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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험한 세월 복음병원 略史
지난 17일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복음병원 이대로 좋은가?: 역사 및 현실 그리고 전망"이라는 주제로 열린 미래교회포럼 제4차 준비모임에서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가 "66년 험한 세월의 복음병원 略史"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아래 글은 『고신의료원 50년사』, 이재술 장로의 메모자료 “고신초창기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A4 용지 15 페이지), 허순길의『한국장로교회사』, 그리고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약간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1. 복음병원의 태동, 복음진료소 시작

복음병원의 태동은 경남구제위원회에서 비롯되었다. 미국 웨스턴신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전영창 씨가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게 된다. 그는 귀국하면서 5,000불을 모금하여 이를 전쟁의 참화로 죽어가는 난민들을 도우는 사업에 사용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한상동, 이약신, 박손혁, 오종덕, 안용준 등과 함께 경남구제위원회(대표 전영창)를 조직하여 경남노회의 승인을 받았다. 경남구제위원회는 유엔 산하 의료기관으로부터 약품과 의료진의 지원을 받아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임시진료소인 복음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 때가 1951년 6월 21일이었다.

그리고 한상동, 전영창은 육군제3병원에서 진료하고 있던 장기려 박사를 만나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장 박사도 이런 구호병원을 세우는 일에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장 박사는 7월 2일부터 진료소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고, 장소가 좁아서 그해 12월 20일에 영도 영선2동 180번지에다 세 개의 천막을 치고 이전하였다. 동시에 복음의원으로 개설허가를 받았고 서울대 의대 교수인 전종휘 박사도 합류하였다1).

※복음병원 설립 목적을 전영창 대표는 다음 4가지를 제시하였다고 전해진다.

1. 복음 전하는 병원(동포에게) 2. 무료 구호 진료하는 병원(극빈자에게)

3. 정직, 정확한 진료로 신용 얻는 병원(외국인에게)

4. 병 치료법을 가르치는 병원(영육 간에)

1951년 6월 21일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임시진료소인 복음진료소가 개설되었다.

 

2. 복음의원 고신 총노회로 이관

1954월 4월에는 고려신학교와 복음병원의 부지로 부산 서구 암남동 34번지 1만3천 평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이 땅을 매입하는 데는 박봉화, 주태화, 주영문 장로 등 몇몇 분들의 헌신이 있었고 말스베리 선교사가 소속한 선교회로부터 큰 지원을 받았다.2) 그리고 경남구제위원회는 1956년 4월 제4회 총노회에서 관하에 있던 복음의원을 총노회로 이관하였다. 총노회는 복음의원 운영을 위한 이사 9명(초대 이사장 박손혁)을 파송함으로써 복음의원이 총노회에 속한 기관이 되었다.3)

그러나 총회 직영기관이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비록 이사회가 있었으나 총회가 복음병원을 직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1964년 제14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결정할 때 복음병원도 법적으로는 총회직영이 되었다. 이때 병원 측의 요구로 단서를 붙였는데 그것은 “병원의 설립정신을 승계하며 운영한다는 조건”이었다.4) 그러나 이후부터 고신총회와 복음병원은 이 문제로 서로 간에 갈등과 긴장이 계속되었다.

 

3. 복음의원 송도 이전과 복음병원 개설

병원 부지를 구입한지 2년(1957. 5. 28)만에 240평(사무실, 입원실, 기숙사 등) 건물을 미8군사령부의 건축자재 원조로 신축하고 복음의원은 송도로 이전하였다. 당시 직원은 27명이었고 연간 외래환자는 3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송도로 이전한지 4년만인 1961년 8월 7일에 비영리의료기관 복음병원으로 개설허가를 받았다. 병원으로 새 출발한 것이다. 이어 1968년 4월에는 복음간호학교의 인가를 받아 간호 교육을 겸하게 되었다.

