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위한 신학: 선교적 교회론

글(번역) 김영대 목사/ 김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스텔렌보쉬대학에서 선교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남아공 자유대학에서 선교학 박사과정을 공부했다. 그는 짐바브웨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섬겼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인도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인도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20년 전부터 가장 대두되는 선교학적 주제는 Missional Church이다. 1998년에 출판된 책을 기점으로 하지만, 그 이전부터 교회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하지만, 보수적 또는 개혁주의 전통의 교회에서는 쉽게 수용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Missional Church의 중심적인 요소가 missio Dei의 이론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호켄다이크의 missio Dei에 대한 광의적 해석으로, 교회를 넘어선 하나님을 위한 행위로 확대 해석해서 세상중심적(Cosmocentric) 접근으로 사회복음으로 나아간 과거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절대규범에 대한 배척과 모호성을 강조하는 시기에, 교회가 본질적인 속성을 회복해야만, 다양성의 사회에서 그 빛을 발휘할 수 있다.

Missional Church의 중심적인 강조는 두 가지 영역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속성에 기인한 신학과 교회론이다. 하나님의 속성 중, 끊임없이 보내시는(mission) 은혜의 속성에 의해서 피조물인 인간과 교통과 교제를 하신다. 교회 또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교제하기 위한 최종적 기관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하나님의 도구로써의 기능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성도들의 성격에 대한 강조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두 가지의 속성을 가져야 하는데, 예배자(Worshiper)와 증인(Witness)이다. 일상의 삶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뉴비긴은 ‘The community of Hermeneutics’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공동체)라고 말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의중과 뜻을 이 땅에 실천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의 모습을 가진다.

Missional Church는 교회의 사역의 한 부분으로, 선교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속성이 하나님께 부여 받은 사명임을 선포한다. 그 사명의 중심요소는 오늘도 세상을 향해서 구속의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남겨주신 사역을 감당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 불확실성과 절대진리에 대한 거부를 표하는 이 시대에, 교회의 본질과 본래적 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 성장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Missional Church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인데, 미국 풀러 선교대학원 교수인 윌버트 R. 셍크의 소논문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은 2003년 Ministry and Theology(September Vol.171)에 나온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교회의 존재목적에 대한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서 살펴 보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교회의 존재목적이 상이하게 이해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성경적 교회관’은 교회가 세상에 대한 주된 선교도구 내지 수단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열방에 선포하며, 만민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할 때,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를 선포할 수 있다. 벌코프와 뉴비긴이 지적했듯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상에 대한 특별한 관계에서 보다 확실한 이해를 갖게 된다.

● Christian Faith(1979, 411-412)

“수세기 동안 정적인 교회 개념이 득세해 왔다…. 신학의 영향력은 간접적이고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다. 선교 관계자들에 의한 신학적 반추도 있었다. 그 중 Gustav Warneck의 Evangelishe Missionslehre(복음전도론, 1892)이 고전적인 모델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것들은 ‘공식적인’ 신학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세상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교회론을, 아니 사실상 신학 전반을 다시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주로 비신학자인 H. Kraemer의 공이었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해 끊임없이 지적했던 것이다. 특히 그의 저서 The Christian Message in a Non-Christian World(비기독교 세계 속의 기독교 메시지) 1938을 보라." 

● The household of God (1954, 5)

