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이후 중국선교 25년을 중심으로(1992년-2017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과 중국선교

(Invisible God's hand and China Mission)

-한중 수교 이후 중국선교 25년을 중심으로(1992년-2017년)-

김 영 산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며, 하나님이 주체이시며 교회와 그의 백성은 선교의 도구인 것이다. 특히 1992년 한중 수교가 재개되어지면서 지난 25년의 (1992-2017년) 한중 선교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의 관점에서 중국선교의 전략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재삼 생각해 보고자한다. 필자는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들이 사역하지만 궁극적으로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큰 손’이 선교의 방향과 전략 그리고 그 결과를 거두시는 분이심을 전제로 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과 중국선교’라는 주제로 지난 사반세기를 돌아보고 앞으로 달려갈 사반세기 선교를 그 분의 손을 바라보면서 해 나갈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그 분의 하시는 일은 지금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나 지나고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신의 한 수>인 것이다.

한중간의 중요 사건과 선교 전환점

 1992년

  1997년

  2002년

  2008년

  2012년 

   2016년

한중수교

한국의 IMF

사스(Sars)

북경 올림픽

시진핑 주석

사드(THAAD) 배치

 

1. 1992년 한중수교와 한중선교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북한을 지원했다. 한없이 밀려 내려오던 중공군. 이런 중국과 우리나라는 좋은 관계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1992년 한중 수교 이전에는 우리 국민들의 자유로운 중국 왕래가 어려웠다. 연변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통행은 여전히 어려웠다. 하나님의 크신 손에 의해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중국의 문은 조금씩 열려갔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국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숫자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미리 중국어를 배워두자는 것이었다. 이에 발맞춰 크리스천들의 중국 진출 또한 눈에 띄게 증가했다.

중국선교연구원 인보라 선교사는 “한국이 중국 선교를 하는데 있어 한중수교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며 “먼저 죽의 장막으로 알려진 중국선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헌신이 지금의 중국 교회를 있게 한 장본인”이라며 “그들이 중국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당시 한중선교를 왕쓰웨 목사는 다음 네 가지로 평가한다. 한국선교사들은 중국을 몰랐으며, 준비가 안되었고, 너무 성급한 면이 있었고, 중국 선교 전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초창기 한국선교사들은 동북삼성을 중심으로 조선족교회와 협력하는 선교를 활발히 하였던 것이다. 조선족과 조선족 교회를 일세기 전에 만주지역에 뿌리내리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손은 선교의 ‘신의 한 수’라고 불러야할 것이다. 조선족 선교를 통해 이루신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의 동반사역을 회고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전개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민감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가볍게 조선족 교회를 접근하기보다 앞으로도 한국교회와 동북삼성의 조선족교회는 통일선교 즉 북한선교의 동반자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2.1997년 IMF 와 한중선교 지각변동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승승장구하던 우리 나라 경제는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이 IMF 위기는 한국 경제의 국가적 위기 뿐 아니라 동시에 한국선교의 지원의 위기였다. 그리하여 궁핍해진 선교사 가정은 자연히 여러 가지 자구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선교전략의 변화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이다

첫째, 물량위주의 선교를 하던 선교사들은 더 이상 선교지에 머물지 못하고 , 언어와 문화 이해의 준비가 된 선교사들만 살아남게 된 것이다. 동북지역의 조선족 한 교회가 한국선교사 5명과 동역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양선교가 난발되었던 것이다.

둘째, 조선족 중심 선교에서 한족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개방과 한중 수교 이후 동북 삼성 중심의 편협된 자민족 중심의 선교가 주종족인 한족선교로 서서히 바뀐 것이다. 즉 중국 언어와 중국문화 이해의 단계를 넘은 선교사들은 조선족 중심에서 한족 중심의 선교로 눈을 열게 된 것이다. 선교는 정치와 경제와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그 정치와 경제의 지각변동 역시 하나님의 큰 손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었다.

셋째. 동북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만주지역 중심에서 북경과 상해등지의 거점 도시로 선교사 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야말로 금융위기를 통한 하나님의 구조 조정과 선교전약이었던 것이다.

 

3. 2003년의 <사스 SARS>와 중국선교

전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갔던 사스(SARS) 의 시작은 2003년 3월 중국 남방의 광동성에서 시작되었다. 한 주방장이 요리를 하는 중 사향 고양이 고기를 주 매개체로 하여, 고양이 몸에 잠복해 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주방장에게 옮아 사스(SARS)가 발생되었다. 사스 환자가 발생함으로써 치료하기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환자들의 ‘격리’였다. 그 당시는 사스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아 격리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2003년 사스 사태를 통한 하나님의 손과 중국 선교 변화는 무엇이었던가?

