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영훈 前 원장

고신의료원 박영훈 前원장(前 고신의료원장, 前고신대학교의무부총장, 송도제일교회원로)께서 2017년 8월 31일 오전 8:25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고 박영훈 원장은 부산광역시장 주치의로서 오래 동안 봉사했으며, 그의 인술은 명의로서 전국에 알려져 있었고, 장기려 박사의 수제자로서 외과의사로 살았다. 특히 그의 인기는 지역의 기관장들이나 법원, 검찰 고위직에 있었던 분들까지도 명의 박영훈 원장을 찾아 수술을 받기 원했다.

고 박영훈 원장은 복음병원 2대 원장(1976.06 ~ 1981.02), 고신의료원 1,2,5대 원장(1대:1981.03. 01.~1985.02.28. / 2 대:1985.05.01.~1988. 05.31./ 5 대:1991.06.03.~1991. 08.27.)을 역임했다. 빈소는 복음병원 영안실 특 2호실에 마련되어 있으며, 장례식은 오는 9월 2일(토요일)이며, 발인은 08:30이다. 문상은 8월 31일 오후 5시부터 가능하다. 장지는 실로암 공원 묘원이며, 가족장이다. 부의금이나 화환은 사절한다고 부고에 미리 적어서 통지했다.

성산관은 장기려 박사의 호를 딴 의대 강단 이름이고, 유은관은 박영훈 원장이 퇴직이후에 사비 2억 원을 기금으로 내놓아서 조성한 의대 건물 1층에 마련된 의대학생들의 수업을 지원하는 시설로서 唯恩 홀(Yu–Eun Memorial Hall) Multimedia CBL / Service 강의실이 조성되어있다.

고 박영훈 원장은 그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밖 앗 출입을 삼가하고 자택에서 장기간 요양 중이었으나, 금년 들어서 더욱 건강이 악화되어 사위가 근무하는 부산 서구의 작은 병원 중환자실에 수개월간 입원하고 있었으나, 약 1개월 전에 부산시 영도구에 소재한 정 요양병원 8층에서 부인과 함께 입원 가료 중이었다.

고 박영훈 원장의 소천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은 인술과 병 고침, 의학교육을 목표로 일생동안 복음병원을 위해 헌신한 명의가,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수술하면서 노력을 해왔지만, 진작 자신도 늙고 병들어서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시는 구나! 하면서 애석해 하고 있다.

고 박영훈 원장은 교단의 정치 파동과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복음병원의 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하신 분이다. 박영훈 원장의 스승으로는 장기려 박사가 유일하다. 그는 후배인 송도제일교회 이승도 장로를 존경하는 분이라고 서슴없이 얘기하기도 했다. 박영훈 원장의 인생 여정은 강인한 신앙심으로 분명한 목표가 정해지면, 엄청난 노력을 경주하는 특징이 있는 분이시다. 그의 복음병원 사랑이나 교단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한상동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장기려 박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일생을 의사로서 살아왔다.

현재의 고신의과대학 조성, 복음병원 3병동, 5병동 건물이나, 고신대학교 영도 캠퍼스 조성,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캠퍼스 조성은 박영훈 원장이 이룩한 업적 중의 하나이다.

복음병원 암센터를 설립, 영남권에서 암 전문 병원으로 성장시켰다

예전에는 영남지역에서 복음병원의 암센터가 유일했었다. 부산대학병원에서도 방사선 암치료는 복음병원에 위탁해서 환자 치료와 진료를 받게 하였다.

김해 공항에 복음병원 진료원을 개설하여 지역사회 봉사는 물론 홍보관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나, 김민남 관선 이사장이 폐쇄하였는데 지금은 인재대학이 운영하고 있다. 당시 병원 연결동 설계를 이사회가 인가해 주지 않아, 오래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의사들이나 직원들이 가장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의과대학 설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의예과 신설을 주도했다

고 박영훈 원장은 복음간호전문대학을 설립 학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고신대학교 간호대학으로 성장하였다.

