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수 박사, <한국 장로교 예배의 미술, 이미지, 상징의 사용에 대한 재고: 실천신학적 연구>

지난 21일 합동신학대학원 설교센터에서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회장 이승진 박사/ 이하 한복실) 제 2차 신학포럼이 열렸다. 한복실 신학포럼은 신진학자들을 위한 자리이다.

한복실 신학포럼이 열리고 있는 합동신학대학원 설교센터

이번 신학포럼에서는 Stellenbosch Univ.에서 예배학 박사학위(Ph.D)를 받은 이건수 박사가 <한국 장로교 예배의 미술, 이미지, 상징의 사용에 대한 재고: 실천신학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총신대학교에서 설교학 박사학위(Th.D)를 받은 지창현 박사가 <현대 교회 설교 흐름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하였다.

한복실 신학포럼을 마치고

한복실 이승진 학회장은 신진학자들의 연구를 격려하며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승진 회장은 “한복실에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천신학 분야의 신진학자들에게는 그동안 힘들게 연구한 학위논문을 발표하며 계속 연구를 심화할 수 있는 학문의 현장을 제공하고, 또 목회 현장의 목회자들에게는 실천신학에 관한 유익한 통찰을 제공하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이번 한복실 포럼에서 심미적 신학(aesthetical theology) 혹은 신학적 미학(theological aesthetics)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건수 박사의 발제문을 싣는다.

 

한국 장로교 예배를 위한 미술, 이미지, 상징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 실천신학적 연구

 

발표자 이건수 박사 <한국 장로교 예배의 미술, 이미지, 상징의 사용에 대한 재고: 실천신학적 연구>

                                                                              

 들어가는 말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에서 미술, 이미지, 상징과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경시되어 온 영역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말씀의 종교’를 표방한 개신교 신앙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이 점을 바로잡고자 한다. 인간이 육체적 존재라는 사실, 창조성이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의 일면이라는 사실, 성경이 시각적 요소들을 긍정한다는 사실 등을 재발견함으로써 앞서 말한 시각적 혹은 심미적 요소들이 우리의 [예배] 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주제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1. 한국 장로교 예배의 설교 중심성

한국 장로교회는 예배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많은 예배에도 불구하고 예전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고 빈약하기까지 한 게 사실이다. 설교는 한국 장로교 예배의 핵심 요소다. 조금 과장해서 설교가 곧 예배로까지 인식되기도 한다. 한국 장로교회에서 설교는 말 그대로 예배를 ‘지배한다’(Jang September 2006; Kim 30 September 2005; Lee 14 July 2004; Park 2003:47-49).

이것은 몇 가지 문제점을 불러온다.

첫째,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독점적 지위이다. 한국 장로교 예배는 설교에 대부분의 비중이 있기 때문에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주를 이룬다. 따라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그 중에서도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있다. 진리를 전하는 데 있어 청각과 말하는 기능에 거의 독점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청각 외에도 다양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특히나 시각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알든 모르든 간에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에 의해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인터넷과 텔레비전의 광고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아이들이 동영상이나 게임 속 캐릭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생각해보라.)

시각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예배에서도 필수적인 감각이다.

기독교 예배는 시각에 의해 지대한 도움을 받는다. 예배에서 우리는 서로를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된다. 예배에서 우리는 아름답고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직물과 나무와 돌 등으로 된 시각적인 것들을 본다. 좋든 나쁘든 우리의 예배당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어떤 암시를 전달한다. 심지어 성상파괴주의적 라인에 있는 청교도 전통도 단순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예배당을 지음으로써 시각적 예전을 이루었다(Witvliet in Jensen 2004:vi).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은 머리 속에 오래 남는다. 예전적인 관점에서 미술, 이미지, 상징과 같은 시각적 매체들은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고 우리의 신앙을 형성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둘째, 지성주의이다. 설교라는 이지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주가 되는 한국 장로교 예배는 인간의 전인성이나 육체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Kim 16 January 2003; Kim 2001:282; Kim 28 March 2005). 따라서 예배가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사건이 되기보다는 정보 전달에 그치고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보다는 교육과 학습을 위한 시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예배는 우리의 육체를 포함해 전인이 관계하는 전인적인 경험이어야 한다. 예배를 통한 신앙의 형성과 삶의 변화는 지적으로 설득 당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감정의 순화, 의지의 순종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의 육체라는 매개를 통해 일어나고 표현되는 것이다. 예배의 전인적 접근에 관한 Hovda(1996:92)의 말을 들어보라.

우리는 단지 “영혼”만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전인 – 몸, 감각, 성별, 기억, 상상 등 한 인간으로 기능하는 모든 것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신앙 경험이란 인간의 모든 구성 요소에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와 [예배] 환경, 그리고 예술은 인간의 이 모든 부분에 접근하는 열쇠를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약해지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미술, 이미지, 상징은 우리 몸의 다양한 감각들과 전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 의식인 성례에는 이성만 관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감각, 감성이 함께 관련된다.

