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포 3차 준비모임, 로마교는 개신교를 어떻게 생각할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 준비위원들은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져보고 있다. 지난 19일 고려신학대학원 고신영성기도실에서 있었던 2017 미포 3차 준비모임에서는 ‘500년 전에 개혁의 대상이었던 중세 로마 카톨릭은 현재 어떤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또한 ‘오늘날 주류 기독교의 흐름이 복음주의라고 했을 때, 장로교 혹은 개혁교회는 복음주의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라는 질문도 가져보았다.

미포3차 준비모임이 열리고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고신영성기도실

개혁교회와 로마카톨릭 교회 서로 너무 모른다

미포 3차 준비모임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두 분의 강사를 모셨다. 서강대 신학과의 최현숙 교수와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이재근 교수다. 서강대 최현숙 교수를 통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시대와 소통하려고 하는 로마교회의 모습을 보았고 이재근 교수를 통해서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을 보며, 오늘날 장로교 혹은 개혁주의의 위치를 찾아보았다. 특별히 카톨릭 신학자 최현숙 교수의 강의는 참가자들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미포3차 준비모임은 사무총장 이세령 목사의 사회로 박은조 목사(미래교회포럼 대표)가 기도한 후, 바티칸에서 교의학(교회론)을 전공한 최현순 교수(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의미와 정신”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최 교수의 강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 카톨릭의 개혁,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로마교회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 내부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반세기가 지났지만 50%정도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평가이다. 한국 카톨릭 교회는 그나마도 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집중적으로 살피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공의회가 열렸는지? ▶공의회의 정신은 무엇인지? ▶공의회가 무엇을 했는지?

최현순 교수(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가 강의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왜 열렸나?

먼저 ‘왜 공의회가 열렸는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 세계 인류를 향해 말을 건 공의회라고 볼 수 있다. 공의회는 3년 동안 4번의 회기를 걸쳐 열렸다. 로마교회의 공의회는 당대의 이슈들 혹은 그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 모인 모임이다. 각 시대의 도전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 모였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 배경이 된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16세기 르네상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17세기 계몽주의와 이성주의 철학의 영향들이 18세기 프랑스 혁명(1789. 7. 14~1794. 7. 27.)으로 폭발했다. 장자크 루소 같은 사람들은 ‘인간 본성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며, 진리는 초자연적 계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서 나온다고 가르쳤다. 이런 것들과 맞물려서 일어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다른 아닌 전통적 가톨릭 국가들이었다. 이태리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남부의 전통적 카톨릭 국가들은 당시 시대의 흐름이었던 ‘이성과 자유’에 대해서 ‘진리와 권위’의 자리를 찾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는 진리와 권위가 뭉쳐 있던 시대였다. ‘진리와 권위’ 그리고 ‘이성과 자유’라는 두 패러다임이 충돌하던 19세기 정점에서 제 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그 당시에는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세속화란 교회가 하던 일들을 세상으로 돌리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 카톨릭교회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런 콘텍스트에서 당시의 교황은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근대사회의 흐름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 교황은 교회의 권위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69년에 열린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주의 주교들 권위적인 중세 로마교회의 패러다임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진보파 주교들은 중세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의 로마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는 결정이 적합했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 결과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답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1,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그 가운데 ‘로마카톨릭 교회의 신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생겼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로마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믿는 게 신앙이다.’라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리를 믿는게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당시 사람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서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교리를 믿는게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은 교회를 떠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고립되게 되었다. 이런 시대의 심각한 도전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는 배경이 된다. 제2차 바티칸 공회 직전은 세상과 교회가 싸우는 단계를 넘어 이혼 상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무관심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된다. 도대체 왜 모였냐는 주교들의 질문에 당사 교황은 좀 신선한 공기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 즉,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가톨릭교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칼 바르트 등과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과 만나고 러시아의 동방교회 풍요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 아죠르나멘토 Aggiornamento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한 마디로 하면 이태리 말로 쇄신 혹은 개혁을 의미하는 ‘아죠르나멘토’이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1962년 10월 11일에 개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신앙의 순종을 드려야 하는 분명하고 불 가변적 교리들은 우리시대가 요청하는 방법 안에서 연구되어야 하고 또 제시되어야 한다. 사실, 신앙의 유산, 즉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가르침 안에 포함된 진리들과, 그 진리들을 표현하는 방식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시대가 변화해도 변할 수 없는 신앙의 보물은 보존해야 하나 그 신앙을 표현하는 표현 방법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교리를 반복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교리의 내용을 전하되 그 방법은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보존과 쇄신’ 그리고 ‘구심력과 원심력’이 공존해야 한다는 의미한다. 교회의 권위만 주장하는 구심력만 있다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게토화 되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원심력만 지나치게 주장하면 세상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2012년 10월 12일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이런 연설을 했다.

나는 복자 요한 23세 교황께서 이 단어를 가지고 의미하고 하셨던 것이 정확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단지 ”과거의 것“으로,”뒤를“ 언제나 영원히 돌아보며 생활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 13,8). 그리스도교는 영원한 하느님의 현존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이 하느님은 시간으로 들어오셔서 매 순간 현존하시는데, 모든 시간은 그분의 창조적 능력으로부터, 그분의 영원한 ”오늘“로부터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항상 새롭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복음적 겨자씨로부터 충만하게 자라 그 열매를 맺고는 어느 날인가 늙어 그 생명의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는 그런 나무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영원한 새벽” 안에서 항상 새로운 나무입니다. 이 실재성, 이 “아죠르나멘토”는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는 것이 아니라, 그 전통의 지속적 생명력을 표현합니다. “아죠르나멘토”란, 신앙을 약화시켜 시대의 유행에 맞추면서 우리 마음에 드는 표현법으로 축소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반대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공의회 교부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는 “오늘” 을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기준 안으로, 우리시대의 “오늘”을 하느님의 “오늘” 안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아죠르나멘토 정신은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유행을 쫓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그리스도의 오늘 안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아죠르나멘토는 현대에 그리스도 신앙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진보파와 보수파의 비율이 8대 2였다. 진보파가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보수파의 주장은 중세 카톨릭교회의 전통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무엇이 정말 진보인가? 참된 진보는 사실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초대교회 전통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오늘날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이런 정신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다.