1970년 대 후반부터 의과대학 설립에 대한 꿈을 가지고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이사장 한명동 목사)는 1979년 고려신학대학 내에 의예과를 신설하기로 결의 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는 총회에서 부결되었다. 당연직 이사였던 오병세 학장이 총회에서 총대들을 설득하여 신학대학으로 남겨두자고 설명하여 부결시킨 것이다. 이듬해 이사회는 다시 의예과 신설을 결의하였다.

고 박영훈 원장의 생각에는, 복음 전파의 소명과 인술을 접목시켜, 의학교육을 통해 육신의 병도 고치고, 마음(영혼)의 병까지도 치료하는 복음병원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당시로서는 고려신학대학에 의예과를 신설한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 박영훈 원장은 모든 것을‘기도로서 극복했다.’고 회상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 주셨다고 하였다.

박영훈 원장은 이규호 문교부 장관을 찾아 장기려 박사의 복음병원 설립 과정과 초기 역사를 얘기했다. 현재 어느 대학병원보다도 가난한자, 어려운자를 가장 많이 무상진료를 하는 병원이 우리 복음병원이라고 장관에게 말씀을 드렸다. 문교부 장관은 박 원장의 얘기를 실큰 듣고서는, 이 문제는 내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 아니고, 국보위 문공분과 위원장 오자복 위원장(2017. 8. 25.세상을 떠남)에게 가서 의논을 해 보라고 하였다. 이에 박영훈 원장은 참모 이화동 교수를 부르고, 김석영 병원 원목을 불러 같이 의논을 하면서, 기도를 부탁했다.

이상하게도, 김석영 목사가 하는 말이‘원장님 오자복 장군을 제가 사단 군종참모로 있을 때 모신분입니다.’하였다. 이화동 교수는‘제 동서(서동근)가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 간사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박영훈 원장은 갑자기 날개를 달았다.

제1영도교회에서 초기 SFC 활동을 함께한 친구 이원홍(문공장관)을 찾아가서‘자네가 우리 대학과 복음병원 그리고 고려파 교단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신중한 마음으로 의논을 하면서, 의예과 신설에 대한 계획을 설명했다. 이원홍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돕겠다고 약속을 했다. 옛 어린 시절 친구간의 의리는 굳은 약속을 이뤄냈다.

박영훈과 이원홍은 원래 같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었다. 박영훈은 1년을 다니다가 중퇴를 했는데, 박영훈은 매일 성경 공부에만 열중하고, 학교 수업은 게을리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다가‘내가 무엇을 해서 먹고 살겠는가?’를 고민하는 가운데 다시 경북대학교 의예과에 시험을 쳐서 입학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1학년 때도 성경공부에 심취되어, 학교공부를 등한시 하다가, 한번 낙제를 당한 이후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학교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1981학년도 신입생부터 진주경상대학교에도 의예과가 신설되었는데, 고려신학대학과 같이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한명동 목사와 이근삼 박사가 박영훈 원장과 뜻을 같이 하면서 함께 협력해 주었다.

의과대학 학사 운영의 조직화와 제도화를 주도했다

박영훈 원장은 현재의 의과대학 학사를 정상 괘도에 올려놓은 분이다. 실력 있는 교수들을 진료 분야 스텝으로 전진 배치하였는데, 복음병원의 외과 팀 의사들은 당시 전국에서도 몇째 손가락 안에 들만큼 명의들로서 구성되었으며, 명성을 날렸다. 또한 1.2.3.회 신입생들은 실력 있는 자들이 대거 몰려들기도 했다.

복음병원을 대학 부속병원으로서의 첨단화와 선진화를 이루었다

박영훈 원장은 항상 세계적인 명의 두 세분을 때로는 미국에서 모셔왔고, 모교 경북대학교나 부산대학교 등에서 은퇴하신 분들 가운데서 명의들을 모셔왔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의사라는 사람을 보고 환자가 찾아오지, 병원 이름을 보고 오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때문에 명의가 없으면, 환자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병원 경영의 최상 방안은 명의가 있어야 환자 손님이 부글부글한다고 했다.

