라는 말이 부사구가 아니예요. 등극했다는 말. 선언되었다는 부사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수식하는 형용사구야. 하나님의 authority,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그거 아니야. 다윗의 씨로 하나님께서, 복음은 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이다? 다윗의 씨로 낳고 성육신. 거기에는 무슨 사상이 지금 함축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서. 보냄의 형식 갈라디아서 4장 4절 5절, 로마서 8장 3절 하나님께서 선지한 그의 아들을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4절 그래서 여자의 몸에서 낳게 하고 인간이 되게 하고 인간이 되게 하고 율법 아래 낳게 하고 유대인이 되게 했다. 뭐하기 위해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속량하기 위해서, 첫째. 둘째 그 다음에 뭐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유명한 보냄의 형식이지요. 그게 지금 여기 로마서 1장 3절에 함축되어 있는 거야.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하나님께서 보내서 다윗의 씨로 낳게 한 다윗적 메시야. 그런데 그 분이 대속의 죽음을 한 후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 자기 우편에 높여 시편 110편 1절의 성취로 하나님의 대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냐? 그게 바울의 말이예요. 그게 주라는 뜻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기 사도직은 뭐냐? 이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대권을 상속받아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의 모든 열방들이 믿음의 순종을 하도록 불러오는 일을 내게 위임했다. 내가 그 사도다. 아주 중요한 본문이예요. 그게. 그런데 심지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로마서 1장 서문에서, 1장 1절에서 17절까지 서문에서 16절 17절에 복음의 정의가 나온다고 생각했어. 거기에만. 왜 그랬느냐. 루터가 그 복음을 재발견해서 이른바 종교 개혁을 이룬 것이거든.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주는 힘이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기 때문에.

그리고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게 로마서의 논지다. 로마서는 그 명제를 푸는 것이다. 주석들이 천편 일률적으로 그렇게 썼어요. 그런데 주석가들이 뭘 잊어 버렸어. 뭘 잊어 버린 것이 아니고. 제대로 관찰을 안했어? 로마서 1장 3절 4절의 복음에 대한 정의가 이미 나와 있는 것을 잊어 버린 거야. 거기에 벌써 하나 나와 있으면 그 복음이 1장 3절 4절의 복음이 여기 16절 17절 복음과 복음의 정의와 어떻게 연결되느냐? 금방 문제 의식이 생길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안한 거야.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보면 로마서 1장 3절 4절에 복음에 대한 충만한 정의이고 16절 17절은 그 복음을 새긴 거예요. 부차적인 거야. 사실은. 그런데 지금 여기 로마서 1장 3절 4절은 모든 주석가들이 동의하듯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 선포 형식이예요. 그래서 바울이 안쓰는 언어가 거기 들어 있는 거야.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 선포를 바울이 지금 받아 가지고 거기 적고 있어요. 그런데 바울이 또 하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을 또 한 번 요약을 해요. 어디에서 요약해.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5절까지. 거기에 뭐라고 요약을 해요. 내가 나보다 먼저 사도된 사람들로부터 받아서 너희들에게 신실히 전달한 복음을 너희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 시키겠노라 하면서 4마디로 요약을 하지요. 복음을. 첫째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 둘째 그가 장사되었다는 것. 셋째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졌다는 것. 넷째 그가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 네게의 절들로. 이게 복음이야. 그런데 그 복음은 어디에 맞춰져 있어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그게 구원의 사건이야. 2절 그가 장사 되었다는 것. 4절 그가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뭐야. 앞서가는 저를 확인한 거야. 그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 그가 장사됨을 확인하고 그가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4절로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 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복음을 다시 요약하면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즐겨 요약하지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그게 구원의 4개인 다음에 그 두절에만 성경대로 성경대로라는 말이 덧붙여 있는 거야. 그런데 여기 지금 로마서 1장 3절 4절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 복음 선포 양식이고 이 고린도전서 15장 3절~5절도 예루살렘 교회 선포 양식이지.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1절에 뭐라고 그래요. 바울이 나나 앞에 언급한 게바와 열두 사도들과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 다 이렇게 선포하고 모든 교회가 이렇게 믿는다.