인간 전인의 한 부분인 육체, 몸은 우리의 신학함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왜냐하면 몸은 인간 존재의 기초이기 때문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나음을 위해 상하셨기 때문이다(Cilliers 2009:61). 몸은 우리의 예배 경험에 있어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셋째, 회중이 예배에 비참여적이 되는 괴리현상이다. 설교 지배적인 예배는 부득불 설교자에서 회중으로 흐르는 단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속에서 회중은 ‘청중’이 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 열린 예배는 회중을 보다 참여적으로 만들 것으로 기대되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 역시 회중의 수동적 지위를 바꾸지는 못했다. 열린 예배가 함께 찬양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임으로써 회중과 함께 하는 예배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 예배에서도 회중은 찬양팀의 퍼포먼스를 그저 관람하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체가 함께 실행하는 상징적 예전(liturgy)을 한국 장로교가 새롭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성례는 대표적인 ‘공공의 일’(leitourgia)이다. 세례 의식에서 회중은 자신들이 “죽음과 부활의 물을 통과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임을 반복적으로 확인 받는다”(White 1981:82). 성찬이라는 공동의 식사에 참여할 때는,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음을 일깨움 받는다. 성례에서 회중은 그냥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이다. 왜냐하면 성례에서 그들은 나누고, 돕고, 먹고, 응답하는 등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넷째, 성찬의 드문 시행이다(Joo Semtember 2006; Kim 2001:309).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된 한국 장로교회는 성찬을 분기에 한 번, 혹은 6개월에 한 번밖에 시행하지 않는다. 이 설교 중심성은 예배 공간의 세팅에도 반영되어 있다.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라는 신학을 반영하듯 설교단은 주로 예배당 전면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찬상은 그보다 아래에 있거나 아예 없는 곳도 많으며, 세례반을 갖추고 있는 곳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성찬은 설교와 함께 예배를 구성하는 기둥으로서 한국 장로교회가 상시적으로 주일 예전의 하나로 회복해야 하는 의식(儀式)이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 같은 물질적인 요소들은 신자들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영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성찬은 인간의 다양한 감각들에 호소하며 신자들에게 변화의 힘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적 실재를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시각적 요소들은 – 그 자체도 물론 한계들이 있겠지만 – 설교가 하지 못하는 작용을 한다. 그것들은 설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이해하게’ 하는 반면에 미술, 이미지, 상징은 진리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Dyrness 2001:156; Wheeler 2003:362).

 

지금까지 서술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제부터 필자는 신학이 미학을 대화의 파트너로 삼는 심미적 신학(aesthetical theology) 혹은 신학적 미학(theological aesthetics)의 필요성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것을 위해 필자는 미술, 이미지, 상징 등 심미적 요소들이 기독교 역사에서 차지했던 위치를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교회 전통에 이에 대한 뿌리가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논증 후에 심미적 요소들이 왜 [예배] 신학에 있어 중요한지에 대한 몇 가지 근거들을 이론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예술에 대한 정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예술(art)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적실한 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의 장르와 개념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는 분분하다. 누군가는 예술이라고 하면 좁은 의미에서 순수 미술, 문학, 연극, 발레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요리, 퀼트, 기계 작업과 같은 일상 생활과 직업에 필요한 기술을 떠올릴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져 온 예술의 개념적 정의는 다양하다: 모방으로서의 예술, 미의 실현 또는 현현으로서의 예술, 존재의 허위를 느끼는 인간이 진정한 자기 존재를 찾기 위한 시도로서의 예술, 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예술, 놀이나 게임으로서의 예술, 인간의 현실과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예술 등등.

예술의 개념은 이렇게나 다양하다. 거기엔 어떤 합의된 정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혼란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예술에 대한 나름의 모든 정의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사항들이 있다(Cf. Adajian 23 October 2007):

●모든 예술에는 매체가 존재한다. 모든 예술에는 우리 몸의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형태나 매체가 있다.

●예술 창작 활동에는 인간의 기술, 능력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 직관, 영감, 공감과 같은 신적 은사(일반은총의 의미에서)가 함께 들어간다.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인간적 활동과 신적 활동의 결합이다.

●예술은 심미적 관심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심미적이라 함은 반드시 보기에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기에 불쾌하고 추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참되고 선한 무언가를 전달하려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 아름다움의 반대 개념은 추함이 아니라 kitsch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것은 참됨과 선함을 담고 있지 않은 그저 예쁨이다.

●예술은 심미적 관심 이외의 다른 영역, 예를 들어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관심과 분리되지 않는다. 계몽주의 이후에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의 자율성’ 개념이 주창되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예술 작품이 꼭 예술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창작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순전히 예술적인 관심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비예술적인 관심 – 종교, 정치, 사회, 이념, 가치관, 윤리 등과 연결되어 있다.

●실존적인 의미는 예술 혹은 예술적 이성의 독특한 특징이다. 과학은 (혹은 정통주의적 신학도 여기에 해당될 지 모른다) 합리적 추론과 지식을 그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예술은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한 실존적 의미 기반 사고를 특징으로 갖고 있다.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감상하는 행위는 이성적 사고만 관련되는 게 아니라, 의미 경험이 추구된다.

●예술은 해석의 과정을 포함한다. 어떤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현실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해석하도록 자극한다.

이 모두를 종합하여 필자는 예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예술은 우리 몸의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심미적인(아름답거나 추한) 매체(물체 또는 활동)이다; 그것은 인간의 기술과 신적 은사가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며; 현실(종종 종교, 정치, 사회, 윤리 등 비예술적인 영역에 해당하는)에 대한 인간의 해석을 반영하고 자극한다.