준비모임 작은 세미나를 마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무엇을 하고자 했나?

제 2차 공의회가 무엇을 하고자 했느냐? 그 키워드는 ‘대화’이다.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대화, 카톨릭교회와 비카톨릭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 더 나아가 세상과의 대화이다. 이런 대화를 중심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방대한 문헌들이 나온다.

1963년 9월 29일에 개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회기 개막 연설에서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목표는 분명해 보인다: 교회의 정의, 혹은 더 낫게 말해서, 교회의 의식, 교회의 개혁,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치를 이루는 것, 교회의 현대인들과의 대화입니다.”라고 말씀했다. 교황은 공의회가 가톨릭교회 자신, 가톨릭교회 신자들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구체적인 실재들, 곧, 모든 사람들, 문화와 예술,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 세상의 통치자들, 비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희망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표 4가지는 ▶교회는 무엇인가? ▶카톨릭 교회 개혁에 대해서, ▶교회의 일치 ▶현대인들과의 대화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공의회는 사목 헌장(목회 헌장)을 발표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된 사목 헌장의 주요 내용은 진리를 연역법적 방법이 아닌 귀납법적 방법으로 가르치자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연역적 방법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먼저 이야기 하고 다음 적용을 하는 방법입니다. 연역적 방법의 폐해는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가르치는 자가 고압적인 자세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나는 너보다 상위에 있는 사람이야 너는 내 말을 들어야 돼!’ 이런 태도를 교회가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떠나간다며 이런 태도를 버리라는 것이다.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목 헌장의 선언은 굉장히 길다. 위에서 언급한 귀납법적 접근을 따라 현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목 헌장 첫 번째 항은 현대인들의 기쁨과 희망 좌절과 고통 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은 일다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현대인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인간론을 이야기 할 때도 인간에 대한 일반적 보편적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현대인들의 고민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도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카톨릭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는 세상은 적이고 세상 사람들은 악마의 자식들이며,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이고 저들은 멸망 받을 자들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로마 카톨릭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세상을 향한 로마 카톨릭의 자세가 이전에는 단죄였다면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자비의 약”이 되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공동체로부터 잘라내는 방법을 우선시 했다면 그 후에는 단죄하기 이전에 이들의 상처를 보고 자비를 베풀어서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비의 약이라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성을 특징 짖는 키워드로 표현되었다.

사목 헌장 2장에 세상은 더 이상 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종교개혁 이후로 카톨릭 교회의 교회론이 바뀌었다. ‘사제가 교회’라는 중세 로마 카톨릭의 교회론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로 바뀌었다. 또한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교회의 사람들이다’ 로 뀌었다.

세상에 대한 관점도 바뀌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나 죄의 상태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해방시켰다. 세상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에 의해서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버린 것이 아니라 구속되고 앞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바꿨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도움을 이야기 했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상이 교회에 줄 수 있는 도움도 이야기 하게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세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현존하고 계시면서 이끌고 계시기에 가능하다.

그러면서 강사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하나님의 가슴에 귀를 시대의 맥박에 손을” 이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대고 들으면서 시대의 맥박에 손을 얹어 진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저의 사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정신을 카톨릭 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개신교회가 함께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로마 카톨릭도 구원은 100% 선물 임을 믿는다

최현숙 교수의 강의 후에 토론 시간이 이어졌다. 박광서 목사가 카톨릭 내에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냐고 질문했고 최 교수는 평신도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회를 연구한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라고 답했다.

또한 루터의 솔라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에 대해서 가톨릭교회도 성경을 제1원천이라고 가르칩니다. 다만 정경론의 입장에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성경이 형성되는 과정을 트레디션(Tradition)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문자 트레디션이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 된다는 이해입니다. 성경과 트레디션의 관계를 질적 보완성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도 구원은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인간이 노력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100%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을 잘못알고 있는 카톨릭 교인들을 깨우치는 것이 사명입니다. 공덕은 천당 가려고 쌓는 탑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에 대해서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교리를 믿는 신앙’,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께 투신하는 신앙’입니다. 나는 배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하나님의 교리를 믿는 신앙), 그 배가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 갈 줄로 알고(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래서 그 배에 올라탄다(하나님께 투신하는 신앙). 이것이 신앙입니다. 오직 신앙(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루터의 주장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트렌트 공의회의 가르침이며 카톨릭 교회의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가르침입니다."

세미나 후에 신대원 식당에서 컵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모든 순서를 마쳤다.

로마 카톨릭은 개신교를 어떻게 보고있나?

이성구 목사는 강의를 들며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갈등은 서로 너무 모르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냐고 질문했다. 최 교수는 "충만하다는 표현을 쓸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신앙공동체(개신교)를 구원의 도구로 삼는 것을 꺼려하지 않으신다. 가톨릭 교회 보다 충만하지 못하지만 개신교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현존하고 구원이 작동한다고 본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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