 

4. 고려신학대학 설립인가와 대학의 수익기관이 된 복음병원

복음병원은 처음에는 무료 병원으로 운영하다가 송도로 이전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진료비 부담이 가능한 환자에게는 정당한 수가를 받고 가난한 환자들은 무료로 진료하는 식의 투 트랙으로 운영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무료진료는 폐지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총회와 병원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6년에 고려신학대학의 설립인가를 받기 위해 복음병원을 학교법인 이사회의 수익기관으로 편입하려 할 때였다. 이때 병원에서는 강한 반대 움직임이 있었다. 이재술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부터 복음병원과 총회는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이유를 “병원설립의 고유목적과 총회의 병원경영방침의 불합(不合)문제이다.”고 했다.

이후 1970년 12월 31일에는 고려신학교 대학부가 고려신학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게 됨과 동시에 복음병원은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수익기관으로 편입되었다. 이것은 고신역사에서 매우 큰 변화였다. 총회는 병원 재산을 학교법인(당시는 유지재단이 학교법인을 겸하였다)에 편입시켰고, 병원을 통해 신학대학원과 대학 운영에 재정적인 도움을 얻고자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전과 같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려 했고, 또 비영리기관으로서 빈민구호와 의료교육에 집중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복음병원에서는 의료진의 반발이 있었고 상당한 소요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15회 총회가 수습위원회를 조직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수습위원들은 양자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총회에서는 복음병원주일을 제정하는 등의 노력을 했고, 대학인가를 추진했던 사조직(私組織)이사들의5) 사과를 받고 이들을 총사퇴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사조이사회가 생긴 이유는 당시 법인 이사장인 송상석 목사가 대학인가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이런저런 일로 총회가 권위를 잃게 되었고 그동안 덩치가 커진 복음병원은 총회의 의도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복음병원이 비록 학교법인의 수익기관이 되었어도 상당기간 동안은 장기려 원장과 학교법인 이사회의 긴장 관계는 계속 도이었는데, 이재술의 증언에 의하면 장기려 원장은 이사회와 마찰하면서도 거의 독립적으로 병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5. 종합병원으로 인가

1971년 화란 정부의 원조 및 화란개혁교회의 후원으로 고려신학교 본관을 건축하였고, 동시에 복음간호학교 신축과 병동 증축공사로 1064평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1973년 3월에는 종합병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6. 이사회의 장기려 원장의 교체준비와 의료진의 탈 교단 운동

이미 언급한 대로 장기려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복음병원과 고신총회는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첫째 이유는 설립목적을 지키려는 원장과 총회의 운영방침이 맞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교단이 장 원장을 퇴임시키려 한데는 더 큰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노선의 문제였다. 장원장이 출석하는 교회가 고신측이 아닌데다 그가 무교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오직 고신”을 추구했던 당시 고신총회로서는 그를 용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고신의료원 50년사』는 이 문제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학교법인 이사장인 송상석 목사는 복음병원 원장인 장 박사에 대해 달갑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유는 장 박사는 퀘이커교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과 함석헌 선생을 좋아하는 무교회주의자였음으로 개혁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교단 병원의 책임자로서는 부적당하다는 것과 교단수익기관인 병원경영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6)

그러다가 재단이사회는 장원장의 정년(1974년 7월)에 대비하여 고신출신(제일영도교회)의 박영훈 박사를 외과과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복음병원은 유래 없는 큰 진통을 겪어야 했다. 먼저 10여명의 의사들은(주로 부신의대 출신) 이사회가 박과장을 임명한 것은 앞으로 장원장의 후임으로 세우기 위한 포석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격렬하고도 폭력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데모는 단순히 장 원장을 지키려는 목적으로만 일으킨 운동은 아니었다. 그들은 장 원장을 앞세워 고신총회와의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으로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박영훈 과장을 장 박사를 퇴출시키려는 고신총회의 앞잡이로 생각하고 박 과장을 병원에서 몰아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박 과장의 출근을 저지하고, 폭행을 가하며, 진료카드를 찢는 등의 행위로 진료를 방해하였다. 이 사태로 2명의 의사들이 구속되고 7명의 의사는 입건되었다. 그리고 박 과장은 다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7. 박영훈의 원장 취임(1976. 6.)

그 이후 복음병원은 부산 시민들의 평판이 나빠져서 환자들이 격감하고 극심한 재정적 압박으로 경영위기에 내몰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단 이사회(이사장 이경석 목사)는 박영훈 씨를 진료부장으로 영입하고(1976년 1월) 같은 해 6월 25일에 제2대 원장으로 취임케 하였다. 장 박사는 명예원장으로 추대했다.

