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편집인

세월을 오래 살다보면 후회되는 일들이 많아진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이다. 나의 한마디 말로 상대방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왜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들이다. 특히 제일 가까운 사람(남편 혹은 아내)에게 그랬던 일을 가장 많이 후회하면서 임종 때에 그것을 주로 사과한다는 것이다.

요즘 청문회를 보면서 부쩍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자신이 질문자로 있을 때 했던 말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거나 이런 날이 올 줄 모르고 말을 함부로 했다거나 속하지 않을 곳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거나 하는 일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왜 후회할 일들을 하면서 살았을까 하는 것이다.

몇 년 후, 아니면 10년 후쯤 중요한 자리에 오를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청문회장에서 의원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그런 당사자들은 얼마나 후회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것 같이 산다. 그리고 그런 일은 남의 일이지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가 죽는 것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인지한다면, 그래서 때가 되면 청문회장에 설 것을 안다면 정말 책잡힐 일이 없도록 조심하며 살았을 것이다. 결코 그런 철없는 언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문회보다 더 무서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더더욱 그리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내세를 믿지 않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는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청문회장에서 의원들은 요청한 자료를 받지 못했다고 질책한다. 그러나 당사자는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들은 제출하지 않을 구실을 찾는다. 서슬 퍼런 국회 청문회장도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같은 편은 그를 옹호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심판대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모두가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우리가 아무리 숨겨도 하나님의 컴퓨터에는 모든 것이 다 자료화 되어 있어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를 부추기던 마귀도 그때는 먼저 심판을 받고 사라진 뒤라 변명을 들을 수도 할 수도 없을뿐더러 원망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100세 시대라는 말로 사람들을 느슨하게 만들고, 나이 70세? 아직도 청춘이라고 속이고 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이던가? 잠깐 보이디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그 뿐인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하지 않았는가?

발가벗기는 청문회를 보면서 그보다 더 정밀하게 진행될 심판대를 생각하며 기회가 있을 때 과거를 지우며(회개하며) 지혜롭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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