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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전통 수립자들의 정치 사상--정치 권력에 대한 순종과 저항에 대한 교리를 중심으로--
이 논문은 27일 은혜샘물교회당에서 열린 고려신학대학원 2017 수도권지역 신학포럼에서 양낙흥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가 발표한 글이다. 대통령 탄핵과 대통령 선출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개혁가들의 정치사상을 소개하며 크리스천들의 정치 참여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는 매우 시의적절한 논문이라 할 수 있다. - 편집장 주

강의자가 부탁받은 강의 제목은 종교개혁가들의 사회 윤리 사상이다. 그러나 사회 윤리라는 주제는 너무 광범위하여 한 시간에 다루기 거의 불가능 하므로 범위를 종교개혁가들의 정치 사상이라는 문제로 좁히고자 한다. 칼빈은 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것을 터부시했는가 아니면 그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가? 존 낙스와 베자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정치 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의 의무가 어디까지라 보았는가? 불의한 폭군적 통치자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 복종을 가르쳤는가, 아니면 그들에 대한 저항을 인정 내지는 요청했는가? 그리하여 오늘의 강의 범위를 우리는 종교개혁가들 중에서도 개혁주의 전통의 가장 중요한 선조들인 칼빈, 존 낙스, 그리고 데오도르 베자 세 사람의 정치 사상, 더 정확히 말하면 정치 권력에 대한 복종과 저항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으로 범위를 좁히고자 한다.

 

I. 칼빈과 정치

칼빈은 정치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오늘날의 많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도 그것을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정죄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를 멀리 해야 한다고 가르쳤는가? 아니면 정치와 정부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는가? 특히 불의한 정부와 정치 권력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그는 가르쳤는가? 어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권력의 정당성이나 정통성과 무관하게 정치 권력에 무조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던가? 아니면 불의한 권력에 대해 때로는 불순종, 혹은 저항도 정당화된다고 가르쳤는가?

칼빈은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 위기가 도래한 시대를 살고 있었다. 교황제에 대한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공격은 제도, 권력, 그리고 지배와 같은 정치의 필수적 요소들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칼빈은 정치의 도덕적 위상을 회복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자신의 정치 이론을 형성함에 있어 칼빈의 첫번째 대적은 재세례파였다. 기독교 강요 가 씌인 것은 피비린내 나는 뮌스터 (Munster) 사건이 있던 무렵이었다. 그 때는 또한 재세례파들이 그리스도인들은 지상 국가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지상의 정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오랫동안 선전해 오고 있던 때였다. 칼빈이 볼 때 이것은 위험한 이단이었다.

재세례파들은 정치에 대한 태도에 있어 두 종류의 과격파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편에는 분리주의자 혹은 신령주의자 (spiritualists)라고 부를 수 있는 극단주의자들이 있었다. 복음의 자유는 인간들 사이에 어떤 왕이나 관원이나 법률도 인정치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본다 고 생각한 그들은 자기들 위에 어떤 권세자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칼 은 정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강요 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 죽은 이후 우리는

(골 2:20)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워져 천상의 존재들 가운데 앉아

있기 때문에...세상적인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존엄한 지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요컨데 분리주의적 재세례파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정치같이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에는 또 한 무리의 과격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토마스 뮌쩌 (Thomas Munzer)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은 온 세상이 새로운 형태, 즉 성도들의 순수한 공동체(pure communion of saints)로 재편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극단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자기들의 목표는 세상을 뒤엎고 그 속에 있는 사악한 요소들을 뿌리뽑아 냄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평화적이든 호전적이든 재세례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치에 대한 반감이었다. 오염된 세상에서 자기들 교회의 순수성 을 보존한다고 하는 궁극적 목표 하에서 그들은 정치 질서에 대한 어떤 의무도 부인했다.

루터 또한 두 형태의 권력, 즉 영적 권력과 세속 권력을 날카롭게 대조시켰다. 그는 양자 사이에 어떤 공통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영적 권세는 신자의 양심에 대한 설득을 통해 행사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법적 처벌 (civil penalties)을 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 제도와 정치인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때로는 그것들에 대해 경멸적이기까지 했다.