 

8. 의과대학 설립

박영훈 씨의 원장 취임이후 그를 중심으로 의과대학을 설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사회(이사장 한명동) 역시 신학교(지금의 신대원)와 대학을 분리키로 하여 신학대학을 일반 대학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명칭도 고려신학대학을 고신대학으로 변경키로 하여 제28회 총회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 절대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었다.7) 다음해 총회(제29회)에는 이와 비슷한 안건으로 의예과 인가추진안이 상정되었는데, 총회는 의예과 인가를 추진하되 고려신학대학을 개편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인가추진과정에서 당국자들은 임의로 고려신학대학을 고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의예과 설치인가를 받으려면 먼저 일반 대학으로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정부방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명 변경은 단순히 학교 이름을 바꾸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신학대학을 일반대학으로 변경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도 대학인가를 받으려 할 때처럼 총회의 지도를 무시하고 대학과 병원의 당국자들에 의해 암암리에 단행되었다. 그리고 총회의 결의를 무시한 중요한 범법행위를 책임자가 사과하는 것으로 그냥 지나갔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런 불법을 행했던 사람들이 교단의 실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기어이 의예과를 설치했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의예과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데모와 분규로 교단과 병원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일은 사조이사회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건이었다. 고려신학교 예과(대학부)를 대학으로 인가 받으려할 때 유지재단 이사장인 송상석 목사가 대학인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적극적인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학인가를 추진하던 사람들은 이를 참지 못하고 총회가 파송한 법인 이사회와는 관계없는 사적인 이사회를 조직하여 대학설립인가를 추진했다. 그리고 결국 대학설립인가까지 받아내는 공적(?)을 남겼다.

이 일을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얼마나 완벽하게 비밀을 지켰든지 당시 법인 이사들은 대학설립인가(처음엔 학력인가였고 일 년 후에 설립인가가 났다)가 났다는 소식이 일간 신문들에 보도될 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다. 신학대학을 일반 대학으로, 이어 종합대학교로의 변경도 모두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으니 고신의 역사는 그 고비마다 공의를 외면한 불법이 자행되었다. 이런 일들은 파벌 갈등이 그 근저에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8) ,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파벌주의로 인한 갈등은 치유할 수 없는 지경까지 깊어졌다. 이후에도 복음병원에서 대형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지도자들의 파벌싸움이 사태를 악화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런 악풍은 현재까지도 그 찌꺼기가 남아있다.

 

9.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1980년 10월에 신학대학에서 일반 대학으로 변신한 고신대는 그 정체성을 정립하기도 전에 또 엄청난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것은 1982년 3월 18일에 일어났던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이다. 여기에는 고신대 학생 5명이 연루되었는데 그 중의 세 명은 의예과 학생들이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고신교회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야말로 날벼락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충격 속에서도 개혁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수습하는 일에만 몰두했을 뿐이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도 이제는 역사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가고 있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신봉한다고 내세우면서도 말과 행위가 달랐던 고신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경고였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0. 노동조합 설립

1980년대에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노동계에 노동조합결성 붐을 일으켰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1987년에 복음병원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조가 병원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일들도 많았지만 원만한 노사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재정적으로 큰 손실을 입는 등의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재단인 고신총회와의 갈등으로 일어난 분규들은 심각한 재정적인 손실로 이어져 병원이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9)

그리고 1999년 제49회 총회에서는 의료원제도를 폐지하고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으로 개편하려 했는데 이 문제로 병원 측 곧 노동조합과 총회 사이에 극심한 갈등이 있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노조원들이 총회장을 점거하는 등의 실력행사로 총회가 정회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1. 고신대 의예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극심한 소요들

80년대 초는 학생들의 대정부 데모와 함께 학내 문제로 인한 소요는 일종의 시대적 분위기였다. 고신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대학들보다 훨씬 더 심하였다. 의예과 신설 이후부터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병원이나 총회 지도자들은 이런 사태를 수습할만한 지도력이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소요는 점점 더 심해졌고, 고신교회 안에는 의예과 폐지를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아예 고신대를 다른 재단에 넘기자는 주장까지 나왔었다.