첫째, 북경중심의 대도시 중심의 선교에서 더 깊은 <내지 선교>에로 대거 탈바꿈되었다. 자녀교육과 문화 적응 등의 문제로 북경에 많은 교단과 선교단체 본부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사스 사태가 일어나면서 내지의 중소도시로 이동과 재배치가 일어난 것이다.

둘째, 중국인들과 잠자던 중국교회 성도들이 과학만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임하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되었다 . 그래서 가정교회는 물론 삼자교회 성도들도 역사의 주인이신 그 분의 손을 바라보며 크게 각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셋째, 중국의 문제는 곡 세계의 문제임으로 중국 주변 국가인 한국은 물론 급속도로 국경없이 퍼지는 유행성 질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동시에 그런 극한의 유행성 질병이 확산되는 때에도 한국선교사 대부분은 철수하지 않고 현장의 선도들과 제자들과 함께 함으로 신뢰와 ‘라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후 2007년 로버트 모리슨의 1807년 중국선교 깃점으로 서구교회의 중국선교 200주년을 맞이하였다. 그것을 기념으로 200년 뒤 2007년 한국의 중국선교단체들이 중심이 돼 시작된 ‘선교중국(Mission China)’운동은 직간접적으로 중국교회에 재도전을 준 것이다.

 

4.2008년 북경 올림픽과 선교중국 전환점

한국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한지 20년이 지난 후 북경에서 올림픽이 거행되었다. 그래서 2008년의 중국은 북경 올림픽에 국운을 걸다시피 한 중국이었지만 체제보호에는 조금의 소홀도 허용할 수 없기에 올림픽을 앞두고 지나칠 정도의 경계로 외국인에 대한 단속을 일찍이 시작하였다. 중국 내 장기 외국인 체류자들은 그들의 비자상황을 점검하고는 일말의 의구심만 있어도 비자연장을 해주지 않고, 또한 방문비자는 말할 것도 없고 단순여행객에 대해서도 중국입국전의 비자발급에 있어서 숙박권과 항공권을 첨부해야만 했다. 어쨌든 올림픽을 전후하여 중국선교의 환경변화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자면 중국인들의 세계화이다. 그들이 세계를 보는 안목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고, 세계교회는 중구교회와 네트웤을 이루었으며, 동시에 중국교회도 이에 따른 글로발 선교의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북경올림픽과 한중선교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첫째. 북경올림픽을 전후하여 중국정부는 중국의 기독교에 대한 정화작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중국선교를 감당하는 선교계의 입장에서는 복음전파에 대한 제약과 핍박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선교 수혜국인 중국에서는 체제안정을 위한 적극적 대처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중국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세계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여기서 국제화라는 것은 세계교회화의 실질적인 네트웍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삼자교회는 애덕 기금회와 같은 기구를 통하여 세계교회와 호흡하고 wcc와도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2008년 북경 올림픽을 기하여 일반 성도들 까지도 세계교회 속에서 중국교회를 인식하게된 것이다. 사도행전의 신앙고백 처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 교회>의 한 몸이 된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선교의 동반자로( Partnership of mission) 상호 네트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삼자교회 리더십은 물론 중국의 신학교와 전국에 가정교회 조직들과 세계 교회 리더십들 간의 교제와 넼?츪p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북경올림픽은 중국선교( China Mission)에서 머물지않고 이제는 선교 중국( Mission China)으로 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5. 2012년 중국 굴기(屈起)의 시진핑 주석과 교회의 중국화 

주후 2012년 11월 27일 중국 삼자신학을 발전시킨 핵심 요원 정광훈(딩광쉰) 주교가 소천하였다. 그의 신학은 사회주의 신학이요, 정치신학이요, 오요종에게 영향을 받은 유애주의신학이었다. 그는 죽었지만 중국 삼자교회와 삼자신학교는 그의 사상과 노선을 강조하고 이제는 기독교의 중국화를 강조하고 있다.