약간은 과장되었으나 울린 (Wolin)은 정치를 혐오하는 루터의 경향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정치 영역은 그것의 실제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미덕이 아니라 강제와 강압 (coercion and repression)에 관계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정치에 대한 적대감이 루터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세상 권력 에 대한 이러한 정죄의 결과는 질서 (order)와 공민성 (civility)의 모든 전통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치 질서를 경멸하는 추세의 와중에서 칼빈이 착수한 것은 정치의 평판을 회복하고 공민적 질서 (civil order)와 종교적 질서 (religious order) 사이의 흑백 대조를 완화하는 일이었다. 개신교도들에게 그들의 정치적 성격을 상기시켜 주고 그들에게 정치의 초보를 교육시킴으로써 그는 그들로 하여금 사회의 결속 (coherence)과 유대 (solidarity)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권력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시켰다. 인간성 (humanity)의 보존을 위해 정치는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세속 왕국이 전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는 데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부의 성격 전부가 오염되었고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단지 광신일뿐 이라고 비난했다. 그리스도인들도 지상의 순례길을 가는 동안 정치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것은 인간성 자체를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칼빈은 생각했다. 그는 시민 정부를 철폐하려는 재세례파들의 시도에 너무나 격분한 나머지 그것을 천인공노할 야만 이라고 공격했다.

국가는 부패한 인간성을 억제 (repression)하기 위한 힘을 가진 필요악이라고 이해했던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탁월하고 유익한 기관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들 사이에서 정부의 기능이 빵, 물, 태양, 그리고 공기만큼이나 중요 하며 그 명예로운 위치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 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정부가 인간성이 야수와 같은 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만일 정부가 없어지면 인간 사회가 짐승같은 무정부 상태 로 타락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정부를 세우신 목적은 인간들이 개나 고양이처럼 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칼빈의 정치 사상이 보수적 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평가는 그의 저항 이론에 관한 한 상당한 일리가 있다. 질서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는 끝까지 대중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명백히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직계 제자들, 특히 데오도르 베자와 존 낙스 같은 사람들부터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칼빈 이후 칼빈주의자들의 정치적 교리들을 고찰하게 되겠지만 결국 이들의 보다 과격한 국민 저항권 사상에 물꼬를 튼 것은 칼빈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의 이포의 이론, 공공연한 보복자 규정, 특히 하나님의 계명들을 거스리는 왕의 명령에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등, 권세에 대한 복종의 예외 규정들이 제자들에게 영감과 힌트를 제공함으로써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은 폭군에 대한 대중의 무력 저항권을 정당화하는 이론들을 확립했다.

우리는 칼빈의 보수주의가 재세례파들의 그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정치와 전혀 무관하다는 식의 분파적 영성주의는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치 영역은 신령한 삶의 차원 아래에 있는 것 이라는 생각은 칼빈이 혹독하게 비난하던 재세례파의 가르침이었지 칼빈의 사상은 아니었다. 칼빈은 반대로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게 될 때 공동체의 삶과 상황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칼빈만큼 정치에 많은 관심을 보인 신학자는 많지 않았다. 기독교 강요 를 편집한 맥닐은 서신 왕래를 통해 칼빈만큼 정치 문제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한 신학자를 찾는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 이라 단언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16 세기 정치 사상사에 있어 존 칼빈만큼 중요한 인물은 없다 는 것이 정치사상사가들의 정설이 되었다. 칼빈과 그의 동료 목사들이 제네바에서 정치적 관심을 너무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바람에 그곳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경계선이 불분명해졌고 그 결과 종종 칼빈은 그 도시에서 신정정치를 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칼빈이 정부가 국사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깊고도 폭넓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전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너무나 갈망했기 때문에 다른 시대라면 정치적 문제로 여겼을 문제들까지도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정치 문제와 종교 문제가 항상 칼로 자르듯이 분명하게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교회와 국가의 관심이 때때로 중복된다고 보았다. 그것은 교회가 자기 교인들의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복음이 세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칼빈 시대 제네바의 교회와 국가 관계를 현대 교회와 국가의 이상적 모델로 채택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실은 칼빈은 설교자들이 정부의 불의와 권력의 횡포를 책망하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할 임무가 있는 하나님의 입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 양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놓여 있는 기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에도 칼빈주의 전통을 물려받은 교회들은 국가가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요 국가가 가진 권력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정부에 위임한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정부가 하나님의 길에서 멀리 떠나 불의한 권력으로 변질될 때 교회는 옛날 칼빈의 제네바 교회처럼 하나님을 대신해서 권력을 책망하고 비판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II. 존 낙스의 저항 사상