 

2. 기독교 역사는 미술과 미학을 어떻게 봐왔을까

미술(혹은 예술)과 종교는 인류 역사 동안 줄곧 밀접하게 관련되어 왔다. 심미적 경험은 인간에게 있어 원초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인간은 일찍부터 이런 심미적 경험을 표현해 왔고 지속가능한 형상을 통해 나타내려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라소의 동굴 벽화라든가 남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춤추는 코이산들의 그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면 심미적 표현은 선사시대부터 인간의 경험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미술과 기독교의 밀접한 관련성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독교 신앙은 신학적 저술로도 물론 표현되고 전달되어 왔지만 건축과 이미지라는 수단에 의해서도 전달되어 왔다. 이러한 시각적인 수단은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때로는 글로 나타낸 저술보다 더 뛰어난 해석을 제공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접근하기에 더 용이한 장점이 있었다(책이 워낙 귀한 것이었으므로)(Dyrness 2001:156).

그들은 어떤 추상적인, 무형의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몸으로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함으로써 거룩한 것을 묘사했다. 비록 예술 그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거나 [성경 텍스트라는 매체에 비해서] 주된 매체는 아닐지라도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에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Farley 2001:111).

2.1초기 기독교(콘스탄틴 이전 시대)

19-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성경과 초기 기독교가 시각적인 작품, 이미지 등에 대해 적대적이고 교회 미술은 콘스탄틴 시대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면서 그런 가설은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초기 기독교 미술 작품들은 카타콤과 다양한 장소의 석관(石棺), 그리고 듀라-유로포스에서 발견된다(Dillenberger 1987:8-9). 이들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종종 세 가지 중 하나로 묘사되어 있다 – 오르페우스, 선한 목자, 헬리오스. 첫째, 오르페우스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는 카타콤에서 볼 수 있는데 주로 구원의 모티프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둘째, 선한 목자는 당시에 가장 많이 나타난 그리스도 이미지의 전형으로서, 카타콤의 묘실 천장, 듀라-유로포스의 침례조, 석관 등 다양한 곳에서 발견된다(그림1 참조). 세 번째, 헬리오스로 묘사된 그리스도의 모습은 성 베드로 성당 지하의 묘지 중 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 진리의 빛이신 그리스도 모티프와 관계가 있다.

그림1: Christ, the Good Shepherd, Catacomb of Priscilla, Rome, Italy, Second half of 3rd century, unknown painter.

 

이 세 가지 이미지는 분명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에서 차용된 것들이다(선한 목자는 성경적 기초도 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이 이미지들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거기에 그들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다(Finney 1994:230). 오르페우스와 선한 목자 이미지는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반영되어 있고, 헬리오스 이미지에는 하나님의 계시자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이 담겨있다(Cf. Dillenberger 1987:12).

이 외에도 성경 속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들이 다수 발견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당시(pre-Constantine era)의 작품들에는 아직 십자가의 수난이나 부활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치유나 위험으로부터의 구조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처해있던 박해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의 핍박 상황 하에서 그들의 창작의 주요한 모티브는 틀림없이 희망이었을 것이다(Dillenberger 1987:15, 19; cf. Snyder 1996:461)

초기 기독교회의 회화는 禮典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카타콤의 어떤 그림은 한 聖人의 죽음을 기념하는 기념 예배와 관련된 성찬 예식을 묘사하고 있으며, 듀라-유로포스 교회의 침례조를 장식하고 있는 일련의 회화들은 침례 행렬과 예식과 관련한 것들이다(Cf. Kraeling 1967:196-197).

 

2.2 콘스탄틴 제국 시대

제국 시대가 되면서 교회 미술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는 그림의 교육적 기능이 크게 강조된 것이다. 유럽 북부가 기독교화 되면서 회화는 새로운 개종자들을 기독교로 동화시키는 교육적 수단으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5세기 중엽의 교황 레오는 교회 벽면을 따라서 개종자와 신자들을 위한 교육의 수단으로 일련의 그림들을 그려야 한다고 했고, 교황 그레고리는 교회 미술이 문맹자들의 성경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시기의 교회들에는 그리스도 생애의 에피소드들을 묘사한 회화와 조각들이 많이 발견된다. 일례로, 산타 사비나 교회의 문에는 엘리야, 하박국, 다니엘 등을 포함해 구약의 주요한 장면을 그린 작품들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십자가像(이것이 현존하는 最古의 십자가像이다. 그림2 참조)과 승천, 그리고 계12:12-13에 대한 회화적 묘사인 알파와 오메가와 나란히 있는 그리스도도 나타난다(Dillenberger 1987:23, 34).

그림2: The crucifixion of Christ, tile from main entrance of cypress wood, Basilica of Santa Sabina, Rome, Lazio, Italy, 5th century.

두 번째 변화는 그리스에 대한 묘사가 오르페우스나 선한 목자 이미지에서 우주의 통치자 심판자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는 Ostia Antica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흉상을 들 수 있다(그림3). 이 그림은 이후에 나타나는 Christ the Pantocrator(우주의 지배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원형(prototype)이다.

그림3 Bust of Christ, end of 4th century, Museo Ostiense in Ostia Antica.

Santa Pudenziana의 천장 모자이크화(그림4) 역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그리스도는 통치자의 자리를 상징하는 중앙의 보좌 위에 앉아 있고 聖人들에게 둘러싸여있다.