“교회가 유럽 바깥에 지배적으로 산적해 있는 비기독교 종교 문화들과 접촉하면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또 교회 자체의 본질에 대하여 현실적인 의문들이 일어났다. 이런 실제적 이슈들을 다루고자 노력하다 보니 교회에 관한 의문이 지난 20년 동안 선교적 사고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성경은 교회의 의미를 설명할 때 주로 이야기(narrative)와 이미지(image)를 사용한다. 기본 패턴은 창세기 12장 1-3절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언약관계에 들어가신다. 1945년부터 성경 신학자들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자상명령이 본질적으로 교회론적 진술이라는 견해를 피력해 왔다. 이런 통찰은 ‘신약성경 속의 교회상’(Images of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 1960)에 관한 고전적 연구에서 가일층 확대되었다. 이 책에서 Paul S. Minear는 신약성경이 교회의 존재 목적과 기능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96개의 이미지를 열거한다. 즉, 성경은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교훈적 설명보다, 주로 언어 그림과 은유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John Driver는 이 연구를 더욱 확대해 ‘선교 관련 교회상’(Images of the Church in Mission, 1997)이라는 관점에서 이런 성경의 언어 그림들을 고찰했다. 그는 이 이미지들을 네 그룹으로 분류한다. 첫째, 순례 이미지들(길, 체류자, 가난한 자)이다. 둘째, 새 질서 이미지들(하나님나라, 새 창조, 새 인류)이다. 셋째, 사람 이미지(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 목자와 양무리), 넷째, 변화 이미지들(소금, 빛, 도시, 영적인 집, 증언 공동체)이다. 종합해 볼 때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교회를 변화의 공동체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연구는 두 가지 사실을 부각된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는 기타 모든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소명을 수행하도록 ‘따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형태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 교회는 무한히 변형될 수 있고, 또 어떤 상황에나 적응할 수 있다. 교회는 어느 언어나 문화 속에도 설립될 수 있으며, 특정 문화와 언어 집단에 어울리는 적합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콘스탄틴주의(Constantianism)의 부상이 긍정적 발전이었는가, 아니었는가에 대해 서로 견해를 달리하지만, 교회가 주후 313년에 내린 콘스탄틴 황제의 칙령 이후 결정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한다. 결국 주후 380년 데오도시우스 1세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교회가 제국의 공식적 국교로 확립되면서 선교 사역의 의미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복음화는 정치적, 군사적 정복과 분리될 수 없었다.

선교적 요소가 없는 교회는 죽는다. 교회가 하나의 종교집단으로 존속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선교 없는 교회는 더 이상 참된 교회가 아니다. 비서트 후프트(W.A. Visser’t Hooft)는 선교적 증언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현실을 검증하는 시금석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이 기정사실(happenedness)임을 믿는다면 교회는 선교적 행위를 통해 이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둘째, 교회가 복음의 보편적 주장들을 믿는다면, 선교적 행위를 통해 이를 선포해야 한다. 셋째, 선교적 행위를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하나의 문화, 특히 서방 문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R.K. orchard, ed., Witness in Six Contents (1964) 22-24).

21세기에는 선교적 교회론이 꽃을 피울 것으로 기대해도 좋다. 우리는 지난 2천년 동안 선교 사명을 강력히 의식하며 여러 시대, 특정 상황을 살았던 기독교 제자들의 본보기로부터 선교적 교회론에 관한 통찰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Letter to Diognetus가 그런 본보기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언어, 관습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만의 도시에 살거나 어떤 이상한 방언을 말하거나 어떤 특이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헬라의 도시들과 외국 도시들을 막론하고 어디든지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복, 음식, 기타 삶의 측면에서 자기 고장의 관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놀랍고도 아주 이상한 형태의 특유한 시민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살지만 외국인으로서 삽니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다른 이들과 모든 것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그들은 온갖 일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외국이 자국과 같고 자국이 외국과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 몸에 대한 영혼의 관계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영혼은 몸의 모든 부분에 퍼져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도시들에 퍼져 있습니다. 영혼은 몸 안에 있으나 몸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Darrell L. Guder, ed., Missional Church, 120).

 

선교적 교회론의 특징

ㆍ선교적 교회는 자신의 최우선 관심사가 하나님나라를 전파함으로써 사람들이 우상의 억압에서 해방되게 만드는 것임을 강력하게 의식한다.

ㆍ교회는 세상에 깊이 헌신하지만, 세상에 의해 통제 받지 않는다.

ㆍ선교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모방한다. 즉 선교는 십자가 형식을 위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섬기고 증언할 때, 이사야의 환상이 성취된다. 십자가가 중심이다.

ㆍ선교적 교회는 종말을 예리하게 인식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개시되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 나라의 완성을 간절히 고대한다.

ㆍ교회의 구조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교사명을 후원하고 뒷받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교적 증언을 방해하는 케케묵은 형식들이 제거되어야 하며 선교를 뒷받침할 새로운 구조가 고안되어야 한다. <계속>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