낙스는 그의 두번째 나팔소리 (Second Blast)의 요약에서 폭군에 대한 저항권에 관해 아주 과격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 글은 네 개의 단도직입적인 명제를 제공한다. 첫째, 주권적 통치자의 정통성은 단지 혈통 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확인되는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둘째, 공직은 분명한 우상숭배자나 하나님의 율례를 깨뜨리기로 악명높은 자들에게 주어져서는 안된다. 세째, 국민들이 맹세를 하고 서약을 한 뒤에라도 폭군에게 불순종하고 그를 제거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네째, 만일 국민들의 조급함이나 무지로 말미암아 최고 주권자의 자리에 앉기에 합당치 않은 자가 통치자로 선출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국민들이 그를 폐위하고 벌주는 것은 아주 정당한 일이다. 이  두번째 나팔 소리 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저항권을 보다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주로 종교적 폭군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국민들은 모든 폭군에 대해 저항하고 그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낙스가 혁명의 합법성을 선언한 기념할만한 경우는 1561년 여왕 메어리 스튜어트 (Mary Stuart)와의 면담에서였다. 대화 가운데 정치 권력에 대한 순종의 문제가 나오자 메어리는 낙스가 백성들에게 그녀가 허락할 수 없는 종교를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께서는 신민들이 군주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데 어떻게 그런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있나요?” 이에 대해 낙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신민들은 군주들의 취향에 따라 자기 종교를 선택할 의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군주들은 종종 하나님의 참 종교에 대해 모든 인간들 중 가장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메어리는 “그러면 신민들이 무력으로 군주에게 저항하는 것이 합법적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낙스는 “만일 군주들이 자기 분수를 넘어서 행동한다면 신민들은 그에게 무력으로라도 저항할 수 있음이 물론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낙스는 하나님과 군주들 사이에 언약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있었다.

낙스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 에서 사용했던 것과 흡사한 비유를 사용하면서 칼빈의 결론과는 정반대되는 결론을 추출하고 있다. 만일 어떤 아버지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자기 자녀들을 죽이려 한다면 자녀들은 단결해서 아버지를 붙들고 그에게서 무기나 칼을 빼앗고 그가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손을 묶은 채 감금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왕이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하나님의 자녀들 을 살해하려 든다면 위의 예에서 자녀들이 한 것과 꼭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고 낙스는 주장했다. 그것은 군주들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정당한 순종 이라는 것이었다.

1563년 4월, 어떤 카톨릭 지도자들이 불법화된 미사를 집행했다. 개신교도들은 분개했으나 여왕은 그들을 처벌하기 위한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어떤 개신교 지도자들이 독자 행동을 취해 그들을 체포했다. 메어리는 낙스를 불러 체포된 카톨릭 교도들을 위해 중재해 달라고 부탁했다. 낙스의 반응이 차가운 것을 본 메어리는 범죄자들의 처벌이 군주의 배타적 사법권 하에 있다고 지적했다. “당신은 그들이 내 손에 있는 칼을 빼앗는 것을 허용할 작정이세요?” 라는 질문에 낙스는 “만일 군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정의의 칼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으면 군주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악을 처벌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낙스는 주권자와 신민들 사이의 상호 계약에 주목하고 있었다.

 

당신이 상호 계약에 의해 그들에게 행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당신에게 순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님 안에서 말입니다. 당신

은 그들에 대해 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

이 당신을 섬길 것을 열망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행악자들

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방어해 줄 것을 열망하고 있습니

다. 이제, 여왕이시여, 만일 당신이 그들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부인한다면...그러면서도 그들은 당신에게 완전한