그림4: Christ the Pantocrator, apse mosaic of Santa Pudenziana, 5th century.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묘사의 변화는 당시 교회의 변화된 위상을 반영한다. 박해 받던 교회에서 제국의 교회로 위상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위험과 박해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하던 오르페우스나 선한 목자像이 사라지고 보좌에 앉아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로서의 이미지가 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Dillenberger 1987:28).

San Vitale 교회의 회화는 보다 예전적이며 성례전적이다. 6세기에 지어진 이 예배당의 모자이크는 자신을 방문한 세 천사에게 음식을 드리는 아브라함, 이삭을 제단에 바치기 위해 죽이려는 아브라함, 양을 잡아 바치는 아벨과 빵을 들고 서있는 멜기세덱 등 성례전적 함의를 가진 이미지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증거들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미술이나 이미지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을 것이라고 볼 만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들은 그들이 종교적 회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기부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심미적으로 표현한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예배를 드리고 성례를 행했다. 미학과 禮典이 이 시기에도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2.3 중세

중세기에 들어와서 플라톤-위 디오니시우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신학자들은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빛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상이 초대 교부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교부들은 빛을 메타포로 이해한 반면에 중세 사상가들은 빛 그 자체를 하나님의 현현으로 이해했다.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신학자 아퀴나스도 역시 물리적인 빛과 색을 신적 아름다움의 현현으로 보았다(Dillenberger 1987:40).

빛을 신적 임재의 실체요 형태로 본 중세의 사상은 고딕양식과 스테인드글라스라는 특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둥으로 지탱하는 아치형 구조물 위에 천장을 얹는 새로운 건축 기술이 개발되면서 벽 대신 기둥과 기둥 사이에 커다란 창문을 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다양한 색깔의 빛을 교회 내부에 끌어들임으로써 말 그대로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천국을 지상에 구현한 것이다.

서방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빛을 가득히 머금은 고딕양식으로 특징지어진다면, 동방은 아이콘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중세 심미적 신학의 또 하나의 이슈였던 성상에 대한 논쟁은 동방에서 한 세기 이상 대립이 지속된 끝에 이미지에 대한 존경(veneration)을 용인함으로써 매듭지어졌다. 4차 콘스탄티노플 회의(869-870)에서 기록된 거룩한 말씀과 거룩한 이미지는 동등하게 공경되어야(respect)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Cf. Theissen 2005:64-66).

 

2.4 종교개혁 시대

심미적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 시대의 중심 이슈는 성상에 대한 잘못된 숭배와 성상파괴였다. 이것은 중세 후기의 교회 상황과 관련이 깊다. 중세 후기, 성인들의 중보 사상과 그들이 남긴 유물들의 마술적 힘에 대한 민간의 믿음, 유물들을 이용한 교회의 돈벌이, 공로주의 등이 일반화되면서 개혁자들의 눈에는 이미지나 상징물들이 곧 우상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따라서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2.4.1 루터

루터는 초기에는 우상숭배의 위험 때문에 이미지를 반대했다. 그러나 카를슈타트에 의해 촉발된 농민들의 성상파괴 행위 이후 그의 입장을 바꾸었다. 루터는 성상을 두는 것이 공로가 되는 것이 문제이지 성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미지를 두어도 되느냐 안되느냐는 그에게 있어서는 아디아포라의 문제였다(Cilliers 2012:29; De Gruchy 2001:39; Luther 1959a:259).

루터는 심지어 이미지가 설교와 복음을 가르치는 교육적 도구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이미지가 기억의 용도(예를 들어 수24:26의 증거의 돌과 같은)로만 쓰이고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않는다면 허용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루터는 성상숭배에 대해서는 물리적인 제거가 답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것은 잘못 사용될 수 있고 우상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제거나 파괴로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그런 식으로 하려면 “우리에게 가장 큰 해가 되는 우리 자신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Luther 1959b:85).

루터는 성상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행동의 이면에서는 그것이 정말로 어떤 영험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상숭배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다. 카를슈타트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외적으로 존재하는 이미지와 마음에 존재하는 우상을 구분하면서 카를슈타트가 진짜 우상인 마음의 우상(재력, 권력, 공로로서의 선행 등)은 없애지 않으면서 외적인 이미지들만 없앴다고 비판했다.

또한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루터는 사람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心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신 일이 읽혀지고 들려지기를 원하신다. … 그러나 나는 그것을 들을 때 내 마음에 그것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의지하든 의지하지 않든 그리스도에 대해 들을 때 내 마음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한 남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 만약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죄가 아니고 좋은 것이라면 내 눈으로 그분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Luther 1958:99-100)

루터는 상상을 인간됨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여겼다. 우리가 형상이 없으시고, 묘사가 불가능한 하나님을 대한다 할지라도 구상적인(imaginative) 접근법을 사용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왕, 목자, 아버지, 양, 바위, 독수리, 불, 빛 등의 이미지와 메타포를 사용하신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터와 멜랑히톤은 그들의 개혁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크래낙(Lucas Cranach)에 의해 회화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크래낙이 그린 비텐베르그 교회에 있는 제단화(altarpiece)는 참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설교)와 성례의 합당한 시행을 묘사함으로써 개혁자들의 사상을 회화적으로 대변했다(Thiessen 2005:126-127; cf. Pettegree 2002:470-477).

