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여행기

모스코바에서 야간침대열차를 타고 밤새 720Km를 달려 도착한 곳이 인구 약 500만 명이 살고 있는 상트베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 Saint Petersburg)라는 도시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3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유럽에는 역사가 1000년이 넘는 오래된 도시가 많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리 오래된 도시는 아니다
모스코바 크레물린 궁전

상트베테르부르크

300년의 역사지만 도시 이름의 변경을 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아픔의 역사를 가졌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맨 먼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명명 되었다가 페트로그라드로, 그리고 레닌그라드로 변경되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네 차례나 이름이 바뀌는 역사가 있다.

사실 스웨덴 군대가 1617년에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에는 이름조차 없는 습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표트르(피터라고도 함) 대제가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사를 시작한 1701년부터이다.

그 후 200년 이상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지명을 사용하다가 1914년 독일군이 침공하자 시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따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을 바꾸었다.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을 바꾼 지 겨우 10년이 지났을까 볼셰비키 혁명의 영웅인 레닌이 죽자 그를 기리기 위하여 1924년부터는 레닌그라드라고 불리게 되면서 67년 동안 공산주의 혁명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1991년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자 시민들은 옛 지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처음 사용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지명을 다시 찾게 되었다.

 

예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시로 유명한 푸시킨을 비롯하여 소설 〈죄와 벌〉등 수많은 명작을 남긴 도스토에프스키, 〈호두까기 인형〉을 비롯하여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던 차이코프스키와 오페라부터 피아노와 교향곡, 가곡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무소륵스키 등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예술의 도시이다.

푸시킨의 응덥실

시가 그러하듯이 푸시킨(1799-1837)의 삶도 참 아쉬움이 많았다. 38살의 아까운 나이에 사망한 푸시킨은 그 죽음의 원인이 결투에서 받은 총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넘보는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결국 상대의 총에 맞아 절명한다. 1837년 2월 8일 오후 4시 30분 경 배에 총상을 입은 푸시킨은 집으로 돌아와 이틀을 심한 고열로 앓다가 “잘 있어 친구들”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푸시킨의 친구들은 그가 소장한 3,560권의 책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그는 아내와 4자녀를 두고 먼길을 떠나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면 기쁨의 날이 있지 않았을까 참 아쉬운 그를 생각한다.

지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푸시킨과 도스토에프스키가 살면서 창작 활동을 했던 집과 자주 갔던 곳, 작품이 공연되었던 무대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옛 해군 본부 앞부터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앞까지 펼쳐진 네프스키 대로이다.

네프스키 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중심부로 수많은 카페와 레스토랑, 다양한 쇼핑 시설이 몰려 있는 곳이며, 러시아 문학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했던 곳이기도 하다. 네프스키 대로에는 사람의 향기로 가득한 화려한 광장부터 유명 문학가들이 자주 방문했던 카페와 묘지까지 흥미로운 공간이 모여 있다.

네프스키 대로 가운데에 있는 미하일로프 광장에는 러시아 문학의 거장인 푸시킨 동상이 세워져 있고 광장 주변에는 러시아 박물관과 말리 발레 오페라 극장, 필하모니 극장과 개성이 넘치는 카페들이 자리잡고 있다.

상트베테르부르크에는 대단히 유명한 명물이 많지만 세 가지만 소개하려 한다. 하나는 이삭성당이고 다음은 그리스도부활성당이며, 마지막으로는 운하의 도시라는 것이다.

 

이삭성당

이삭성당은 181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858년에야 완공하였다고 하니 공사기간만 40년이 걸렸으며 이 공사에 50만 여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황금빛 돔을 만드는 데에는 100kg 이상의 금이 들어갔다고 하며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삭성당 전경

성당 밑에는 2만 4000개의 말뚝이 막혀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원래 이곳이 늪지대였기 때문에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사원 안에는 저명한 22명의 화가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103점의 벽화와 52점의 캔버스 그림이 있다.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삭 성당의 내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이다.

성당건물의 사방과 그리고 원형 돔을 받히고 있는 기둥은 모두 대리석 돌로 원석을 다듬어 세운 것이다. 그 대리석에 약간의 총탄흔적이 남아 있어 이전에 있었던 아픔의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이 성당은 웅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리스도부활성당은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스도부활교회에 가보자.

 

그리스도부활교회

네프스키 대로를 지나 네바 강이 만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그리스도부활성당이 떡하니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부활교회 전경, 그 화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성당은 피의 성당, 혹은 보혈교회, 그리스도부활교회라는 명칭들이 붙어 다닌다. 왜 피의 사원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알렉산드르 2세가 그의 정적으로부터 폭사를 당하였기 때문에 훗날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3세가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폭사 당한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르3세, 그가 황제에 오르면서 정적에 의해 폭사한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그 폭사한 지점에 그리스도부활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노동운동 및 공산혁명운동의 무대가 되어 1905년 ‘피의 일요일’사건으로 시작되는 러시아 제1혁명과 1917년의 2월 혁명, 10월 혁명이 결행됨으로써,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이 성공을 거둔 곳으로 이 교회당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이 교회당의 특징은 유명한 화가들이 직접 도안한 모자이크화가 많다는 것이다

 

유럽을 대표하는 운하 도시

우리는 운하하면 베네치아를 먼저 떠올린다. 운하란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를 말한다. 선박을 운행하거나 관개 시설과 농사짓는 데 필요한 물을 대기 위해 주로 만든다. 베네치아 외에도 라인 강과 북해가 만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있다.