이게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고 초대교회의 에큐메니칼 복음이예요. 요세말로 하면 유대교회나 이방교나 다 이렇게 선포하는, 모든 사도들이 공유하는 선포 양식이야. 그 선포가 어디에 집중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 거기 복음선포는 어디에 더 포커스가 맞춰저 있어요?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 그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를 되세김에 더 강조 되어 있어요. 이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성토시키기 위해서 부활의 증인들을 자꾸 내세워서 부활에 굉장히 강조점이 있지만 그 선포의, 복음 선포의 3절 ~5절만 놓고 보면은 그의 죽음이 우리 죄를 먼저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거기에 포커스가 맞춰저 있어요. 그런데 아까 로마서 1장 3절 4절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저 있어요.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져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자. 부활하여 승천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현재적 주권의 행사자로 맞춰저 있어요.

하여간 중요한 것은 이 사도들의 공통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어떻게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 save event (독일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의 죽음과 속죄 제사로 새 언약의 제사로 죽음과 그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높임을 받아 만유의 주가 되심. 이 to moments에 집중이 되는데 우리 신약 성경을 크게 보면 어느쪽에 더 포커스를 맞추느냐. 선포 양식이 달라요.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하여 지금 현재적 주로서 활동하는 지금 현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완성의 시간은 주에 초점을 맞춘 복음 선포 양식이 그게 누가 신학이야. 그래서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의 복음 선포 양식이예요. 그게 히브리서의 복음 선포 양식이야. 히브리서의 복음 선포는 뭐야. 부활하셔서 하늘 성전에 들어간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현재 우리를 위해서 뭐한다고요? 중보하시는 기독론. 현재적 주권 행사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십자가에 속죄적 죽음에 포커스를 맞춘 선포 양식의 대표적인 것이 바울 신학이지. 바울 복음의 양식.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뭐라고 그래요. 2장에 내가 고린도에 당도했을 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 바울이 즐겨 복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요약하지만 더 예리하게 요약할 때는 그의 죽음을 위한 속죄 새 언약의 제사예요. 우리를 위한. 그 십자가 신학. 그래서 바울 신학을 뭐라고 해요. 십자가 신학. 이 루터 신학이 그걸 굉장히 강조한 거지요. 십자가 신학. 데오로기아 쿠르케스. 요한 신학이 그래. 요한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이 낮아짐이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올려서 영광 받게 함. 이 구도가. 낮아짐. 들림받음. 높여짐. 그게 초대교회의 공통된 복음 선포 양식이예요. 대표적으로 빌립보서 2장 6절~11절 그리스도의 찬송시. 요한복음은 십자가의 예수가 죽음이 그게 영광 받음이야. 그러니까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영광 받음을 합병 시켜 버렸어. 오묘한 신학적인 논리예요.