 

2.4.2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성찬에 대한 견해에서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대해서도 루터와는 반대 축을 형성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루터가 말했던) 교육의 보조 기구로서의 이미지에 대해서 반대했고 오직 말씀에로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쯔빙글리는 성상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거짓 신들이 직접적으로 형상화된 것이라고 보았다. 성상이나 이미지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것일 뿐이라고 그는 보았다. 쯔빙글리에게는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거짓 신이나 물리적 이미지나 똑같은 우상이었고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Dillenberger 1987:67-68).

쯔빙글리는 예배 공간에 어떤 이미지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단언했다. 따라서 그는 1524년 쮜리히 뮌스터 내의 이미지와 성상들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를 단행했다.

 

2.4.3 칼빈

이미지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대개 세 가지 단계로 정리된다. 첫째, 그는 기본적으로 성상을 없애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둘째, 그럼에도 그는 모든 이미지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세계의 예술의 심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셋째, 禮典과 관련하여, 그는 이미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그림이 문맹자들의 성경책이라는 그레고리의 주장을 비판한다. 그레고리와는 반대로 그는 사람에게 참된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방편이 말씀에 대한 설교와 성찬의 시행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만약 사제들이 가르침과 예배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했다면 이미지는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기독교강요 I.xi.5, 7). 칼빈은 설교를 진리 전달의 독보적인 수단으로 여겼다. 그는 시각적인 것들은 말씀만큼 하나님을 잘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에 대한 구원 지식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람이 창조세계를 보는 것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론할 수는 있으나 더 고상하고 직접적인 하나님 이해는 말씀을 설교함으로써 얻어진다고 했다. 대체로 칼빈은 이미지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나 그것은 진리를 가르침에 있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입장이었다(I.xi.12).

이처럼 이미지에 대한 그의 기본적 입장이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무대라는 사실을 웅변했다. 그는 하나님을 예술가에 비유하며 작품이 작가를 반영하듯 창조세계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려주며 보는 이를 창조주에 대한 찬양과 경배로 이끈다고 말했다(Cf. Institutes I.v; Dyrness 2001:53; Wheeler 2003:360).

그러나 예배와 관련해서 칼빈은 시각적인 것들에 대해 여지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예배 공간에 이미지를 두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주장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존재적인 차이 혹은 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부패함이다. 칼빈이 말하는 창조주과 피조물 간의 존재론적인 차이는 물질과 하나님이 서로 섞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동일시될 수 없고 물리적 수단(physical medium)으로 표현되는 어떠한 이미지도 신적 속성을 대변할 수 없다. 그런데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종종 이런 물질과 하나님을 혼동하고, 창조주에게 돌려야 할 찬양과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린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성상, 이미지를 두는 것은 현명하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다(Wheeler 2003:357; cf. De Gruchy 2001:41-42).

그렇지만 칼빈은 예배 장소가 아닌 세속 사회의 공간에 예술 작품을 놓는 것은 양해했다. 그는 이미지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는 이미지에 신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루터의 비판과 맥을 같이 하면서 공공 장소에 이미지를 놓는 것에 대해서는 허용적이었다(I.xi.12).

칼빈의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 비판을 해야 할 것 같다. 첫째, 칼빈은 기독교 역사 초기 500여년 동안에는 예배 장소에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초대 교회가 이미지 사용을 반대하는(aniconic)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I.xi.13).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둘째, 칼빈은 이미지의 사용이 성찬과 세례처럼 예수님께서 명시적으로 지시하신 예전 사항(liturgical element)이 아니므로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연 예배와 관련하여 성경이 모든 세부 요소들을 일일이 지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초기 기독교회들의 예배가 성경이 지시한 규정에 따라 단일한 형태였고 다양성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까?(Wheeler 2003:362-363)

셋째, 칼빈은 이미지와 우상을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Park 2007:105; Wheeler 2003:354). 칼빈 역시 어쩔 수 없이 한 시대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이해할 수 있는 사항이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시대에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그것과는 다른 함의를 갖기 때문이다. 당시 이미지, 성상은 초월적 실재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해주는 ‘언어’라기 보다는 그 실재의 ‘대응적인 具象’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칼빈은 우상숭배를 이유로 이미지, 성상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우상이 예배당 내에 놓인 어떤 像이기보다는 사회적인 제도나 힘, 가치관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물론 우리가 십계명의 제2계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주의는 해야겠지만 이미지와 우상을 반드시 동일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미지에 대한 잘못된 숭배의 위험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오용의 위험이 이미지가 가진 좋은 가능성마저 부정하는 기초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미지를 예배 공간에 놓아도 되느냐 안되느냐는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와 상황의 빛 아래서 실천적으로 판단할 문제이다. 칼빈의 시대에는 이미지의 위상이 우상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예배 공간에서 이미지를 몰아내는 것이 적절하다고 칼빈은 판단한 것이지만, 우리 시대는 다를 수 있다. 이미지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전달과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시각 미디어의 활용을 통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Wheeler 2003:368).

 

3. 심미학이 왜 신학함에 있어 중요한가

전술한 바와 같이 이미지, 상상, 아름다움, 몸, 육체적 감각과 같은 심미적인 요소들은 개신교 신학에서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부분이다. 특히나 한국 장로교회 내에서 이런 이슈들은 그동안 더욱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고찰에서 본 바와 같이 심미적 요소는 기독교 초기부터 신앙과 예배의 일면으로 존재해왔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에 들어와서도 (개혁자에 따라서) 그것의 가치가 인정되었고, 실제 그들의 개혁 사상은 화가들의 심미적 표현을 통해서 얼굴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 후에 이제 필자는 심미적 요소가 우리의 신학작업에 왜 중요한지를 몇 가지 근거를 가지고 논증하고자 한다.