스승 장기려 박사를 임종 시까지 극진히 모셨다

박영훈 원장은 원래 송상석 목사에게 발탁되어, 장기려 박사를 원장 직에서 내보내고 병원장으로 박영훈을 세우려고 했으나, 이를 극구 사양했다. 당시 그 파동으로 박영훈은 침례병원 외과과장으로 가서, 잠시 2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후 학원 이사들이 병원 경영에 어려움이 있게 되자, 박영훈을 찾아갔다. 그때 박영훈은‘지난일은 내 뜻이 아니며 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입니다.’라고하면서‘나는 선생님께서 70세 정년 은퇴하실 때까지 원장 자리를 탐하지 않겠다,’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의 이러한 스승에 대한 도리와 충정을 알게 된 이사들이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서, 경영을 위해 박영훈 원장이 다시 복음병원으로 와야 한다고 건의를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여 복음병원 진료부장직에 보임하게 되었다. 장기려 박사는 수술 환자가 자신을 찾아오면, 항상 입버릇처럼 수술은 나보다 박영훈 선생이 더 잘하니까 박영훈 선생에게 가서 하라고 권했다.

박영훈 원장을 가까이에서 접해 본 사람들은 그분의 심성을 이해한다

박영훈 원장은 복음병원 인근 송도 암남동 웃길 비탈길이 있는 위치에서 평생 살았다. 새구두를 신은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항상 흰 까운을 입고 병원 아래층에서 위층까지를 오가면서, 자신이 맡은 환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고 진료하는 의사였다. 소탈하기로는 YS 처럼 카드도 돈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욕심이 없는 분이다.

이사들이 바뀌면 슈퍼마켓 같은데 가서 먹을 것을 한보따리 사서 찾아간다. 우리가 박 원장에게서 느낀 것은 돈 봉투 같은 것을 스스로 건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학사와 관련하여서는 모든 것을 대학 학장과 의논하여 허락을 받아 결정을 하였으며, 의학부를 운영하였다.

아직은 돌아가실 때는 아닌 것 같았는데, 갑작스럽게 원장님께서 허약해진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을 느끼게 되었다. 실버타운 같은데 라도 가셔서 편히 쉬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좋은 음식도 섭취하셨으면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년퇴직 후에도 그 흔한 해외나들이나, 유람여행을 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의 옆에는 늘 사람이 많았으나, 초라한 병약한 모습으로 조그만 한 작은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계실 때에, 그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청년시절 우찌모라 간조를 만나러 일본까지 갔던 열정을 가졌던 그가, 이제 모든 꿈을 접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옆으로 다가오는 듯하지만, 이제 우리가 그와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그가 애지중지했던 복음병원과 의과대학을 잘 지키고, 넓은 마음으로 자신보다는 우리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분에게 마지막으로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고 박영훈 원장 약력

박영훈(朴瑛勳)

1930년 8월 23일생

육군 군위관 중위제대

학력

1953. 03.04 ~ 1958. 03.29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학사)

1060. 03.01 ~ 1962. 02.28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대학원(의학석사)

1987. 03.02 ~ 1989. 02.25 일본산업대학대학원(의학박사)

전문의 및 교원

1958. 04. 01 ~ 1974. 02. 28 복음병원 전공의, 외과과장

1974. 05. 08 ~ 1976. 01. 08 부산침례병원 외과과장

1976. 06 ~ 1981. 02 진료부장 겸 2대 복음병원장

1981. 03. 01.~ 1985. 02. 28. 제1대 고신의료원장

1985. 05. 01.~ 1988. 05. 31. 제2대 고신의료원장

1991. 06. 03.~ 1991. 08.27. 제5대 고신의료원장

1981. 05. 01 ~ 1995. 08. 31 고신대학 의학부 교수

1981. 03. 01 ~ 1985. 02. 28 고신대학 의학부장

1981. 05. 01 ~ 1991. 04. 30 고신대학 교수

1991. 09. 01 ~ 1995. 08. 31 고신대학 교수

1995. 09. 01 ~ 2000. 08. 31 고신대학교 의학부 명예원장

2009. 03. 09 ~ 2010. 03. 08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대통령 표창

1979. 04. 09 지역사회 의료봉사 (48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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