그러던 중 1988년에 들어서면서 의예과 학생들은 병동과 주차장 건축을 둘러싼 비리 공개 등 17가지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농성을 벌렸는데 학장실과 재단사무실을 점거하고 집기를 파손하는 등 폭력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심지어 병원 경내에서 노제(路祭)를 지내기도 하여 고신교회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재단이사회가 병원 지도부와 담합하여 의료기자재 구입과 신학대학원 이전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고 12명의 학생을 보결 입학시키는 부정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박 원장이 구속되고 이사장이 입건되는 등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일은 학내 분규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들과 노동조합의 시위가 점점 심해지다가 1991년에는 학생들의 수업거부, 수련의들의 집단행동, 의사들의 휴진이라는 최악의 상태가 초래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고신의료원이 존폐위기를 느낄 만큼 어려움을 겪었다. 『고신의료원 50년사』는 “당시 학생들은 이사회나 학교의 비리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것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코람 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으로 살고 교육한다는 이사회와 학교가 학생들로부터 비리의혹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10)

 

12. 김해복음병원 인수

정부(보건복지부)가 무의(無醫)지역에 병원을 설립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김해병원을 설립했으나 개원도 못하고 빚만 지고 있었는데 정부 당국은 이 병원을 고신의료원이 인수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당시 복음병원이 이를 인수할만한 형편이 안돼서 의예과 기성회 간부들(박영훈, 박노정, 윤은조 등)이 인수하였다. 이름은 김해복음병원으로 개칭하였다. 이때가 1982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복음병원 의료원장인 박영훈이 김복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당시 총회는 김복원 문제에 대해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취했다. 1983년 총회직전에 열린 고려학원 이사회는 김복원을 교단이 인수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이를 총회에 보고하였는데, 그 다음 해(1984년)에는 인수하기로 번복 결의하였다. 아마 이금조 목사가 학교법인 이사장이 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목사는 그 다음해에 김복원의 이사장을 겸하게 된다. 그리고 김복원의 원장과 의사, 간호사들을 복음병원에서 파견하는 형식을 취하여 급여를 본원이 부담했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며 인수한 김복원은 해마다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인수당시 6억 원이었던 부채가 2년 만에 16억으로 불어났고 11년 후에는 92억 원으로, 1999년에는 180억 원으로 불어났다. 이 중에서 100억 원은 부외부채 곧 사채였다. 처음부터 김복원의 인수와 운영에서 불투명한 일들이 많았다.

 

13. 김해복음병원 처리에 관한 논의

1993년 제43회 총회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김복원 운영의 난맥상을 보며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일차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음해 총회는 위원회의 존속을 결의하고 처리하는 일을 계속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위원장은 김인규 목사에서 곽삼찬 목사로 바뀌었다. 그런데 곽 목사는 매각처리하기보다 전문경영인(박노정 장로)을 세워 경영을 쇄신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변경하고 이를 총회에 보고하였다. 그 후 부채증가가 잠시 주춤했으나 곧 다시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제3차 처리논의는 교단미래정책연구위원회(위원장 정주채)에서부터 다시 시동이 걸렸다. 미정연은 복음병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단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 미정연은 1998년 9월초에 복음병원의 미래에 대한 공청회 형식의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경영진단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제48회 총회는 미정연의 건의를 받아드려 두 병원을 전문경영진단법인체에 맡겨 진단을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전문 업체에 맡기면 불법이나 비리 등이 드러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총회임원회가 총회결의를 무시하고 월권으로 교단 내 인사들로 진단 팀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런 결정들 뒤에는 항상 커튼 뒤에서 조종하는 빅 브라더가 있었다. 그는 대의를 생각지 않고 주로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는 의도로 관계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총회의 결의를 뒤집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막후조종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고신교단이 파국에 직면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하였다.