 

3.1우리의 몸됨

기독교는 종종 몸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주요한 기독교 전통들은 육체를 무시하기도 하고 육체를 거의 신앙에 해가 되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Cooey 1994:64; cf. De Gruchy 2001:15-16). 몸은 기독교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몸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기독론 논쟁의 와중에서 이루어졌다. 2세기 말에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신학적 이슈가 되었다. 가현설과 영지주의에 맞서 초기 기독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 물리적인 몸이며, 믿는 자들에게 약속된 몸의 부활 역시 우리의 실제 몸의 부활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기독교회의 입장은 信經으로 공식화되었다(사도신경의 몸의 부활(carnis resurrectionem, 직역하면, 살의 부활)을 보라)(Kelly 1960:369). 부활 외에도 그리스도의 양성 논쟁도 몸과 관련된 논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오랜 논쟁 끝에,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를 육체를 가진 참 인간인 동시에 참 하나님으로 규정했다.

초기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처럼 적극적으로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대체로 기독교 역사에서 경시되어 왔다. 몸은 우리가 지성으로 복종시켜야 하는 장애물이나 혹은 우리가 조종하는 기계나 물체쯤으로 여겨졌다. Sigurdson(2008:25-28)은 이것을 ‘몸의 객체화’라는 말로 정의하고 이러한 몸의 이해에 세 가지 영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첫째, 플라톤 철학의 영향이다. 플라톤 철학은 기독교의 몸에 대한 경시나 육체와의 투쟁 이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기 기독교는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사상을 거부했지만, 실제로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몸을 구원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로 이해했다(Cf. Guthrie 2007:100-101). 둘째, 합리주의 철학의 영향이다. 근대 합리주의는 몸을 생명 없는 물체,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질로만 이해했다(Cf. Hauerwas 1998:81). 이러한 이성주의의 영향은 몸의 존재론적 의미를 더욱 약화시켰다. 셋째,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의 결과로 몸은 공동체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를 잃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몸됨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이었다. 성도 개개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몸’으로 이해되었었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이러한 상호육체적이고(intercorporeal) 사회적인 몸 이해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퇴화시켰다.

이러한 영향들의 결과, 기독교에서 구원은 하나님과 영혼 간의 일이 되어버렸다. 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리를 잃고 만 것이다.

몸의 객체화는 현상적으로 두 가지 중 하나로 나타난다: 몸에 대한 경시, 아니면 몸에 대한 강박적 집착(몸의 우상화). 몸에 대한 경시 현상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다른 한편의 결과인 몸에 대한 강박적 집착(몸의 우상화)는 현대 문화에서 나타나고 있는 왜곡된 육체론의 또 다른 모습이다. 현대 대중 문화는 젊고 건강하고 비율 좋은 완벽한 몸을 우상시하고 있다. 그런 몸을 갖기 위해 사람들은 과도한 다이어트와 운동을 하며 성형수술을 통해 몸을 造形한다.

완벽한 몸에 대한 이해는 억압적인 미신이다. 완벽한 몸에 대한 집착은 사람들을 자학에 가까운 운동과 성형수술, 섭식 장애,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낙인 찍기로 몰아간다(Eiesland 1994:116).

이러한 사고방식 하에서는 모든 육체적인 흠결이나 병약함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건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 가치가 되고 건강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된다 – 신체적 건강, 심리적 건강, 관계적 건강, 정서적 건강, 사회적 건강 등등. 건강하고 완벽한 몸에 대한 이 병적 집착 현상은 본회퍼가 말한 ‘인간 생명의 機械視’(mechanization of [bodily] life)와 맥을 같이 한다(Bonhoeffer 1955:107). 그것은 인간의 몸이나 인격을 능력, 생산성,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만 판단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독일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가졌던 이런 시각이 인간의 몸을 수단으로만 보며 인간의 권리를 위협한다고 비판했다.

몸은 우리 현대 사회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언제나 바람직한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몸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의 결과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몸을 온당하게 대우하는 신학적 접근이 더욱 시급히 요청되는 실정이다.

계몽주의 이후 개신교 신학은 대체로 육체와 육체적 감각들을 백안시해왔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禮典에 대한 연구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심미적 요소들과 육체적 감각들, 우리의 몸, 창조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되었다(Lukken 1990:8-9; Pamela 2008:115).

우리 인간은 육체가 없는, 영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 몸은 물리적인 객체, 물체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느껴지는 육체의 피곤은 손의 피곤이거나 머리의 피곤이 아니다. 나의 피곤 곧 全人의 피곤이다. 또한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몸이 곧 나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병에 걸렸을 때 나는 병든 몸을 가진 영혼이 아니다. 병든 몸이 곧 나다(Hauerwas 1999:29; Sigurdson 2008:34).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가지고(have)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곧 몸이다(be)(Cf. Aracil February 2012; Cilliers 2012:74).

