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찬경 목사(하늘샘교회 담임)

음악의 사용을 극대화하여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이 자극에 마음이 고양될 때 은혜 받았다.라고 합니다. ‘은혜 받았다.’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 음악적으로 고양되고 내가 가진 감정을 많이 표출 하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칼빈은, 음악자체가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 중개하지 못한다고 했고, 어거스틴은 예배에 음악이 감동적이지만, 그 노래가, 그 음악이 진리보다 더 감동적인 것을 염려했습니다.

칼빈은 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사용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습니다. 제네바 시편찬송(1543년) 서문에서 그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그에게 기쁨을 주는 데 적절한 다른 것들 사이에서도 음악은 첫째이거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음악은 하나님께서 그 사용을 위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필수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음악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면서도 타락할까 염려하는 우려의 마음을 함께 가졌습니다. 칼빈의 염려는 역사 가운데 현실로 드러났다. 음악사용이 신학적 이해 안에서 이루어졌던 16세기와 달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용도가 아닌 자기감정을 표현하고 즐기는 수단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도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링거는 찬송소리(Stimme)와 성령의 감화에 대한 관계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소리를 담고 있는 찬송이 인간의 마음을 격려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이런 찬송소리와 같은 외적인 요소들이 성령의 역사 없이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고 밝힙니다.

불링거는 찬송소리가 인간의 고무시키는 것 자체를 성령의 감화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의 내용(가사)이 아닌 소리의 달콤함을 통해서 감동을 받는 것을 죄로 여긴 어거스틴의 고백을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불링거는 찬송이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의 보편적인 구속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시편송이 찬송되었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시편 송을 부르든지 혹은 부르지 않든지 간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결국 불링거는 복음을 믿는 신자들은 선한 동기로 성경의 지지가 없는 찬송가를 부르거나 그 찬송가를 교회 안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바른 찬송가가 교회 안에서 불러지는 일은 교회의 매우 중요한 신앙요소임을 각성시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가사의 내용보다 곡조에 더욱 끌려갔다면 벌 받을 죄를 지은 것으로 고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이런 내용의 참회의 기도를 한 사람이 있는가? 신자는 찬양을 자기 흥에 겨워 부르거나 예술적 감흥에 겨워 불러 제치듯이 불러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통제를 받지 않은 자기 열정과 자기 과시의 방편으로 음악을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듯이 찬송 또한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불러야 한다.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을 따라 불러야 하며, 혀로만이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예배가 예배다워지게 됩니다. 필자가 시무하는 하늘샘교회에서는 찬송가와 함께 스코틀랜드 시편 찬송가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요즈음 많은 교회의 찬송시간에 악기소리가 크고 성도들의 목소리는 작습니다. 그러나 시편찬송을 할 때 악기소리는 작고 우리 목소리가 커집니다. 시편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거룩한 정서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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