1999년 제49회 총회는 경영진단 팀의 진단결과를 따라 “김해복음병원은 조속히 매각처리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사회는 이를 이행치 않았다. 제50회 총회는 이사장의 사과를 받고 지난 총회의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이사회는 또다시 이를 분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총회에서 사과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도리어 두 병원을 합병하기로 결정하는 불법처사를 감행하였다. 역시 빅 브라더의 작품이었다.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이런 행태는 고신의 전통처럼 이어져왔는데, 역시 김복원 처리에서도 동일한 행태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들은 고신의 영적, 도덕적 실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14. 복음병원바로세우기운동본부 결성

1998,9년을 거치면서 총회임원회와 이사회가 저지른 불법처사들에 격분한 4-50대의 중진 목사 장로들이 들고 일어났다. 안용운 이성구 정주채 목사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복음병원바로세우기운동본부는 전국교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호응을 얻었다. 이 운동에 가입한 목사 장로가 250명을 넘었고 재정후원도 많았다. 그러나 이 운동도 결국 교권을 쥐고 있던 교단 지도그룹들의 불법처사를 막지 못했다. 복음병원 문제는 갈 데까지 가버렸다. 그나마 하나의 열매를 찾는다면 힘이 집중돼 있었던 고신의료원 제도를 폐지하고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으로 정상화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5.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임원승인 취소 및 관선이사 파견

교단총회가 이런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교육인적자원부는 학교법인 고려학원 산하에 있는 고신대와 복음병원에 특별감사를 실시하였다. 감사결과는 역시 불법적인 처사들에 대한 지적이 있었고 이것들을 속히 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불의한 역사 가운데서 쌓여온 적폐들을 청산하고 난마처럼 얽힌 문제들을 올바르게 시정한다는 불가능했다. 거기다 감사지적사항을 보완한다면서 변칙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고 이를 교육부에 보고함으로써 정부당국을 속이는 일까지 저지르게 된다.11)

따라서 정부 당국은 이런 거짓된 보고에 분노하였고, 당시 이사들로서는 법인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능력도 진실성도 없다고 판단하여 그들의 임원승인을 취소하고 임시이사들을 파견하였다.

 

16. 복음병원 부도와 김민남 임시이사장의 삼자인수 추진

임시이사들이 파견된 지 한 달 만에 복음병원은 부도가 났다. 관선이사가 파견된 것은 2003년 4월 1일이었고 부도가 난 것은 5월 9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교단 지도부에서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부도를 황창기 총장과 김민남 이사장이 협조하지 않아 막지 못했다며 그들을 비난하였다. 황 총장은 상당한 액수의 교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사용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았고, 김 이사장도 병원이 상당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의 지출을 막았기 때문에 부도가 났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김 이사장이 병원을 삼자에게 인수를 시킬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부도를 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2) 후에 황 총장은 교단 지도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소속한 부산노회로부터 목사정직이라는 치리를 받았고 이로 인해 총장직에서도 물러나야 하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불의한 교권이 판을 치던 때였다.

그런데 병원 매각에 대한 당시 김민남 이사장뿐 아니라 교단 내 일각에서도 병원과 함께 고신대학교를 팔자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당시 교단행정의 책임자가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를 만나 의사를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었고, 부산 소재 모 대학교도 인수의사를 가지고 접촉을 했던 것으로 소문이 났었다. 의학부 교수협의회에서도 이참에 교단과 관계를 끊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7. 고려학원 정상화를 위한 노력과 정이사체제로의 환원

관선이사 파견 이후 교단은 고려학원 정상화를 위해 200억 원이라는 엄청난 재정을 쏟아 부었다. 인천 부평의 부지를 매각한 금액과 교회들의 헌금, 그리고 은행융자(후에 총회 상회비 중 대학과 신대원 지원금 돌려 이를 변제하였다) 등으로 학교법인 고려학원 정상화를 위한 노력에 총력을 기우렸다. 200억 원이라는 금액은 고신의 입장에서는 거의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그리하여 2007년 4월 17일부로 정이사체제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막대한 헌금이 적극적인 미션에 쓰이지 못하고 실패한 병원운영을 수습하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8. 의사들의 리베이트 수수사건

근년에는 복음병원 의사들과 직원들의 도덕적 타락이 드러나 다시 한 번 고신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었다. 2016년 7월 복음병원 의사들이 불법적인 리베이트 수수혐의로 줄줄이 소환되다가 8월3일에는 검참이 44명의 인력을 투입하여 복음병원을 압수수색을 하는 일까지 당했다. 검찰은 주로 부산지역의 대학병원 의사들을 조사하여 그 중 28명을 입건하였고 이들 중에서 12명을 기소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소를 당한 12명 의사들 중 7명이 복음병원 의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7명 중 1명은 2억4천만 원의 리베이트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 구속되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제약회사의 직원들을 개인비서처럼 다루며 갑질을 했다는 언론보도까지 있었다. 고신교회가 직영하는 병원 의사들의 도덕 수준이 이랬다.

