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은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에서 최근에 여성안수를 총회에서 원칙적으로 전면적 허용하고, 개교회 차원에서 실천을 결의했다. 고신 교회는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박윤선 이후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신학적 표준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결정은 놀라운 것이다. 성장이란 프레임에 갇혀있으면서도 신학적 반성의 참조점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신학 풍토의 한 단면: 성경해석 발전의 수용

필자는 네덜란드에서 13년을 보냈다. 신학 공부도 하면서 네덜란드 신학적 풍토를 익히기도 했다.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소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 한 가지 놀랬던 점이 장로들이 목사들의 설교문을 대독하고,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이 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장로들이 축도를 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해석의 발전을 교회 질서 속에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필자가 신학 부전공으로 교회 성장학을 선택해서 공부를 하는 중에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장로들의 축도를 허용한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트림프 교수의 실천신학 책 중에 교회의 직분을 논하는 자리로 기억한다. 장로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의 허순길 목사를 언급했다. 허 목사님은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 유학하면서 “장로의 완전한 권리”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미국 남북 장로교회의 논쟁을 적으면서 하지와 쏜웰의 논쟁을 정리했고, 쏜웰의 입장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 내용이라고 했다. 쏜웰의 입장은 우리 헌법에도 언급되었듯이 장로와 목사직의 동등이었다.

트림프 교수는 자신의 책에 허 교수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며, 허 교수의 지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트림프 교수는 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십계명을 선포하는데, 이 선포가 바로 설교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교의 대독과 함께 설교자가 하는 축도의 권리가 장로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장로의 축도권이 한국교회 허순길 목사의 논문과 관련됨을 밝히면서, 바른 성경 해석의 결과를 교회 질서에서 수용하는 것이 말씀 앞에 서는 오직 성경의 태도라고 트림프 교수는 밝혔다. 트림프 교수는 이어서 장로의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두 가지 직을 설명하는 디모데전서5:17절을 기존과 달리 해석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해야 하는데, 그들은 특히 ‘말씀과 가르침’(‘복음과 교리’)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함으로 장로들과 목사의 동등권이 확보되었다. 이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논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결과들이 축적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장로의 축도권은 교회의 질서로 인정되었다.

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 로고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학적 난제 극복

이제 여성 안수 결정 과정으로 가보자. 역사적인 과정은 이미 코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밝혔다.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에서 분리가 된 교회와 합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 교회는 여성 집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합동을 위해서 신학적 연구의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남성/여성 직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미 3년 전에 보고서에서 여성 안수 허용이라는 입장을 내었지만, 저항이 거세서 결정을 미루었다. 3년 동안 위원회가 지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이번 결정에 이르렀다.

이번 결정의 기초가 되는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요약 판도 나와서 그 요약 판을 검토해 보았다. 거기서의 필자의 주된 관심은 ‘성경적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었다.

기본적으로 성경해석을 통해 직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직분을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그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함께 섬기기(Serving together)가 되었다. 이렇게 직분을 정의하면서 여성에 관련된 난해한 본문 해석을 쉽게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

여성 안수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중요한 본문들이 있다. 여자는 잠잠 하라는 고린도서의 말씀과 디모데전서의 창조의 순서에 따른 권면이다. 위원회는 창조의 질서가 지금도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스리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자가 잠잠 하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이고, 이는 남자나 여자가 상호 지배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아래는 보고서의 요약판중에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번역해서 전재한다.

화란자유개혁교회 총회 현장

성경적인 디딤돌들

우리 보고서의 제 2장에서, 여성들의 직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시한다. 여성들이 직분으로 섬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인 답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들의 사역을 조직하는 방식도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여성들이 봉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지침들을 발견한다. 여선지자로서, 사도로서, 집사로서 그리고 사사로서 역할을 한 여성들의 은사들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나,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들을 서로에게 주셨다. 그들은 함께 세상을 돌보고 발전시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렇게 공유된 책임성 안에서 먼저 이끄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담는 것이며, 온전한 순종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 위에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됨을 언급하는 본문들은 남자와 여자로서 각기 독특함을 가지고 상호 섬기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경은 두 가지의 입장을 보여준다. 자유롭게 말하는 여성들을 말함과 동시에 여성들이 침묵하여야 한다고 가리키는 본문들도 있다. 이 본문들은 남자나 여자가 서로를 지배함으로 각기 가진 공유된 책임을 왜곡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나 임무의 분리에 대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회중에 대한 지도력과 누가 인도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명백히 떠오르는 상이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의 역할은 일관되게 교회의 지도력에 있어서 중요하다. 교회 회중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직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인도 한다.

정리하면 직분의 개념을 다스림에서 섬김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통해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과 그 구성에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성경해석적인 난제를 극복하고 그 길을 열었다.

고신 교회의 과제

학문과 경건, 교회와 세상에 대한 균형을 가진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여성안수를 결정한 것은 결국 직분에 대한 전통적인 성경적 이해와 남녀 관계에 대한 전통적 성경적 이해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자체 내에서 반발과 앞으로 많은 논의가 생산될 것이다. 심하면 교회 분리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와 통합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이 깨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반복할 것이다.

한국의 고신 교회를 비롯해서 합동과 여러 장로교회들, 그리고 소위 몇몇 개혁교회들은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 저들이 가진 해석적 지평의 이동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개혁파 성경해석은 문자주의가 아니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적 정당성이 있는 성경 해석의 발전을 늘 수용해 왔기에 이번 결정에 대해서도 이런 성경해석학적 차원의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올해 총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겠지만, 내년 총회에서는 각 노회가 상정 안건으로 제시하게 되어 결국 다루게 될 것 같다. 이에 앞서 “함께 섬기기”란 보고서에 대한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먼저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의 현장에서 공부한 이들은 정확한 상황 설명과 분석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일은 신학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일이다. 교회의 일은 교회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질문이다. 한국교회가 과연 신학적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신학적 독립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가지는 필자의 큰 질문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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