순종을 바치리라고 기대하십니까? 두렵건데, 여왕이시여,

아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1564년 총회에서 낙스와 레팅턴의 메이틀란드 (Maitland of Lethington)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악한 군주에 대한 순종 혹은 저항의 문제가 나오자 낙스는 1558년 이래로 자기가 천명하고 있던 입장을 되풀이주장했다. 신민들은 권세에 순복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권세자들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에 저촉될 때는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에서 낙스는 사람 (person)과 직분 (office)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소개한다. 로마서 13:1-2의 중심 단어인 권세 라는 단어를 해석하면서 그는 인간에게 주어진 권세와 그 권세를 가진 인간은 별개라고 주장했다. 이 구별은 하나님이 권세를 세우신 목적에 관한 로마서 13: 3-4의 말씀과 인간 통치자들의 경향에 관한 낙스의 관찰에 입각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권세를 세우신 목적이 인류의 보존, 악의 처벌 및 덕의 유지 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은 흔히들 불경하고 불의하며...부패하기 쉽다.... 는 것이었다. 따라서 비록 신민들이 권세 그 자체에 저항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권세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합법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리와 인물의 이러한 구별은 낙스로 하여금 사법 이론 (Private-law theory)을 채용하게 만들었다. 그 이론에 의하면 왕이 극악무도한 (flagrant) 죄를 범하면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라 사사로운 한 범인으로 취급된다는 것이었다.

 

...왕들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위엄을 거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

다. ...만일 왕이 살인자, 간음자, 혹은 우상숭배자라면

그는 왕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범죄자로 하나님의 법

에 따라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수 있다....

 

이 논쟁에서 낙스가 보여준 가장 통찰력있는 관찰은 칼빈의 수동적 입장의 배경에 대한 해석이었다. 메이틀런드가 칼빈의 말에 호소하면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왕을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낙스는 폭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저항의 한계는 특정한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대응했다. 낙스가 볼 때 칼빈은

 

폭군들과 불신자들 아래에서 너무나 흩어져 있기 때문에

울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 힘이 없

는 크리스챤 신민들에 관해 말한 것이었다....그러나 나의

주장은 다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공동체에 함께 모여 있는 백성들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

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종류의 공개적 우상

숭배에 저항하고 그것을 억누를 충분한 힘을 주셨다...

 

낙스의 하나님은 현실주의적이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정치적 책임을 부여하지 않으셨다. 여기서도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8)는

원리가 적용되었다. 이 점에 관한 낙스의 견해를 카일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자들이 소수에 불과할 경우 낙스는 콘스탄틴 이전의

교회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델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충분한 수가 되면 구약을 모델로 삼아

기독교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

 

낙스는 목사들이 강단에서 당대의 정치적 문제들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목사들이 선지자적 관점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다룰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것을 몸소 실천했다.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 관해서는 어떤 제한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종교적이니 정치적이니 하는 구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제에 상관없이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말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여왕 메어리가 카톨릭 왕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낙스가 반대하는 설교를 하자 그녀는 격노해서 그를 소환했다. 그녀가 낙스에게 공적인 문제에 간섭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자 그는 그 비난을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왕이시여, 그 점에 있어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나는 나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지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아부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그분께만 순종해야 합니다.”

 

낙스는 칼빈주의 정치 사상의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앨런 (Allen)같은 학자는 1560년 이후 칼빈주의 진영을 지배한 정치 사상은 칼빈의 것이라기보다는 낙스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1 세기 청교도들은 낙스의 언약 사상을 즉각 받아들여 그것을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과 웨스터민스터 대요리 문답 에서 표현했다. 제 2차 권징서 (The Book of Discipline)는 언약 사상을 아주 선명히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제임스 6세와 챨스 1세에 대한 저항의 근거가 되었다. 낙스의 언약 사상을 받아들인 사무엘 러드포드는 그것을 자신의 저서 왕과 법 (Lex Rex)에서 활용했다. 이 책은 스코틀란드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17세기 후반의 모든 언약 운동에 기본이 되었다.

 

III. 데오도르 베자와 정치 권력

1574년에 데오도르 베자가 쓴 백성들에 대한 관원들의 권한과 관원들에 대한 백성들의 의무에 관하여 (Concerning the Rights of Magistrates over their Subjects and the Duty of Subjects toward Their Rulers)를 읽는 독자들은 칼빈 후계자의 정치 사상의 과격성에 놀라게 된다. 칼빈이 죽은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 그의 후계자의 정치 사상은 너무 발전되어 버렸기 때문에 만일 칼빈이 베자의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뒤에 언급하게 되겠지만 그들의 그러한 심각한 차이는 각자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 상황의 차이에 연유하는 바 컸다.

