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단절과 소통의 역사다. 범죄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과 완벽한 소통을 이루었지만, 죄를 범한 후에는 에덴동산의 생명과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다. 단절의 결과는 상실이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상실, 하나님의 지식의 상실,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상실을 초래하였다. 단절로 인한 소통의 상실은 바로 우리 사회를 깊이 그늘지게 하는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소통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한다. 로마는 사람과 자원의 소통을 촉진하는 도로망 건설에 힘을 쏟았다. 반면에 고대 중국은 사람의 왕래를 끊는 거대한 방벽인 만리장성을 쌓아올리는 데 에너지를 쏟았다. 그 결과 로마의 도로망은 팍스로마나로 이어진 데 반해 만리장성은 중국에 결코 팍스(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인류 역사에서 완전한 소통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그가 지신 십자가는 수직으로는 하나님과 소통케 했고, 수평으로는 인간과 소통케 했다. 기독교는 막힌 담을 허는 소통의 종교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막힌 담을 헐고 갇힌 물길은 터서 유무상통으로 흐르게 하는 소통인으로서의 책무가 있다.
 
최근 대운하로 국론이 분분하다. 경제 혹은 환경적인 담론은 전문가의 식견에 맡기기로 하고, 대운하를 소통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대운하의 본질을 제대로 보려면 문명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물길이 통하면 정신이 통하게 마련이다. 대운하가 한국 전체를 관통하면 산간 벽지에까지 이어지는 물길의 소통으로 우리 민족의 암적 존재인 지역분열의 종식과 통합을 이루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대운하에 흐르는 소통의 시대정신이 북한과 연해주를 관통해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 일컬어지는 중앙 아시아의 해발 1609m 산상에 있는 드넓은 이시쿨 호수에까지 뻗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오래 전에 크루즈를 타고 나일강 주변에 있는 역사적인 유적지를 탐방하는 여행을 하면서 이집트는 나일강이 먹여 살린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진도에 가면 소치 허련, 허백련 등의 남농 일가 유적이 그곳을 살리고, 강진은 다산 정약용 때문에 빛나는 것을 본다.
 
인천공항에 내린 외국인이 사통팔달의 대운하를 항해하면서 산과 강을 따라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광과 청풍명월 같은 1000년의 기품 있는 역사를 보고 이 땅과 정신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면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강에서 낙동강으로, 낙동강에서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대운하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창의성과 열정이 어우러져 동양의 예지와 서양의 합리성이 고도로 결합된 현장이 돼야 할 것이다.
 
모든 물길이 생명의 소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이 흘러 들어오고 나가는 갈릴리 호수는 생명의 신진대사를 이루는 곳이지만, 물길이 트여 있지 않은 사해는 이름 그대로 죽은 바다가 되는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이 천혜의 풍광 속에 있는 물길을 따라 국토를 일주하면서 시를 쓰고 예술적 통찰력을 얻는다면 그곳이 생명의 소통으로 흐르는 물길이 될 것이다. 고속도로가 인위적 소통이라면 대운하는 문명사적, 정신사적 소통이 돼야 할 것이다. 대운하가 국력 결집과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소통을 이루는 생명의 물길로 자리잡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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