다리만 무려 500개가 넘는다는 운하, 그 길을 1시간여 넘게 가보았지만 끝이 없았다.

상트베테르부르크는 네바 강과 핀란드 만에 접해 있는 운하의 지역이다. 도시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이 운하 도시들에서는 조각배에서 수천 톤에 달하는 커다란 선박들까지 많은 배들이 운하를 따라 운행되고 있다. 육로가 함께 발달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인공 운하를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운하에는 도시 안에 건설되어 있는 다리만도 500개가 넘는다고 하니 가히 운하의 위용을 알만하다. 그래서 운하로 못가는 곳이 없을 정도인데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관광용으로 배를 타기 때문에 어디든 배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운송수단으로 편리하게 이용되고 있다.

 

러시아의 정교회가 개혁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종교개혁50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루터가 말한 대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러시아 인구의 75%가 러시아정교회 신자라고 한다. 980년 블라디미르가 동방정교를 국교로 정하는 바람에 러시아정교회가 되었다가 종교와 왕실의 부패로 볼세비키혁명을 불러왔고 결국 1917년 공산화가 되어 교회는 핍박 아래 들어갔고 교회수와 신도, 사제 수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러다가 1985년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을 주창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른다. 다시 러시아정교회가 회복을 하면서 30여년을 지났다. 지금 러시아정교회는 약 1천여 년의 새월을 지나고 있다.

러시아정교회의 내부와 예배 장면, 그들은 주중에 교인이 교회를 찾아오면 예배를 집전한다.

과연 지금은 어떨까? 로마가톨릭과 러시아정교회는 같은가 다른가? 소비에트연방에 묶여있던 북유럽에는 개신교회인 루터교회가 왕성하다. 과연 루터교회는 어떠한가? 이 부분은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쉽게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겉으로 보는 것은 셋 다 비슷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당의 외형적인 모습일 뿐 아니라 예배의 형식에서도 그러하다.(루터교회는 외형적인 형식은 비슷해도 개혁교회이다.)

러시아에서의 로마가톨릭은 미미하다. 그러나 러시아정교회와는 동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출발이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평신도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좀 더 근원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로마를 중심으로 서로마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자연히 의사소통이 원할치 못했으며 정치와 문화도 다르게 발달하여 로마가톨릭과 정교회(正敎會, Orthodoxe Kirche)로 구별되기 시작한다. 5세기부터 분열의 싹을 키우기 시작하여 1054년에 완전 분열되었다. 그 원인 중에 가장 큰 요인은 교황에 관한 것인데, 정교회는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총대주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다가 필레오케라는 교리다툼으로 인하여 급기야 정교회는 교황을 파문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 두 교회가 가지는 공통점이 있는데, (1)성경의 권위 인정, (2)마리아는 신앙의 대상은 아니나 숭배한다. (3)성인을 숭배하고 유물과 성상을 숭배한다. (4)성인이 되는 길은 신앙과 선행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다. (5)자발적인 독신과 자발적인 빈곤을 강조 (6)7성례를 행한다(영세(세례), 성체성사(성찬), 견진성사(견신례), 고해성사, 결혼성사, 성품성사, 종부성사) (7)영세는 구원의 필수 (8)화체설 인정 (9)사제가 예수의 권위로 사죄 선언 (10)교회의 제도는 삼중적 제도이다(주교, 사제, 부제)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숭배(崇拜) 라는 단어이다. 숭배는 영어로 worship이고 어학 사전에는 종교적 대상을 우러러 신앙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어 개혁주의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용어라는 점이다. 내(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요14:13, 14,  16:26)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변경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성인을 통하여 예수님께 혹은 성부께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로마가톨릭과 정교회가 서로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도토리 키재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러시아의 정교회를 둘러보면서 한국교회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한국교회당이 몇 백억, 아니 수천억을 들인 건물이라 할지라도 관광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만큼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도 높지 않다. 외국인들이 한국교회를 시찰하러 온다면 반가운 일이겠지만 한국교회당을 관광하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주 먼 훗날까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공산치하에서 교회당은 온통 회칠이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말끔히 벗겨내고 보수를 하면서 관광상품이 되고 있다. 세계에서 이 화려한 건물을 보려고 구름떼 같이 밀려들고 있다. 그런 와중에 무슨 신앙생활이 제대로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관광수입만으로도 헌금 없이 교회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이 없는 교회, 말씀 중심이 아니라 관광수익에 열을 올리는 교회에 희망을 걸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글을 좀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지식백과 등 여러 불로그와 카페의 글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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