인간 존재의 일면으로서의 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의 바탕 위에서 긍정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물리적인 실재인 이 세상과 형상을 만드셨다. 몸은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해 우리의 신학적 사고 안에서도 긍정적인 자리를 얻어야 한다(Cottin 2001:304). 둘째,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몸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획기적으로 바꿀만한 사건이다. 하나님은 육체가 되심으로써 육체성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는 몸으로 사람들과 만나셨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만드신 물질 세계가 보시기에 좋았다는 성경의 진술을 더욱 확증해준다(Bonhoeffer 2003:214). 셋째, 성령의 내주는 몸에 대한 이해를 더욱 진전시키는 사건이다.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육체성을 강조해준다 – 교회는 이에 대한 육체적인 증거이다”(Cilliers 2012:73). 성령은 몸으로서의 교회에 거하시고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 죽을 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의 부활을 보증하신다. 몸은 성령이 하시는 변화(transformation)의 사역에 있어 장애물이 아니라 그 변화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몸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오늘날 소비주의와 상업주의가 선전하는 완벽한 몸 이미지와는 다르다. 몸에 대한 기독교적 이미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셔서 상하신 그 몸이다(Cilliers 2012:75). 그의 몸은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서,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상하고 깨어졌다.

[예수의 몸은] 상처 입기 쉬운 – 구부러지고, 베이고, 연약해지고, 마비되고, 감각이 없어지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했지만 다시 치유되고 평안을 향유할 수 있게 된 모든 몸을 대표한다. 그러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거의 자연의 인력에 이끌리듯이 예수께 매료되어 모여들고 그는 말 그대로 그들에 의해 둘러싸인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상한 사람들)을 그에게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치료했다. 분명 이것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예수가 이들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육신이 되신 그가 십자가에 달린 연약한 (그러나 또한 부활하고 변화한) 몸이 되심으로써 상한 자의 가장 극명한 사례가 되셨다(Caputo 2006:131).

Eiesland는 예수 그리스도를 ‘장애를 가진 하나님’으로 재해석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실 때,

그분은 장애를 가진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구주 예수는 겁먹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 장애의 표시를 보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들의 구원을 알게 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 장애인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됨에 대해서 계시하셨다. 장애인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계시자이다. 그분은 장애가 – 신체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 진정한 인간임과 모순되지 않고 양립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Eiesland 1994:100).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Ackermann(2001:32-33)은 성적으로 학대 당한 사람들의 몸 그리고 HIV/AIDS를 가진 사람들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상한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과 결부시켰다. 그는 상했다가 치유되신 그리스도의 임재 그리고 그분과의 연합이 우리를 치유의 희망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미국의 화가이자 그 자신이 AIDS 환자였던 Maxwell Lawton은 Ackermann의 이러한 주장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림 Man of Sorrows: Christ with AIDS(그림5)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십자가가 예수께서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결과를 대신 담당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십자가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림5: Man of Sorrows: Christ with AIDS

예전적 측면에서, 깨어진 몸 이미지는 성만찬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성찬에서 빵을 쪼개는(찢는) 행동은 십자가에서 깨어진(찢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모든 깨어진(상한) 사람들을 아우르는 의미가 있다. Moloney는 이와 관련하여 성찬이 자격을 갖춘 완전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게 아니라 불완전한 죄인들과 깨어진 사람들에게도 열려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성찬이 도덕적으로 거룩한 사람들을 위해 행하는 예식인가? 기독교회가 죄인들, 상한 자들을 성찬 테이블에서 배제하는 것이 옳은가? 그는 성찬과 관련된 성경의 구절들을 연구한 결과, 그 구절들에 나타나는 한 가지 공통된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상한 자들과 식탁에 함께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성찬은 죄인들에게 불허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실패하고 상한 제자들과 함께 드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곳의 실패하고 상한 교회, 우리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Moloney 1990:137).

 

3.2 하나님의 형상의 발현으로서의 예술적 창조 행위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의 일면은 창조성이다. 인간은 창조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성을 반영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도 갖지 못한 상상력과 기술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았고 이것으로 예술을 만들어낸다.

예술적 창조 행위는 자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이다. 이 초월적 경험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예술과 기술을 가지고 ‘이차적인 세계’를 창조한다. 즉 그것은 인간이 창조자(creator)임을 의미한다(Horne 1995:84).

예술적 창조와 관련하여 성령은 영감의 주체이시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은 창조세계를 돌보시고 보존하심으로써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동참하도록 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영감, 감동이라는 신적 활동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내신다(Sherry 1992:2).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창조세계에 전달하시는 성령은 예술적 창조 행위에서도 예술가들의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으심으로써 활동하신다. 따라서 예술 작품들은 신적 眞, 善, 美의 광휘를 표현하는 하나의 형태가 될 수 있다.

예술가들에 대한 성령의 감화에 근거하여 또 하나 생각해볼 만한 점은 예술의 종말론적 함의이다. 성령의 역사의 지향점이 종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모든 진정한 예술도 종말론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의 흔적을 지니는 예술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그 변화를 고대한다(Dyrness 2001:94). 심지어 비기독교 예술작품(비기독교인인 예술가가 만든 작품, 혹은 비기독교적인 주제를 담은 작품)도 신이 부재한, 악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신이 존재해야 함을 드러낸다. 그러한 작품은 작가가 현재의 모습과 기대하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염려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부정의 방법을 통해 궁극적인 것을 구하는 것이다(Horne 1995:91; cf. Dyrness 2001:101-102).