이 사건에 대해 고려학원 이사회의 징계위원회는 리베이트 수수관련 의사들을 중징계(의사 4명 파면, 1명 해임, 1명 정직 처분)를 단행하였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해이는 이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복음병원은 자체 감사에서 진료비를 횡령한 직원을 적발하였는데 그가 횡령한 금액이 8천만 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병원을 둘러싼 비리 소문들은 자주 연기처럼 피어오르곤 했다.

 

[평가]

1. 복음병원의 역사, 넓게는 고신의 역사에서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런 설립이념이나 순교신앙계승 등의 캐치프레이즈는 말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신앙과 정신을 부르짖었던 지도자들이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 잘못들을 저질렀고, 소위 “고신정신”과 “코람 데오 의식”은 첫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버렸다.

실례로 사조이사회를 구성하여 고려신학교 대학부의 대학인가를 받았던 일, 총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신학대학을 일반대학으로 변경해버린 일, 학교와 병원의 재원마련을 위해 12명의 학생들을 부정입학(보결입학)시킨 일, 총회가 김해복음병원을 매각하기로 결의하고 다음 총회에서 이를 재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정반대로 김복원을 복음병원에 통합시키기로 한 일 등등. 이런 일련의 불의한 일들이 고신의 최고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아는 제2세대 고신인들을 매우 황당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불의한 처사들은 고신이 신봉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교단의 설립이념을 직접 부정하고 파괴하는 행위였다.

 

2. 복음병원의 설립이념은 그야말로 “구제”였다. 전영창 선생은 전쟁의 참화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유학도 포기하고 5천불을 모금하여 귀국했다. 그리고 경남구제위원회를 설립하고 의료봉사를 위해 무료진료소를 개설하였다. 장기려 박사는 한상동 목사 전영창 선생의 제의를 받고 자신의 입신이나 영달을 모두 내려놓고 가난한 진료소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그는 원장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복음병원을 구제병원으로 운영해보려고 혼신을 다하여 희생하며 노력했다. 그러나 오히려 고신교회 지도자들은 복음병원을 일반 병원들처럼 경영하여 크게 발전?)시키길 원했고 나아가서 병원을 통해 얻는 수익으로 신학교와 대학교가 재정적인 지원을 발을 수 있기를 원했다.

이런 의도들이 암암리에 서로 부딪히며 병원을 운영하다보니 일반 병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했고, 나아가 세상의 빛이 되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짓밟는 일들도 많았다. 그리고 순교와 희생과 공의를 지키려 했던 고신정신은 순식간에 성장주의와 성공주의에 함몰되고 말았다. 이 가슴 아픈 사실 역시 고신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3. 고신교회가 복음병원을 직영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긍휼사역인가? 복음전도를 위한 것인가? 병원을 운영하는 자체가 사회봉사이기 때문인가? 아니라면 대학운영에 도움이 될 만큼의 수익이 있는가?

복음병원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긍휼사역은 극히 제한적어서 존재이유를 논할 만한 의미 있는 사역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 정도는 어느 병원에서나 하고 있다. 복음전도는 더욱 그러하다. 복음병원이라는 브랜드가 과연 전도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물론 가끔 믿음이 좋고 열심 있는 의료진들을 통하여 복음전도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의대생들의 의료봉사나 의료선교를 통해 복음전도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과연 복음병원의 존재이유가 될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병원의 존재와 운영 자체가 사회봉사가 될 수도 있으나 의료시설이 넘쳐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것도 거의 의미가 없다. 그러면 수익기관으로서 존재의미는 있는가? 물론 복음병원에는 천오육백이 넘는 종사자들이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이 병원의 존재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익이 복음병원의 담을 넘을 만큼 되지 않는다면 역시 수익기관이라는 면에서도 그 존재이유가 아주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대략이나마 복음병원의 역사를 살펴 본 필자의 결론은 고신교회가 이런 병원을 직영해야 할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하루빨리 고신교회보다 더 확실하게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재단에 넘겨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끝

 

◆미주◆

1) 전종휘 박사는 얼마 후 서울대가 피난학교 생활을 끝내고 돌아갈 때 그도 상경하였다.