다 설명할 시간이 없는데.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을 고스란히 드러내. 하나님의 사랑힘.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힘. 자기를 내어 주시는 분이야. 그의 충만한 가운데서 자기를 내어 주심. 거기에 우리 인류의 소망이 있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요? 에로스적 존재야. 가치 있는 것을 자기 것을 취하려는 존재. 그런데 하나님은, 신성은. 자기 충만한 가운데 내어주는, 그게 어디서 나타나. 십자가에서 나타나.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거야. 하나님을 충만히 계시하는 사건이야. 그래서 그게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영광 받음이야. 그래서 십자가 신학이 그렇게 오묘하게 십자가의 낮아짐과 높여짐. 아니 십자가가. 그래서 요한은 무슨론을 써요? 인자가 들어 올려질 때에 들림 받을 때, 이중 의미지요. 물리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땅위에서 들려 올려질 때에. 그게 더 깊은 신학적인 용어로는 그게 영광 받는 순간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예요. 하나님의 계시자로 드러나는 순간이예요. 로고스로 드러나는 순간이예요. 하나님의 계시자로 이렇게 십자가 신학이예요. 마가복음이 그렇지 이 십자가 신학. 마가복음에는 부활 출현이 거의 없다 싶이 해. 15장에 어디에.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저 끝까지는 전부 무엇이예요. 십자가 신학이예요. 십자가 신학. 그래서 누가 그랬지요. 마가복음은 뭐라고 긴 서문에 달린 예수의 수난사라. 예수의 수난사에 서문이 길다랗게 달린 거에요. 자 이렇게 복음 선포 양식 두개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현재적 주권에 포커스를 맞추는 누가신학이나 요한계시록 신학이나 히브리서 신학이라고 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무시하고 경시하냐? 그렇지 않아요. 그것의 중요성이 전제되어 있고 그걸 또 새기지. 마찬가지야. 바울에 있어서도 십자가 신학. 바울 신학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그러는데. 바울의 신학에 그렇게 흔히 나오는 칭호들이 2개죠. 가장 많이 나오는 칭호 두개. 그리스도라는 칭호하고 메시야 칭호.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주로 바울이 그의 죽음과 함께써.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술할 때. 그리스도 다음으로 많이 쓰는 칭호가 주라는 칭호예요. 이것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서 높임받아 하나님의 주권을 현재 대행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 함축하는 말이야. 그것을 길게 전개한 것이 계시록 신학이예요.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바울의 윤리적 권면은 전부 주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주권의 명령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바울의 십자가 신학에 집중을 하면서 그의 예수의 현재적 주에 대한 이해를 무시하면 안된다. 그런 말이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 한대로 로마서의 구조를 보면은 로마서 1장 3절 4절에 복음이 뭐라고요? 예수가 다윗의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서 다윗의 아들로 낳게 하고 그를 대속의 제사로 죽음에 넘겨주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자기 대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했다. 이게 복음이라. 그런데 로마서의 끝에 가면 결론이 뭐예요. 로마서 15장 12절에 가면은 이 이새의 뿌리의 통치를 받아 열방이 이스라엘과 함께 구원을 받고 기뻐한다. 여기 로마서 1장 3절에 다윗의 씨라는 말과 이 로마서를 닫는 15장 12절에 이새의 뿌리라는 말, 이게 둘 다 다 예수가 뭐라는 말. 다윗적 메시야라는 말이지. 이 말로 수미상관을 이루었어요. 무슨 말이에요. 로마서 전체의 내용이 예수가 다윗적 메시야로 어떻게 우리에게 종말의 구원을 가져왔나? 다윗적 메시야가 뭐하는 분?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분. 그래서 벌써 이 수미상관의 구조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이해하게 해. 우리는 지금까지 로마서는. 이 로마서 1장 16절 17절의 전개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라고 받나. 칭의론의 전개로만 봤다고. 그거지 사실은. 그런데 그것을 어느 틀 속에서 이해를 하라? 그게 예수가 다윗적 메시야로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만유의 통치자의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의 구원의 활동이다. 구원의 사건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라. 바울이 그렇게 지금 정해 준 거예요. 또 하나 수미상관이 있어요. 칭의론의 이제 복음의 전개를 마감하는 8장 31절부터 39절까지 보면은 예수의 재림때, 주 예수의 재림 때 최후 심판의 장면입니다. 거기서 이제 우리가 칭의가 완성이 돼. 로마서 14장 10절, 고린도후서 5장 10절 어쩐다고요? 예수의 재림 때 우리가 다 우리가 우리 몸안에서, 몸으로의 존재.... 해석하기가 좀 어려워요. 고린도후서 5장 10절 우리가 몸으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행한 행위대로 그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재판석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렇게 되어 있어. 그 장면이야. 지금. 거기서 어전다고요? 의를 행한 자는 구원으로 심판받고 악을 행한 자는 어쩐다고요? 나쁜 판결을 받는다고 되어 있지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그 장면을 로마서 8장 31절 39절 거기서 칭의론의 결론 부분에 칭의가 이루어지는 완서오디는 그 장면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여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재판장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자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가,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사가 되셔서. 중보자가 되어가지고 우리의 칭의를 완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쩐다. 우리 구원이. 칭의가 확실하다. 로마서가 그러지. 그러니까 지금 칭의의 완성을 그리죠. 최후의 심판에서 그런데 35절부터 39절까지가 어떤 컨텍스트에서 그 이야기를 해요. 이게 모든 사단의 세력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다. 그러니까 칭의론을 어떤 구조 속에서 이해를 하라? 메시야가 하나님의 우편에서 높임 받은 이가 모든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그 컨텍스트에서 이해를 하라. 그렇게 지금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어요. 그런데 로마서 1장 3절 4절에 이 복음을 좀 전개한 것이 뭐예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15장 23절부터 28절까지야.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 져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뭐 했다는 거야. 그의 왕권을 한시적으로 위임 받았다는 거예요. 그의 나라를 위임 받았어. 뭐 하라고? 부활을 승천, 그러니까 로마서 1장 4절을 지금 전개한 것이 고린도전서 15장 23절부터 28절까지인데 뭐하라고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 했어요? 로마서 1장 4절에 하나님의 권세를 행사하는 아들로 앉혔다고 하는데 뭐하라고 위임 받았다고? 모든 사단의 세력을 박멸하도록. 차근차근 박멸하도록. 마지막 박멸할 사단의 세력이 뭐라고요? 그게 죽음이라고. 죽음까지 다 사단의 세력을 박멸하면 어쩐다고요? 아들이 나라를 아버지께로 환원시킨다.