 

3.3 그림책으로서의 성경

성경의 줄거리 전체는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에게 하시는 일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役事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창조는 아름다움에 대한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사건이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은 매일 ‘보시기에 좋았다’고 논평하셨다. 이 말은 아마도 창조된 세계가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와 목적 하에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Mitchell(2005:349)은 말한다: “시각이 주 감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고 그것이 좋음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또는 선함)이 불변의 고정된 특징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무언가가 그 아름다움을 망치는 일이 생길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이렇게 훼손되기 쉬운 특질이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주를 찬양하는 자리로 이끌기도 하지만, 피조물로 하여금 창조주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가도록 유혹하기도 한다(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범죄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출애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보다 풍부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과 임재를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나타내셨다. 모세를 산에서 만나실 때는 구름과 연기, 천둥과 번개, 지진 현상이 있었다. 하나님의 힘과 거룩이 시각적인 효과와 거대한 자연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성막(또는 성전)도 구약의 심미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성막을 만드는 일을 위해 하나님의 영이 브살렐과 오흘리압에게 공교한 기술과 예술적 재능을 부여하셨다. 그들은 오늘날 예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함으로써 시각적인 예배(장소, 도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지어진 성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시각적으로 임했다.

선지자들의 예언에는 종종 주의 날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현재 美에 대한 우리의 경험(眞과 善에 대한 경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은 죄의 영향을 받아 왜곡되어 있다. 미는 종종 심미주의(우상화된 미)로 흐르거나 아니면 육욕적인 嗜好로 저하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미는 장차 그런 欠들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경험될 것이다. 주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의 아름다움은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주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면류관”(사62:3)이 될 것이다.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미는 종말론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

신약에 들어와서 이 아름다움의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에서 더욱 고조되어 나타난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미지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은 종종 비유와 이야기 같은 상상력이 담긴(상상력을 자극하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분석인 설명을 내놓는 대신 그것이 무엇과 ‘같은가’를 보여주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게다가 십자가는 그가 한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역이다. 인간의 잔인성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그에게 와서 인간의 추악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십자가는 역사상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였고 또한 위대한 작품들의 주제였다.

성경의 이미지의 대미는 재림 사건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수많은 생생한 이미지들과 노래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의 기이함을 묘사한다. 악한 세력과의 마지막 투쟁, 성도들의 최후 승리,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 그 나라의 광휘가 그 책에 이미지 가득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성경에는 이미지가 풍부하다. 그것은 일련의 말로만 꿰어진 책이 아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 사건들과 주제들에는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성경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언어와 비언어(성육신)로 나타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전체 계시에 통합되어 있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제시한 역사적이고 신학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필자는 미술, 이미지, 상징 등 심미적인 것들이 설교가 우세한 우리의 전통과 대립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분명 한국 장로교가 설교에 의해서 지금까지 자라온 것과 설교가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것, 그리고 설교가 절대 우리가 버리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은혜의 수단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이제까지 우리가 간과해왔던 영역인 심미적 요소들을 우리의 신학 작업에 포함시키고 우리의 예배에 의미 있게 사용한다면 신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더욱 풍성해지리라 믿는다. 이미지는 그저 언어를 돕는 장식이나 부속물이 아니라 다른 형태를 가진,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따라서 이미지와 말을 통합적으로 구사하는 예배를 만든다면 그런 예배에서 얻는 하나님(의 진리와 선하심과 아름다움의) 경험 역시 통합적이고 전인적인 것이 될 것이다.

1) 이 논문에서 필자의 초점은 예술 중에서도 특히 미술에 집중되어 있지만, 용어의 정의와 어원을 다룸에 있어서는 보다 포괄적 표현인 ‘예술’을 사용한다.

2) art의 어원인 헬라어 techne는 원래 일상생활과 직업에 필요한 기술과 노하우를 의미했다(Brown 1989:81).

3) 듀라-유로포스는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 위치한 고대 로마의 국경 도시이다. 이 도시는 1921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발굴 당시 이곳의 유대인 회당과 초기 기독교회 내부는 다양한 회화 작품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 연대는 A.D. 24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들의 발견으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가 성상 반대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뒤집히게 되었고,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이 구상 예술을 일찍부터 사용해왔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Thompson 1996:241-242).

4) 이것은 당시 교부들의 글과도 맥을 같이 한다. 순교자 저스틴과 터툴리안, 오리겐은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태양과 빛의 유비로 설명했다. 그들은 빛이 태양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가 태양의 본질은 볼 수 없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봄으로써 그 근원인 태양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Thiessen 2005:15, 18-19).

5) Weiss(1999:5)는 우리의 몸됨을 상호육체적인(intercorporeal) 것으로 설명한다. 이 세상에 인간은 홀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인간체와 비인간체(자연, 동식물)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존재하고 그런 상호작용에 의해서 형성과 재형성의 과정을 반복한다.

6) 이런 관점에서 독일 국가사회당(나치스)은 1933년 7월에 유전적 질병이 있는 사람들의 생식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그들은 유전적 질병이 있다고 추정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강제적으로 불임 수술을 실시했다.

7) 죄인들과 상한 자들에게 성찬이 허락되어야 한다는 Moloney의 주장은 무질서에 대한 옹호는 아니다. 성찬에 임하는 자들에게 정결을 요구하는 본문들(예를 들어, 고전11:20-29)에 대해서 그는 고의적으로, 공공연하게 공동체의 연합(communion)을 해치는 자는 성찬(Communion) 의식에 참여할 여지가 없다고 주석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 번 성찬은 실패하는 공동체에게 주신 주님의 은사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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