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에 있는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대표 송길원 목사)에 주기도문 산책길이 완공되었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에 들었는데, 차일피일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가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9월 25일이 되어 부산 거제교회(옥수석 목사)에서 성도 80여명이 탐방을 온다고 하여 더 이상 미룰 처지가 못돼 부랴부랴 양평으로 달려갔다.

필자는 주기도문 산책길이라는 말만 듣고도 흥분이 되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주기도문을 한다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주기도문 산책길을 만들다니 참 희한한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반갑기도 하였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모든 예배의 마침에는 주기도문이 낭송되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대한 강의, 설교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 천지가 되면서 주기도문 자리에 축도가 차지하고 주기도문은 설자리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복받기를 좋아하는 성도들은 주기도문 보다는 축도 받기를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주기도문도, 주기도문 신앙도 사라져 버렸다. 목사나 성도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살기를 거부한다. 일평생 먹을 것을 쌓아놓고 살려고 한다.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서 이기지도 못하고 넘어지면서도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를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시험속으로 들어간다. 도박장에 앉아 있거나 주점에 앉아서 자기를 시험하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무너지고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신인도를 잃어 버렸다.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주기도문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할 것이다.

주기도문 산책길을 오르고 있다.

하이패밀리의 주기도문 산책길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교회 본당 뒤편 산뿌리에서 시작하여 가파른 등산을 하면서 약 2.1키로 미터 정도를 산책하게 되어 있다. 송길원 목사는 자신의 신앙고백적인 해설을 문학적으로 풀어내면서 함께 산책길에 동행한다. 그는 8가지 주제로 주기도문 산책길의 해설자가 된다.

 

우리는 누구편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미국이 남북 전쟁 중에 있을 때 병사들은 지치고 힘들어서 랑컨에게 이렇게 말한다. “각하 우리가 전쟁에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아 나는 하나님이 누구 편인가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네. 하나님이 남군편이겠는가? 북군 편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아닌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네”

우리를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주는 것이 주기도문이다. 이 첫 번째 신앙고백은 관계의 고백이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라 부른다. 아버지가 함유하고 있는 뜻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다.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거룩일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송길원 목사는 산책길의 길손들을 쉽게 이해 시키기 위해 예화 사용하기를 즐긴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엄마를 따라 시장을 나선 아이가 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롭기만 하다. 엄마가 물건을 고르는 사이 그만 딴 데 정신을 파느라 엄마를 놓치고 만다. 아이는 엄마를 찾는다. 흐느낀다. 보이지 않는 엄마를 부른다.

‘헬렌, 헤~엘렌’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엄마가 고개를 돌린다. 아이가 보이질 않는다. 소리를 따라 내달린다. 이내 아이를 발견한다. 기둥 뒤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아이, 엄마가 얼른 안아준다. 등을 토닥인다. ‘그래, 알았어. 엄마가 여기 있잖아, 그러기에 엄마 옆에 꼭 붙어 있으라 했잖아!’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이내 울음을 그친다. 엄마가 궁금해 묻는다. ‘너 왜 맘이라고 부르지 않고 헬렌이라고 엄마를 불렀던 거니?

아이가 답한다. ‘시장 바닥에 맘은 수도 없이 많지만 헬렌은 꼭 한 명일 거라 여겼어요’ 그 말을 들은 엄마가 이번에는 아이를 끌어안고 엉엉 울어 버리고 만다.

우리를 성도로 불러준 이가 계신다.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자 그 분은 우리를 마치 성도라 부르는 듯...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 있을까?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성도이다. 우리를 성도로 불러내신 주님이 내게 요구하는 게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여기 우리를 향한 부름이 있다.

“너희는 내가 명령한 것을 행하고, 내가 일러 준 대로 살아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라. (......) 나는 하나님이다.”(레22:31-33)

무엇이 ‘거룩’일까? 거룩은 한 마디로 ‘몸부림’이다.“

‘Ship Thief’이 Saint가 되기까지....

몸부림? 송목사는 그 몸부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두 형제가 있었다. 배를 훔치려던 둘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분개한 그들은 이를 가만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했다. 회의가 소집되었다.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극한 주문에서부터 처음이니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의견은 분분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 있던 촌장이 입을 열어 말한다. ‘설령 저들의 한 짓이 크고 커도 그 목숨까지 빼앗을 자격이 우리에겐 없소. 그렇다고 충고만 하고 끝내기에 중하니 도둑질을 했다는 표식을 남기면 어떻겠소. 저들이 지은 죄를 두고두고 후회하며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두 형제의 이마에 ST가 새겨졌다. ‘Ship Thief’(배 도둑)의 약자였다. 사람들은 볼 때마다 ‘배 도둑’이라고 수군거렸다. 이마에 깊이 새겨진 스티그마((stigma-낙인)는 큰 상처였다.

수치심을 견디기 어려웠던 형은 어느 날 야밤에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글자까지 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어디를 가도 ST가 따라다녔다. 궁금해서 묻는 사람들이 싫어 숨어 지내다 보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괴로움과 회한이 그의 마음을 짓눌렸다.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깊은 투라우마(trauma,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자리잡는다.