베자가 관원들의 권리... 에서 놀랄만큼 과격한 저항권 사상을 전개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1572년에 있었던 성 바돌로메날의 대학살 (the Massacre of St. Bartholomew's Day: 프랑스 왕의 칙령으로 성 바돌로메의 축제일 밤 프랑스 전국에 있는 개신교도, 즉 위그노 수만명을 학살한 사건) 사건이었다. 사실상 관원들의 권리 는 이 대학살을 경험한 수천명의 위그노들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질문, 즉 사람마다 칼을 잡고 달려나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없이 이 폭정을 참고 견뎌야 할 것인가? 에 대한 답변이었다.

베자는 “관원들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께 대한 것과 같이 무조건적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논문을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관원들에 대한 복종을 유보해야 하는 경우가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명령이 반종교적 (irreligious)이거나 불법적 (iniquitous)일 때라는 것이다. 반종교적 명령이란 십계명의 첫 돌판이 금지하는 것을 명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명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불법적 인 명령이란 동료 인간들에게 행해야 할 자비의 의무를 범하거나 소홀히함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을 의미했다. 이 은 칼빈주의 저항 이론사에 있어 중대한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주로 종교와 직접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만 불순종할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베자는 폭군들을 두 종류로 분류했다. 하나는 찬탈자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 남용자였다. 베자는 전자와 후자가 완전히 다른 경우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찬탈자에 대해서는 어떤 의무도 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도 복속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떤 폭군이 찬탈자의 범주에 속한다면 그에 대한 저항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관원들에게 지워진다고 베자는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정당한 자격없이 통치권을 소유하거나 이미 그것을 찬탈해 버렸다면...국민들은 합법적인 관원들에게

호소해서 가능하면 공적 권위를 가진 자들과 국민들의 동의에

의해 그러한 공공의 적을 격퇴하도록 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주목할만한 사실은 심지어 찬탈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이후라도 찬탈자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의 입장과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1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누가 어떤 경로를 통해 권력을 잡게 되었든간에 현재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정통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자는 권력의 적법한 획득에 대해 칼빈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정권의 정통성 보호의 책임을 진 두 번째 집단은 사사로운 시민들이었다. 만일 관원들이 [찬탈을] 묵인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사사로운 시민들이라도 온 힘을 다해 자기 나라의 정당한 제도를 수호해야 하며...그 권력이 합법적이지 않은 자들에게 저항해야 한다 고 베자는 주장했다. 이  역시 칼빈과 베자의 또 하나의 중요한 차잇점이었다. 칼빈은 사사로운 시민이 폭군에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는 오직 그 개인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을 때뿐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베자는 찬탈자에 관한 한 아무나 무력저항을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관원들의 권리... 전반에 걸쳐 베자는 자신의 저항 이론을 세 가지의 근본 전제 위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국민 주권 사상, 사회 계약 사상, 그리고 법치주의 사상 이다.

첫째는 국민 주권 사상이다. 베자는 모든 권력은 그것을 그 자리에 둔 공공의 권력으로부터 추출되었다고 믿었다. 분명한 것은 애초에 통치자들로부터 백성들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통치자들이 세워졌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국민 주권 사상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치되지 않는가? 즉 민주주의는 신본주의와 대립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베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인간적 통로, 즉 국민의 선출 (election)을 통해 직분을 임명 (ordination)하신다. 다윗 왕이 그 예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분명히 다윗을 지명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백성들에 의해 선출되어야

했다. 그를 선택함에 있어 백성들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준행했다....다윗 가문에서는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 왕권이 세습되었지만 백성들에게 자유가

있는 한 그들은 서거한 왕의 자녀들 중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자를 선택했다....