2) 이 부지는 한상동 목사의 개인 명의로 보존등기를 하였다가 1965년 10월에 고신총회유지재단에 증여 등기하였다.

3) 총노회가 총회로 조직된 것은 1956년 9월 20일이었다. 매년 4월에 모였던 총노회는 제5회로 끝났다.

4) 병원의 설립정신이란 “구제를 위한 무료진료”가 그 기본정신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장기려 박사가 가능한 이 정신을 지켜보려고 애쓰다보니 재정적자 때문에 총회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총회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그의 조기퇴진도 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5) 사조직 혹은 사조이사회란 총회가 아닌 사적인 모임에서 학교법인 이사회를 조직하였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6) 『고신의료원 50년사』p.86.

7) 제28회 총회록에 의하면(p. 65) 재적 114명 중 가가 36표, 부가 74표, 기권이 3표였다.

8)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 목사를 수장으로 하는 파벌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당시는 파벌은 아니라 두 지도자의 개인적인 갈등이 사사건건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두 지도자의 갈등은 자연히 파벌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고소파와 반고소파의 분열에까지 이르는 결과를 낳았다.

9) 노사분규로 인한 것만이 아니었지만 복음병원의 분규로 입은 재정적인 손실을 제57회 총회임원회(총회장 권오정)는 “대통령 정책실장님께 드리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91년 사태 때 60억, 1996년 의약분업으로 인한 분규로 100억, 2002년 파업으로 인한 손실 200억 원이라고 했다.

10) 『고신의료원 50년사』 p.102.

11) 교육부는 김복원이 발행하고 고신의료원장이 배서한 어음을 회수하라는 감사의 지적사항을 이행한다면서 어음을 당조수표로 교체한 후 교육부에는 채권자에게 준 어음을 회수하였다고 보고한 것이다. 고신이 정부 당국을 속인 첫 번째 일은 사조이사회를 조직하여 대학인가를 받은 일이다. 이는 사문서 위조 등의 범죄행위로써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총회나 이사회가 그들을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고 대학인가도 취소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12) 앞에서(주석 9번)에서 인용했던 “대통령 정책실장에게 드리는 보고서”에서 “김민남 이사장은 교수협의회 관계자와 짜고 일부 자금을 개인 명의의 예금계좌로 이체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어음결제를 못하도록 하고 동년 5월 9일에 병원을 부도처리 시켰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동 보고서는 김 이사장이 고의적으로 부도를 냈다는 증거로 그가 교육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 보고서에는 “충남 천안시의 신학대학원은 교단의 품에 안겨주고 고신대학교와 부속 복음병원은 제3자가 인수토록 하여 정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건의를 두 번에 걸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주채  juchai2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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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창기 2017-08-23 22:43:29

    아무리 교단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도 주님나라의 '의와 공의'를 먼저 세워야 한다. 교단을 사랑해도 교단주의자는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때 부산노회 처사도 총장을 처벌할 문제가 아니었다. 규정적으로 총장의 지출 내용은 합법적이었고, 일반대학교의 1/10 수준이었다. 교단 사태가 긴박하여 늘 모여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많은 회의비를 총장이 지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삭제

    • 황창기 2017-08-23 22:24:32

      본고 16번 "복음병원 부도...."에 관하여 --- 그 때 이사장 등 교단 감사들이 학교 돈을 지출하도록 강요한 일은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교비를 다른 용도로 지출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즉 지출하면 2천만원 벌금에 총장이 2년 이상 감옥에 가야했기에 교비를 지출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교단에서는 오해가 많았다. 특히 이를 위해 온 교무위원들이 총장을 도왔고, 특히 김영수 사무처장이 자금을 관리한다고 정말 수고를 많이 하였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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