S.T를 직접 그리보며 거룩을 되새기다.

하지만 동생은 어디를 가도 죄를 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죄과를 달게 받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도 묵묵히 견디어 냈다. 세월이 켜켜이 쌓여간다. 사람들 역시 저들의 일에 바빠졌다. 그들의 관심은 희미해져 갔다.

동생은 그야말로 하루하루 참회하는 심정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사람들은 동생의 모습에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도움을 청할 때면 성심성의껏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그네가 그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한 노인의 이마에 새겨진 글자 ‘St.’를 보고 궁금해 묻는다.

동네 사람이 대답한다. “저 분은 우리 마을의 자랑이자 우리 모두의 존경의 대상이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지요. ‘저 분처럼만 살아라.’ 이마에 새겨진 글씨는 성자(Saint)의 약자랍니다.”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가 임하옵시며의 주제 앞에서...

송길원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순종)에만 있다고 전한다. 그는 이런 예화를 들었다.

때제 공동체, 2005년 8월의 어느 날, 기도시간이었다. 90세의 로제 수사도 함께 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여성이 성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칼을 빼더니 맨 뒤에 앉아있던 로제 수사의 목을 찔렀다. 로제 수사는 피를 쏟으며 고꾸라졌다. 젊은 수사 몇 명이 로제 수사를 업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착한 응급차에 싣고 병원으로 내닫는다. 로제 수사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범행을 저지른 루마니아 여성은 정신착란 상태였다.

성당 안에 남아있던 수사들은 차분하게 저녁기도를 마쳤다. 그들은 무엇을 간구했을까? “주님, 저 여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찾아 나서는 떼제 공동체에 떼제만의 영성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라고 할 수 있는 힘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 ‘도리질’이 아닌 ‘끄덕임’으로 온다.

고요하기만 한 숲속, 5미터 높이의 ‘킹덤트리’(kingdom tree)가 끄덕이고 있다. 한 번 시작한 끄덕임은 5분이 지나도 멈출 줄을 모른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찾아온다.

‘예’ ‘예’ ‘예’ ‘예’ ‘예’ ‘예’ ‘예’

 

한 목사님이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안 쓰던 영어를 쓰게 되면서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영어는 모음 다음에 t는 L 발음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water는 워터가 아니라 ‘워러’로 발음해야 한다. 또르르 구르는 듯...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차츰 익숙해져갔다. 1년여를 지난 목사님이 귀국했다. 돌아오자마자 전하게 된 첫 설교가 시편 23편이었다. 성경을 읽는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혀가 미끄러지면서 엉뚱한 발음이 튀어나오고야 만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르시니.....” ‘아차’싶었다. 숨이 컥 막힌다. 짧은 순간이지만 이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고백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신도 모르게 울어 버린다. 영문을 알고 난 성도들도 따라 운다.

과연 나의 목을 자르신다 해도 난 ‘예’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산책길의 해설자 송길원 목사

나는 몇 명의 밥그릇을 구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스코틀랜드, 남편을 잃고 아들을 홀로 키우는 엄마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버겁다. 끼니가 다가오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어느 날, 빈 밀통을 긁다가 울고 만다. 엄마의 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섯 살 난 아들이 엄마 옷소매를 붙잡고 묻는다.
“엄마, 왜 우세요? 하나님이 엄마가 통 밑바닥을 긁어모으는 소리를 못 들으실까 봐서요?”

주님은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약속 앞에 무엇이 겁나랴?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감사를 드린다.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된다. 거기 자족(自足)의 정신이 함께 한다. 어느 부자인들 하루 10끼를 먹을 자 있겠는가? 아니 양식을 구하는 기도 속에 우리는 꿈도 새겨진다. 무슨 말인가? 나의 세끼 양식을 뛰어넘어본 일이 있는가? 나로 인해서 더 많은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감사할 식탁을 구할 때 비로소 나의 꿈도 자란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교회(청란교회)의 담임목사로 우리 교회 L장로의 꿈을 좋아한다. 그는 ‘나로 인하여 5천 명이 먹고 마실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한다. 순간 오병이어의 기적이 고용창출의 꿈으로 피어난 것을 본다.

“나는 몇 명의 밥그릇을 구하고 있는가?” 만종의 부부가 물어온다. 거기 나의 소명이 미소 짓고 있다.

다음 코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용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풀리지 않는 366의 비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내가 어찌 찬양 안 할까?)로 이어진다.

거제교회 성도들 단체사진

이날은 거제교회가 찾아왔지만 매일같이 교회에서 단체로 혹은 개인으로 찾아온다고 전한다. 송목사는 목회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주기도문 산책길에 함께 서며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말씀을 전하며 사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계란교회당을 둘러보고...............

양평 하이패밀리 동산에는 둘러볼 곳이 많다. 작지만 공명이 잘 어울리는 계란교회당, 수목장 등 성도들이 맑은 공기와 함께 하루를 영과 육이 힐링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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