 

둘째,베자의 저항 이론은 계약 (contract), 즉 언약 (covenant) 사상에 입각해 있다. 존 낙스처럼 베자도 언약 사상을 구약에서 추출했다. 그는 유다왕 요아스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의 언약들을 발견했다. 하나는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과 백성들 사이의 상호 서약이었다. 베자는 바로 이 두번째 종류의 언약에 주목했다. 세계사를 살펴볼 때 그는 법과 공평이 지배하는 나라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왕을 받아들일 때 한 가지 분명한 조건 을 제시했음을 발견했다. 정의롭고 공정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조건을 명시적으로든지 묵시적으로든지 첨부하지 않고 나라를 왕에게 맡길 정도로 자기 이익에 둔감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베자에게 있어 계약이 존재한다는 것은, 계약이 성립되게 한 그 본질적 조건 이 명백히 침해될 때 계약은 무효화되며 의무는 해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과 공평의 법에 의하면, 통치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할 권력을 가진 국민들은 또한 그들로부터 그것을 박탈할 권력도 가진다는 것이었다.

세번째로 베자는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최고 통치권자는 결코 법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법이 그의 위에 있었다. 왕은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가증스러운 아첨꾼들의 거짓된 논리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비록 왕이 법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 법에 순종해야 했다.

하지만 베자는 왕이 모든 법에 무차별하게 묶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민법에 대해서는 왕이 일반 시민들과 꼭 같은 구속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헌법이라 불리우는 소위 공법에 대해서는 왕도 일반인들과 꼭 같이 구속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법이나 자연법에 통치자가 순종해야 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베자의 논문에서 특기할만한 부분은 반대 이론에 대한 그의 답변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베자의 답변들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칼빈의 비저항 이론의 핵심 부분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폭군은 백성들의 집단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베자는 사법 이론 (private-law theory)과 정당 방위론으로 대응했다. 그는 노상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예를 든다. 하나님의 동의가 없으면 어떤 사람도 살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강도에게 저항할 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강도에 의해 살해당하라는 특별한 계시를 주시지 않는 한 그러한 저항 행위는 정당 방위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러한 계시를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폭군에게 순종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주시지 않는 한 폭군에 저항해서 합법적인 자기 방위를

하는 것은 다른 범죄자에게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허용될 수 있는 일이다. 비록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지만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분명한 계시가

없는 한 하나님의 섭리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런 계시

가 없을 때는 하나님의 일반적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베자로서는 폭군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는 아무런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베자는 무력 저항에 의해 폭군 제거에 성공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가능했다고 반박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싯점에 권력을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정권의 정통성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칼빈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누구에게나 나라들과 왕국들을 주시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권좌의 찬탈에 성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재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베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과가 좋거나 나쁜 것이 어떤 일의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입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흔한 반대는 누가 폭군을 벌할 권리를 가졌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전통적 답변은 하나님께서 통치자를 세우셨으므로 그들은 하나님께만 직접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아무리 잔인하고 불법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외에는 최고 통치자를 심판할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다윗 왕이 인용되었다. 그는 간음자요 살인자였지만 어떤 인간에 의해 판단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베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권력의 정당성은 단지 신적 임명에 의해서뿐 아니라 국민의 선출이라는 과정에 의해서도 확보되기 때문에 통치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뿐 아니라 국민들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폭군이 하나님과 분명한 마찰을 일으킬 때 백성들은 그를 처벌할 권리를 가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처벌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그 권리를 보류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다윗 왕은 일반적인 폭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한번 죄에 빠진 사람과 온갖 종류의 죄에 빠진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주권자가 수호하겠다고 서약한 선한 법과 조건들을 저버리고 악명높은 폭군이 되면

 

방백들은 극악무도한 폭군에게 저항함으로써

자신들과 자신들의 관할 하에 있는 자들을

보호해 줄 권리가 있다. 그리고 법률에 의해

그렇게 할 권위가 주어져 있는 국회나

그와 유사한 기구는 그의 범죄에 저항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저항해야 한다...

 

칼빈은 다윗이 사울을 처벌하지 않고 참았다는 사실을 폭군에 대한 순종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제시했었다. 그러나 베자는 생각이 달랐다. 그 경우에 다윗의 행동은 일반적 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볼 수 없었다. 다윗의 사울에 대한 무저항이 모든 무장 저항은 불법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시드기야 왕의 경우도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느부갓네살에 대한 반란 때문이 아니라 그 침략자에게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처벌되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도 폭군에 대한 저항의 합법 혹은 불법의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느부갓네살과 바빌론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신 사실은 폭군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의 일반적 원칙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특정한 유대인 세대를 위한 특수한 명령이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찬탈자일뿐 아니라 폭군이기도 했던 티베리우스 시저에게 반란을 일으키시지 않고 세금을 바치셨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이유는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인간적 방식으로 다스리시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베자는 반박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특권을 버리고 지상에서 사사로운 시민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유대의 힘있는 다수파들은 로마의 찬탈을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었다. “우리에게는 시저 외에 왕이 없나이다”고 외쳤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는 존중되어야 하며 그것은 사회 질서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폭군에 대한 순종을 강조했다. 그러나 베자의 견해는 완전히 달랐다.