그래서 모든 피조세계가 사단의 사죄 아래 하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반역, rebellion 반란을 종식시켜. 아들이 그러니까 뭐하는 거야. 이 반란 상태에 있는 사단의 통치 아래,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반란 상태에 있는 피조 세계를 사단의 세계를 다 박멸 시킴으로 말미암아 평정하는 거예요. pacifier하는 거야. 평정하는 거야. 하나님께 회복시키는 거야. 그게 구원의 완성이라고 그래요. 로마서 1장 3절 4절에 그 복음을 전개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 23절부터 28절이고. 고린도전서 15장 23절부터 28절을 전개한 것이 요한계시록 신학이야.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죽고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은 이 복음을 이해하려면 어떤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해. 묵시문학적 구도 속에서 해야 해. 세상에 대한 세계관이 뭐예요. 이 세상이 사단의 사주아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금 반란 상태에 있는 거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서 세상을 평정하는 거야. 이 악의 세력을 다 척결함으로 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가 의와 생명의 통치가 궁극적으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다 극복하고 하나님 통치가 이루어짐 그래서 우주적 샬롬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그것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위임받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이예요. 어디에도 그게 쓰여 있어요? 빌립보서에도 그렇게 써 있어.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11절까지 여러분이 다 암송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찬송시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었던 분이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않고 어쩧다고 스스로를 비워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되시고 종에서도 가장 낮은 십자가의 죽음까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셔서 만유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다 만유에 뛰어난 이름이 뭐예요. 하나님의 이름이지. 야훼. 하나님 이름.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위에 있는 인간들이나 땅 아래 있는 악령들까지도 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그에게 예배하면서 뭘하라고요? 입으로 예수가 주이시다. 부르짖겠다고. 그게 유명한 그리스도 찬송시지. 그 그리스도가 어쩐다고요? 3장 20절 21절 그렇게 연결되요. 그가 종말에 재림해서 모든 악령들을 다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의 힘으로. 누가 그걸 굴복시킬 수 있어. 모든 사단의 세력을 제압할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쩐다고요. 모든 악의 힘을 다 굴복시키고. 우리의 비천한 몸을 자기의 영광된 형상으로 탈바꿈 할 것이다. 거기도 빌립보서에서 구원의 종교를 뭐라고 말해요. 부활하신 예수, 주께서 어쩐다고요.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박멸해서 온 우주를, 인류와 온 우주를 하나님께 회복시키는 이 구도로.