2016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전국 종교국장 회의에서는 새로운 종교조례를 시행하고 종교 업무의 법치화를 강화키로 의결했다. 조례 개정안은 2016년 9월 공포됐다. 중국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명확하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종교이론을 견지, 발전시키고 당의 종교공작 기본방침을 전면적으로 관철시켜 종교공작의 수준을 제고해야 한다.” “당의 종교 신앙 자유정책을 관철시키되 종교사무는 법에 의거해 처리하고 독립자주원칙을 고수하고 종교가 사회주의사회에 상호 적응되도록 해야 한다.” “모든 종교는 ‘당의 영도’을 따라야 한다. 종교는 행정, 사법, 교육 등 국가의 각종 직능에 간섭할 수 없고 정부는 국가이익과 공공이익에 관련된 종교 문제를 법에 따라 관리할 수 있다.” “공산당원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자로서 당장(党章)규정을 준수하고 절대로 종교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찾아서는 안 된다.” “외부세력이 종교를 이용해 (중국에) 침투하는 것을 단호히 막아내고 종교 극단주의 사상에 의한 침해를 방지해야 한다.” “인터넷에서 당의 종교정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새로운 종교 조례는 종교를 이용한 국가안전 위협세력 원천봉쇄, 종교학교에 대한 관리 강화, 종교를 이용한 비즈니스 문제 척결 등이 개정안의 주 내용이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의 중국화를 골자로 <5진5화> 종교 정책임으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도 새로운 선교환경에 걸맞는 선교사역과 장기적인 선교전략이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6.2016년 사드( THAAD) 문제와 한중선교

중국 길림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한국 선교사 수십 명이 2016년 불법 사역 혐의로 전원 출국 명령을 받으면서 중국 선교에 적신호가 켜졌다. 추방이 대규모로 급박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로 인한 보복 조치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선교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번 조치에 중국 정부의 강화된 종교정책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이로 인해 중국선교의 위축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선교단체들은 사역을 다각화하고 파송교회는 추방 선교사에 대한 위로와 돌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함태경 CGNTV 경영본부장은일 서울 서초구 남서울교회 비전센터에서 열린 위기관리포럼에서 “최근 중국의 한국선교사 추방 조치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며 “이는 새로운 일은 아니며 종교를 지배하려는 중국 정부의 로드맵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화문화가 외래문화를 동화시킬 수는 있지만 외래문화가 중화문화를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국의 기본 입장”이라며 “이 같은 관점이 중국의 종교 정책 기저에 흐르고 있으며 이는 2005년 3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종교 사무조례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필자가 KWMA 선교전략회의에서 중국교회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신학적 지원이라고 말한바 있다. 중국 선교역사에 있어서 형제교회 전통이 뿌리내림으로 신학적 토양이 약하여 이단과 사이비운동 그리고 신사운동과 함께 위험한 성령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거기에 신중국 건설과 함께 꾸준히 진행되어온 삼자애국신학에 기초한 기독교의 중국화는 선교신학적 커다란 Dragon의 도전인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 옛뱀 곧 마귀라고도하는 사탄이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협하고, 핍박하고, 때로는 회유하며 잡아먹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깨어 기도하며 연구하며 연합하여 세계 선교와 중국선교를 감당해 가야한다.

 

나가는 말

중국선교 역사를 보면 다른 나라 선교역사에서 보듯이, 세속사와 선교사가 함께 진행됨을 보여준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나라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변동과 함께 진행됨을 보게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역사 이면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잊어버리기 쉽다. 양국간의 수교가 이루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며, 금융위기가 온 것도 그러하다. 동시에 북경 올림픽을 통하여 세계교회 지체로서 중국교회의 네트웤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샤드 사태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필자는 이 논고를 통하여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큰 손을 다시 바라보며 세계선교에 매진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성경적 선교는 선교현장에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 어느 한 사상의 시녀(侍女)나 어용적(御用的)으로 국가화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 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현지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벗어날 경우, 그 나라의 바른 신학의 정립을 위하여, 믿음의 도를 위해 힘지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의 중국화는 한중 선교의 큰 과제를 던져 준 것이며 다른 한면으로는 Spititual warfare가 시작된 것임을 알아야한다.

한중 선교는 지정학적으로 이웃 나라이면서 동시에 선교 역사적으로 중국을 통하여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통로였기에 함께 가야 할 동반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변화가 선교 환경에 적지 않는 영향을 준다. 그러나 선교역사를 회고해 볼 때 지난 4반세기 25년은 한국선교사들이 공헌도 많이 했지만 부족한 면도 많았다 . 하지만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선교의 영이신 성령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메꾸어 가시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가심을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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