 

폭정이 기어들어 오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혹 이미

그것이 들어왔다면 그것을 제거하고 추방하지 않는다

면 통치자들의 권세도 안정될 수 없고 공공 질서도

유지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폭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기도라고 주장했다. 베자는 폭군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기도는 필요불가결의 요소임을 인정했다. 기도없는 다른 어떤 대책은 그것이 아무리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저주의 위험을 내포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유일한 대책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러한 경우라 하더라도 배교자 쥴리안 (Julian the Apostate)을 대적하는 기도를 한 저 기독교인들처럼 폭군을 대적하는 저주의 기도 (imprecations)를 할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폭군 르호보암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란이 정죄를 받았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베자는 그들이 정죄된 것은 폭군에 대항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고 불법적 방법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한다. 그는 반란이 합법적이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그것이 폭정임이 완전히 명백할 것, 둘째, 모든 다른 수단을 다 써 보았고 남은 것은 무력 저항뿐일 것, 세째, 해결책을 사용한 후가 그 전보다 더 나쁜 것으로 판명되지 않도록 가장 적절한 방법을 잘 생각할 것 등이다.

 

베자의 영향과 역사적 의미

16세기 유럽에서는 민족 주권 국가들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것은 중앙집권과 절대주의 이론으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위협하고 있었다. 기독교 강요 마지막 판이 출판된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았었지만 정치적 상황은 훨씬 더 첨예해졌다. 국민 저항권을 행사해야 할 필요성이 더 절실해졌던 것이다. 이 위태로운 역사의 싯점에서 베자의 관원들의 권리... 는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 옹호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폭군의 압제와 불의 하에 있는 백성들이 호소할 수 있는 기독교의 원리들을 제시했던 것이다.

셸븐 (Schelven)은 이 작은 책자에 있는 베자의 가르침과 이론들이 여러 유명한 문서들에 반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1)1581년 17개의 화란 주들이 스페인의 필립 왕에 대한 충성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문서 ("Plakkaat van Verlating"), 2) 미국의 독립 선언, 3)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the French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Citizen), 그리고 심지어는 4) 베자의 원리들의 20세기 번안인 대서양 헌장 (the Atlantic Charter) 등이다. 셸븐의 말처럼 성 바돌로메 밤의 학살 이후 칼빈의 후계자의 관원들의 권리...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칼빈, 베자, 낙스의 비교

불의한 정치 권력에 대한 순종과 저항의 문제에 관한 한 칼빈의 후계자 베자나 낙스는 자기들 스승보다 훨씬 적극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특별히 낙스는 폭군에 대한 대중 혁명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에게 있어 불의한 권세에 저항하고 그것을 처벌하는 것은 권리일뿐 아니라 의무였다. 특별히 하나님의 모든 법에 순종하겠다는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법을 침해하는 폭군을 방임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 언약의 백성들은 불의한 정치 권력의 악에 동참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그 악에 대한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칼빈과 달리 권력의 정통성이라는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던 베자는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대해서는 심지어 일반시민까지 저항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정통성이 있지만 후에 폭군으로 변질된 정권에 대해서는 일반시민에게 적극적 저항권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 경우 저항은 귀족, 방백, 그리고 의회의 몫이었다.