지금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자꾸 하겠어요. 바울 신학의 십자가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지금 현재적 통치,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해서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데 그 현재 통치가 묵시문학적 틀 속에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제거해가는. 그래서 종말에 완성한다는 그런데 그게 로마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어떻게 일어나냐. 인간들을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들을 하나님과 회복하게 하는. 그게 칭의론이예요. 인간들을, 먼저 인간들을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하나님과 회복시켜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시켜서. 종말에 완성하는데 로마서 8장 17절에 뭐라고 해요. 그때 어쩐다고요? 누구까지 회복된다고? 피조세계 전체가 회복된다고. 그때. 드디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로부터 인간들 만들이 아니고 누구까지도 다 회복이 된다고요? 피조 세계 전체가 회복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런 커다란 묵시문학적 구도. 하나님 나라가 사단의 나라에 대결 상태에 있음. 칭의론도 어떻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들을 자기에게 회복하나. 자기 나라에 회복하나. 이 구도로 이해를 해야 한다. 그게 바울이 지금 로마서에서 그래서 이렇게 틀을 짜는 거예요. 이 메시야 나라로. 하나님 나라를 대행하는 통치를 대행하는 하나님 나라로. 그래서 저기 16장에가면 바울이 아직도 미진 한 것이 있어서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 살롬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어쩐다고요? 사단을 곧 완전히 박멸하시리라.

다시한번 그 소리를 해.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것이 뭐라고요? 인간들이 하나님께 회복에 대해서 하나님의 통치에 뭘 해야 한다. 믿음의 순종을 해야 한다. 믿음의 순종이라는 말이 로마서 1장 5절과 어디 또 한번 나와. 로마서 끝에 16장 26절. 그것도 수미상관이야. 그러니까 로마서 중심이 전부 칭의라고 합시다. 그러니까 칭의라는 것이 뭘 한다는 소리예요.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회복이 된다는 소리야.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누가 대행해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한다. 믿음의 순종을 해야 한다. 1장 5절 모든 민족들이 그 말로 끝내 로마서 16장 26절. 그러니까 이 칭의론을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틀 속에서 이해를 해야. 우리가 뭣을 해결해요. 결론 부분을 보세요. 두 가지의 신학적인 근본 문제를 해결해. 첫째 뭘 해결해. 우리가 칭의가 뭐냐면 단순히 의인이라 선언받고 사면받고 저기 세례 다 이루어지고 끝. 그게 아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이 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이 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예요. 하나님이 왕이시고 우리가 그의 백성으로 삶.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한다. 이제 곧 보겠어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다는 말이 무슨 소리냐.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소리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를 누가 대행해요? 예수 그리스도가.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해요? 그리스도의 법을 지켜야 된다고 그래. 어디 써있어? 고린도전서 9장 21절. 갈라디아서 6장 2절.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지켜야 된다. 그리스도의 법이 뭐야. 이중 사랑 계명. 그게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받는 삶을 해야 한다.

그래서 칭의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예수의 언어로 해석을 해야. 칭의가 무엇으로부터 분리가 안돼요? 윤리로부터 분리가 안돼. 첫째. 그래서 19세기 말부터 예리하게 제기되었던 칭의, 전통적인 종교개혁이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한 칭의론. 또 구원의 서정의 틀에서만 이해한 칭의론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약점. 윤리와 분리된 칭의론을 극복할 수 있는 거고. 더 크게는 뭘 극복 할 수 있어요? 그것도 19세기 말부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제시한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는데 그의 사도라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싹 잊어 버리고 무슨 복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전혀 다른 복음이다.

지금 내가 이야기 한 것이 뭐에요. 그게 전혀 다른 복음이 아니라 하나의 복음이다는 말이예요. 하나의 복음. 우리가 지금 칭의론에 대한 더 포괄적인 새 이해로 이 바울 신학의 근본 이슈 두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에요. 이럴때 우리는 이 칭의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되는 거고. 교회가 복음을 올바로 포괄적으로 선포해서 올바른 성도들 제자됨의 삶 하나님의 백성된 삶을 살게 한다. 그게 제 논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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