칼빈과 베자에게 있어 일반 시민은 아직 정치 주체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의 참정권 사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정치는 왕이나 귀족, 혹은 국민의 대표자들 같은 엘리트들의 독점물이었다. 칼빈과 베자가 폭군에 대한 저항권을 국민의 대의 기관이나 귀족, 관리들의 전유물로 간주하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칼빈과 베자도 아직 중세적 정치 사상의 영향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칼빈주의자들은 머쟎아 국민 참정권 사상을 발전시키게 된다. 특별히 청교도 목사들과 프랑스 위그노 같은 칼빈주의자들은 국민들이 정치 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근대적 정치 풍토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정치 권력에 대한 복종과 저항에 관한 칼빈의 이론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액면 그대로 수용하고 답습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태도가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벌써 4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요소를 간과할 수 없다. 17,8세기 이후 국민 주권 사상, 사회 계약론, 법치주의는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17세기만 해도 왕이 법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왕은 법 위에 있는가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나 정치학적으로 열띤 논쟁거리였다. 오늘날 법 위에 존재하는 권력자가 있다고 주장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점에서는 베자가 칼빈보다 훨씬 근대적 정치 사상에 접근되어 있었다.

그러나 낙스와 베자의 저항 이론이 칼빈의 그것과 완전히 대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오히려 칼빈의 후계자들은 칼빈이 조심스럽게 시사했던 가능성을 발전, 만개시켰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칼빈의 추종자들의 적극적 저항권 이론은 칼빈의 이포 (Ephors) 이론이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해야 한다 는 가르침으로부터 힌트와 격려를 얻어 출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의한 권력에 대한 불순종과 저항권을 인정하는 정도에 있어 칼빈과 그 후계자들 사이에 그처럼 심한 차이가 발견되는 이유는 그들 각자의 기질과도 관계가 있었다. 칼빈은 차갑도록 지적이고 극도로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 인 반면 낙스는 뜨겁고 격렬하며 조급할 정도로 열렬할 뿐 아니라...솔직하고 시원시원하며 야성적이었다. 낙스는 칼빈보다는 루터나 라티머 (Latimer)를 더 닮은 사람이었다. 베자도 법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는 했으나 그의 천부적 충동은 인간 사회의 법률적 관계에 대한 정의와 고려보다는 문학과 시가의 방향에 놓여 있었다.

단지 기질뿐 아니라 각자가 놓인 상황도 그들의 견해 차이의 원인이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의 관원들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그들의 협조에 힘입어 종교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반면에 낙스는 로마 카톨릭을 옹호하는 권력 (예를 들면 스코틀란드 여왕 메어리 스튜어트, 영국 여왕 메어리 등)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다. 베자의 경우, 제네바에는 적대적 정치 세력이 없었지만 자기 조국인 프랑스에서는 카톨릭 절대 군주가 수많은 위그노들을 박해하고 있었고 성 바돌로메 밤의 대학살 사건에서 그것은 절정에 달했다. 개신교도의 씨를 말리려 하는 이런 폭정을 경험한 베자가 폭군은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몽둥이라고 간단히 넘겨 버리기는 어렸웠을 것이다.

낙스와 베자에게서도 차이는 발견된다. 낙스는 주로 종교 문제에 관련해서 폭군을 논했으나 베자는 단지 종교뿐이 아니라 정치적 폭군도 아울러 논했다. 이 점에서 베자는 낙스보다 더 포괄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저항의 주체에 관해서는 낙스가 보다 포괄적이었다. 즉 낙스는 심지어 사사로운 시민도 폭군에 저항할 수 있다고 한 반면 베자는 정통성있는 폭군이라면 사사로운 시민은 건드릴 수 없고 방백들이나 귀족, 혹 의회가 처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낙스와 베자의 이론을 종합하면 거의 완전한 근대적 시민 혁명권 사상이 나타난다. 즉 어떤 종류의 폭군이든 법과 계약을 위반해서 폭정을 하는 자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저항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요소들, 즉 절대 권력의 제한, 국민 주권 사상, 법치주의 사상 등의 사상과 제도들의 형성에 칼빈주의자들은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의 이러한 글과 행동은 대부분의 한국 보수 장로교인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폭군에 대한 저항은 고사하고 불의한 정치 권력에 대해 선지자적 경고나 비판, 심지어 충고나 조언의 말 한 마디하는 것도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교회 풍토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 베자, 낙스 같은 칼빈주의자들은 인간 삶의 한 긍정적 요소로서의 정치에 대한 심오하고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정치 권력의 행태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나아가서 그들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크리스챤의 순종과 저항의 범위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까지 심도있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러한 주제의 논의는 자신들의 신앙고백에 충실하려는 크리스챤들이 회피할 수 없는 중요한 신학적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양낙흥  webmaster@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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